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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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라의 제55대 국왕.
시호는 경애왕(景哀王), 휘는 위응(魏膺), 관등은 이찬, 직위는 상대등이었다.
제53대 신덕왕의 차남이자 제54대 경명왕의 동복동생으로, 신라 후기 박씨 왕조의 마지막 군주다. 후임 경순왕 김부 시대에는 신라의 통치력이 경주시 바깥 어느 곳에도 미치지 못하는 도시국가 정도까지 떨어져버렸으므로[2] 당당한 영토국가 신라로서는 이 임금이 마지막이다.[3][4] 포석정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왕이기도 하며, 시호에 슬플 '애'(哀)가 들어가는 것도 이것이 이유다.
즉위 전에는 형 경명왕 때 상대등을 지냈다. 신라는 사위가 왕위를 물려받는 일이 많았는데, 대개 근친혼이 많아서 넓은 의미로 박혁거세 시조를 중심으로 성씨와 관계없이 따지고 보면 모두 같은 혈족이었다. 따라서 혈족의 의미가 오늘날과는 많이 다르다. 그래서 성씨가 다른 왕이 나와도 동요가 생각보다 적었다. 사실 사망한 왕을 기준으로 출생 순서에 따라 자녀의 왕위 계승 순위가 정해지는 것이어서, 이전 왕의 성씨가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5]
2. 생애[편집]
경애왕은 즉위 직후부터 시작해 거의 매년 북방의 고려에 사신을 파견했다. 형인 경명왕이 궁예가 죽은 뒤에 920년 때 맺은 수호동맹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던 의도로 보인다. 태조 왕건 역시 이에 화답해 경애왕 정권과 재위기간 내내 굳건한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신라 멸망이라는 벼랑 끝에 몰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해외 외교에도 나름 공을 들이게 된다. 《요사》 <태조본기>, 926년 1월 항에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의 발해 상경용천부 함락전 때 거란 측에 서서 공을 세운 나라들로 해(奚), 회흘(回紇), 토번(吐蕃), 당항(탕구트), 실위(室韋), 오고 등과 함께 신라가 나오고 있다. 물론 당시 신라는 서라벌조차 겨우 방비하는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상경용천부 공성전에 파병한 병력은 깃발만 보내는 형식적인 정도였거나, 또는 920년대 신라의 안보 상황을 감안하여 지지 선언 정도로 하고, 실제로는 도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삼국시대 역사상 그런 사례가 한 둘이 아니기도 하다.
927년 2월에는 병부시랑 장분(張芬) 등을 후당(後唐)에 보내 조공함으로써 중원의 국가와도 미리 친분을 맺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 신라는 서해안과 남해안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아예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경남 진주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반독립 세력인 왕봉규의 도움으로 남해안을 통해 중국의 중원으로 사신단을 보낸 것으로 보이며, 왕봉규도 덤으로 후당에 같이 조공해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의 관직을 하사받았다. 왕봉규가 비록 신라의 충신까진 아니라지만 경남 중부 해안 일대를 장악한 그를 견훤의 침략을 받아낼 탱커 역할이자 남해 바다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로 여겼을 수 있다. 하지만 제3세력치곤 힘이 있었던 왕봉규도 고려와 후백제라는 고래 싸움에 껴서 새우등 터지듯 927년이 지나기도 전에 망하고 말았다.[6]
한반도 내부에서도 경애왕은 이전에 방어 내지 방치에 가까웠던 신라 조정의 대응과 달리 비교적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도 보였다. 선왕인 경명왕 때 후백제가 기어코 신라의 통제하에 있었던 천혜의 요새 대야성을 무너뜨리는 등 점차 서라벌의 숨통을 조여오자 막 건국된 신생국 고려의 왕건과 굳건하게 동맹을 맺어두는 한편 후백제와 고려가 대치하는 전선에 신라군을 파견해 고려와 같이 연합군을 편성하여 후백제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는 등 제법 유의미한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선왕 경명왕 시절에는 신라가 고려의 도움을 일방적으로 받는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신라군이 고려군을 도울 수도 있다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과거의 나제동맹과 같은 공수동맹 관계로 전환된 것이다.
심지어는 고려가 후백제와 싸우다가 숨을 돌리기 위해 서로 왕실 종친(왕신, 진호)을 인질로 교환할 때도 경애왕은 견훤은 약속을 어기고 병사들을 일으켰으므로 하늘이 벌을 줄 것이라는 등 그를 까는 글을 보내면서 후백제와 적극적으로 싸워보자고 왕건에게 의견을 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런 적극적인 행보는 경명왕 시절 무력한 신라 조정에 등을 돌리려 했던 경상도 각지의 친신라 성향 호족에게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행했던 조치들로 보인다.
