일본 아이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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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 문서: 일본 아이돌/포지션
1. 개요[편집]
일본의 아이돌에 관한 문서다.
2. 남녀 공통 특징[편집]
2.1. 종합 엔터테이너[편집]
대한민국에서도 아이돌이라고 하면 최근에 들어서는 종합 엔터테이너로서의 뜻도 어느정도 함유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가수의 한 부류를 의미한다. 물론 한국에서도 아이돌은 전문적인 가수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실력 차원에서 아이돌을 디스하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이돌이 일단 가수임은 인정하며 이런 비판은 이들에게 가수로서 자격이 충분한가, 즉 아이돌의 본분이 가무 실력이라는 전제 하에서 나온다.[1]
다만 실질적으로 대한민국 아이돌은 일본의 아이돌과 같이 종합 엔터테인먼트의 기능도 소화하며, 다인수의 그룹 아이돌은 멤버 모두에게 동일한 가수로서의 역량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도 그런 것이 많은 종류의 매체 소화와 적응력을 필요로 하는 종합 엔터테인먼트인 이상 천재 수준의 재능이 아니고서야 현실적으로 우리나라 연예계에서 여러가지를 소화하기 어려우며, 그렇기에 예능, 보컬, 댄스, 비주얼, 연기 등 각 개개인의 두드러지는 특성을 중심으로 서로의 부족한 구멍을 메꾸고 시너지 효과를 얻는 형식으로 팀이 이루어진다.
반면 일본에서는 아이돌이라고 하면 확실하게 가수보다는 종합 엔터테이너로 먼저 통한다. 다만 일본도 맨 처음부터 아이돌의 의미를 종합 엔터테이너로 쓰지는 않았는데, 1970년대에 아이돌이라는 단어가 일본에서 처음 사용된 사례는 아래에서도 후술된 것처럼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이르는 연령층의 가수들만을 칭하던 것이었다.
1970년대 중후반에서 1980년대까지 아이돌 최전성기를 보낸 일본 연예계의 당시 모습을 살펴보면 1990년대의 1세대 한국 아이돌들이 그랬던 것처럼 약간의 신비주의, '아이돌(우상)'이란 이름 뜻처럼 이상적이고 멋지게 꾸며진 모습이나 '구름 위의 존재, 환상의 대상'인 것마냥 포장된 모습이 매체에 비춰지고 실제 활동도 그러했다. 예능 출연은 너무 망가지는 모습은 자제하고 1회성 게스트 출연 위주, 특집극이 아닌 이상 연기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가요 위주의 앨범 및 공연 활동이 무조건 최우선이었던 것이다.
일본 예능에서 가끔씩 1970~80년대를 회상하는 토크나 관련 컨텐츠를 하는 중에 '정통파 아이돌'이란 용어를 쓰기도 하는데 이게 바로 세월이 지나면서 의미가 변하기 전에 활동하던 그 시대의 아이돌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전성기를 보낸 아이돌들이 야마구치 모모에, 마츠다 세이코, 나카모리 아키나, 고 히로미, 콘도 마사히코, 소년대, 히카루GENJI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던 와중에 일본 록(J-Rock)을 비롯한 다른 장르의 음악에 밀려 1980년대 후반을 끝으로 한동안 아이돌 음악 산업의 침체기를 크게 맞이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SMAP을 시작으로 1990년대부터 당시 신세대 아이돌들이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 패널, 더 나아가서는 MC까지 보면서 웃긴 분장을 하거나 심하게 망가지는 모습도 자주 보여주게 되고 전문적으로 드라마와 영화에서 연기도 겸하는 등, 타 장르에서도 두루 활약하며 종합 엔터테이너로서의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즉, 이때부터 일본 내에서 사용되는 아이돌의 의미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SMAP의 리더였던 나카이 마사히로가 본인이 진행하는 예능에서 당시 어려웠던 아이돌 암흑기 시절과 이를 벗어나려고 노력한 신인 시절 에피소드들을 수 차례 풀기도 했었다. 밝힌 내용들을 정리하자면 "우리가 앨범 데뷔를 했을때 암흑기가 찾아오고 쟈니스 사무소 최초로 데뷔 1위를 못한 팀이 되었다. 소년대나 히카루GENJI같은 선배조처럼 무대에서 멋있는 모습만 보여주고 사라지는 그런 활약을 할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예능 PD들에게 인사하러 다니면서 '출연시켜 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를 여러 차례 반복했고 당시 인기 예능이었던 와랏떼이이토모 고정출연을 시작한 그 날을 아직도 잊지못한다."는 식의 인터뷰였다.
이렇듯 1990년대부터 용어의 의미 확장과 변화를 거치며 현재 일본에서의 아이돌은 가수, 예능, 드라마, 모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팬덤에 주로 소구하는 나이어린 연예인을 뜻하는 단어로 변했다. 이 때문에 어린 배우나 성우가 다방면에서 활동하면 아이돌 배우, 아이돌 성우로 불린다. 이 때문에 나이가 차서 아이돌 생활을 마치고 전업 뮤지션이 되는 비율보다 배우나 모델, 버라이어티 탤런트 쪽으로 전직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래서 일본 아이돌은 가창력이나 춤 실력이 아닌 개개인의 캐릭터나 컨셉의 매력, 외모, 방송에서의 예능감을 중심으로 육성된다. 한국 아이돌도 '종합 엔터테이너'로 활동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본업'은 가수이고, 본인들도 가수로서의 정체성에 방점을 두고 활동하는 것과는 정 반대다.[2]
하지만 한/일 양국의 아이돌 시장은 90년대를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결정적인 차이는 '아이돌'의 활동양상과 육성방식. 현 시대의 일본 아이돌은 일본 연예계가 선호하는 미성숙한 어린 연예인의 세련되고 상큼한 캐릭터성 그 자체에 집착하는 반면 한국 아이돌 시장은 개개인을 끝까지 갈고닦아 나오는 완성된 퍼포먼스에 세일즈 포인트를 두고 있다. 한국 아이돌들은 1990년대부터 이어진 '아이돌이 댄서지 가수냐?'라는 비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어린 시절부터 훈련시켜 완벽한 퍼포머를 키워낸 뒤 데뷔시킨다'는 방향을 잡았고, 수년간 강도 높은 연습생 생활을 시킨 끝에 고르고 고른 인재만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라갈 수 있다.
반면 일본은 빠르면 초등학생부터 작은 활동을 시작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대부분 중학생 때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아이돌 연습생 제도가 있지만 한국처럼 체계적으로 트레이닝을 시키는게 아니라 말 그대로 잠깐 간을 보는 '인턴' 과정에 가깝다. (이런점에서는 디즈니 미키마우스 클럽과 유사하다) 특히 여자 아이돌은 데뷔하고도 연습생 생활을 지속하는 것과 다를 것 없는 상황이다 보니 팀간 인사이동을 하고, 졸업 제도로 꾸준히 데뷔와 졸업이 반복되고, 졸업 이후에는 프로페셔널로서의 기준치를 넘지 못하고 은퇴하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스포츠로 비유하자면, 한국 아이돌은 마이너 리그에서 엄청난 수준의 경쟁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선발된 인재들로 구성된 프로 팀들끼리 1부 리그에서 본격적으로 경쟁하는 구조지만, 일본 아이돌은 1부 리그부터 시작해 마이너 리그, 아마추어 리그, 리틀/유스/학교 리그 팀들이 죄다 뒤섞여서 한꺼번에 경기를 하고 있는 상태다.
참고로 이러한 일본의 아이돌 문화는 최초의 현대적 아이돌이라 불리는 프랑스의 예예걸스를 그 직접적인 기원으로 간주하며, 간혹 스모나 가부키에서 왔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이는 마이너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아이돌이란 단어부터 서구권에서 프랭크 시나트라를 비롯한 당대 청춘스타들을 칭하던 용어였고 일본에서 어린 나이대의 인기 가수들을 칭하기 위해서 용어부터 서구권에서 수입해왔기 때문이다.
2.2. 주로 발매하는 장르[편집]
장르적으로는 다양하고 유행의 변화가 빠르다. 여자 아이돌의 경우 프로듀서 층쿠의 헬로 프로젝트의 그룹들, 대표적으로 모닝구 무스메는 펑크와 복고적인 댄스음악으로 크게 인기를 끌었다. 그 후 나타난 것은 여자아이들이 밴드 풍의 노래를 부르는 '걸즈 락'. 대표적으로 AKB48이 크게 성공했다. 또 Perfume이 인기를 끈 이후 디스코 풍의 신스팝이 잠깐 유행하기도 했다.
AKB48이 예전같지 않은 지금은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그룹들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선 한류의 영향으로 힙합 댄스를 하는 그룹도 있다. 다만 서태지와 아이들을 비롯하여 블랙뮤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한국과는 달리 노래에 랩이 거의 들어가지 않으며, 대신 밴드맨 출신 프로듀서들의 영향인지 샤우팅이 들어가는 곡이 제법 된다.
남자 아이돌의 경우 쟈니스 사무소 소속의 그룹이 장악하고 있다. 80년대의 콘도 마사히코, 소년대, 히카루GENJI의 인기를 이어받아 SMAP이 이전까지의 아이돌과는 다른 친근한 이미지로 큰 인기를 끌었고 이를 이어 아라시가 국민적인 인기를 물려받으며 독과점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스타더스트 프로모션, EXILE 등도 남자 아이돌 그룹을 런칭했으나 사실상 쟈니스 사무소 원탑 체제라고 보아야 무방하다.
장르적으로는 다양하지만 총체적으로는 '일본 아이돌스러운'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것도 특징이다. 상대적으로 리얼세션이 자주 기용되며 '이해하기 쉽고, 따라부르기 쉬운 멜로디 중심의 음악'이라는 것이 전반적인 특징이다. 보컬적으로는 대다수가 강한 비음과 좁은 음역대가 특징으로, 트로트나 엔카가 연상되는 창법으로 팝을 부른다는 평가를 듣는다.[3]
2.3. 공연 실력[편집]
원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 아이돌은 솔로 위주였다. 80년대까지 활동하던 솔로 아이돌들은 오늘날의 아이돌과는 달리 가수로서의 실력을 갖추고 활동했다. 스스로 작사에 참여하는 등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아이돌도 있었다. 쉽게 말하면 재색을 겸비한 가수들인 것이다.
예를 들어 시대를 풍미했던 나카모리 아키나는 독자적인 가창력과 뛰어난 음악성뿐만 아니라 노선 없이 1년에 3번씩 변하고도 그게 다 매력이 철철 흐르는 콘셉트가 그녀의 인기 비결이었고, 당시에는 미모와 스타성을 주로 평가받았던 마츠다 세이코 역시 탄탄한 발성과 표현력을 지닌 보컬리스트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야마구치 모모에에 이르면 엔터테이너적 성격보다는 '아름다운 뮤지션'이라는 인식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한때 아이유가 일본 데뷔를 했을 때, 80년대 일본 여성 아이돌을 연상케 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던 것은 이러한 당시 아이돌들의 상황에서 기인한 거다.[4]
그러다가 오냥코클럽의 데뷔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음악 쪽으론 경험이 없던 일반 여중고생들이 전략과 마케팅의 승리로 인기를 얻은 것이다. 오냥코클럽의 성공은 이후 모닝구 무스메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모닝구무스메 1기의 경우에도 락보컬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인재들인만큼 가수로서의 실력은 준수했으나, 인기를 얻는 데에는 ASAYAN이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힘, 그리고 친근감을 무기로 내세운 마케팅의 견인이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모닝구무스메는 후기 기수를 받아들이면서 상당히 적극적으로 예능 방송 활동을 펼친 그룹에 속했다.
이런 형태의 아이돌이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 실력도 있고 아이돌성도 있는 정통파 여성 아이돌의 계보는 끊어졌다시피했다. 물론 등장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유사연애 아이돌에게 밀려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을 뿐. 단적인 예로 진정한 의미의 '정통파' 솔로 아이돌을 지망했던 무토 아야미는 실력이 동년배 아이돌들 중 탑급이지만 악수회도 하지 않았고 방송 활동도 거의 하지 않아 인지도를 높이지 못했고, 결국 2016년에 소속사를 떠나 유학길에 오른 뒤 싱어송라이터로 전향했다.
현재에도 '정통파'를 자칭하는 아이돌들은 많지만, 그들이 말하는 '정통파'는 7080년대의 진짜 정통 아이돌의 '컨셉 이미지'에 48사단이 구축한 '악수회형' 스펙을[5] 섞은 아류인 경우가 많다. 진짜 정통 아이돌이 보유했던 뮤지션으로서의 능력은 그들에겐 전혀 없다.
그래도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여성 가수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모모에-세이코-아키나로 이어지는 여성 솔로 가수의 계보는 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아무로 나미에, 하마사키 아유미, 오오츠카 아이, 코다 쿠미 등 여성 솔로 아티스트로 이어졌다. 반대로 서술하자면 이 시기부터는 스타가 되고 싶은 '여자 유망주들'에게는 예능감을 살려 아이돌이 될지, 음악성에 집중해 가수가 될지 양자택일이 강요되는 상황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코다 쿠미는 모닝구 무스메 오디션에도 지원했던 바 있지만, 결국 강한 컨셉의 솔로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맨 위의 개요 문단에도 쓰여 있지만 일본의 아이돌은 가수라기보다는 방송가의 모든 예능 분야에 발을 걸치고 있는 종합 예능인[6] 두 집합이 비록 온전히 분리된 집합은 아니지만 활동 양태에서 차이점을 지적하는 것은 가능한데, 일본에서는 외모(외모, 패션감각 등), 가수 능력(가창력, 음악 실력 등), 퍼포먼스(춤, 공연 실력 등), 방송 능력(연기력, 캐릭터 등), 예능 능력(개그감, 입담 등), 아이돌 능력(팬서비스, 이미지 관리 등) 등등 방송에서 써먹을 수 있는 엔터테이너 능력 전반을 아이돌에게 요구하고 전방위로 써먹는다.
한국 시장에서 해당 아이돌이 타 분야를 겸업하는 것과는 별개로 대중가요 가수로서 일정 수준의 실력을 요구한다.[7] 반면 일본 아이돌은 가수가 본직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 가수 수준의 실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흔히 일본의 아이돌을 '성장형 아이돌', 한국의 아이돌을 '완성형 아이돌'로 나누는데, 현지 전문가들도 일본 아이돌 오타쿠들은 완벽한 모습보다는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모습을[8] 선호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아이돌로 성공하려면 퍼포먼스가 뛰어난 것보다는 '설익은' 상태에서 '노력하는' 캐릭터를 잡는게 유리하다고 보고 있다. 일례로 AKB48의 최고 인기 멤버였던 사시하라 리노는 '아이돌로 성공하려면 오히려 춤도 노래도 적당히 못하는 편이 귀엽다'고 발언한 바 있다.#[9] 완벽한 실력으로 '우러러 보게' 하는 것 보다는 귀여워 하면서 내려다 볼 수 있는 게 일본 아이돌 소비자들에게 더더욱 유리하기 때문.[10] 실제로 일본 여성 아이돌 팬덤의 대부분은 극단적인 남초이며, 한류 아이돌들은 반대로 여성팬덤이 크다. 거기다 댄스 음악에 대한 수요를 아이돌들이 전담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각 장르별로 '프로 뮤지션'들이 아이돌과 아예 별개로 활동 중이기 때문에 좋은 실력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은 처음부터 아이돌을 쫒아다니지 않는다.
이미 한국은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을 지나오면서 점점 상향평준화가 되어 평균 수준이 일본을 넘어 글로벌 팝 시장에도 통용되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한국은 작사·작곡을 직접 해서 곡을 내는 아이돌도 흔하고, 그룹 내 메인댄서쯤 되면 안무도 직접 짜는 경우도 많은 상황이니 애초에 실력이 없다면 연습생 단계에서 곧바로 탈락한다. 대중들이 이미 '아이돌'에게 바라는 기준치가 그만큼 높아졌기에 아무리 기획사의 능력이 좋다 해도 가수로서 실력이 떨어지면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 일본은 실력이 떨어져야 캐릭터로 어필하기 쉽고 실제로 '어설픈 실력'을 메인으로 내세우며 흥행한 아이돌이 많지만[11] 한국은 그 어떤 캐릭터성을 들고 온다고 해도 '모든 분야에서 기본적인 실력 이상을 갖추었음'이 밑바탕이 되어야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12]
상술했듯 일본과 한국은 아이돌에 대한 개념과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선상에서 성장형/완성형 아이돌로 분류하는 것 자체에 어폐가 있다. 일본 아이돌이 '성장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마치 아이돌이 성장하면서 점점 실력이 발전하는 것 처럼 표현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성장은, 성장이 100% 완료됨을 의미하는 '결과로서의 성장'이 아니라 '지향점으로서의 성장', '방향성으로서의 성장'이기 때문. 실제로 일본에서 오랜 기간동안 아이돌을 한 인기 그룹도 한국식 아이돌 기준으로 바라보면 춤이나 노래의 실력에 있어서 기준에 한창 못 미치는 경우가 상당수다. 다만 일본이 아이돌의 실력에 대해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아키모토 야스시와 쟈니스[13] 의 등장 이전에는 일본 아이돌 또한 실력에 큰 비중을 두었었고, 현재도 실력없는 아이돌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단적인 예로 AKB48과 쟈니스는 일본에서도 '안무하나 안맞는 립싱크 군단' 등 저조한 퍼포먼스에 대해 비판받고 있다. 2000년대 후반 한류 아이돌 러쉬로 인해 대중들의 눈도 같이 높아졌기 때문에 소속 아이돌의 트레이닝에 투자하는 경우도 많아지는 추세다.[14]
한때 트위터 상에서 '일본은 버블 경제 붕괴 이후 국민들이 탈력에 빠졌고,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실력이 없는 아이돌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라는 분석이 유행했던 적이 있는데 실상은 정반대다. 거품이 무너진 뒤인 90년대 중후반에는 걸출한 가창력과 댄스 실력을 갖춘 SPEED가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였고, 반대로 거품 경제의 최전성기였던 1980년대 후반에는 실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오냥코클럽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건 경제적 상황이 아닌 연예계의 트렌드에 따른 것으로, 하단의 1990년대 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오냥코는 80년대 아이돌 호황기의 막차를 탄 격이었고 스피드는 90년대 댄스가수 붐에 다리를 걸친 걸그룹이었다.[15]
그리고 그 오냥코 클럽도 결코 음반 판매량이 높다거나 콘서트 규모가 큰 그룹이 아니었다.[16] 당대 인기 가수들과 비교하면 결코 특출난 수치를 기록하지 못했으며, 팬층도 10대 학생층에 국한됐었다. 까놓고 말해 85년 말에서 87년 초까지 1년 정도 반짝하고 끝났다. 지금까지 회자되는 건 컨셉이 준 충격과 당시 오냥코의 팬이던 6070년대생들이 나이가 들어 추억 보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지표를 섞어 분석하자면 오히려 경제 호황기였기에 저런 기획도 소비해줬으나, 불황이 되자 얄짤없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불황인 시기에 기획된 오냥코의 직속후배들 모두 실패했다.