이러한 조치들에 대해 견훤은 격분했다. 과연 견훤은 지체없이 왕건과 경애왕의 허를 찌르는 복수극에 나섰다. 당시 상황은 고려군이 지금의 경상북도 북부를 차지하고, 후백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서부까지 점령한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927년 고려-신라 연합군이 친후백제로 기운 왕봉규를 멸망시키고, 추허조가 지키는 대야성까지 함락해 경상남도 서부까지 고려-신라 연합군이 이제 막 주둔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보면 후백제를 포위한 형세 같았지만 두 지방 가운데, 지금의 경북 서부 방면은 아직 후백제 점령지가 많이 남아있었고 연합군의 대비도 허술했다. 물론 좌•우에 적의 대부대가 있는 상황에서 가운데를 뚫고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부담이 큰 행동이었지만, 견훤은 직접 정예 부대를 이끌고 들어가 신라의 심장부를 타격할 대담한 기습 계획을 세운다.
927년 9월, 왕건의 거센 공격을 받은 견훤은 반격을 위해 환갑에 이른 나이에도 불구하고 몸소 친정하여 전장에 나타났다. 견훤은 신라의 근품성(문경시 인근)을 빼앗았다. 고려군과 신라군은 후백제군의 측면을 공격하려 했지만, 이때 엉뚱하게도 견훤은 경북 북부로 진격하려던 것 같던 군사를 돌려[7] 고울부(高鬱府)(경북 영천시)를 습격하고, 신라의 왕도인 서라벌(경주시)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격하는 서라벌 기습 작전을 시행했다. 견훤이 서라벌 레이드를 벌린 루트가 딱 현대 한국에서 상주영천고속도로의 경로이다.
순식간에 경주 옆인 고울부(오늘날 경상북도 영천시)까지 후백제군이 다다르자 비로소 견훤의 목적이 오로지 서라벌이란 걸 알게 된 경애왕은 급히 왕건에게 지원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왕건은 10,000명의 병력을 급파했지만 고려의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이 친정한 후백제군이 경주에 나타났고[8] , 풍전등화의 상황에서도 견훤이 막 도착했을 때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며 놀고 있었다. 견훤이 급습하자 연회장은 난리가 났고 경애왕은 끝내 견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사실 견훤의 기습 공격은 당시 상황에서는 엄청난 무리수에 가까웠다. 당시 후백제군이 정석대로 퇴로 및 보급로를 확보하며 진격한다는 전제하에 신라 지역을 공격하려면 문경 일대와 대야성이 있는 합천을 점령한 고려군의 협공을 피할 수 없었다. 만약 경애왕이 제대로 산성에서 농성하면서 오래 버티기라도 했다면 퇴로가 차단될테고, 왕건이 직접 지휘하는 북쪽 고려 본국의 구원군+대야성과 강주에 나가있던 남쪽 고려군 병력+고려군을 지원해 외지에 나가있던 신라군 병력이 집결하기라도 했다면 본국으로 돌아갈 길도 없이 협공당할 위험이 컸다.[9] 그런데 견훤은 이런 협공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일단 문경 방어선을 뚫은 뒤 멧돼지처럼 우직하게 서라벌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이러니 고려군과 신라군은 도저히 대응할 시간을 벌지 못했던 것.
견훤이 무리수나 마찬가지였음에도 기어이 전광석화처럼 서라벌을 점령할 수 있던 건 견훤 자신이 바로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복무하던 군인 출신이니만큼 서라벌 일대의 지리와 신라군의 행동 반경 및 경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처럼 서라벌 군인 출신 장졸들을 대동하여 앞장 서게 했을 터이다.
결국 경애왕은 견훤의 강요로 자결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으며 이후 견훤이 경애왕의 왕비를 겁탈했고 장군들은 첩들을 겁탈했으며 경애왕의 동생 박효렴(朴孝廉) 등 귀족들을 포로로 끌고갔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남아있다.
서라벌을 침공한 견훤은 수도 경주를 약탈하고 방화를 저질러 화려했던 신라의 보물들과 문화재들이 안타깝게도 상당수 사라져버렸다. 또한 이제껏 신라군이 고려와 대(對) 후백제 연합전선을 펼쳤던 것을 뿌리 째 뽑아버리기 위해 병기를 제작하는 기반 시설들까지도 철저하게 없애버렸고, 이런 참상에 자포자기한 서라벌의 많은 사람들이 서라벌을 떠나거나 수도 전주로 돌아가는 견훤을 순순히 따라갔다.
이후 경순왕 김부는 주도권을 되찾자 전왕 경애왕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나름대로의 직속 병력을 육성해서 고려군과 또 다시 연합 작전을 벌여 후백제를 저지하려고는 했지만 이때 입은 타격이 워낙 심각하여 다시는 공세 작전에 병력을 투입하진 못하고, 수세적으로 몰렸던 것으로 보인다.[10] 경애왕의 두 아들은 인질로 견훤이 데리고 갔는데, 장남 금성대군 박교순(交舜)의 후손 박윤웅은 울산 박씨의 정식 시조가 되었으며, 차남 계림대군 박순현(舜玄)[11] 은 경주 박씨의 정식 시조가 되었다. 겁탈당했다는 경애왕의 왕비는 기록이 없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자식들과 끌려갔거나 치욕감에 자살했을 것으로 보인다.[12]
견훤은 3대를 이은 15년 동안의 박씨 왕실을 무너트렸지만 신라 국체를 완전히 끝내진 않고, 제46대 문성왕의 후손인 김부를 새 임금으로 세우고 철군하니 그가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다.[13] 고려 태조 왕건은 철군하는 견훤을 현재의 대구광역시 팔공산 인근인 공산에서 따라잡았고, 치열한 혈전인 공산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왕건은 여기서 개국공신 신숭겸의 목숨을 대가로 겨우 살아나 단신으로 도망치는 대패를 당했고, 일시적으로 힘의 균형이 깨진다. 현재 대구광역시 전역에 많이 있는 왕건과 관련된 지명들은 모두 여기서 유래되었다. 사실상 후백제로서는 이때가 가장 절정기였었고, 견훤이 왕건에게
라고 패기있게 국서를 보냈던 것이 이때 있었던 일이다.[14]
경애왕릉은 본인이 일생을 마친 포석정에서 멀지 않은(1.5km 정도 남쪽) 남산 자락에 있다. 이미 신라의 국력이 쇠할 대로 쇠한 시기에 조성된 능인 만큼 소박한 편이고, 능 주변의 숲이 볼만하다. 경애왕릉 바로 옆에 삼릉이라는 3명의 박씨 선대왕들의 릉이 위치한다.
2.1.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무엇을 했는가?[편집]
현대에는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인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설이 제기되었다. 포석정은 사실은 연회의 장소가 아닌 일종의 성지로서, 술잔을 띄우는 그 구조물도 사실은 연회용이 아닌 제례용이었다는 것이다.[18] 마침 음력 11월은 신라, 고려를 막론하고 팔관회가 있었던 시기였다. 즉, 나라가 위급해지자 경애왕은 팔관회를 통해 신라의 선조들에게 나라의 평안과 안녕을 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애왕은 "나라 망하는데도 술쳐먹고 논" 막장 왕이 아닌, 흡사 서로마 제국 말기처럼 자력만으론 운명을 타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이것저것 다해볼려고 하다가 그래도 불안하니 천지신명에게 기원할 수밖에 없었던 눈물나는 망국의 군주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설이며 정설은 아니다. 별로 의미 없는 정황 증거를 제외하면 중요한 근거는 양력으로 12월경인 음력 11월에 포석정에서 덜덜 떨면서 잔을 띄우고 놀 이유가 없다는 것과, 견훤군이 기습 공격해 오는 것을 알면서도 놀고 있었겠느냐는 것인데, 전자는 꼭 겨울에 유상곡수연(잔 띄우기) 놀이를 못한다는 법은 없고, 후자는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놀았다는 것보다 더 잘 설명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견훤군이 공격해 오는 것을 알면서 비빈들을 거느리고 방어 거점 밖으로 나가는 것도 유희를 위해서건 제사를 위해서건 지나치게 안이한 행동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정 안 되겠으면 고려 제8대 현종이나 조선 제14대 선조처럼 도망을 간다든지,[19] 아니면 경주 근처의 명활산성 같은 데라도 올라가 농성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20]
차라리 경애왕이 견훤의 공격 징후까지는 알아챘었어도 구체적인 공격 내용은 제대로 몰랐거나, 혹은 견훤의 진격 속도를 잘못된 정보 때문에 오판했을지도 모른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아니면 실제로는 견훤이 왕건의 구원 시도에 퇴각하는 척하다 질풍신뢰와 같은 급습을 시도해 경애왕의 목숨을 빼앗았는데, 견훤을 지나치게 띄워줄 이유가 없는 고려 왕조에서 작성한 역사적 기록이 이런 견훤의 천재적인 전략 전술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할 수 있다. 사실 술 퍼마시다 망했다는 의자왕의 이미지와도 겹치는데, 이를 고려하면 당대 후백제 측의 프로파간다가 경주 초토화로 인해 교차검증되지 않은 채, 혹은 신라 멸망의 당위성을 보여주려는 고려 정부의 정치적 의도 하에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가운데 어느 쪽이 맞을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해야 할 일.
경애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간만에 등장한 박씨 왕조는 15년 만에 허무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 신라에는 김씨 왕조가 들어섰으니, 즉위한 이는 바로 신라 최후의 왕 경순왕 김부였다. 이런 사실 때문에 후백제가 신라 내부의 이러한 갈등을 알고, 김씨와 손을 잡아 경애왕을 제거했다는 가설 또한 제기된다. 실제로 선왕 경명왕 때는 김씨의 반란 사건도 있었던만큼 박씨가 뜬금없이 재등장해 김씨를 밀어내고, 대를 이어 왕을 하는 것에 대해 남아있던 김씨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건 분명하다는 것이다.