여담으로 일본에서는 음악도 '아이돌이 하는 예능 활동의 일환' 정도로 취급해서 립싱크 무대가 흔하고 대중들도 이들에게 라이브 무대를 기대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라이브를 고집하는 건 하로프로와 아뮤즈 정도 밖에 없다. 다만 그것도 도가 지나치면 논란이 되는데, 립싱크로 곤욕을 치른 대표적인 일본 아이돌이 바로 야마시타 토모히사. 음악 프로에서 열정적으로 노래를 하는 척하다가 스탠딩 마이크가 넘어졌고, 마이크는 바닥을 구르고 있는데 노래는 계속 나왔다(...).#
한류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라이브 비중을 늘리는 가수들도 점차 생기고 있다. 다만 대부분의 아이돌이 가수로서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음이탈이나 실수 없이 한 곡을 클린하게 부르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단적인 예로 AKB48이나 노기자카46은 라이브 무대를 시도했다가 전혀 맞지 않는 화음으로 낭패를 본 적이 여러 번 있다. 후술하겠지만 기본적인 보컬 트레이닝이 전무한데다 멤버를 짤 때 무조건 인기만 고려하고 팀 전체의 사운드 밸런스는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
2.4. 상술[편집]
보통 3가지, 심하면 10여종이 넘는 수많은 사양으로 나누어 음반을 발매한다. 물론 좀 심한 상술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돌그룹들은 이 음반에 멤버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이벤트권을 집어넣어 엄청난 수의 복수구매를 유도한다. 이러한 접촉상술의 대표주자가 바로 악수회, 하이터치회, 샤메/체키회이다.
악수회는 말 그대로 그룹 멤버와 악수를 할 수 있는 이벤트로, 음반에 이 악수회에 응모할 수 있는 악수회권을 동봉한다. 악수회에 참가하면 그룹 멤버와 짧게는 10초에서 길면 1분정도 악수를 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악수회 상술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것이 바로 AKB48을 비롯한 48사단 자매그룹들로, 이들의 음반판매량의 약 90%는 이런 악수회 참가를 위한 복수구매이다.
오리콘 기준으로 AKB48의 싱글은 100만장이 넘게 팔리지만, 악수회권이 들어있는 극장반이 제외되는 사운드 스캔 기준 판매량은 보통 20만장 내외다. 자매그룹들은 더 심해서 60만장 넘게 나간 싱글이 사운드스캔에선 겨우 6만장 잡히는 수준. 반면 상술을 덜 쓰거나 쓰지 않는 가수들의 경우 사운드스캔 판매량과 오리콘 판매량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개중에는 도리어 사운드스캔이 오리콘보다 높게 나오는 경우까지 있다.
하이터치회는 악수회와 비슷한데, 음반을 구매하면 이벤트장에서 멤버와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는 하이터치회권을 음반에 동봉한다. 이쪽을 가장 적극적으로 구사하는건 쟈니스로, 쟈니스 소속 그룹인 Sexy Zone은 사실상 3인조 유닛 활동하던 2014년 하반기 ~ 2015년 상반기에 Sexy Zone 5인 완전체[17] & Sexy Family[18] 합동 하이터치회를 개최해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체키회, 혹은 샤메회, 투샷회는 악수회나 하이터치회보다 많은 수의 음반을 복수구매했을 때 참가 가능한 이벤트로, 멤버와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티켓을 음반에 동봉해서 판매한다. 사진이라는 물질적인 증거가 남는 이벤트이다보니 인기도 매우 크다. 현장에서 폴라로이드로 찍어주는 경우도 있고, 입회자의 디카나 폰카로 찍어주는 경우도 있다. 보통 발매된 사양 전부를 한데 묶은 박스셋에 동봉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박스셋 하나를 사면 차트에는 시디 여러장 구매로 찍힌다. 이 상술은 48사단, 하로프로 등등 많은 아이돌 집단이 사용하고 있다.
이런 문제점은 어찌보면 한국 게임업계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 국내 내수시장 전용으로 특화, 구매력이 있는 남자 30대 이상의 연령층 타켓팅, 뽑기-가챠 중심의 현금 땡기기식 운영, 그로 인한 업계 전체의 경쟁력 약화와 외산 컨텐츠의 시장 잠식 등이 있다.
지하 아이돌이나 인디즈 아이돌까지 내려가면 아예 멤버들과 껴안을 수 있는 기회를 파는 '허그(hug)회', 벽치기를 해 주는 '카베동회', 껴안고 귓속말을 해주는 이벤트, 무릎베개 등 무슨 유흥업소급으로 선정적인 스킨십 이벤트도 매우 많다. 허그회도 말이 허그회지 대놓고 멤버들을 만지작 거릴 수 있게 풀어놓은 이벤트나 다를바 없다. 그 외에 EXILE, E-girls 등의 LDH 소속 그룹들이 쓰던 뮤직 커넥팅 카드 상술이나 콘서트 티켓 첨부 상술도 있었는데 오리콘측에서 이러한 상술이 첨부된 음반은 차트에 반영하지 않기로 하면서 폐지되었다.
이런 상술은 그룹의 멤버 수가 점점 늘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AKB48이 밀리언을 기록할 수 있는 이유는 무려 300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손을 팔기 때문이다. 2015년부터 급성장한 노기자카46 역시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피지컬 판매량은 악수회로 인한 것이다. 그 외에도 개개인의 떨어지는 가창력을 떼창을 통해 감추려는 기술적인 의도도 있겠지만 2010년대 이후 현재 일본 아이돌의 인원수는 사운드 보완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술로 판매량을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상술을 통해서 음반 판매량을 불리다 보니, 음반이 몇십만장 넘게 팔려 오리콘 차트 1위를 해도 일반 대중들은 그 노래, 그 가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오리콘 차트는 이미 '인기의 척도'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였다. 개중에는 이름을 알리기 위해 음반가격을 낮추고 갖가지 상술을 떡칠해서 인지도 없는 아이돌이 차트에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한다. 이벤트를 계속 추가해서 떨어지는 낙폭을 가리는 눈속임 수법도 나왔다.
반면 Perfume이나 모모이로 클로버 Z 같이 실제 팬덤과 대중 관심도는 훨씬 더 높은데도 상술을 쓰지 않기 때문에 음반 판매량은 적게 나오는 가수들도 매우 많다. Perfume 싱글이 7~8만여장, 모모이로 클로버 Z의 싱글은 보통 4~5만장 정도 팔리는 정도로, 48사단의 자매 그룹의 10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Perfume이나 모모이로클로버가 '48사단 자매그룹'보다 인기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때문에 오리콘 차트 이외의 다양한 지표를 사용해야 그 그룹과 곡의 실제 인기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순수한 곡의 인기는 iTunes 다운로드 차트, 레코초쿠 착신음(벨소리) 차트, 노래방 차트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E-girls가 이 부분에서 강세였다. 콘서트 관객 동원력은 대중들의 관심과 팬덤의 규모를 확인하는 새로운 척도로 각광받고 있다. 접촉 이벤트를 통한 중복구매로 눈속임을 하지 못할 뿐더러[19] , 일단 규모가 크고 '공연'이라는 가수 본연의 능력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Perfume과 모모이로클로버Z는 음반 판매량은 높지 않지만 돔 투어 정도는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정도로 인기가 있다.
또한 티켓이 잘 팔리는 지역을 통해 이 가수의 인기가 전국구인지도[20]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또한 비디오리서치, 닛케이 파워랭킹, 오리콘의 '2만명이 좋아하는 아티스트 순위' 등 공신력 있는 설문조사도 인기 척도로서 사용되는 중. 특히 닛케이의 경우 인지도와 호감도를 동시에 조사하기 때문에 그 가수의 유명세가 '악명'인지 여부도 알 수 있다. 때문에 기업의 광고모델 선정에 중요한 참고자료로 사용된다.
닛케이 파워랭킹의 경우 여성 그룹은 현재까지 십수 년째 Perfume이 독보적인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개인별 파워랭킹에서는 사카미치와 48그룹 천지가 된지 오래. 46, 48 외에는 모모이로클로버Z 멤버들만이 그나마 개인 랭킹에서 선전하고 있다. 남성 아이돌은 따로 집계하지도 않고 아예 쟈니스 랭킹으로 발표한다. 물론 일본 현지에 거주한다면 주변의 분위기나 TV 등을 통해 체감 인기를 알 수 있으므로(길거리에서 노래가 많이 들린다거나, 주변의 대화에서 화제가 된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는 한국에서 팬질을 할 때 신경쓰게 되는 부분이다.
다만 오리콘 차트가 지표로서 기능하는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팬덤의 화력'을 측정하는데는 도움을 줄 수 있다. AKB48이나 노기자카46의 판매량이 거의 악수회 티켓으로 판 물량이어도 인정을 받는 것은 그걸 감안해도 현역 걸그룹 중에서 팬덤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PASSPO☆의 사례처럼 극단적으로 상술을 몰빵해서 실제 팬덤의 구매력보다도 판매량을 뻥튀기하는 사례도 있지만 그런 경우 다음 싱글의 판매량이 극단적으로 떨어지는 등 결국 티가 나게 된다.
여담으로 일본 아이돌은 CD를 사면 반드시 악수회를 갈 수 있는 반면 한국 아이돌 그룹 싸인회는 완전 추첨제라 오히려 상술이 심한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일본에서도 CD를 사면 반드시 악수회를 갈 수 있는건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을 표방한 AKB48 그룹과 그를 본딴 아이돌 그룹들뿐이다.[21] 일본의 다른 아이돌 그룹들도 하이터치회나 팬이벤트를 하기는 한다. 쟈니스 같은 아이돌도 때때로 할 때가 있다. 단지 대중적인 이미지 때문에 AKB처럼 대규모 악수회를 잘 열지 않을 뿐이다. 이 경우 인원이 제한되어 있으니 당연히 한국과 비슷한 추첨제다. 쟈니스 소속 King & Prince로 예를 들면 CD에 들어있는 하이터치회 응모용 시리얼 넘버를 전용 예약 사이트에 입력해 추첨한다. 당연히 한 장으로 추첨될 확률이 낮으니 여러장 음반을 사는게 기본이다. 물론 비인기 아이돌은 경쟁이 심하지 않으니 돈만 쓰면 무조건 갈 수 있지만 이건 비인기 한국 아이돌도 마찬가지다.
2.5. 기획사의 갑질로 인한 악습[편집]
(일본 연예 기획사 관련 기사)
아이돌의 소속 연예 기획사들의 과도한 권력남용에 대한 비판을 가한 영국 BBC 보도를 인용했던 연합뉴스의 기사를 링크한 것이다. 기사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일본에서 연예기획사들의 '갑질'에 대한 우려는 최근에 부각되기 시작한 문제이지만 그 이전에도 아주 없었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물론 한국이나 일본이나 소속사들의 갑질은 비판과 논란이 되고 있지만, 여전히 뿌리깊게 박힌 악폐습이 많다.#
한국에서는 별 일이 아닌 것이 일본에서는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단적인 예로 위의 기사에서 일본 아이돌인 SMAP와 AKB48 소속 멤버인 미네기시 미나미의 예를 들었는데 이 둘을 예시로 일본 연예기획사들의 횡포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기무라 타쿠야를 제외한 SMAP의 멤버들이 '탈퇴'를 결정하자 기획사가 이들을 막아 생방송에 검은 옷차림으로 출연시켜 사죄하게 한 것에 대한 것에 BBC는 고용주의 '갑질'로 간주, 이들을 '회사의 노예'로까지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AKB48 소속 멤버 미네기시 미나미가 남자친구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이유로 삭발을 하게 되었는데, 본인이 삭발한 것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 상황으로 내몬 것은 소속사의 횡포에 의한 것이다. 미네기시는 방송에 출연, 대중에게 역시 사과를 했다는 것 역시 '개인생활까지 간섭'하는 소속사의 횡포로 볼 여지가 있다. 특히 일본 소속사들이 소속 연예인들의 연애활동을 금지하는 규정을 강조한다는 점을 비난하고 있다.
게다가 일본은 아이돌의 연애생활을 철저하게 엄금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연예인들의 경우 직업의 특성상 같은 직종계열의 사람들과 만날 수 밖에 없고 그렇다보니 여성 아이돌들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대개 프로듀서들, 소속사 직원들이나 매니저, 혹은 해당 기획사 소속 이성 아이돌 또는 타 기획사 소속 아이돌, 또는 다른 연예인들인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연예인도 사람이기에 연애라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고, 이를 막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라고 할 만하다. 일단 개인의 선택이나 판단이라고 존중하는 편이고 결과적으로 책임은 개인이 지게 되니까 기획사가 규정까지 지어가면서 컨트롤하는 것은 부당하고 봐야한다.
결국 궁극적으로 기획사들이 해당 연예인들을 '동등한 위치에서의 동업자'라는 인식보다는 '갑과 을의 관계'로 여기고 이를 바탕으로 대하려는 태도로 인해 벌어지는 문제다. 일본 아이돌계가 사실상 오타쿠화한 인지도 때문에 이들을 무시할 것은 아니지만 권력화 되어가는 소속사들의 횡포는 문제가 아닐 수 없으며 이는 일본 아이돌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문제이다. 항목에도 서술되었으나 일본 아이돌이 사실상 캐릭터화, 비디오 게임에서 볼 수 있는 '육성화 캐릭터'성의 아이돌 컨셉으로 인해 일본 아이돌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는 것에 부작용으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문제를 제기한 측이 영국의 BBC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일본에서는 소속사들의 횡포를 문제시 여기고 있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개인적인 선택권과 행복권을 중요시 여기는 서구권에서 단체의 이익을 더욱 중요시하는 아시아권 문화를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건 사실이나 소속사가 개인의 연애활동까지 강압적으로 컨트롤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이기에 일본 내에서도 비판적인 여론이 있는 것도 맞다.#
심지어 범죄에 연루된 아이돌이 피해자 위치에 있어도 피해자마저 퇴출시키고 입을 막는 관행을 악용하는 악랄한 아이돌마저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야마구치 마호 자택 습격 사건으로 야마구치 마호를 타 아이돌 파벌이 교사사주하였다는 증거가 명백함에도 운영진 측에서 묻어버린 사건이다.
사실 BBC에서 지적한 점은 한국 아이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부분이 있다. 한국 아이돌 역시 소속사 아래에서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쳐 상품으로서 만들어지는 구조로, 일부 성공한 그룹들이나 전소연, 지드래곤 처럼 본인의 능력으로 멤버와 회사를 전부 먹여살리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아이돌들이 회사의 방침에 눌려서 개인의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구조이기 때문. 다만, 한국 아이돌들의 연애생활도 일부 비판여론이 있는건 사실이지만 일본처럼 강압적인 터치까지는 하지 않는 편이고, 팬들도 그럭저럭 용인하는 편이다.[22] 적어도 한국 아이돌은 일본처럼 열애설만으로 연예계에서 은퇴하거나(칸나), 그룹에서 탈퇴당하거나(하라다 마유), 지방으로 쫓겨가거나(사시하라 리노), 삭발하거나(미네기시 미나미), 손해배상 청구당하지는 않는다.[23] 원래 한국도 2002년까지만 해도 박준형이 한고은과 열애설 발각으로 탈퇴까지 거론되었으나 이 때 무렵을 기점으로 대중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2.6. 월급제[편집]
일본 아이돌은 월급제다. 정확히 말하면 월급+수당이다. 사실 아이돌 뿐만 아니라 일본 연예계 전체의 특징이다. 물론 한국처럼 수익분배제를 시행하는 회사도 있고, 초기엔 월급제지만 연차가 쌓이면 수익분배제로 재계약하는 경우도 있다. 탑스타나 인디 출신 밴드[24] 처럼 활동영역에서 소속사보다는 연예인 본인의 영향이 크다면 한국처럼 수익분배제지만[25] , 회사의 투자비용이 크고 수명까지 짧은 아이돌 그룹은 특성상 대부분 월급제다.
특히 일본은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소속사가 절대적인 갑의 위치라 한국 같은 정산 시스템이 거의 없다.[26] 방송에서 모닝구 무스메 전성기 시절 멤버인 야스다 케이가 CD판매량 인세같은건 한 번도 받아본적이 없고, PASSPO☆의 멤버였던 마스이 미오는 CD 판매 1장당 0.91엔(9원)을 받았다고 밝힌바 있다[27]
그래도 인기 아이돌이 되면 활동에 따라 수당을 꽤 쳐주기 때문에[28] 몇천만엔 이상 받는 아이돌도 드물지는 않다. 일본 아이돌의 연간 수입은 발표되지 않으나 납세액은 어느정도 파악가능한데[29][30] 일본 연예 기자들이나 스포츠 기자들은 이를 추정해서 연간 수입이 얼마인지 기사를 작성한다.
일본에서 당대 최고 인기 아이돌은 여성은 4천에서 8천만엔 정도이며 쟈니스 소속 아이돌이 간혹 1억엔 이상 받는 경우가 있다. 또한 음반의 작사나 작곡에 참여했다면 판매량에 따라 인세를 받지만, 아이돌에게 작사, 작곡을 시켜주는 사무소는 매우 드물다. 정확하게는 음반 작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 아이돌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가수'가 된 것으로 대우한다. 이 과정에서 계약도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게 일반적이다. 재계약이 이뤄지면 프로듀서가 아닌 한국식 매니저가 붙는다.
한국은 기본 월급이 없어서 데뷔 초기엔 사실상 무급 노동자 취급을 받지만, 어느정도 위치에 오르면 손익 분기점을 돌파하고 정산을 하기 시작한다. 전체 수익의 일정 비율을 회사가 가져가고, 나머지를 아이돌이 가져가는 방식이다. 따라서 최정상급 탑 아이돌이라면[31] 건물 하나씩은 갖고 있을 정도로 큰 부를 쌓지만, 그렇지 못한 무명 아이돌들은 수입이 한 푼도 없어서 부업을 할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해야 한다.
또한 기획사에 따라 인지도를 얻자마자 바로 정산을 해 주는 곳도 있지만, 투자비용을 회수할 때까지 한 푼도 정산해주지 않는 곳도 있다. 흔히 말하는 3대 기획사(SM, YG, JYP) 포함 일부 돈 많은 초대형 기획사는 연습생들에게 투자한 금액을 데뷔 후에도 청구하지 않기 때문에, 데뷔하자마자 바로 정산을 해준다.
반면, 일본 아이돌은 탑급이 되어도 월급제라 비슷한 위치의 한국 아이돌보다 수익이 적다. 그러나 안 팔리는 비인기 아이돌도 월급을 주니 최소한의 생계는 보장한다는 말도 된다. 하지만 비인기 아이돌에게 많은 월급을 줄리가 없고 대부분은 일반 회사에 취업해 받는 급료보다 훨씬 낮다고 봐야...
그나마 이정도라도 주는건 대형 기획사 이야기로, 일본 중소 기획사 아이돌은 월급이 거의 없거나 매우 적어서 먹고 살기 힘든건 마찬가지다. 탑급은 아니더라도 바다건너 나무위키에도 항목이 있을 정도인 걸그룹 멤버가 받는 연봉이 한화로 2천만원대다. 일본 유명 기획사 중 호리프로나 업프론트 프로모션의 급료가 비교적 높다고 알려져 있으며, 반대로 요시모토 흥업의 급료가 짜기로 유명하다.
한국과 일본 기업의 차이 중 하나가 숙소와 교통 시스템인데, 이는 연예기획사도 동일하다. 한국은 숙소 비용을 지출로 처리해서 매출에서 제하고 정산하지만, 일본 기획사는 회사에서 복지비용처럼 숙소 임대료와 교통비를 처리해준다. 그러다 보니 인기있는 아이돌은 월급만큼 비싼 월세집을 회사에서 해 주는 케이스도 있고[32] 회사까지 오가는 대중교통 정기권이나 신칸센 티켓 등을 지급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인기에 따라 대우가 달라서, AKB48 전성기 시절인 마에다 아츠코가 졸업한 2012년에는 월세만 30만엔~100만엔에 달하는 고급 맨션을 제공했지만 하락세로 접어든 2018년에는 집세는 일절 제공하지 않는다고(전액→반액→10%에서 현재는 없음) 한다. 이외에 귀가시 버스나 식대 등 대우도 전성기와는 크게 다르다고 한다. 출처는 주간문춘 디지털
3. 여자 아이돌 특징[편집]
3.1. 유사연애와 종속성[편집]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일본 여성 아이돌은 철저한 '유사 연애대상'이라는 컨셉에 묶여있다. 이는 연애 경험이 부족한 소년이나 청소년들에게 마치 실제로 아이돌과 연애를 하고 있는 듯한 감정을 들게 함으로써 장사를 하는 수법이었다. 그런데 여성 아이돌들이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이런 수법은 써먹을 수가 없으므로, 아이돌 기획사들은 아이돌 스타들이 연애를 전혀 모르는 순수한 소녀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켜야 했다.
1980년대에는 청순함, 순정과 같은 깨끗한 이미지와, 첫사랑이나 짝사랑 등을 다룬 풋풋한 소재의 노래를 들고 활동하였다. 또한 방송 인터뷰에서도 '애인 같은 거 없어요'라고 대답하며 연애와는 거리가 먼 순수한 이미지를 쌓았다. 아예 '연애 금지' 조항을 내건 소속사도 많았다. 물론,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처자들이 죄다 연애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관심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무성애자, 무로맨틱, 자발적 비연애가 아닌 이상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1970~80년대에는 이런 상술이 통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지속적으로 아이돌 스캔들이 터져버렸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츠다 세이코의 경우이지만, 마츠다는 이것을 역이용해서 '자유롭고 당찬 여성 스타'(걸 크러시)의 이미지를 구축, 당대의 여성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또한 1990년대 들어 사회적으로 '여성의 성욕'이 인지되면서 '순결하고 청순한 소녀'라는 것이 현실에서는 드물다는 것을 일반인들도 잘 알게 되었다.[33] 지금까지의 여성 아이돌이 추구하던 '유사 연애대상' 상법은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일본 여성 아이돌 시장은 상큼한 소녀 콘셉트를 대부분 포기했으며, 남성들에게 성(性)적으로 어필하는 연약하고 섹시한 콘셉트 위주가 되었다. 과도한 섹시 콘셉트 때문에 성 상품화 및 성희롱 문제, 멤버들의 신체적 건강 문제[34] 등 큰 논란이 일었고, 이는 1990년대 초반 불어닥친 여성 아이돌 빙하기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한가지 특이사항은 이러한 사건과 로망 포르노 등 성적 콘텐츠가 증가하면서 기존의 여성 아이돌 팬덤을 구축하고 있던 소위 아이돌 친위대 남성들이 대거 다른 문화 콘텐츠의 소비층으로 이동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소위 말하는 초식남 계열 오타쿠들이 채우게 되었다. 일본의 락커이자 음악평론가 오키테 포르쉐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언제까지 그런 젖비린내 나는 걸 좋아할 거냐?"는 분위기가 생긴 것이라 표현했다.
기존의 아이돌 팬덤은 아이돌을 자신의 우상이자 지켜줘야 할 상징적 여성으로 여기는 외향적인 남성들이 많았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일진 등 '노는' 부류에 들어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아이돌에 대한 환상이 깨진 이들이 '현실의 여성'을 소비하러 이탈한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이성을 만나 본 경험이 거의 없어 여성에 대한 비현실적인 환상이 있고 '이상적인 순결한 소녀'에 대한 갈망을 가진 모범생, 오타쿠층이 현실도피의 일환으로 아이돌이라는 허상에 목메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이는 후술되는 '왜곡된 유사연애 모델'의 범람으로 이어지게 된다.
마침 1990년대가 오면서 아무로 나미에 같은 카리스마적인 여성 아티스트들이 더욱 돋보이게 되면서 아이돌이 활약할 장소는 더욱 없어진다.
그렇게 아이돌 빙하기가 끝난 1990년대 후반 등장한 모닝구 무스메는 이전의 여성 아이돌과는 달리 친근하고 부담 없는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어필했다. 모닝구 무스메는 우타방 등의 예능 방송에서 거침없이 망가지면서 친한 친구같은 이미지로 다가갔다. 한정된 계층에게만 어필할 수 있는 '상상 속의 연애대상'이라는 컨셉 대신 '재미있고 웃긴 여자애들'이라는 컨셉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덕분에 모닝구 무스메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등장한 여성 아이돌들 역시 성애 감정보다는 친근감으로 승부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는 Perfume이 있다. Perfume은 퍼포먼스의 화려함이나 높은 퀄리티의 곡으로도 인기를 얻었지만, 멤버들이 예능 방송에서 보여준 독특한 캐릭터[35] 역시 Perfume이 인기를 얻은 중요한 요인이었다.
상술된 아이돌 팬덤의 성향 변화와 맞물려서, '유사 연애대상'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일본 여성 아이돌 업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유사연애 대상 모델이 일본 여성 아이돌 업계에 남긴 가장 큰 악습으로는 '연애 금지'를 들 수 있다. 과거의 여성 아이돌은 연애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었는데, 그런 관습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1970~1980년대의 아이돌 팬들은 '나의 아이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해서는 안 된다'라고 인식했다는 것이지만, 2010년대의 아이돌 팬들은 '여자 아이돌은 연애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연예계의 오랜 규칙이니까 그냥 지켜야 한다'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아이돌보다는 아티스트로 간주되며 유사연애 노선을 포기해도 지지해주는 대다수의 팬들을 확보한 이들이 아니면 얄짤없는게 일본의 현 상황이다. 일본에는 여성 아이돌의 환상에 그대로 넘어가버리는 극성팬, 오타쿠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안타깝게도 일본에서는 아직도 이런 유형의 소비자들이 '아이돌 시장'의 주요 소비자층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소속사도 무시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인기 아이돌 성우였던 히라노 아야의 스캔들때나 토요사키 아키의 스캔들이 대표적인 사레다. 굳이 한국에서 비슷한 예를 찾자면 아이유와 은혁의 스캔들 정도다. 당시 과도할 정도로 아이유를 비난했던 일부 남성 팬들이 있다.[36] 재미있게도 오히려 한국에서는 남성 아이돌에 대한 유사연애 풍조가 심한 편으로, 대표적으로 "변백현 돈 내놔" 사건이라든지, 최근에는 연애했다는 이유로[37] 소속사에서 잘린 이던-현아 사건이 있다. 이 문서에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설명되지만, 그 원인은 바로 해당 연예인들의 주 소비자층이 가진 비현실적인 성적 욕망과 현실과의 괴리 때문이다.
AKB48의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는 2013년 들어 "AKB48에 연애 금지 룰이란 건 애초에 없었다."라고 밝혔다. 물론 이것은 미네기시 미나미 삭발 사건에서 온 연애금지 규칙에 대한 비판 때문에 나온 변명에 가깝지만 실제로 그런 말을 하기는 했었다. 실제로 사시하라 리노가 연애 금지 룰이 없어지고 자기 책임제로 바뀌었다고 증언하는 등, 연애에 대해서 어느 정도 관대해진 것은 사실이다. 팬들도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면서 넘기는 분위기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큰 논리적 모순이 존재하는데, "아이돌의 연애가 왜 금지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변도 없이 '아이돌이니까'라는 두루뭉술한 얼버무리기로 그냥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는 아이돌이라는 직업이 '인간'이 아닌 '인형처럼 순결한 아이돌'이라는 허상 그 자체를 소비하는 형태로 변화하였음을 의미한다.[38]
일본 아이돌들은 어린 나이에 데뷔하고, 대부분의 노래는 짝사랑이나 상대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혹은 이렇게 부족한 나지만 사랑해달라는 피동적이고 종속적인 형태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이는 서툰 노래와 안무와 어우러지면서 철저하게 아이돌을 존경할만한 '우상'의 위치에서 완벽하게 끌어내려버렸다. 과거 한국의 여자 아이돌도 큰 차이가 없었으나,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널 좋아하니 내가 반드시 쟁취한다', '헤어질 거면 찌질대지 말고 떠나라', '너 없이도 난 당당하다'와 같은 내용의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가사 내용의 노래가 나오며 대조를 이룬다.
실제로 해외 시장에서 호평을 받는 K-POP 여자 아이돌은 BLACKPINK 류의 걸크러쉬형 그룹들이라 해외 진출을 노리는 한국 기획사들이 갈수록 이런 컨셉에 주목하는 반면, 일본에서는 아직까지도 어중간한 국내 초식남 시장을 노리면서 교복을 입고 학창 시절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어린애 흉내나 내는 여린 소녀 컨셉이 각광받으면서 활발히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애초부터 남자들에게 어린 소녀와 손잡고 이야기할 기회나, 껴안을 기회(허그회)를 돈 받고 파는 시점에서 '아이돌은 유사연애가 아니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을리가 없다.
사실 소거법으로 계산하면 매우 간단한데 일본이라는 나라는 유사성매매와 AV가 합법인 나라다. 성인 여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은 그나마도 본인의 돈과 능력이 감당이 되는 선에서 얼마든지 직간접으로 해소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니어도 유일하게 금기시되는 게 미성년자에 대한 성적 욕망이다. 그러므로 합법적으로 남자를 모르는 순결한 미성년자~사회 초년생에 대한 연애욕망을 대리만족할 수 있는 수단은 아이돌 단 하나만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일본 사회도 성범죄 문제는 거의 무관용에 가까운 수준으로 다루는 데다가, 심각한 결혼 대란과 불황으로 인한 젊은이들의 경제력 감소로, 자기 능력만으로 남녀 간의 교제조차 마음대로 못할 정도가 된 상황에서 그나마도 돈 쥐어주고 선만 안 넘으면 뒷탈없이 자기보다 어린 여성을 마음껏 성적 노리개로 삼을 수 있는 지금의 유사연애 모델은 주요 소비층인 초식남의 정신적 탈출구나 다름없어졌다. 실제로 악수회에 가보면 만화에나 나올법한 키모오타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지하 아이돌 정도 되면 더 심해진다.
AKB48을 비롯한 48사단과 자매그룹처럼 인식되는 노기자카46 등의 경우, 악수회나 투샷회처럼 팬들이 아이돌을 직접 만나 접촉할 수 있는 이벤트를 주력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유사연애 마케팅이다.[39] AKB48의 멤버들은 악수회에서 팬들에게 대하는 태도에 따라 팬들로부터 평가를 받고, 그 평가에 따라서 인기에 영향이 크게 미친다. 와타나베 미유키나 하타 사와코처럼 악수회에서 오타쿠들에게 웃음을 잘 지어주고 말을 잘 해주는 멤버들은 소위 '神'이라고 불리며 큰 인기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제아무리 춤이나 노래가 뛰어나고 미모가 빼어나도 악수회에서 오타쿠들에게 아양을 떨고 비위를 맞춰주는, 소위 '설탕/카미 대응'을 제대로 못하면 인기를 얻는게 거의 불가능하다. 실제로 48사단에서도 악수회에서 팬들 따위는 신경도 안쓰는 소금대응으로 유명한 시마자키 하루카만 예외였는데, 이건 시마자키가 당시 아이돌씬에서 탑급으로 손꼽힐 만큼 외모가 뛰어났던 데다 소속사에서 '소금대응' 그 자체를 캐릭터로 구축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40]
결국 아무리 춤을 잘추고 노래를 잘해도 악수회 반응이 더럽다고 소문나면 아이돌 생활은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수백~수천 명까지 상대하는 악수회에서 지치지 않고 연기를 하는 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이지만, 정작 본업인 가창력과 댄스 실력보다는 이런 부수적인 곳에서 인기가 좌우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 시장의 구성이 본말전도가 된 채로, 핵심 소비자가 컨텐츠 내용물의 품질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처녀성같은 성적 환상에 돈을 지불하는, 사실상 술 안 파는 캬바쿠라 시장과 다름없다는 반증이다.[41] 그래서 AKB48 이후 시대의 아이돌 팬에 대한 인식은 거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속된 말로 있는 돈 다털어서 미성년 여자 만지러 다니는 음습한 인간 말종 취급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진짜 그런 소수의 성도착증, 성범죄자들이 친 사고들이 워낙 엽기적인 수준이라 보통의 팬들까지 질려서 떨어져나가 팬덤 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진 케이스. 그나마 AKB같이 대형 소속사의 아이돌은 양반이고 그보다 더 밑에 있는 지하 아이돌은 사실 이미 선을 한참 넘은 상태다. 이름만 아이돌로 포장했지 유사 성매매나 다름 없어진 지경.[42]
2010년대 들어서는 Perfume의 브레이크와 곧 이어진 한국의 걸그룹의 일본 진출과 러쉬로 인해 유사연애보다는 가수로서의 능력을 전면에 내세운 아이돌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큐트, 9nine, DiVA, 페어리즈, 도쿄죠시류, E-girls 등이 대표적 케이스다. 아울러 모모이로 클로버 Z도 있긴 하지만, 완벽하게 앞의 케이스에 부합하진 않는다. 이들이 공연 위주로 활동하고 있긴 하지만, 유사연애 노선을 약간 변형한 쪽이거나 성공해서 이제는 유사연애 노선을 버리는게 가능한 것에 가깝다. 유사연애보다는 가수로서의 능력을 앞세운 이런 그룹들은 10대 초중반 어린 나이에 활동을 시작했고, 어느 정도 예능 활동을 겸업하며, 자신들의 비주얼을 적절히 활용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비주얼과 남성팬' vs '가창력과 음악성'을 무기로 한 노선의 대비가, 과거 마츠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 때 이미 이뤄진 구도라는 점이다. 이런 황금기 시절 아이돌 노선을 잇는 아이돌로는 대표적으로 큐트의 스즈키 아이리가 있다. 문제는 아이돌 위주로 음반시장이 재편된 한국과 달리, 일본 음반시장은 아이돌의 비프로화가 겹치면서 아직도 비아이돌 아티스트들이 폭넓게, 활발히 활동 중이라는 것. 일반 대중들 입장에서는 실력 있는 아티스트의 '좋은 노래'를 소비할 기회는 충분하다보니 이러한 퍼포먼스 노선을 타기 위해서는 아티스트에 준하는 가창력과 무대 퍼포먼스 실력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
자연히 이 컨셉을 쉽사리 선택할 수 있는 그룹도 드물고, 설령 실력이 있다고 해도 콘텐츠가 대중들의 눈높이에 들 정도로 훌륭하지 않다면 애매한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43] 무엇보다 이런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수년간 피나는 트레이닝이 필수적인데 소속사 입장에서도 당장 현금을 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 AKB식 운영을 포기하고 실력있는 멤버를 수년간 훈련시켜야 한다는 선택지를 쉽게 택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때문에 메이저 기획사들 중 한국같은 연습생 시스템을 갖추고 데뷔 전후 트레이닝에 투자하는 회사는 뛰어난 자본력을 지닌 아뮤즈와 하로프로 딱 두 곳 뿐이다. LDH의 경우 연습생으로 소속시켜 육성하기 보다는 산하 댄스스쿨 등에서 훈련된 인재를 오디션으로 발탁해오는 미국식 시스템을 사용해서 성과를 냈다.