다만 김씨가 견훤과 내통해 경애왕을 제거했다는 설은 반론도 만만치 않다. 첫째로는 박씨 세력과 김씨 세력의 대립이란 것도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이지 직접적 사료는 없으며, 둘째로는 경순왕이 즉위 직후 경애왕을 위해 통곡하고 장사지내는 모습, 셋째로는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순왕은 전대 박씨 왕들과 마찬가지로 친고려 반후백제 정책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도 견훤이 전격적으로 신라 영토를 침탈했던 건 김씨 족단이 반란을 일으켰던 순간이었고, 이후에도 견훤이 서라벌 상황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며 신라 영역을 헤집은 건 분명하다. 적어도 견훤에게 서라벌 내 동조자가 있었을 개연성은 매우 높고, 경순왕마저도 일단은 살아남기 위해 즉위한 후 얼마 동안은 친견훤 반왕건 정책을 펼쳤었다. 경순왕의 행적을 보면 경순왕이 경애왕 살해 및 견훤에 대한 영합에 찬성했을 확률은 높지 않지만[21] , 적어도 신덕왕계 왕실에 대해 반감을 품은 김씨 족단 입장에선 무슨 수를 써서든 신덕왕계 세력을 서라벌 내에서 완전히 뿌리 뽑고 싶어했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아무튼 신라 내부 갈등구도를 묘사하는 것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기에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김씨 세력의 일부인 유염과 김응겸이 박씨 왕실을 제거하기 위해 견훤을 끌어들인 것으로 묘사된 바 있다. 경순왕 김부의 어머니는 경명왕과 경애왕 어머니의 동생으로 3명은 모두 헌강왕의 외손(外孫)이다. 따라서 경순왕은 경애왕 사후 가장 가까운 근친 중 하나였다. 또한 견훤에게 수도가 약탈되면서 경애왕과 동성(同姓)인 박씨 일족들이 타격을 받은 영향도 있을 것이지만, 경순왕 김부의 즉위는 당시로서는 정통성 있는 즉위였다.
2.2. 견훤은 정말 왕후를 겁탈했는가?[편집]
경애왕의 왕후에 대해선 자세한 기록이 없으며, 그나마 있는 기록이 견훤이 왕후를 강간했다는 것이다.
일단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 4년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다.
萱又縱其兵,剽掠公私財物略盡,入處宮闕,乃命左右索王。王與妃妾數人在後宮,拘致軍中。逼令王自盡,强淫王妃,縱其下,亂其妃妾。
견훤이 또한 병사를 풀어 공사의 재물을 모조리 노략질하고, 궁궐에 들어가 좌•우에 명해 왕을 찾도록 하였다. 왕과 비첩은 후궁에 있다가 군사들에게 붙들렸다. 이에 왕을 협박하여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아랫사람을 풀어 경애왕의 비첩들을 강간하도록 하였다.
ㅡ《삼국사기》-경애왕-
이 기록이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에 의해 쓰였음을 생각하면 견훤의 잔혹성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시켰을지 모른다는 추측은 해볼 수 있다. 왕건을 위해 견훤은 깎아내려져야 했는데 그 일환이 이런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런 잔혹한 행위는 삼국시대에 신라가 사비백제에게 저지른 일에 대한 복수의 일환이란 해석도 일부 있다. 실제로 과거 백제의 성왕은 비장 도도에게 참수된 머리가 신라의 북청 계단 아래에 묻혔다는 썰이 전해지고 있었고[22] 의자왕은 항복 직후 태종 무열왕과 제장들에게 술 시중을 들어야 했으며,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은 문무왕 김법민이 침을 뱉기까지 했다. 이런 역사적 경위에 따라 견훤도 신라를 정벌한 후 "의자왕의 한을 씻었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견훤은 옛 백제 지역 출신은 아니었으나, 그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백제 왕이었고, 그 신분에 걸맞게 행동했다. 그가 그저 지지 기반인 백제 유민들에게 뭔가 보여줄 만한 보복 행위가 필요해서 억지춘향으로 그런 만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경애왕의 증외조부인 경문왕(제48대) 시기에 태어나 외조부 헌강왕(제49대)을 섬긴 신라 정규군 장수였던 견훤이, 다소 과도하다 여겨질 정도로 신라 박씨 왕실에 치욕적인 굴욕을 그렇게까지 강요한 건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긴 하다. 정략적이고 정치적인 부분으로 따지면 왕성 서라벌 약탈까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긴 해도 경애왕을 겁박해 자살하게 만들고, 왕후를 강간한 건 다소 불필요한 만행이었던 건 사실이다. 이것은 백제에 대한 복수나 정치적인 쇼보다는, 견훤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과 분노가 더 이유가 컸다고 보인다. 그전까지 경애왕이 적극적으로 뭔가 해보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꽤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견훤이 겪으면서 꽤 많이 낭패를 보았던 건 사실이다. 백제니 신라니 뭐니 하기 이전에 개인적으로 몹시 약이 올라 격앙해있었을 가능성이 크단 얘기. 이런 개인적인 큰 분노와 적개심에, 나름 백제의 왕으로서 백제의 복수를 한다는 쓸만한 합리화의 명분이 더해져 행동의 브레이크가 망가져 버린 걸로 보인다. 이 기록을 뒤엎을 수 있는 사료는 현재까진 없다.
견훤이 경애왕을 죽인 후 신라를 무너트리는 게 아니라 김씨인 김부를 경순왕으로 추대해 세웠으니 백제 유민에게 잘 보이려 한 행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은 더욱 더 설득력이 적다. 신라에 대한 복수라면 이미 경애왕을 살해했을 때 충분히 차고 넘치도록 했던데다, 그대로 신라를 접수하기엔 왕건이 이끈 고려 대군이 바로 육박해있어 당장은 시간이 너무나도 없었다. 경애왕이 박씨므로 과거 백제 왕들에게 모욕을 주었던 신라 왕들과 관계가 없다는 얘긴 더욱 너무한 소리. 경애왕은 헌강왕의 외손자였던데다, 박씨와 김씨는 오래도록 통혼과 근친혼으로 엮여 있어 그렇게까지 다른 집안도 아니었다.[23]
일단 견훤이 경애왕을 죽이고 그의 왕후를 강간했다는, 남편을 죽이고 그 아내를 그 자리에서 취했다는 내용은 워낙 성적으로 자극적인 내용이라 믿기 힘들어하는 현대인이 많다. 이와 같은 행동은 동양사에서는 사례가 없는 막나가는 행동이긴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이 일화는 오히려 설득력이 높다. 견훤이 경애왕 때문에 겪어야 했던 정복사업의 차질은 7년인데, 7년이 짧다면 짧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본인이 살아있을 때 모든 걸 이뤄야 한다고 생각하던 60대 노인의 관념으로는 엄청나게 손해본 세월이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그러니 경애왕에 대한 그의 분노는 백제니 신라니 이전에 개인 견훤이 인간 박위응에게 품은 과도한 적개심과 격앙이 가장 비중이 높았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신라 왕실을 위한 변호를 하자면, 교과서에서 흔히 나오는 진골 독주체제에 대한 6두품 이하 지식인들의 이탈이나 지방 출신 장수의 출세 한계 탓에 견훤이 신라 체제에 미움을 가졌을 거라고 추측하는 것인데, 실제 당대 현실은 매우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견훤은 단순한 지방 출신이 아니라 눌지-자비-소지 등 눌지계 왕실이 3대에 걸쳐 왕실 직할령으로 개척한 추풍령 일대 출신이었고, 바로 그 빽으로 신라 왕궁 근위대에 입대해서 매우 빠른 출세를 경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견훤은 반란 일으키기 직전에는 서남해 방수군 비장이었는데 이 자리 또한 오늘날 기준 원스타다. 즉 견훤은 적어도 골품제 한도 내에선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아온 것으로, 때문에 객관적으로 봤을 때 딱히 신라가 그를 내쳤다고 보긴 어렵다. 도통을 자처한 걸 신라 왕실이 받아주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런 관직 자체가 신라사에서 사례가 없었고, 신라 왕실이 견훤의 천재성을 우리 같이 미래시로 보고 알 수 없지 않은 이상 그에게 전례를 어겨가면서까지 그런 대우를 해줄 필요는 없었다. 다만 경애왕 때문에 몇 년에 걸쳐 신라 공략이 지지부진해 쌓인 스트레스를 돌이켜본다면, 그 신라 체제의 최정점인 왕과 왕비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처사를 강요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이렇게 자신이 손에 쥔 권력을 재확인하기 위해 불필요할 정도의 가혹행위를 일삼는 경우는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고.
견훤과 완벽히 비슷한 사례로 칭기즈 칸이 있다. 칭기즈 칸이 살았던 몽골에서도 아내를 빼앗거나 훔치는 관행은 있을지언정 승자가 패자의 아내를 능욕한다는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유독 칭기즈 칸과 나이만부의 타양칸의 모후에 대해서만 해당 일화가 있다. 타양칸의 모후가 칭기즈 칸과 카마그 몽골부를 여러 차례 골탕먹이고 심한 모욕감을 여러 차례 준 게 원인으로, 견훤 또한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짓을 저질렀을 수 있다.