3.2. 아키모토 야스시 계열 위주의 시장 구도[편집]
모닝구 무스메 → Perfume까지의 구도는 확실하게 곡의 성공에 초점이 맞춰졌으나, 이 후에 비롯한 인기 아이돌의 계보는 상당히 독특하게 이어지고 있다[44]
대표적으로 아키모토 야스시가 프로듀스한 2010년대에 가장 성공한 걸그룹인 AKB48 스타일의 시스템에서 대다수의 아이돌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AKB48는 지하아이돌의 활동수단인 상시극장공연을 기반으로 기존 아이돌과 달리 '만나러 가는 아이돌'로 팬들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방법을 도입해 대성공을 했고 총선거, 악수회 시스템을 최초로 만들어서 높은 매상을 기록하는 멤버를 메인으로 올려주는 지표로 활용했다.
거기에 파생적으로 자매그룹인 48그룹을 만들었는데 이 흐름은 프로듀서인 아키모토 야스시가 제창한 거점 아이돌 + 대단위 아이돌 그룹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도쿄 이외에 나고야, 오사카, 후쿠오카 등의 다른 대도시까지 확장을 해서 일본 전국의 아이돌 팬덤을 48그룹의 브랜드로 흡수하겠다는 것. 또한 체급을 불려서 인원이 많아지면 아이돌 오타쿠들의 취향에 맞는 멤버가 그룹중에 생길테니 이득이 될거라는 계산이 들어있다.
그리고 이 계획은 나름 선방해서 아이돌에 관심은 있지만 도쿄에 상경할 엄두를 못내던 재능있던 인적자원들이 자매그룹에 가입하는 것으로 기존에 활동하던 로컬 아이돌의 수요를 상당수 빼앗아버렸다.
이후 전성기가 끝난 48그룹의 다음에 나타난 노기자카46의 히트는 AKB48가 기틀을 다진 악수회 시스템 + '오죠사마(아가씨)' 컨셉의 아키모토의 작품이다. 48그룹과는 분명 다르지만 크게 시스템이 다르지 않으며 자매그룹으로 침묵하는 아이돌, 웃지 않는 아이돌 기반인 케야키자카46을 만드는것을 보면 48사단 시스템의 변형에 불과하다는것을 알 수 있다. 결국 2010년대 내내 48/46 그룹, 즉 아키모토 야스시가 프로듀스한 그룹이 여성 아이돌계를 독과점하고 있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아키모토식 아이돌'이 업계표준이 되었고, 다른 형태의 아이돌들은 이질적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단적인 예로 Perfume은 90년대식 댄스팝 아이돌'에 토대를 두고 결성된 팀으로, 당시 기준에 맞춰 자신들을 '아이돌이라고 자칭'한다. 허나 악수회형 아이돌이 표준이 된 현재 아이돌 시장에서 그녀들은 아이돌이 아니라 아티스트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된다.
이 일련의 아키모토 야스시가 인기 그룹을 만들 때는 '기존에 없는 아이돌'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점. 하로프로나 아이돌링 같은 기존 아이돌 시스템을 벗어난 독특함이 그들의 성공의 비결이었다. 무엇보다 아키모토는 자신의 인맥과 스폰서를 이용해 TV를 적극 활용했다. 종래의 아이돌의 성공에는 그가 만든 시스템이 기본 베이스일 정도로 시장의 선두격인 인물.
하지만 그룹을 띄울 때 가창력을 배제하고 그라비아, 악수회 등 여성의 성상품화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비판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AKB48만 해도 '얘들이 술 안 파는 캬바쿠라 직원이지 아이돌이냐'는 극단적인 비판에도 반박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러 있다. 운영 측이 비판을 반박하고 대책을 강구하기도 모자랄 지경인데 운영 측은 오히려 캬바스카 학원 따위를 찍음으로서 이런 비판을 오히려 부채질하는 수준.
또한 아키모토의 '인기 위주로 가창 멤버 꾸리기'는 그룹 가수에게 필수적인 요소인 '사운드 밸런스'를 완전히 망쳐버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합창을 할 때는 당연히 고음/중음/저음에 맞는 목소리를 균형있게 분배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아니라 인기순으로 뽑아버리니 쨍쨍대는 하이톤은 넘쳐나는데 중음역은 텅텅비고 몇몇 로우톤 멤버들이 저음테러를 하는 총체적 난국이 벌어진다.[45]
아키모토가 만든 그룹에도 분명 노래를 잘 하는 멤버들이 있긴 했으나, 열댓명이 다같이 배를 산으로 끌고 가는데 사공 혼자 고분분투 해 봤자... 이 때문에 48사단 노래들 중 '라이브 무대'에서 대중적인 호평을 받았던 곡은 365일의 종이비행기 정도 뿐이다. 그마저도 노래가 되는 야마모토 사야카에게 파트를 가능한 한 몰빵해주고 다른 멤버들에게 추임새만 시켜서 낸 성과.
2013년 이후에 데뷔한 그룹 중에서는 좀처럼 빅히트하는 아이돌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나마 덴파구미.inc나 BiSH가 그나마 메이저 음방 출연이나 아레나급 콘서트 정도의 성과를 보인 것이 전부. 종래의 컨셉을 벗어나지 못하는 양산형 아이돌이 늘어나고 있고 대부분이 소규모 라이브 등의 로컬이나 지하 아이돌의 활동 방식을 따르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어필하기가 힘들다. 오히려 러브라이브 같은 아이돌 성우가 노래하는 가상 아이돌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 홍백가합전같은 메이저 방송에 진출하거나 대규모 라이브를 성공하는 중이다. 그리고 이런 아이돌 성우의 파이가 커지자 아키모토 야스시는 성우가 연기하는 가상 아이돌 22/7을 밀어주는 시도를 하고 있다.
4. 남자 아이돌 특징[편집]
4.1. 쟈니스 사무소의 독점과 몰락[편집]
일본 내 남성 아이돌은 90년대 이래로 쟈니스 사무소가 독점하고 있다. 쟈니스가 지금처럼 탑급 기획사가 아니었던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쟈니스에 경쟁할 만한 남성 아이돌 기획사가 있었다. 70년대의 신 고산케, 80년대를 풍미한 그룹 체커스 등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80년대 중반 콘도 마사히코, 소년대로 이어지는 부활기를 거쳐 히카루GENJI와 SMAP의 히트로 인해 쟈니스는 남성 아이돌계의 1인자로 성장했다.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에 걸쳐 라이징 프로덕션에서는 w-inds., Lead 등의 남성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켰고 w-inds.는 실제로 큰 인기를 얻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방송 출연이 뜸해지면서 인기가 떨어졌다. 이를 두고 쟈니스의 외압이 들어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설사 그런 현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쟈니스의 적극적인 외압을 통한 결과인지는 입증할 수 없다.
2000년대 들어서 동방신기의 일본에서의 대성공,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빅뱅, 그리고 슈퍼주니어, 샤이니, 2PM 등의 한류 아이돌이 일본에서 팬덤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면서 이런 쟈니스 중심의 시장에 변화가 오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2012년 들어서 한일간의 정치적 관계가 냉각되었고, 이에 따라 한류 아이돌에 대한 일본인들의 호응도 조금씩 사그라들었고 일본의 음악이나 오락 방송에서 한류 아이돌이 사라졌다.
그 대신 2012년 무렵부터는 EXILE, J Soul Brothers를 필두로 한 LDH 계열 그룹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이들 그룹은 쟈니스에 비해 남성적인 이미지와 대중의 취향에 부합하는 곡을 들고 나오면서 기존 쟈니스와는 달리 남성층에서도 호응을 얻었다. 이를 두고 기존 한류 아이돌의 수요를 어느 정도 흡수했다는 분석도 있다.
정확하게는 일본 대중이 가지고 있던 남성미',강인함에 대한 수요를 한류 아이돌들이 채워 주다가 자국 그룹인 EXILE, J Soul Brothers 등이 등장하면서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고 추측한다. 이는 여자 아이돌판에서 역시 LDH 소속인 E-girls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해석. 실제로 한류 아이돌들이 하던 광고를 LDH 계열 그룹들이 이어받은 경우가 종종 보인다.
반면 쟈니스가 데뷔시킨 아이돌 중 국민 아이돌이라고 부를 만큼의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1999년 데뷔한 아라시가 사실상 마지막이다. 그 이후 데뷔한 NEWS, Kis-My-Ft2, KAT-TUN, Hey! Say! JUMP, Snow Man 등은 그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실제로 쟈니스 신규 그룹의 팬덤은 대부분 다른 그룹 팬질을 하다가 치비 주니어 시절부터 곁다리로 봐 온 멤버들이 데뷔했을 때 팬심이 이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규팬 유입이 없으니 판매량은 정체되거나 줄어들기만 하고, 아예 KAT-TUN이나 Hey! Say! JUMP처럼 데뷔 싱글이 디스코그래피 최고 판매량인 경우도 왕왕 있다.
물론 국민 아이돌이라는 칭호를 얻는 그룹이 매번 나올 수가 없는것도 맞다. 위에 언급된 쟈니스 그룹들도 국민 아이돌급이 아닐 뿐이지 모두 오리콘 차트 주간 1위곡이 20개 이상 있는 크게 성공한 아이돌이다. 비판과 염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 남자 아이돌 시장은 방송국에서 쟈니스 소속 연예인을 빼면 방송이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 돌아다녔던데다 실제로 쟈니즈는 눈밖에 난 연예인의 밥줄을 끊으려고 압력을 행사하다 공정위 주의까지 먹을 정도로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다. 이런 온갖 견제와 정치질 덕에 LDH 계열을 제외하면 쟈니스 치고는 인기가 많지 않은 편인 A.B.C-Z와 비교할 만한 타 사무소 출신 남자 아이돌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다가 2010년대 초반 이후 사그라들었던 K-POP의 일본 내 인기가 2017년 즈음 이후 다시 살아났다. 특히 방탄소년단을 필두로 이전 케이팝 한류와는 차원이 다른 글로벌한 인기와 행보들이 세계 조류와는 동 떨어진 쟈니스 아이돌과 비교되는 모습이 계속 연출되면서 기존 팬덤의 이탈까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에 쟈니스 측은 크게 위기감을 느꼈는지 유튜브 채널 개설, 안무 영상 업로드, 아라시의 영어곡 발표를 시작해서 Snow Man과 King & Prince의 영어곡 등, 신인 그룹들의 해외 진출 선언, 라이브 비중을 늘리는 등 K-POP 아이돌들을 의식한 듯한 행보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2020년대 들어서는 쟈니즈의 사내정치 문제, 소속 연예인 개인의 도덕적/법적 문제 등으로 인해 탈퇴나 활동중단을 선언하는 연예인들이 늘어나면서 진짜로 적신호가 켜졌다. 부사장으로 취임했던 타키자와 히데아키도 3년만에 임원직을 내려놓고 독립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 가뜩이나 SMAP해체사건 이후로 아얘 공정위의 경고를 당해 대놓고 압력을 행사하기에는 대중의 눈치가 보이는 상황인데, SNS와 OTT 등 뉴미디어의 대두로 쟈니스를 나가고도 잘만 활동하는 연예인까지 늘어나고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지금은 고인이 된 쟈니 키타가와가 생전 연습생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성착취를 지속적으로 자행한 사실이 BBC에 의해 조명되었고, 일본의 주요 미디어는 이를 수십년 간 쉬쉬하며 감춰왔다는 점까지 밝혀져 이미지가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고 있다. 결국 10월 2일을 끝으로, 쟈니스는 스마일업이라는 보상 협회로 존속된 뒤 역사 속으로 사라질 예정이다. 이에 따라 향후 일본 아이돌 계에도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5. 역사[편집]
5.1. 1970년대 이전[편집]
일본에서는 1960년대 이전까지는 가수나 배우를 대상으로 아이돌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다. 미소라 히바리나 요시나가 사유리처럼 인기가 있는 여성 스타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그냥 '청춘 스타'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했으나, 1970년대에 젊은 층을 대상으로 대중가요를 부르는 청순파 가수를 가리키는 의미로 '아이돌 가수'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
일본의 아이돌의 경우 단어 등장 초기에는 남성을 지칭하는 것보다는 주로 여성을 지칭하는 데 쓰였다. 50~60년에 당시 프랑스 영화와 스타들이 일본인들에게 굉장한 붐을 끌었다. 그들은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아이돌을 찾아라'(Cherchez Idole!)와 같은 영화들과 영화스타들, 그리고 당시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여가수들인 ye-ye GIRL들의 붐이 일었다. 그들은 일본에서 앨범도 내고 잠깐 동안 활동하기도 하였다. 실제 당시 일본 여가수들, 엔카가수들을 제외한 LP판들의 폰트, 디자인, 패션등 많은 면에서 ye-ye GIRL의 LP판 디자인 컨셉과 유사했다.
이들은 프랑스에서 "ye-ye GIRL"이라고 불리며 패셔니스타로 지칭되는 등 수영복 화보를 찍기도 하였다. 그리고 1963년에 데뷔한 "65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수상자인 프랑스 갈 등이 인기가 많았다.
이러한 프랑스 출신 아이돌의 득세로 일본에서는 아예 '프랑스갈(걸)'이라는 용어로 통칭에 여자 아이돌을 부르기도 하였다. 이후 등장했던 마츠다 세이코 류의 아이돌들이 프랑스 갈 스타일의 전형.
5.2. 1970년대[편집]
고 히로미, 사이조 히데키, 노구치 고로, 야마구치 모모에, 이와사키 히로미, 사쿠라다 준코, 모리 마사코, 아사오카 메구미, 핑크 레이디, 캔디즈 등이 대표적인 70년대의 아이돌로 아이돌 붐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시기였다.
이 시기에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탄생!'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해 여성 아이돌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탤런트성이 있는 인물을 찾아내서 데뷔시키는 스카우트 쇼 프로그램이었다. 70년대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 아이돌인 핑크 레이디와 야마구치 모모에가 '스타 탄생!' 출신이다. 핑크 레이디가 일본 여성 아이돌 붐의 시초를 열었다고 기록되고 있으며, 이 시절은 야마구치 모모에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는데 야마구치 모모에는 아이돌의 필수 덕목(청순함, 가련함, 가창력, 외모)을 확립하며 여성 솔로 아이돌의 시작점을 열었다.
5.3. 1980년대[편집]
쇼와 시대에는 아이돌 산업이 엄창나게 번창하여 수많은 아이돌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아이돌 붐 현상이 일어났다. 특히 80년대는 70년대부터 시작된 아이돌 붐이 절정에 달한 시기로 아이돌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대표 격으로 마츠다 세이코, 나카모리 아키나, 콘도 마사히코, 타하라 토시히코, 히카루GENJI 등을 꼽는다. 1980년에 마츠다 세이코, 카와이 나오코, 카시와바라 요시에, 타하라 토시히코, 콘도 마사히코 등이 데뷔한 아이돌 풍작을 기반으로 82년에는 엄청난 수의 아이돌이 데뷔해, 당시 데뷔한 아이돌들을 '꽃의 82년조'라고 불렀다. 나카모리 아키나, 코이즈미 쿄코, 하야미 유, 호리 치에미, 이시카와 히데미, 마츠모토 이요가 그 중에서도 유명하다. 하지만, 버블 경제 시절처럼 엄청나게 수많은 아이돌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 대부분 거품같이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돌인 마츠다 세이코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은퇴와 한께 바통 터치를 하듯이 데뷔하였고, 압도적인 실력과 스타성으로 수명 짧은 아이돌이 롱런 아티스트로 진화하기 위해선 이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거기에 유사연애의 화신, 만인의 연인인 아이돌로서는 치명적인 남자 스캔들에도 흔들리지 않고 대응하여 후대 일본 여성 아티스트들에게 길을 제시했다.
한편, 이 마츠다 세이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라이벌로 나카모리 아키나가 있다. 한편 나카모리 아키나가 정점에 오른 것은 마츠다 세이코가 결혼과 출산으로 활동을 무기한 정지한 와중이었기 때문에, 나카모리 아키나를 모모에-세이코를 잇는 후계자 격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나카모리는 82년에 데뷔한 이래 꾸준히 커리어를 쌓아, 마츠다 세이코가 결혼과 출산 등으로 주춤하던 시기에 여성가수 최초로 일본 레코드 대상 2연패를 달성하고, 가수별 연간 매상 순위에서 총 4회의 1위를 차지해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나카모리는 대세였던 기존 아이돌의 밝고 귀여운 음악에서 탈피, 특유의 프로듀싱 능력과 아티스트로서의 실력을 길러 마츠다와 대적하는 것이 가능했다. 마츠다와 나카모리는 각각 2900여만, 2500여만의 총 판매량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80년대 아이돌 중 최고에 달하는 수치이다. 최근의 아이돌들까지 합해도 SMAP나 AKB48, 아라시 정도가 이 위에 있다. 애초에 2000만장 이상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7~80년대 아이돌은 이 두 사람이 유일하다.
84년 데뷔조로 키쿠치 모모코와 오카다 유키코, 85년 데뷔조로 혼다 미나코와 사이토 유키 등이 전성기를 맞이했다. 후술할 '아이돌 4대 천왕'은 전원 85년도에 데뷔했다. 또한 80년대 후반에는 4대천왕 외에도 사카이 노리코, wink, 모리타카 치사토, 와타나베 마리나, 시마다 나미, 와타나베 미나요, 오기노메 요코 등 무수히 많은 거물 급의 아이돌이 춘추전국시대를 이끈다.
한편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와 후지 테레비의 기획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어진 오냥코클럽이 국민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평범한 여고생들이 아이돌로 데뷔한다는 컨셉을 통해 남자 중고생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쿠도 시즈카도 이 그룹 소속이었다. 비록, 오냥코클럽 자체는 3년밖에 가지 못했지만 오냥코클럽의 성공은 현재의 모닝구무스메와 AKB48 같은 아이돌 그룹의 초석을 완벽하게 다져 놓았다. 그러나, 실력이 없어도 전략과 상술만 좋으면 성공한다는 전례를 남김으로서 일본 아이돌 전체의 품질 저하를 야기했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또한, 이런 식으로 양성된 아이돌은 '성공의 과실'이 본인들이 아니라 '전략가'들이 가져가게 된다는 선례도 남겼다.
80년대 후반에는 포스트 마츠다 세이코/나카모리 아키나 세대로서, 같은 해에 데뷔했던 쿠도 시즈카, 아사카 유이, 나카야마 미호, 미나미노 요코가 아이돌 4대천왕이라 불렸다. 음반 총 판매량은 나카야마 미호(1497만)>쿠도 시즈카(1487만)>미나미노 요코(563만)>아사카 유이(297만) 순이었다. 그리고 드라마나 영화 등으로의 진출까지 하면서 확고한 산업체계가 구축된다. 이 아이돌 4천왕이라는 칭호는 90년대 초반까지 사용되었다.
80년대말 아이돌 4대천왕 메들리
이 즈음에 인기가 높았던 또 다른 아이돌이 코이즈미 쿄코. 쿄코는 사실 '꽃의 82년조'의 일원으로 나카모리 아키나와 데뷔 동기인데, 데뷔 후 점점 인기가 높아져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최전성기를 맞았다. 이 때 그녀는 "CM의 여왕"이라 불리며 '코이즈미 쿄코를 광고에 기용한 상품은 무조건 팔린다'는 이야기까지 만들어냈다. 일설에는 상품의 매상이 10%가량 올랐다고 한다. 90년대 이후로는 여배우로 사실상 전향.
그러다가 80년대 말부터 J-ROCK 밴드와 싱어송라이터들의 부상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해 기존 아이돌의 인기는 저하하고, 90년대의 반 아이돌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5.4. 1990년대[편집]
80년대 말에 이르면서 엑스 재팬이나 LUNA SEA같은 락 밴드를 필두로 '밴드 붐'이 크게 유행하며 아이돌 붐이 가라앉아 '아이돌 암흑기'라는 말이 생겨났다. 80년대까지 대형기획사에 의해 만들어진 아이돌에 대한 반감은 인디즈 시장의 확장 및 매니아 시장의 확대로 이어지고, 비쥬얼계의 끝물과 함께 GLAY, LUNA SEA 등의 밴드가 강력한 여성팬층(+록 음악의 팬인 남성팬들)을 확보하면서 사실상 아이돌의 지분을 침식한다. 사실상 CoCo와 Ribbon의 해체년도인 1994년을 마지막으로 70-80년대식 정통 아이돌의 시대는 끝났다고 봐야 한다.
대신 아이돌이라는 말 자체에 '특정한 집단을 대상으로 인기를 얻는 연예인'이라는 의미가 붙었다. 그래서 아이돌 여배우, 아이돌 성우, 그라비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그라비아 아이돌, CF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CM 아이돌 등의 단어가 생겨났다. 90년대 중반부터는 이러한 아이돌 마케팅의 히로스에 료코가 국민 여동생급의 인기를 얻으며 80년대 이후 위축되어 있었던 여자 아이돌 시장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한 주로 노래도 부르면서 댄스, 작사, 연기와 예능 등에도 강한, 엔터테이너적인 성향을 중시하는 '1인 아이돌'이 대두되었던 시기기도 하다. 이 때 인기를 얻은 아이돌은 시노하라 료코, 치넨 리나, 우치다 유키, 미즈키 아리사, 타카하시 유미코, 니시다 히카루, 마키세 리호 등이 있다.
이렇게 배우, 모델, 그라비아 아이돌 등 여러 형태의 아이돌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여성 아이돌 가수 시장은 90년대 초반 잠시 위축기(아이돌 빙하기)를 맞았다. 90년대 초반 활약했던 아이돌 중 가수만을 전업으로 하는 것은 CoCo가 유일하다.
90년대 중반에는 코무로 테츠야가 프로듀스한 솔로 아이돌 가수인 카하라 토모미와 아무로 나미에가 등장하여 서로 경쟁하였으며,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스즈키 아미와 하마사키 아유미가 인기를 다투었다. 한편 그룹 아이돌 가수로는 SPEED가 음반 판매량 180만 장을 기록하며 거의 전설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는 일본에서 반 아이돌 기류가 가장 팽배했던 시기로, 여자 아이돌의 주고객층인 남성팬들은 애니메이션, 만화, 인디즈 시장의 고객으로 변하게 된다. 반면 남자 아이돌은 쟈니스 사무소 계열로 대표되는 특정 회사의 독식이 아주 크게 나타나며 SMAP, KinKi Kids, TOKIO, V6 등이 주류가 되었다. 그중 SMAP이 기존 아이돌의 단편적인 이미지를 깨 버리고 버라이어티에 나가며 망가지거나 진행을 하면서 '멀티 엔터테이너' 아이돌로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국민 아이돌로 성장하게 된다.
또한 KinKi Kids가 26년만에 아이돌 데뷔 싱글 판매량을 <유리의 소년>으로 179만장으로 갱신하면서 SMAP의 뒤를 이은 국민 아이돌로 평가받으며 5개의 고정방송이 시작하고 CD 데뷔 전부터 출연한 드라마가 시청률이 29%가 나올 정도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또한 두번째 싱글인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고 싶어>가 164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면서 2번 연속의 밀리언 싱글을 내는 등 음반 판매량에 있어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특이하게 이 시기에 유행이 지난 정통파 아이돌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전성기를 구가한 여가수가 있는데, 바로 모리타카 치사토. 사실 모리타카 치사토는 80년대 후반 아이돌 4대 천왕들과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으나 오히려 전성기는 그들의 시대가 막을 내린 90년대 초반에 와서야 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모리타카 본인이 원래부터 밴드 음악을 추구하였고, 마침 그러한 경향이 90년대의 사조에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46] 그러면서도 아이돌 이미지를 유지했으니, 어떻게 보면 이분이 진정한 최후의 정통파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시점 이후로 일본에서는 '아이돌'과 장르별 '프로 뮤지션'이 확실하게 갈라지게 되었다.
5.5. 2000년대[편집]
2000년대에 들어서 솔로 여성 아이돌이라는 개념은 거의 사라졌다. 2001년 데뷔한 마츠우라 아야는 히로스에 료코의 계보를 잇는 마지막 솔로 여성 아이돌로 평가받는다. 노래 실력도 있고 외모도 출중하며 연예 감각도 뛰어나서 각종 오락 방송과 CM을 독차지하면서 소위 '국민 여동생'의 지위에 올랐다. 음악성도 있고 스타성도 뛰어난 정통파 여성 아이돌이 차지하던 시장은 하마사키 아유미, 오오츠카 아이, 코다 쿠미 등 솔로 여성 아티스트가 차지하였다. 이로서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경계선이 더욱 명확해졌다고 볼 수도 있다.
정통파 여성 아이돌이 사라진 자리를 모닝구 무스메와 같은 헬로! 프로젝트 아이돌이 메웠다. 모닝구 무스메는 친근한 이미지와 방송에서 거침없이 망가지는 모습 등을 통해 기존의 아이돌 팬층 뿐만 아니라 같은 여성들에게도 인기를 얻으며 국민 아이돌의 자리에 우뚝 선다. 모닝구 무스메의 대성공 이후 여성 아이돌에게는 가수로서의 실력보다 방송인으로서의 센스를 더 많이 요구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한국보다 약 10년 정도 빠르게 내 생애 마지막 오디션 같은 컨셉의 '과거 아이돌 재데뷔 프로그램'이 나왔으나 역시나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이미 아이돌의 개념이 많이 바뀐 상황이기 때문에 예전 암흑기에 스러져간 유망주들을 발굴해 봤자 방송 트렌드를 따라가기 쉽지 않기 때문.
한편으로 새로운 아이돌 컨셉을 제창하며 등장한 4인조 밴드형 여성 아이돌 그룹 ZONE이 2000년에 메이저 데뷔하며, 밴드라는 여성 아이돌계에 새로운 블루오션 영역을 개척하며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홋카이도의 사무소에서 결성되어 SPEED를 롤모델로 하는 댄스 그룹을 목표로 연습하던 ZONE은, 인디즈 시절에 발표한 밴드 컨셉의 PV제작을 계기로 아예 밴드 아이돌로 노선을 튼다. 그리고 소니뮤직을 통한 메이저 데뷔 이후 이게 제대로 먹혀서 100만 장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올리기도 하는 등 크게 성공했다.
활동 당시 소니뮤직은 밀레니엄에 맞춘 아이돌 그룹이라며 밴돌(밴드 + 아이돌)이라는 컨셉으로 그룹을 소개했었다. 댄스 아이돌로 연습생을 시작했던 탓에 처음에는 악기 포지션만 서로 나누어져있고, 악기를 들고 핸드싱크와 함께 춤을 추는 등, 연주력은 없다시피했으나, 본인들의 노력으로 연주력과 음악성을 점차 강화했고, 무엇보다 안정적인 댄스 퍼포먼스를 내세우는 순수 댄스곡도 이따금씩 발표하는 등 복합적인 컨셉으로 형태를 유지했다. 아이돌이지만, 아티스트적인 요소를 어느정도 갖추고 있었고, 점차 그러한 실력이 두드러졌다는 점에서는 한국의 아이유와 비슷한 포지션으로 생각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에이벡스와 비전팩토리 등에서 시도했던 SweetS, dream, Folder5 등의 댄스 걸 그룹들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또한 모닝구 무스메도 2002년 이후 판매량이 급감하고, 모닝구 무스메 소속사의 장기의 포석이었던 헬로! 프로젝트도 방송을 통한 대중적인 접근보다는 투어, 굿즈 위주의 수익성을 추구하면서 황금기보다는 매상이 떨어지게 된다.
이후 일본 내의 여자 아이돌은 오타쿠 전용 연예인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고 대중적 관심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로 일본 내에서 여성 아이돌이 침체기를 겪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한국 여성 그룹의 침체기와 겹친다.
다만 모닝구 무스메 이후 침체기에 빠진 것인지, 아니면 90년대 이후 계속 침체기가 이어졌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다. 사실 80년대 말부터 2000년대 말까지 계속해서 여성 아이돌 시장은 암흑기였다. 2000년대 초반에 모닝구 무스메가 엄청난 인기를 끌기는 했지만 그 인기는 여성 아이돌이라는 시장 자체의 부흥이 아니라 모무스라는 그룹 하나의 인기에 지나지 않았던 데다가 그 기간도 매우 짧았기 때문.
2007년을 기점으로 Perfume이 7년 무명 끝에 큰 인기를 끌어[47] 50여만 장에 달하는 음반 판매와 무도관 입성을 이루고, 뒤를 이어 모닝구 무스메 이상으로 까이던 AKB48이 연달은 히트, 싱글 20만 매 이상 판매라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여성 아이돌계 탑으로 올라섰다.
이 시기 쟈니스 사무소로 대표되는 남성 아이돌은 90년대의 전성기를 이어서 안정적인 흐름을 이어갔다. 특히 데뷔 이후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던 아라시가 2000년대 중반부터 <Love so sweet> 등의 곡을 히트시키며 대중과 팬덤을 모두 잡았으며, 이후 2018년까지 10년 연속 선배들의 뒤를 이은 국민 아이돌로서 멈추지 않는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다.
새롭게 데뷔한 KAT-TUN이 팬덤의 지지에 힘입어 100만 장이나 되는 판매고를 올리는 등의 성과를 올렸고, 이를 통해 쟈니스는 여성 아이돌에 비해 매우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에 맞서 라이징 프로덕션에서는 윈즈, 다 펌프, 리드 등의 남성 아이돌을 데뷔시켰지만 쟈니스의 독점 등으로 인해 활동에 제약을 받으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성우 업계에서는 이 시기에 미즈키 나나, 타무라 유카리, 호리에 유이 3명이 애니메이션 음악 쪽에서 크게 활약하면서 성우 아이돌 고산케로 불렸으며 현재도 높은 인기를 가진 채로 성우 가수로서 활동 중이다.
5.6. 2010년대[편집]
일본 여성 아이돌계는 2010년대 중반까지 '아이돌 전국시대'라는 말이 미디어에서 통용될 정도의 호황을 이루었다. 이는 2010년 폭발한 AKB48 붐에 따라 여성 아이돌 시장 자체가 커진 덕분이었다. 모모이로 클로버 Z 등 스타더스트 소속 그룹은 콘서트 위주의 활동으로 막강한 동원력을 자랑하고 있고, E-girls 등 LDH 소속 그룹은 EDM 위주의 음악과 퍼포먼스성을 내세운 무대로 주로 1~20대 여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아뮤즈 소속 Perfume과 BABYMETAL은 각각 특유의 음악성으로 롱런하였다. 또한 이 시기 여성 아이돌 업계는 지하 아이돌과 로컬 아이돌이 대두된 것도 특징이다.
아무리 멀리 잡아도 2018년에 걸그룹 전국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에이벡스, 소니 뮤직 등 대형 기획사에서 제작한 그룹들과 중견급 그룹들이 줄줄이 해체하였고, 2016년 BiSH 이후로 이렇다 할 신인 그룹도 없다. 히나타자카46, =LOVE, BEYOOOOONDS 등은 기존 4846/하로프로 팬층이 수평이동했을 뿐 대중적으로 히트한 곡은 한 곡도 없다. 이미 일본 음악 시장에서 걸그룹은 대중과 유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라이징 프로덕션의 여성 아이돌은 AKB처럼 극장공연 위주의 하라주쿠 에키마에 파티즈 그룹들이 데뷔 직후 반짝 주목을 받았지만[48] , 이후 큰 성과는 없다. 크게 성공적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에이벡스의 iDOL Street도 활동중이다. 또한, 2010년대 들어 덴파구미.inc, BiSH, Little Glee Monster 등 48, 46, 스타더스트, LDH, 아뮤즈, 하로프로 같은 기존 여성 아이돌 주요 사무소 이외의 신인이 두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남성 아이돌은 여전히 쟈니스의 독주가 이어지고 있다. 아라시가 국민 그룹으로 활동하는 한편 후배 그룹들도 비록 아라시와 같은 대중적 인기를 얻은 그룹은 아직 없지만 쟈니스라는 기반이 워낙 탄탄하다 보니 별 문제 없이 활동을 하고 있다. SMAP의 해체와 TOKIO, NEWS의 잇따른 미성년자 음행 사건과 더불어 기대주였던 KAT-TUN이 멤버 탈퇴 등의 내홍을 겪으며 부진했지만, Kis-My-Ft2, King & Prince 등 2010년대 이후 새로 데뷔한 쟈니스 아이돌들이 인기를 끌었다. 아이돌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많지만 KinKi Kids, V6, 칸쟈니∞ 등 데뷔 15년이상 지난 쟈니스 그룹들도 201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인기가 많다.
LDH의 EXILE 계열 그룹은 원래는 아이돌이 아니었지만, 젊은 멤버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아이돌성이 강화되고 있다. 한편 라이징 프로덕션 남성 아이돌은 활동이 많이 줄어들었는데, 2018년 뜬금없이 데뷔한지 20년 이상 지난 DA PUMP가 터졌다. 스타더스트 프로모션에서 이 시기 남성 아이돌 그룹을 여럿 데뷔시켰지만 뚜렷한 성과는 내지 못했다.