견훤이 일시적으로 서라벌을 기습 점령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점령 과정이지 견훤이 서라벌을 점령한 지 하루도 못 되어 바로 나와야 했을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서라벌의 무기 만드는 시설을 부수고, 정예병을 압송하며, 서라벌 사람들 일부를 후백제 수도 전주로 보내는 조치 등이 이뤄졌는데 그런 일들을 해낼 정도 시간은 있었으니, 서라벌 궁정 자체를 초토화하며 박씨 왕실에 극도의 모욕감을 안기는 행태를 저지를 시간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적진 한복판이든 뭣이든 적어도 그 상황에서 통일신라의 군사적 유산을 가장 충실히 계승한 후백제군에게 감히 도전해올 신라군은 어디에도 없었고, 유독 경계해야 했을 왕건의 고려군 본대는 여전히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으니 분 단위로 급하고 말고할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김부식이 작성했다는 점에서 신라계인 그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으나 김부식은 어디까지나 신라계니 뭐니 이전에 고려의 신하로서 《삼국사기》를 서술했고, 《삼국사기》를 김부식 혼자 전체를 서술한 것도 아니며 어디까지나 고려 임금 인종의 확인을 거친 관찬 사서였다. 김부식이 일부러 후백제를 격하하려고 마음먹었다 해도 신라의 왕후가 백제 왕이라지만 한때 신라군 장수였던 늙은 역적에게 강간당했다는 얘긴 김부식이 정말로 신라계로 정체성이 강했다면 오히려 삭제하고 싶었을 치욕적인 일화이다. 견훤은 휘하 장병들에게 서라벌 궁정의 후궁들 및 시녀들을 겁탈하게 했다는데 이 또한 한국사는 물론이고, 동양사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모욕 행위다. 이렇게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센세이셔널한 만행이 김부식 혼자만의 상상에서 나온 창작일 수 있을 개연성은 0에 가깝다. 당시의 과장된 야사를 그대로 적었을 수 있으나, 신라계라는 이유로 곡필을 할거라면 견훤의 만행도 만행이지만 경애왕부터 나라 망하는데 포석정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놀던 암군으로 기록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여간 이러한 복수는 견훤에게 7년 묵은 한을 쑥 내려가게 하는 스트레스 해소이자, 잠깐 동안이긴 했지만 서라벌에서의 모든 정치행위를 좌지우지하는 최강의 권신 지위를 확인하는 숙원 해소였다. 신라사에는 많은 굴곡이 있었고 전기의 실성 마립간과 진지왕, 후기의 애장왕과 민애왕처럼 살해당하거나 쫓겨난 임금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오래 전 망한 적국을 부활시키까지 한 권신에게 아무 것도 못해보고, 임금부터 가장 지위 낮은 시녀들까지 몸까지 빼앗기며 철저하게 능욕당한 사례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이런한 만행의 이야기는 신라인들의 후백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굳게 했으며, 신라에게 별 원한이나 악감정은 없었던 패서 호족들의 동정심을 크게 자극하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항이 현실로 드러나 왕건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려면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본문과는 관계 없지만 어디선가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며 놀다가 지은 <번화곡>(繁花曲)이 전한다. 진짜로 경애왕이 이런 시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
기원실제혜이사동(祇園實際兮二寺東)
양송상의혜나중(兩松相依兮蘿中)
회수일혜화만오(回首一兮花滿塢)
세무경운혜병몽롱(細霧輕蕓兮幷濃)
기원정사[24]
와 실제사, 두 절의 동쪽에소나무 한 쌍이 등넝쿨 속에 기대 있도다.
머리 들어 한 번 바라보니 꽃이 언덕에 만발했는데,
옅은 안개와 가벼운 구름이 둘 다 몽롱하구나.
3. 가계[편집]
4. 대중매체에서[편집]
-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문회원[26] 이 연기했다.[27] 드라마에서의 모습은 비록 암군이지만 기울어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하고 최소한의 보는 눈은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28] 즉위 초부터 후백제를 지지해야 한다거나 후백제한테 이제라도 사신을 보내야 한다는 유염 등의 말을 무시하고 고려한테만 사신을 보내며 친고려 외교 노선을 견지하고 고려와 후백제 간 전투가 다시 벌어졌을 때 고려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후백제를 공격하는 식으로 후백제를 자극했다.[29] 그렇게 해서 일단 경명왕 때 잃었던 대야성을 되찾는 등[30] 전공도 올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를 가지고 샴페인을 일찍 터트렸다. 대야성 수복을 기념으로 3일 동안 나라의 곳간을 활짝 열고 성대히 잔치를 베풀도록 한 것이다.
포석정 침공 대본 [펼치기•접기] (침공 중에 현장 포석정 상황....)
경애왕: 이보시오 들, 며칠 째 마시고~ 놀아도~ 도무지 피곤하지가 않구려. 경들은 어떠하오?
박연식: 폐하께오서 이리 즐거워 하시는데, 어찌 신들이라고 그렇지 않겠사옵니까?