2010년대 일본 아이돌 시장은 한국 아이돌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201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의 2세대 아이돌 그룹들이 일본에서 큰 활약을 했다. 2010년 소녀시대, 카라가 큰 성공을 거둔 이후 K-POP에 관심이 있는 일본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져서 '한류'의 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과거 2012년은 한일관계가 냉각되면서 한류 붐은 냉각기에 들어갔었지만 한류의 고정 팬 층과 대한민국 아이돌이 지속적인 일본 진출로 인해 고정적으로 시장을 확보하는 것에 성공하면서 2010년대 중반부터 대한민국 아이돌의 인기가 높아졌다. 라이트팬 성향이 명확한 일본 한류팬 특성상 상당수 그룹들이 괜찮은 티켓파워를 기록했고 (특정 그룹을 좋아하기보다는 K-POP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오히려 TV가 아닌 라인뮤직, 유튜브 등 매개체 위주로 TV 프로모션의 영향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기에 외교적인 문제로 인한 영향도 줄어들고 있는 편이다. 대한민국에서 히트한 K-POP 노래는 10대 ~ 20대 일본 젊은 연령층 사이에서도 전파가 빠른 편이다. 2018년 라인뮤직, 착신음 등의 차트에서 모모랜드의 뿜뿜이 그해 연간차트 상위권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5.7. 2020년대[편집]
200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일본 아이돌 팬들의 한국 아이돌 팬덤으로의 유입은 2010년대 들어서 더 가속화되었다. 한일관계 악화 이슈로 인해 잠깐 주춤한 적은 있어도 전체적인 흐름은 변함없었다. 그렇게 일본 아이돌 수요층이 대거 한국 아이돌 팬덤으로 유입되고, 방탄소년단과 BLACKPINK 같은 한류 그룹이 전세계를 석권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일본 아이돌계는 한류를 모방하거나 아예 인재들이 한국으로 가서 데뷔하는 사례가 매우 많아졌다. (다만 일본에서 방탄소년단은 '아이돌'보다는 '아티스트'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들로 인한 반사작용으로 2020년대 일본 내 대중음악 판도는 싱어송라이터 및 밴드의 강세가 두드러졌으며, 일본 대중들이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도 다른 나라들처럼 CD에서 다운로드로, 그리고 다운로드에서 스트리밍과 유튜브로 변화했다. 대표적으로 요네즈 켄시, YOASOBI, 오피셜 히게단디즘, King Gnu, 아이묭 등이 디지털 스트리밍 차트에서 히트곡을 여럿 발표했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돌 그룹들은 코로나19로 인해 아이돌의 주요 밥줄인 공연 및 굿즈 판매를 하지 못하게 되면서 여러가지 큰 차질을 빚고 있다. 이 문제는 아이돌 뿐만이 아니라 공연계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특히 악수회 등의 접촉 상법으로 수익을 내던 아이돌 쪽이 타격이 더 크다.
여성 아이돌을 대표했던 AKB48 그룹은 야마구치 마호 자택 습격 사건[49] 의 여파로 가뜩이나 떨어져가던 인기와 대중적 호감도가 폭락했으며, 결국 2020년 홍백가합전에 낙선하고 그 자리를 NiziU에게 넘겨주기에 이르렀다. 각종 스캔들과 기존의 접촉상술의 차단 등으로 생존을 위해 자매그룹들의 각자도생을 나서기 시작했지만 폭락하는 음반판매량을 잡을 수는 없었다[50] 공식 라이벌로 불렸던 사카미치 시리즈 역시 AKB48의 위치를 그대로 대체할 듯 했던 기세와는 달리 음반판매량은 정체를 겪고 있으며 대중성을 나타내는 음원 성적과 유튜브 조회수에서는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51] 음악시장의 트렌드 변화, 코로나19로 인한 접촉상법의 붕괴, 끊임없는 사건사고로 누적된 좋지 못한 이미지 등이 부정적인 시너지를 낳고 있는 상황[52] .
남성 아이돌 업계를 대표하는 쟈니스 사무소는 스맙, 아라시, V6 등 원로 인기 그룹들이 해체하거나 활동을 중단하고 SixTONES, Snow Man 등 신인 그룹들이 대거 데뷔하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쟈니스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유튜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영어 가사 곡을 발표하는 등 해외시장을 노리고 있다. SixTONES의 1집 앨범은 아예 홍보 문구가 "기다려라, 세계."였다. 다만 수십년간 이어져온 갈라파고스화의 여파로 해외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낸 그룹은 없다. 게다가 쟈니 키타가와가 후계자로 지목했던 타키자와 히데아키가 부사장으로 취임한지 3년만에 퇴직금도 거절하고 퇴사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바로 이듬해인 2023년 쟈니 키타가와의 주니어 성착취 폭로가 터져나왔다.[53] 침묵하는 일본 언론과 달리 BBC등 해외 메이저 언론사들이 이를 기사화하면서 향후 쟈니즈의 해외시장 진출은 매우 어려워진 상태.
한편 한류 아이돌은 방탄소년단, TWICE, BLACKPINK가 여전히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방탄소년단의 노래 Dynamite가 일본 디지털 음원 분야 기록을 경신하며 일본 대중음악계에서의 입지를 굳혔다. 한편 JYP엔터테인먼트와 소니 뮤직 재팬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그룹 NiziU가 2020년 12월 데뷔하여 이미 오디션 방송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데뷔곡 "메이크 유 해피"가 디지털 음원 시장에서 히트하며 홍백가합전에도 출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K-POP을 토대로 하는 PRODUCE 101 JAPAN 출신 JO1도 데뷔했다. 프로듀스 조작 사태 이후 오랜만에 다시 재개된 엠넷 오디션인 보이즈플래닛에도 일본 출신 연습생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진행된 프듀 재팬 걸즈에서도 여러 연습생이 참여하였다.
48사단과 쟈니스의 독점은 사실상 붕괴되었으며 KPOP 아이돌들과, 한국 기획사와 공식 업무제휴 협약을 맺은 일본 기획사들과, 그 외에 KPOP을 벤치마킹하며 자체적으로 트레이닝 시스템을 도입하며 노력하고 있는 일본 기획사들 간의 대규모 경쟁이 벌어질 전망이다. 어떻게 보면 이른바 "일본 아이돌"들이 완성도 높은 아이돌로 변하는 좋은 변화이기도 하지만, 기존에 있던 소속사들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수많은 기존 그룹이 해체되고, 선배들의 도움 없이 신인들이 홀로서야 할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살아남는 회사와 아이돌이 2030년대까지 진짜 꾸준하게 활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독점의 붕괴로 신세대 아이돌들의 약진도 눈에 띈다. 사시하라 리노 프로듀스의 =LOVE를 비롯한 요요기 애니메이션 학원 소속의 아이돌들이나, 틱톡 등의 SNS로 곡과 그룹 인지도가 크게 상승한 초 도키메키 센덴부와 같은 아이돌은 물론, 전 AKB사단 멤버들을 대거 영입하여 중독성 있는 멜로디로 성공한 아소비시스템 소속 FRUITS ZIPPER나 Candy Tune, 여성 코어 팬층을 가지고 최신 트렌드를 정확히 해석하여 유튜브 구독자 20만이라는 쾌거를 이루어낸 iLiFE!와 그 인기를 기반으로 거대한 브랜드를 만드는 데 성공한 HEROINES 등, 이른바 "지하 아이돌" 의 약진도 눈에 띈다.
그렇게 K-pop 아이돌 등 다른 소속사 가수들의 활동이 늘어나고 있지만, 쟈니스는 소속사의 가수들이 (음악방송 이외의) 방송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고정적으로 출연하고 있기 때문에, 전 세대를 아우를만한 대중성이 높은 편인데 비해, K-POP 가수들은 (일본 기성세대들을 흡수할만한)대중성 측면에 있어서 쟈니스 소속 연예인들보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황이다. 그 때문에 2023년 홍백가합전은 1부 - 29.0%, 2부 - 31.9%를 기록하면서 자체 최저 시청률을 기록했는데, 시청률 파이가 점점 줄어드는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 쟈니스 가수들이 모두 사라진 여파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다른 소속사나 K-POP 가수들이 한동안 쟈니스를 대체하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6. 대한민국 관련[편집]
해당 문단에서는 일본 아이돌 음악이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졌던 인기와 대한민국 아이돌에 미친 영향럭을 서술하였다. 설명을 돕기 위해 아이돌의 정의를 조금 더 폭넓게 사용하였고, 또 정치와 대중문화의 전반적인 흐름도 함께 서술하였다.
참고문헌: 《Jpop 연대기, 김상환, 음악세계》를 뼈대로 여러가지 당대 신문기사들을 종합하여 서술되었다.
K-POP이 제로베이스 상태에서 어느 순간 한국에 탄생해 독자적으로만 발전한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경제적 발전이 늦었던 점, 그리고 군부독재 시기를 거치며 대중음악이 억압되어왔던 점에서 90년대 이후 세련된 외산 음악을 찾는 소비자가 폭발했던 것이 사실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외산 음악이 한국 음악과 한국 아이돌의 발전 단계에서 큰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일부 일본인들의 '단순히 영향을 받았으니 아류'라는 식의 주장은 억지다. 이런 논리대로 라면 J-POP 산업의 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쟈니스의 창립자 쟈니 키타가와부터 미국 문화에 매우 깊은 영향을 받은 인물이니 J-POP도 영미권 음악의 아류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일본 음악계 내에서도 공식 석상에서 저런 주장을 하는 인물들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것. 대표적인 케이스가 "K-POP의 뿌리는 일본 아이돌" "쟈니 키타가와의 유산이 다른 나라에 뿌리내린 것"이라고 주장해서 논란을 일으킨 마츠모토 준이다기사[54] 한국과 일본은 대중음악에 영향을 준 영미음악 트렌드가 확연히 차이[55] 가 나는데다가 한국엔 AFKN, 미군기지, 재미교포, 교회[56] 등을 통해 영미음악을 접할 독자적 통로가 많았기 때문에 진지하게 한국대중음악사를 기술하려 할 때 일본 음악의 아류로 기술하려고 접근하면 무조건 실패할 수밖에 없다.
과거나 현재나 세계 대중음악의 선두주자는 언제나 영미권 팝이었다. J-POP이나 K-POP이나 따지고 보면 영미권 팝을 동양화, 일본화, 한국화하여 그것을 토대로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57] 쟁점은 먼저 발전한 일본 음악이 한국 음악 발전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냐인데, 이 부분이 애매하다. 음악 산업은 말그대로 음악과 산업 2가지로 나뉘어진다. 음악, 퍼포먼스적인 발전과 산업, 상업적인 발전을 분리해서 볼 수 있다. 전자는 일본이 밴드음악에 치중한 반면 한국은 흑인 음악의 영향이 큰 관계로 결이 확연히 다르다. 반면 후자에서는 상대적으로 일본식 사업 모델의 영향을 받은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58][59] 물론 모든 영미권 음악적 요소나[60] 혹은 일본 기획사들의 모든 사업 모델이 한국에 먹힌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부분적 영향 관계는 적어도 2000년대 중반까지는 유효했으나 계속해서 쌓인 성공과 실패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만의 사회 문화에 맞춰 발전시킨 결과, 2020년대 현재에는 양쪽 모두 독창성과 완전성을 이루어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61][62]
아래 서술의 경우, 일본 아이돌이라는 렌즈를 통해 한국 아이돌을 들여다보며 기술하다보니 영미권의 영향은 생략되었고, Jpop의 영향관계는 과대평가 되는 측면이 있는 점을 유의하자.
좀 더 중립적인 영향사는 강준만의《한류의 역사 (김 시스터즈에서 BTS까지)》같은 책이나 Kpop Evolution[63] (링크) 같은 다큐를 참고하면 좋다.
참고로 K-POP의 독자적인 발전 위주로 서술한 기사도 있다. K-POP이 J-POP의 아류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쓰여진 기사다. 링크
6.1. 1970/80년대 초반: 태동기[편집]
일본 대중음악이 대한민국 제도권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부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정책이 실시된 1990년대 후반부터다. 하지만 음성적으로는 청계천 빽판 시장등을 통해 유통된 일부 음악들이 다운타운가에서는[64] 이르면 70년대부터는 매니아층을 형성하며 일부 소비자들에게서 지속적인 관심을 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더욱 세련된 멜로디를 찾는 청년층과 일제강점기 때 들었던 멜로디를 찾는 일부 장년층 사이에서 매니아적 인기를 끌기 시작했는데, 80년대초에 들어서면 일본 대중문화에 물드는 현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기사들도 쉽게 찾을 수 있다. #
이러한 현상은 쓰시마 섬을 통해 넘어오는 일본 tv와 라디오 전파가 잡히는 경상남도 해안 인근 지역에서 특히 발달했는데, 일반인들도 한국 tv가 방영되지 않는 시간에 그 대체재로 일본 tv를 시청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쉽게 접촉하며 자연스럽게 일본 대중음악의 인지도도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이때 부산은 일본 대중문화와 한국을 이어주는 일종의 창구 역할을 하였는데, 70년대에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던 이시다 아유미의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역시 처음 유행한 곳은 부산과 인근 경상남도 지방이였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불법 복제판 시장에서 유통되는 물건의 거의 50%가 일본의 것이며 대부분 부산 부근에서 녹화된 것의 복사본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 80년대 중반에는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명목으로 정부에서 직접 일본 방송과 동일한 주파수 송신, 위성방송 수신이 가능한 안테나 국내반입 억제, 방송 시간 연장, 방송 출력 증가, 방송망 확장, 고성능 안테나 자진 철거 홍보등 일본 전파월경에 다각적으로 대응하였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
이 시기 비록 음성적이지만 매니아들 사이의 인기를 넘어서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던 노래들 중에는 아이돌 음악도 소수 포함되어있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미국 진출까지 했던 핑크 레이디와 일본 음악 팬들 사이에서 '긴기라기니'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콘도 마사히코의 '화려하지만 자연스럽게(ギンギラギンにさりげなく)'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80년대 중반까지는 그 인기가 일본 아이돌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일류(日流)의 영향으로 홍콩 등 타아시아 국가나 미국에서 인기를 끌던 곡 몇 개가 어쩌다 한국에 재수입되어서 생긴 단발성 인기인 측면이 강했다.
6.2. 1980년대 후반: 상승기[편집]
일본 아이돌 문화가 본격적으로 한국의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8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다. 일본에서 도입된 레이저디스크가 한국으로 넘어오며 단순히 음악만 듣는 것이 아닌 영상 형태로 볼 수 있게되어 아이돌 공연이 제공하는 시각적 즐거움이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거기에 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문화 산업이 전반적으로 전보다 국제화되며 80년대 후반부터는 아예 한국에 진출까지 했던 소녀대를 필두로 한국 10/20대 사이에서 차츰차츰 알려지게 된다. # 물론 아직 반일 감정이 살아있는 한국에서 이러한 일본 대중음악의 '침투'에 대한 사회적 저항도 있었다. #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본국에서 80년대 초중반에 전성기를 누렸던 마츠다 세이코도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진건 이미 전성기가 지난 80년대 후반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지만 이처럼 당시 한국에서의 일본 가수/아이돌 인지도는 본토에서의 인기도와 일치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일본 음악은 한국 음악시장의 소비자들 뿐만아니라 생산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한국 댄스 음악은 60-70년대 박정희 정부의 퇴폐풍조 퇴치라는 미명 하에 극도로 폐쇄적인 환경에서 억압되며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나마 전두환 정부의 3S정책 덕분에 어느정도 숨통이 틔인 80년대 한국 댄스 음악 시장에는 음악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보고 배울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때 문화적 이질성이 강한 영미권 팝 트렌드보다도 일본 대중음악은 한국의 음악가들과 특히 음악 관련 사업가들에게 좋은 참고서가 되었다. 컨셉을 밴치마킹했다는 거지 표절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이 시기 본토에서 인기 있던 곡들의 표절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했다.
6.3. 1990년대 초반: 전성기[편집]
90년대에 일본 대중음악의 완성도는 마침내 전성기를 맞는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노태우 정부의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문화의 밀수가 쉬워진 것 그리고 파라볼라 위성 안테나의 보급(정확히 말하자면 국내수입의 자유화)으로 접근성이 낮아진 것이 톱니바퀴처럼 맞몰리며 "일본 문화 홍수" "왜색 비상"과 같은 말이 신문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일본 문화의 전파가 빠르게 전개되었다.
과거 부산 정도를 제외하면 부유층과 매니아층에 국한되었던 인기가 파라볼라 안테나를 통해 전국에서 일본 위성 방송 시청이 가능해지며 안방에서 일본 tv를 시청하는게 가능해졌고, 영미권 팝을 듣는 곳이었던 '영상 음악 감상실'에서 일본 음악 방송이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대중음악은 청소년/청년층 사이에서 말그대로 폭넓게 보편화 되어 '유행' '열풍'등의 단어도 헤드라인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기사에 따르면 당시 서울 시민의 무려 37.4%가 '질 적으로 우수한' 일본 위성 방송을 시청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물론 이러한 '저질'적인 일본 문화의 인기를 경계하는 시선 역시 여전히 존재하였다. # [65]
본국에서도 전성기를 맞은 일본 대중음악, 그 중에서도 특히 락밴드와 댄스 팝(좁은 의미로 보자면 이때 일본 댄스팝은 아이돌 음악과는 색이 조금 다르다. 90년대 초반 정통적인 아이돌은 일본에서 거의 빙하기 수준으로 인기를 잃는다)의 경우 일각에서는 그동안 세계 대중음악의 선두주자였던 영미권의 수준에 마침내 도달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에 반면 아직 비교적 촌스러웠던 한국 댄스 음악을 대신해 더 세련된 음악을 찾는 일부 소비자들 사이에서 90년대 중반에는 아무로 나미에, 우타다 히카루, SPEED등 일본 가수와 아이돌들이 소규모 팬클럽까지 형성될 정도로 인기를 얻는다. # 특히 비주얼계 락밴드 X JAPAN의 경우 동시기 영미권에서 쇠락하던 헤비메탈을 원하던 소비자들에게 대체재로 소비되며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도 했는데, 이는 그 동안 청소년/청년 세대와 부산 지역을 제해하면 마이너한 수준에 머물러있던 일본 대중음악 전반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기와는 별개로 여전히 소비자들은 대부분 용산 전자상가나 세운상가등을 통해 유통된 해적판으로 우회하여 들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일본 대중음악 밀수의 난이도가 대폭 내려가 전파 속도 자체는 때로는 몇달씩이나 걸렸던 70, 80년대에 비해 비약적으로 빨라졌으나 가장 큰 장벽은 가격이었다. 아직 중소규모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에 비해 미국 바로 다음의 경제대국이었던 일본, 게다가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의 여파로 인한 당시 한일간 경제 격차덕에 물가 차이가 상당했고, 때문에 앨범 한장 가격이 정가로 계산해도 몇 배였는데 거기에 밀수 프리미엄까지 붙으니... 이러한 문제 때문에 이 시기 밀수되어 유통되었던 정식 앨범들은 대부분 일본 본토 발매판이 아닌 일류(日流)의 영향으로 일본 대중음악이 인기가 많았던 대만등 경제 격차가 크지 않은 타아시아 국가에서 현지 라이선스로 발매된 로컬 정발본이 들어왔다.
6.4. 1990년대 후반: 대망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편집]
90년대 후반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정책으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비롯한 일제 잔재 청산이 시작되고 독도 영유권 분쟁등 일련의 사건들로 한일 갈등이 고조되며 국민적으로 반일 정서가 고취된다. 이로인해 후일 일본 대중문화 개방 반대 의견이 힘을 얻는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일본 대중문화 개방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이유가 단순히 반일감정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아직 발전 단계에 있었던 한국 대중문화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이미 완성된 '선진' 일본 대중문화에 잠식당해 종속될 것이라는 우려도 컸다. 이러한 인식이 여전히 지배적인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을 밀어붙인다.
하지만 개방 이후 그러한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중음악계에서의 파장은 크지 않았다. 잠식당하기는 커녕 오히려 한국 대중음악에서 일색(日色)이 점차 옅어지는 효과를 가져왔다. 사실 개방 직전 한국에서는 단순한 밴치마킹 수준을 넘어서 한국 음악가들의 일본 음악 표절이 극에 달할 정도 였으나 일본 음악이 제도적으로 양성화되며 많이 사라졌다. 대표적인 예로 대부분의 수록곡들이 표절로 판명난 룰라의 3집 <천상유애>와 나가부치 츠요시의 대표곡 '톤보(とんぼ)'를 표절한 홍수철의 '보고싶다 친구야'가 있다. 추가적으로는 표절/공식 판정, 빽판등 문서 참조.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내 대중음악계에서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올 정도였는데, 다음은 1998년 일본 대중음악 개방 직전 표절을 자제해야한다는 내용의 기사이다. #
반대로 이 개방정책은 오히려 일본에 한국 대중문화와 가수들을 소개하는 계기가 되어 보아, 배용준 등 초기 한류의 발판이 되었다. 그동안 한국인들은 일본 대중음악을 음성적으로 들어볼 사람은 다 들어봤다 할 정도로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던 반면 일본인들은 본 정책을 통해 '전혀 새로운' 한국 문화를 접하며 발생한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조 아래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변덕스러운 한일 관계에 따라 경색과 재개를 반복하며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져 매듭지어진다.
사실 대중문화 개방 전에도 90년대 후반에 이르면 제도권에 진입을 못할 뿐이지 일본 대중음악 팬층은 이미 자체적으로 일정수준 양성화되어 양적, 질적으로 모두 발전되어있는 상태였다. 전자통신기술의 발전으로 PC통신이 활성화되며 수많은 관련 동호회들이 개설되어 반일감정에 눈치보지 않아도 되는 '팬들만의 공간'이 탄생했고, 또 이 사이버공간을 통해 일본 음악 관련 정보들이 과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국내에서 전파되었다.
초기 한국 아이돌들의 일본 아이돌 밴치마킹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일으킨 대중음악적 혁명 이후 계속되는 발전과 넓어지는 다양성, 또 한국 음악시장 자체가 커지며 점차 줄어들지만 적어도 90년대 중후반의 H.O.T., 핑클 등 한국 1세대 아이돌까지는 동시대 일본 가수들과 패션 스타일, 음악적/방송적 콘셉트 등에서 여러가지 유사성을 보인다.
한국 아이돌은 90년대 초반부터 있었으나 상업적으로 일반 가수들과 비교되는 독자적인 특징들을 갖게 되는 것은 90년대 후반의 H.O.T.를 비롯한 1세대 아이돌부터이다. 당시 한국 아이돌의 선구자였던 SM엔터테인먼트와 일종의 패스트팔로워였던 DSP 미디어가 산업적으로 아이돌의 스타일과 컨셉, 그룹을 운영하는 방식, 또 그들을 젊은 소비자들에게 효과적으로 판매하는 사업 모델을 90년대 중반 이후로 선보였기 때문인데, 양쪽의 이수만 사장과 이호연 대표 모두 7080년대 인물로 일본 아이돌 업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당시 일본 아이돌 업계로부터 밴치마킹하여 구축한 여러가지 시스템은 한국에서 지금까지 유용하게 잘 쓰이고있다. 예를 들어 현재 굿즈라고 흔히 불리는 아이돌 관련 파생상품들도 당시 일본 기획사들의 마케팅 수법을 밴치마킹하여 탄생한 것이다. # 이외에도 대한민국 아이돌 기획사들은 일본의 거대 아이돌 기획사 쟈니스 사무소의 아이돌 운영 방식을 많은 부분 참조하였는데,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그러나 한일의 아이돌 음악은 산업적 영향관계와는 별개로 90년대를 기점으로 근본적인 차이가 생긴다. 흔히 한국 아이돌의 효시, 시초를 꼽아보라고 하면 모두가 서태지와 아이들을 꼽는다. 서태지의 음악은 명백하게 일본 음악보다 영미권 팝, 락, R&B를 토대로 하였다.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영미권 음악을 성공적으로 한국화하자 젊은 팬들은 거기에 열광했고,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그대로 90년대 후반 1세대 아이돌의 팬덤이 되면서, 1세대 아이돌의 음악 자체는 자연스럽게 일본 음악보다 영미권 음악을 밴치마킹하게 된다. 사실 무엇보다 90년대에 이미 정통적인 의미의 아이돌은 그 장르 자체가 일본에서 인기를 잃었기 때문에 80년대와 비교해 그 음악적 수준이 크게 진보하지 못했다. 즉, 더 이상 한국 아이돌 업계가 일본으로부터 음악적으로 뭔가 배우거나 밴치마킹할 요소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K-pop과 한류의 성공 이후로 최근 한류와 한국 아이돌의 성립을 학술적인 차원에서 깊이 탐구하고 연구하는 책과 다큐가 나오고 있으나 일본 아이돌로부터의 영향은 크게 평가되지 않는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기점으로 한국에서 아이돌 음악이라는 장르가 새롭게 재편되었기 때문에 현재 한국 아이돌은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80년대 아이돌들과 직접적인 연관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6.5. 2000년대 이후: 아웃 오브 안중[편집]
2000년대 이후에는 일본의 웰메이드 대중음악 시장이 락밴드 위주로 흘러가며 90년대부터 점차 침체기에 접어들던 아이돌 음악은 본격적으로 시장에서 도태되기 시작한다. 위 '3. 여자 아이돌 특징 - 3.1. 유사연애와 종속성' 문단에서 소개된 이유로 인해 우상이 될 수 있는 정통 아이돌이 몰락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모닝구무스메, 좀 더 이후에는 AKB48으로 대표되는 '성장형 아이돌'이라는 친오타쿠적인 컨셉으로 열화되며 채워진다.
남자 아이돌도 역시 쟈니스 사무소의 독점 정책으로 인해 다수의 중소규모 아이돌 기획사가 몰락하며 경쟁이 약화된다. 또, 일본 경제의 버블 붕괴로 방송사의 사정이 나빠져 음악 프로그램이 줄줄이 종영된 이후, 소속 아이돌을 그 대체재로 예능에 내보냈는데, 기획사는 아이돌이 예능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통해서도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이로 인해 경영진이 투자비용이 높은 음악과 퍼포먼스보다는 저예산으로도 가능한 예능 활동으로 친근감을 보여주는데에 주력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하다 보니 남자 아이돌도 여자 아이돌과 함께 열화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 동시기 한국 아이돌 산업은 보아를 시작으로 동방신기, 빅뱅, 샤이니,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 연습생간의 철저한 적자생존 시스템을 갖춰 '완성형 아이돌'을 표방, 발전하며 일본 아이돌과 완전히 분화된다. 이는 일본 아이돌과는 거리가 아주 먼 양현석의 YG엔터테인먼트와 박진영의 JYP엔터테인먼트 등이 2000년대 중후반에 SM엔터테인먼트 못지 않은 거대 기획사로 자리잡은 영향도 있다.
과거와는 반대로 일본 아이돌 시장이 한국 아이돌 추세에 크고 작게 영향을 받는 편이며 아이돌을 꿈꾸는 일본인 지망생 중 자신이 원하는 노선에 따라 오히려 한국 기획사로 넘어와 연습생 생활을 하며 데뷔를 하는 추세다. 대표적인 예로는 JYP엔터테인먼트의 걸그룹 TWICE 출신 일본인 세 명이 있다.(사나, 미나, 모모)
이러한 아이돌 완성도의 질적 역전 때문에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인터넷의 발달로 일본 아이돌에 대한 접근성이 과거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좋아졌음에도 현재 대한민국에 일본 아이돌 팬은 극소수며 그들의 음악을 찾는 소비자도 거의 없다.
2018년에 엠넷과 아키모토 야스시의 합작으로 방영된 프로듀스 48의 영향으로 AKB48이 한국 대중 사이에서 잠시 인지도를 얻기는 했지만, 해당 프로그램이나 이를 통해 데뷔한 프로젝트 걸그룹 IZ*ONE의 활동이 일본 아이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48그룹 소속 일본인 멤버들은 다른 걸그룹 내 해외파 멤버들처럼 '그룹 내 외국인 멤버'로만 취급되었다. 오히려 국내 팬덤은 아이즈원과 48그룹을 연관짓는데 부정적이었다. 데뷔멤버 조작이라는 대형사고에 연루되어 사회면을 오르내릴 때, 팬들이 48그룹의 일본 예능 출연분을 자극적으로 발췌해 '아이즈원이 해체되면 일본에서 다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며 해체반대 명분으로 써먹었을 뿐.
7. 목록[편집]
자세한 내용은 일본 아이돌/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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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치 이게 나라냐 드립이 한국이 나라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건 아닌 것과 같다.[2] 일례로 그룹 해체 이후 배우 활동에 전념하던 수지가 신곡을 발표했을 때 언론에서는 이를 본업으로 컴백이라고 표현했다. 연기 활동을 하다가 비슷한 시기 신곡을 발표한 김우석 역시 언론에서 본업 컴백이라는 문구로 소개되었다.[3] 한국식 표현을 빌자면 '뽕끼 있는 비음창법'이다.이런 '일본식 여자 아이돌 창법'의 최정점으로 평가받는 보컬이 마츠우라 아야와 후지모토 미키다. 후지모토는 실제로 그룹 졸업 후 엔카로 전향했다.[4] 물론 그 많은 80년대 아이돌 모두가 실력이 좋은 건 아니다. 얼굴은 괜찮지만 가창력이 애매한 아이돌 가수들은 80년대에도 꽤 많이 있었고, 70년대에도 적잖게 존재하고 있었다. 허나 당시에는 아이돌도 엄연히 가수였고, 가창력이 부족한 가수는 '가수'로서의 경우로 비판받았고 롱런도 어려워했다.[5] 대면 애교, 그라비아등 쉽게말해서 아이돌 오타쿠들에게 소구할 수 있는 팬서비스.[6] 아이돌은 '아직 서투르지만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세일즈 포인트다. 때문에 실력이 별로라도 다른 방송인들이 웃으면서 귀여워해준다. 그런데 만약 아이돌 졸업하고 솔로로 활동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부족한 실력과 실수에 대해 가차없는 평가와 비판이 가해진다.[7] 이 때문에 대중적으로는 '예능 담당'으로 알려진 멤버더라도 실제 그룹 내에서는 퍼포먼스적으로 중요한 포지션을 맡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카라의 소녀가장으로 불렸던 한승연은 곡의 중심을 잡아주는 리드보컬이었고, 러블리즈의 이미주는 안무의 핵심인 메인댄서다. 정확하게는 무대에서 한 사람 몫을 해 내지 못하면 아무리 입담이 좋거나 외모가 예쁘다 한들 애초에 데뷔조차 못한다.[8] 정확하게는 '완벽하진 않지만 노력하는 모습'.[9] 그래서 같은 일본인이라도 일본 내에서만 활동하는 멤버들과 K-POP의 영향을 받고 한국으로 건너 와 한국 아이돌로 활동하는 멤버들을 비교했을 때, 뮤지션으로서의 능력치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아이돌들이 월등히 뛰어난 편이다. 한일 양국이 추구하는 아이돌로서 나아갈 방향성의 차이도 있겠지만, 고된 훈련으로 프로페셔널함을 갖춘 한국 아이돌들이 아이돌로서, 더 나아가 아티스트로서 리스너들에게 어필하는 영향력은 그 차원이 다르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HKT48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서 재데뷔한 미야와키 사쿠라의 AKB 시절 무대와 한국에서 재데뷔한 후의 무대를 비교한 영상을 감상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10] 예를 들어 5ch등 일본 아이돌 관련 커뮤니티만 봐도 놀랄만큼 아이돌들에 대한 훈계조 글들이 많은 걸 볼 수 있고, 악수회에서도 묘하게 아이돌에게 고압적인 오타를 찾는게 어렵지 않다.[11] 상술된 사시하라 리노가 대표적. '허접함'을 '친근함'으로 전이시키는 캐릭터성과 예능감을 바탕으로 아이돌 시절 내내 그룹 전체 인기투표 1위를 독식했다.[12] 일례로 한국 아이돌은 소위 '병맛컨셉' 마저도 본인들의 가무 실력이 뛰어나야 대중들이 받아들여준다. 크레용팝, 오렌지 캬라멜이 대표적.[13] 그중에서도 특히 SMAP.[14] 이전부터 자체적인 트레이닝 시스템을 구축하고 아이돌을 제작하는 회사는 일본에도 있었다. 하로프로는 '에그' '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연습생 제도를 운영했고, 아뮤즈는 실용음악 학원인 액터즈 스쿨과 결연을 맺고 트레이닝된 인재를 데려오거나 사쿠라 학원 같은 견습팀을 운영하고 있다.[15] 음악 스타일만 봐도 알겠지만 말랑말랑한 아이돌용 걸팝에 아키모토 야스시가 만든 선정적인 가사를 얹은 오냥코와 미국 팝씬, 특히 R&B의 영향을 받은 스피드를 동일선상에 놓는 건 억지다. 다만, 스피드도 소속사에서 대놓고 아이돌로 홍보하지는 않았지만 보통 일본에서 대중적으로는 아이돌로 분류된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데뷔 당시 멤버가 초등학생 2명(5학년, 6학년), 중학생 2명(중1, 중2)이라 진짜 일본의 아티스트라고 불릴 정도 실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16] 데뷔곡은 20만장이 팔렸지만, 해체 직전 싱글은 십만장도 채 안 팔렸고 마지막 콘서트도 3만명 규모인 요요기에서 단발성 공연이었다.