박효렴[1] : 술맛이 좋은데다가 날씨 또한 좋사옵니다. 게다가 주변의 소식들 또한 훈훈하옵니다. 많이 드시오소서, 폐하
박연식: 이제 모든 근심걱정의 끈을 내려 놓으시오소서. 머지 않아 백제의 도적 견훤이가 폐하의 무릎 아래서 살려달라고 애원할 날이 올 것이옵니다.[2]
경애왕: 암, 짐도 그런 날이 올 것이라 믿소이다. 제가 누구였는가 말이오. 우리 황실의 근위대를 맡았던 군관이었소이다. 괘씸한 자 같으니라고! 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암!
왕비: (웃으면서)많이 취하셨사옵니다, 폐하!
경애왕: 하긴 좀 취했소이다. 허나. 내 분명 말하오. 견훤이 그자는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오. 암! 괘씸한 자 같으니라고!(술 원샷하며 견훤을 분노하는 표정을 짓는다.)
(즐겁게 보내고 있는 중에, 그 때...)
환관: (다급하게 경애왕에게 달려가면서) 폐하! 폐하! 큰일났사옵니다!!!
김부[3] : (정신 번쩍 차리며) 무슨 소리인가? 궐 안에 무슨 일이 있는가? 왜 그리 피투성이인고..?
환관: 어서 피하시오소서, 폐하. 백제의 도적들이 궁궐을 범했나이다. 어서 피하시오소서, 폐하!
(조금 당황하며...)
경애왕: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고?
왕비: 도적들이 오다니? 궁궐에 범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박연식: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며) 상세히 말하봐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환관: 말씀 드린 그대로 이옵니다. 수 만명의 백제군이 고울부를 돌파하고, 다시 월성에서 아찬 김율공과 그 군대를 전멸시켰으며, 지금 남문을 통해 궁궐로 들어왔사옵니다.
(경애왕과 왕비, 모든 신하들이 환관의 말에 들어, 술을 깨며 점점 불안감과 당황하기 시작한다.)
경애왕; 아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백제의 군대는 대야성에서 전멸을 하였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서라벌로 온다는 말이냐?
김부: 폐하, 허나 환관의 말을 들어보아 궁에 난리가 난 것은 분명한 것 같사옵니다. 일단 경계를 하시고, 전후 사정을 헤아리심이 맞을 것 같사옵니다.
박효렴: 그리하시오어서, 폐하. 저 환관들의 말과 행색을 보니, 뭔가 사정이 있는 것은 분명하옵니다.
경애왕: (그제서야 긴장) 그렇다면 김율 아찬이 죽었다는 말이냐? 김율 아찬이 죽었어??!!!
환관: 예 폐하, 어서 피하시오소서. 적도들이 지금 이리로 오고 있사옵니다. 어서 피하시오소서!
박연식: (그제서야 믿는다) 폐하, 어서 피하시오소서. 이자들은 대전 환관들이옵니다. 거짓을 아뢸 일이 없사옵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옵니다. (군사들을 불러) 여봐라! (신라의 군사들: 예!) 궐 안에 변이 일어난 것 같다. 모두 폐하를 뫼시어라! 악공들과 광대들은 연회를 물려라! 어서 폐하를 뫼시어라!
(경애왕도 너무나 큰 충격을 먹는다.)
박효렴: (군사들에게) 아, 폐하를 뫼시어라, 어서!
환관: 어서! 어서, 폐하를 뫼시어라!
(갑자기 연회장은 소란이 일어나 엉망이 된다. 경애왕과 황후가 손을 잡고 어쩔 줄 몰라 한다. 피투성이 늙은 환관 하나가 관모도 없이 다시 달려와 부복한다.)
환관1: 폐하!!!! 폐하!!! 폐하아아아.....!!!
모두들: ....???
환관1: 여기 대신들 중에 백제군과 내통한 무리들이 있사옵니다. (유염과 김응겸은 '으음...'하면서 모른 체 한다.) 저들이 내통하여 백제군이 오는 모든 길목을 열었다 하옵니다.
경애왕: (충격을 먹는다.)...뭐라????
환관1: 뿐 만 아니라, 폐하께 이르는 모든 소식을 차단하여, 저들이 서라벌에 이를 때 까지 알지 못하게 하였다 하옵니다!
(모두들 큰 충격을 먹는다.)
경애왕: 이럴 수가 있나...? 그들이 누구란 말인가, 도대체...???
(유염과 김응겸은 또 "으음..."하면서 모른 체 한다.)
환관1: 일단 이 자리를 피하시오소서. 신도 간신히 궁궐에 빠져 나와, 이리로 왔사옵니다. 이미 모든 궁궐은 저들에게 장악되었사옵고, 난폭한 군대들이 이리로 오고 있사옵니다. 피하시오소서! 어서 피하시오소서!
박효렴: (모두들에게) 폐하를 뫼시고 가라! 어서 서둘러라, 어서... 폐하를 뫼시어라!
(우왕자왕이다. 경애왕과 황후가 환관들에게 이끌려 간다. 그리고 곧 한 쪽에서 말 발굽 소리와 군사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신라 장군: 백제군이다!! 백제군이다!!!
(모두들 얼굴에 흙빛이 되어본다. 애술의 부장들이 군사들과 함께 몰려왔다.)
- <태조 왕건> 157화, 서라벌에 침공한 백제군 및 늦게 소식을 알게 된 신라 대본.
궁궐까지 장악한 후백제군이 경애왕을 잡으러 포석정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는데 남아있던 얼마 되지도 않는 호위 병력들은 갑작스러운 후백제군의 대군 습격에 우왕좌왕하다 경애왕이 도망갈 시간조차 벌지 못하고 모두 전멸했다. 많은 신하들은 죽거나 사로잡혔으며 경애왕과 왕비는 환관 및 후궁들과 같이 급히 도망치다가 밤에 탈출하기 위해 근처 별궁의 병풍 뒤에 숨었으나 곧 발각되었고[32] "게 아무도 없느냐"를 연발하다가 견훤 앞에 끌려나온다. 이후부터는 비굴한 장면의 연속인데 한때 신하였던 유염과 김응겸으로부터 조롱을 당하더니 견훤을 잡아서 꿇리겠다는 패기는 온데 간데 없고 "술에 취해서 한번 해 본 말"이라고 변명하는걸 시작으로 견훤에게 술을 따라 올리고 견훤이 바닥에 흘린 술을 개처럼 핥기까지 한다. 급기야는 견훤으로부터 "더러운 놈"이라고 욕을 먹고 얼굴에 침을 맞으며 발로 걷어차이는데 그런 수모를 겪고도 경애왕은 "살려주시옵소서. 폐하!" 소리만 해댄다.[33]
이에 빡친 견훤은 "내가 너를 미워해서 핍박하고 모욕한게 아니었으며 단지 지난 날 의자왕의 한풀이를 하려는 것이었고[34] 그래도 1,000년 사직을 이어온 신라의 기백을 보고자 했다"고 일갈한다. 이후 단도를 던져주며 자결할 것을 강요하지만 자결할 때조차도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어이할꼬... 어이할꼬..."만 연발하며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 끝에 측근 대신 연식의 도움으로 간신히 단도에 찔려 자결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35] 연민과 혐오가 공존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을 듯.
경애왕이 자결한 후 견훤은 최승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애왕의 왕비에게 연회에서 자신의 시중을 들라고 하였으나, 왕비는 이를 치욕으로 느끼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 견훤은 왕비가 자살했다는 말을 듣고 당황하여 장난이었다고 말했다.[36]
- 2021년 7월 1일 방영된 <심야괴담회> 16회에서 -해목령의 절규-라는 제목의 사연에서 다루어졌다. 일성 이사금의 능을 밤늦게 갔다가 왕의 복장을 하고 형체가 엄청 큰 한 노인의 모습을 가진 귀신을 목격했다는 것(공포스러울 수 있으므로 주의)이 사연의 요지인데 능의 주인이 사실 일성 이사금이 아니라 경애왕이며, 귀신 역시 경애왕이 아닌가 하는 결론을 내렸다.[37] 영상 방영 이후 7월 17일 고스트 헌터로 유명한 유튜버 윤시원이 직접 경애왕릉과 일성왕릉을 방문해 괴담의 실체에 대해 조사했다. 영상 그러나 상술했듯이 목격자의 증언과 달리 경애왕의 나이는 노인이라 보기 힘든 30대로 추정되며[38] 사연의 패턴도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근거없는 고인드립성 괴담에 불과하다. 덤으로 평범한 귀신도 아니고 무려 왕족 귀신을 보았다는 대단한 내용이라 유튜브 댓글창에 역사공부가 잘 되겠다거나 왕 귀신이라니 신기한 광경이라는 댓글이 가득하다.
5.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경애왕 본기>
一年秋八月 경애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九月 태조에게 사신을 파견하다
一年冬十月 신궁에 친히 제사지내고, 대사면을 하다
二年冬十月 태조가 투항한 능문을 돌려보내다
二年冬十一月 견훤이 진호를 고려에 인질로 보내다
三年夏四月 진호가 갑자기 죽자, 견훤이 고려를 향해 진군하다
四年春一月 태조가 백제를 친정하자, 왕이 그를 돕다
四年春二月 장분 등을 후당에 조공 보내자, 후당에서 관직을 제수하다
四年春三月 황룡사 탑이 흔들려 북쪽으로 기울다
四年春三月 태조가 친히 근암성을 깨뜨리다
四年春三月 명종이 왕봉규를 회화대장군으로 삼다
四年夏四月 왕봉규가 임언을 후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四年夏四月 강주 관할 하의 4개 향이 태조에게 귀부하다
四年秋九月 견훤이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을 세우다.[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