[17] 2명은 싱글 활동도 못하고 있는 와중에 하이터치회 셔틀 취급이냐며 논란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18] 이들은 쟈니스 주니어다.[19] 일례로 SUPER☆GiRLS는 각종 접촉 이벤트를 통해 싱글을 10만장 가까이 팔기도 했으나, 각종 이벤트와 티켓 떨이판매를 동원했음에도 무도관의 절반정도밖에 채우지 못했다.[20] 예를 들어 관서지방은 홀 규모 공연장이 모두 매진인데 관동지방은 제프도 어렵다면 그 가수의 인기는 관서지역 한정이라고 볼 수 있다.[21] 정확히 말하면 AKB도 개별악수회의 경우, 지정부수를 완판시키는 인기멤버들은 인터넷 추첨이다. 다만, 추첨에 떨어지면 예약이 취소되므로 돈을 많이 쓰고도 악수회를 못가는 경우는 없다. 전국악수회는 음반을 사면 무조건 갈 수 있지만, 엄청난 대기시간에 비해 시간이 매우 짧다.[22] 소속사가 사귀거나 사귄적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유명한 한국 아이돌 커플 중 누구도 열애설만으로 소속사 차원에서 공식적인 사과 성명을 발표(SNS 등에서 팬들에게 도의적으로 미안하다고 말한 아이돌은 있다.)하거나 탈퇴 등 불이익을 겪은 아이돌은 없다. 탈퇴당한 경우는 소속사의 공식발표를 다음날 SNS로 뒤엎은 현아와 던뿐이고 그 밖에 탈퇴한 경우는 크레용팝의 소율처럼 결혼, 임신 등으로 아이돌 활동 자체가 어려워진 경우이다.[23] 손해배상 청구당한 일본 아이돌은 메챠하이(정식 명칭은 아오야마세인트 하챠메챠하이스쿨, 오리콘 차트 주간 7위까지 해본적이 있어 완전 무명은 아니다.)의 멤버인 미우라 세나로 소속사에서 연애금지규정 위반을 이유로 소송을 걸었는데, 놀랍게도 2015년 소속사가 승소해서 65만엔의 배상판결을 받아냈다.# 물론 그룹에서도 탈퇴당했다.[24] 인디 밴드로 라이브 등으로 활동하다가 인디즈 앨범을 내고 이게 메이저 음반사 눈에 띄어 계약하고 메이저 앨범으로 데뷔해, 여기서 더 인기를 얻어 스타가 되었다면, 소속 레이블(음반사)은 있어도 소속 기획사는 없거나 본인 기획사이므로 월급제가 아니고, 수익을 계약에 따라 음반사와 %로 분배한다. 일본 인디 밴드 중 이렇게 성장한 경우는 흔하다. 대표적으로 SEKAI NO OWARI 등등. 하지만 일본의 인기 아이돌은 대부분 전부 기획사의 프로듀싱을 받고 유명해졌다.[25] 이것도 엄밀히는 한국처럼 '총 순익'에서 배분하지는 않고 기본급+수익에 따른 일정비율의 성과금을 지급받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는 매년 한해동안 해당 연예인의 매출과 순익을 바탕으로 갱신된다. 쉽게 말해 직장인들처럼 연봉협상을 한다.[26] 기무라 타쿠야는 특이하게도 아이돌 출신임에도 수익분배제로 소득을 지급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미 아이돌이라기보다 배우, 그것도 시청률 30%를 숱하게 찍은 국민배우에 가까운 입장이라 매우 특수한 케이스고, 다른 거의 모든 아이돌은 월급제이다. 심지어 기무라 타쿠야가 속한 최고 인기그룹인 SMAP조차 월급제라고 쿠사나기 츠요시가 직접 밝힌 바 있다. 출처 일본 여성 아이돌들도 최정상급이라도 수익분배제로 알려진 사례는 없다.[27] 대신 일본 기업은 아직까지도 '정년보장'에 대한 인식이 강하다. 때문에 소속 연예인이 큰 사고만 치치 않는다면 인기가 떨어져서 예전만큼 수익을 가져다 주지 못해도 계속 계약을 갱신하며 어느정도 월급을 챙겨준다. 즉 소속 연예인 역시 '직원'으로 대우하는 것. 다만 이렇게라도 챙겨주는 건 어느정도 규모가 되는 메이저 기획사에 한하며, 엄청나게 굴리다가 인기가 떨어지면 가차없이 계약을 해지하는 회사도 많다.[28] 악수회 수당, 콘서트 굿즈 게런티, 방송 및 행사 출연료, 여자 아이돌은 그라비아 촬영 등은 기본급과 별개로 추가수당을 지급받으며 콘서트는 수익 대부분이 가수에게 떨어진다. 즉 음반을 많이 파는 아이돌 멤버보다 공연을 많이 흥행시키는 아이돌 멤버가 더 많은 돈을 버는 구조.[29] 일본에서는 2005년까지 고액납세자명부 공시제도가 있어서 고액납세자들의 세금 납부 내역이 공시되었다. 2006년 이후 이 제도가 폐지되지만, 공시되지만 않을 뿐이지 명부는 여전히 만들어지는데 기자쯤 되면 간단히 입수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해당 기자가 소속된 언론사가 유력 자민당 국회의원을 통해서 해당 자료를 넘겨받는 것이다. 한국도 온갖 비공개 자료들을 보고 싶으면 정보공개청구를 하는데, 정보공개청구로도 안 되는 자료는 대한민국 국회의원한테 부탁하면 국회의원을 통해 간단하게 받아서 볼 수 있다.[30] 참고로, 일본 야구나 축구 등 프로선수들의 연봉도 대중에 공개되지 않는데, 기사에 나오는 연봉은 대부분 이 방식으로 기자들이 추정한 것이다.[31] 특히 7년차를 넘어가는 정상급 아이돌이라면 스포츠계의 FA 자격을 취득한 다년차 선수랑 비슷한 포지션이 된다. 그래서 타 기획사에 이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익분배 조건과 기타 여러가지 계약 조건을 더욱 아이돌에게 유리하게 제시하게 된다.[32] 일례로 48사단 자매그룹 소속인데 본점 활동도 병행하는 인기 멤버들은 월세만 수십만엔인 숙소를 도쿄와 지방 두곳에 모두 잡아주는 경우도 있다. 이때문에 황색언론에서 찌라시로 툭하면 아이돌 멤버들이 사는 집 월세 찌라시가 올라온다.[33] 같은 시각 한국은 여성의 성욕이라는 개념이 조금 더 늦은 2000년대에 와서야 인식되었지만 한국의 아이돌은 애초에 방향성 자체를 유사연애 대상으로 잡지 않았으므로 이것에 대해선 별다른 말은 없었다. 사실 이건 남성의 경우긴 하지만 박준형의 영향이 크다. 남성 평균 결혼 나이 29세이던 2001년에, 30대 총각들 모아놓고 노총각 장가 보내기 TV 프로젝트 하던 시절에, 34세에 아이돌을 하던 그가 눈물로 호소하며 자기 나이에 여자친구가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엄청나게 항변한 후로 한국에서 아이돌에 대한 시선은 많이 바뀌게 된 것이다.[34] 섹시함을 위해 지나치게 연약한 몸매를 만들면 근육량 부족으로 신체기능이 저하되어 건강이 나빠진다.[35] 특히 아~쨩의 천연 캐릭터 컨셉.[36] 이건 사실 단순히 연애 스캔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욕을 먹은 게 아니라 은혁이 상의탈의한 사진 속 상황이 일을 키운 측면이 컸다. 정작 이후 아이유가 장기하와 공식적으로 연애를 시작했을 때는 이런 반발이 거의 없었다.[37] 물론 팬이나 소속사 측은 태도, 거짓말 문제를 구실로 삼지만 결국 그 발단은 연애 문제였으니.[38] 노골적으로 보자면 아이돌들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팬 서비스'이기 때문에, 즉 업무의 일환으로 팬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만 상당수의 아이돌 오타쿠들은 이러한 '공사구분' 능력과 사회성이 떨어져 이를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즉 빈번하게 발생하는 서비스직 근로자에 대한 스토킹, 성추행 등과 기전이 동일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나는 돈을 지불했으니 너를 마음대로 하겠다'같은 수준까지 떨어진다. 사회에서 갖게 된 불만을 어리고 예쁜 소녀들에게 '돈을 주고 화풀이'하는 것. 문제는 이를 제제해야 할 소속사가 수입에 눈이 멀어 되려 아이돌들에게 모바메, SNS 등으로 악수회 영업을 사실상 강제하고, 오타쿠들의 망상을 부채질한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일부 인방 여캠의 팬들과 남성 아이돌의 여성 팬덤, 특히 어린 미성년자~사회 초년생 팬덤이 이런 경향을 보인다.[39] 엄밀히 말해 구조 자체는 캬바쿠라 시스템과 동일하다. 심지어 팬들을 악수회에 불러들이기 위해서 모바메로 성적 어필을 해 대는 멤버도 부지기수다. 이러다보니 이런 일본 여아이돌의 마케팅 방식이 손X년이라 부르며 비하되기까지 한다. 손을 그냥 파는 것도 아니고 그 방식 자체가 유흥업소와 다를 게 없으니...[40] 48사단에 대한 영화가 상영될 때 굿즈로 시마자키의 얼굴이 박힌 '소금대응 맛 팝콘'을 팔기까지 했다. 그리고 시마자키 이후로 이런 컨셉으로 인기를 얻은 아이돌이 전무하다.[41] 심지어 소속사는 이런 논란을 부정하기는 커녕 캬바스카 학원 등을 찍으며 인정하기에 이르렀다.[42] 돈을 준다는 자본주의 원칙 하나만 가지고 약자이자 을이 되는 젊은 여성에 몇 푼 쥐어주고 그 돈만큼 성노리개로 삼는 일부 막장들의 사고방식은 이미 지하 아이돌뿐 아니라 이런 10~20대 여성이 공급자측이 되는 다른 서브컬처에까지 지대한 악영향을 미쳤다. 여성 가상 아이돌(의 성우), 버튜버, 코스프레이어 등 일본에만 존재하는 기형적인 서브 컬처의 성상품화 끝자락에 이런 막나가는 인간들이 널려있다. 오죽하면 Perfume 팬들이 소속사가 제일 잘한 일 중 하나가 폴리리듬으로 성공한 이후 악수회를 절대 열지 않은 것이라고 할 정도.[43] 예를 들어 큐트가 결국 실력파 그룹이라는 이미지로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은 곡과 콘텐츠의 방향성이 대중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며, 페어리즈 역시 그룹만의 특유한 음악성이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는 문제점이 있다. 결정적으로 일본인들은 아이돌의 실력에 대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44] Perfume이 07년 하반기부터, AKB48이 08년 여름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했기 때문에 시기는 거의 동일하다. 정확하게는 Perfume의 성공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소위 '착신음'계, 즉 대중성을 중심으로 한 여성 그룹들보다 AKB48을 위시한 '악수회형' 아이돌의 수익성이 훨씬 좋았기에 시장 주도권이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시기로 따지면 '곡의 인기'와 '대중성' 중심의 아이돌 계보는 Perfume -> E-Girls 순서다[45] 대표적 사례가 다카하시 미나미. 솔로가 더 잘 어울리는 굵은 저음 보컬인데 중음역대가 텅 빈 상황에서 그녀의 파트가 들어가면 안 좋은 의미로 튀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46] 게다가 모리타카 치사토 본인이 자기 자신의 앨범에 직접 관여하는 등 음악적으로도 욕심이 있는 가수였기에 뚜렷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할 수 있었고, 이 덕분인지 큰 침체기 없이 99년 결혼 직전까지 꾸준한 인기를 유지했다.[47] 사실 Perfume은 SPEED를 동경해서 2001년에 결성된 그룹이다. 후술되는 다른 그룹들 보다 1~0.5세대 앞선 선배인 셈. 동기들보다 늦게 빛을 봤지만, 열심히 판 한 우물이 성과를 내어 긴 전성기를 보내는 모습까지 딱 2000년대의 모리타카 치사토다.[48] 2016년 AKB48의 10주년 극장공연에서 사시하라 리노가 "지금은 하라주쿠 쪽이 뜨거운 듯 하다"고 말했을 정도. 일본유선대상에서 후와후와가 신인상을 받기도 했다.[49] 숙소에 남자를 끌어들이고 스폰까지 받은 멤버들이 이를 제재한 내부고발자 멤버를 폭행사주한 사건. 심지어 이후 소속사가 피해자를 보호하기는커녕 그룹에서 탈퇴시키고 가해자를 보호하는 등 일본 연예계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50] 22년 8월에 발매한 久しぶりのリップグロス의 판매량은 약 30만장으로, 전성기의 5분의 1 수준이다. 정확히는 그동안 자매그룹 멤버들까지 동원하여 약 300명이 손을 팔아서 불렸던 판매량의 실체가 나온 것.[51] 노기자카46은 2021년 여름 발표한 ごめんねFingers crossed부터 줄줄이 스트리밍 차트에 진입조차 못하고 있으며, 케야키자카46에서 개명한 사쿠라자카46 역시 음원 강자였던 케야키자카 시절과는 달리 발표한 싱글 표제곡들이 스트리밍 차트에 진입하지 못했다. 두 그룹 다 2017~2018년의 음원 성적에 비해 음원 성적 하락세가 현저하다고 할 수 있다.[52] 이는 판데믹 기간 동안 월드투어 콘서트 중단 및 떡밥고갈로 약이 오른 해외 팬들이 음반을 미친듯이 사들여 급격한 판매량 인플레가 벌어지고 있는 K-POP과는 정반대 상황이다.[53] 그 동안 쟈니즈는 피해자들의 호소를 자신들과 유착관계를 맺은 언론에 영향력을 행사해 입막음 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이에 피해자들이 외신기자협회와 기자회견을 하고 BBC에서 특집보도를 하는 등 더 이상 눈 가리고 아웅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결국 쥬리 케이코가 사죄기자회견을 열었다. 하나 여기서도 '소란을 일으켜 죄송하다'며 얼버무릴 뿐 피해자들에게는 사과 한마디 없었다.[54] 특히 마츠모토 준 처럼 K-POP이 J-POP의 아류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일본 대중음악이 글로벌 시장에서 도태되고 한국 대중음악이 그 영향력을 북미 시장에 까지 뻗기 시작한 2010년대부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55] 일본은 밴드음악, 한국은 블랙뮤직의 영향이 각각 컸다.[56] 성가대의 존재나 소위 교회오빠의 이미지에서 보이듯, 교회는 정규 교육과정 외부에서 꾸준히 서양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통로 중 하나다. 흑인음악의 역사에서도 흑인교회와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언급된다.[57] 참고로 발전이 언제나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화는 시간이 지나며 대중의 관심이 사라지거나 경제가 무너져서 소비자 층이 사라지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쇠퇴할 수도 있다. 여기서 발전은 '독자화'를 의미한다.[58] 이 내용에 관련된 디테일은 '90년대 후반' 부분 참고. 80년대까지는 일본 아이돌의 음악, 컨셉부터 사업 모델까지 많은 부분을 적극적으로 벤츠마킹하였으나, 영미권 음악을 벤치마킹해 대성공을 거둔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부터는 음악적 경향은 많이 달라지고 사업적 경향의 유사성이 주로 관찰된다. 90년대 중반부터 초기 한국 아이돌 산업을 이끌었던 이수만과 이호연은 모두 7080년대 인물로 일본 아이돌 산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59] 일본의 영향을 축소의 수준을 넘어 아예 부정하는 주장도 있으나 그것은 지나치다. 예를 들자면 god 박준형이 '눈물의 기자회견'을 한 이유를 생각해보자. 만약 박준형이 미국 아이돌이었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일본 아이돌이 가지는 유사연애의 특성을 이용한 사업 모델을 당시 한국 기획사가 자사 아이돌에 어느 정도 이식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근본적으로 한국인들의 문화가 서양인들보다 일본인들과 비슷한 점이 훨씬 많기 때문에 많이 '팔아야 하는' 기획사들은 일본인들에게 많이 팔아본 일본 기획사들의 수법을 따라할 수 밖에 없었다.[60] 예를 들어, 락이나 컨트리는 영미권에서 꾸준히 수요가 있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그 영향력이 작다.[61] 일본식 모델에 가장 가까운 케이스가 DSP였다. SM도 일본 모델의 영향이 있으나, 미국으로부터 다이렉트로 받은 영향도 컸다. 반면 YG는 미국의 힙합 크루 모델을, JYP는 모타운 모델을 지속해서 갈구해왔다. HYBE같은 경우 방탄소년단의 흥행 과정에서 유튜브를 적극 활용하였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플랫폼 기업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등 기획사마다 복수의 시장 전략이 경합하며 상호 영향을 끼치는 구도에 가깝다. 특히 플랫폼 활용은 한국 아이돌의 세계화에 지대한 요인이 된 전략인데 이런 전략은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처럼 한국 아이돌 비지니스 모델은 더 이상 일본 모델에 기대고 있지 않다.[62] 일본 음악계가 음반판매에 장기간 의존해온 반면 한국은 IT화가 급격하게 일어난 탓에 90년대 말부터 이미 음반시장에 의존한 전략에서 빠르게 탈피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두 나라의 비지니스 전략은 일찍부터 같은 길을 갈 수 없었고 결국 상이한 길을 걷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업계인인 JYP의 인터뷰를 참조할 것.[63] 유튜브 오리지날로 공개되고 있다. 해당 다큐는 Banger Films라는 캐나다 회사에서 제작된 것으로 해당 회사는 Metal Evolution, Hip hop Evolution과 같은 대중음악의 주요 장르에 대한 다큐를 여러 시즌 이미 제작한 경험이 있는 이 분야의 베테랑 제작자이다.[64] 현재의 언더그라운드/인디 정도로 보면 된다.[65] 다만 실제로 일본 대중음악은 현재까지 한국에서 단 한번도 한국 대중음악의 위치를 위협할 정도로 주류의 수준까지 올라오지는 못했다. 청소년/청년 세대와 부산을 중심으로 인기가 어느정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당대 신문 기사들의 경우 반일감정에 호소하거나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기 위해 실제 인기보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한 경우가 많으니 주의하자.[66] 특히 본가나 분가가 출시되던 당시 시대별 아이돌업계의 흐름을 보고싶다면 시리즈의 컨셉을 참조하는 것으로도 나쁘지 않다. 아침놀은 황금빛은 싱어송라이터 및 밴드의 부흥으로 인해 아이돌 업계의 침체기, 신데마스는 AKB쪽의 인원수를 중시한 컨셉을, 밀리마스 시리즈는 AKB쪽의 극장형 시스템을 참조했으며, 2010년대 후반부터 시리즈 전반에 걸쳐 서서히 K-POP의 비중이 증가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