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향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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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配享功臣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이름을 떨친 공신들을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 모셔놓은 것을 말한다. 이름하여 종묘배향공신. 당나라의 제도에서 유래했다. 왕이 사망했을 경우 그의 치세에 큰 공을 세운 명신을 뽑아서 그 왕과 함께 왕실 사당인 종묘에 모시는 것으로, 당대 최고의 권력가를 의미한다. 때문에 3대 영의정, 3대 대제학도 종묘배향공신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러 왕의 치세에 벼슬을 했던 신하가 있어도 공신으로는 한 번. 즉 한 명의 왕과만 함께 배향된다. 이것 때문에 가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일반적으로는 선왕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먼저 재위한 왕의 공신으로 올라간다.
공신이라는 위신에 걸맞게 특혜가 엄청났는데 심지어 후손들이 공신 가문이라는 이유로 처벌이 면제되거나 완화되는 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2. 역대 왕조의 배향공신[편집]
2.1. 한국[편집]
2.1.1. 고려[편집]
2.1.2. 조선[편집]
2.2. 중국[편집]
2.2.1. 당나라[편집]
2.2.2. 요나라[편집]
2.2.3. 북송 및 남송[편집]
2.2.4. 명나라[편집]
2.2.5. 청나라[편집]
3. 문묘 및 종묘 동시 배향 인물[편집]
공신은 아니지만 공자의 사당인 성균관 문묘나 향교에 모시는 유명한 선비로 '문묘명현(文廟名賢)'이라는 것이 있다. 한국의 유학자로는 18인이 모셔져 있는데 이들을 '문묘 18현(文廟十八賢)'이라고 부른다. 문묘에 모셔지는 사람의 신위는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성리학자로 인정받은 자의 신위로서 유교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이 현인을 배출한 인물의 가문은 조선을 대표하는 국반(國班)으로 명실공히 인정받았다.
따라서 문묘에 배향되는 것은 본인은 물론 물론 양반 사대부 가문들과 학통을 잇는 후대 유학자들에게 있어 엄청난 영광이었고[95][96] 그에 걸맞게 단순히 학문의 업적만 가지고 될 수 있는게 아니었다. 때문에 문묘 당대의 정치상황이 고려되어 수많은 갑론을박을 거치며 정해졌으며, 후대에 정치 상황이 바뀌면 추가로 모셔지거나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숙종시절 환국으로 정국이 어수선할 때 이이와 성혼은 문묘에서 빠졌다가 다시 배향되기를 반복했다. 오늘날에는 둘 다 문묘에 배향되어 있다. 또한 남인은 서인 노론이 정권을 잡은 17세기 이후 단 한 명도 문묘 배향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97]
조선조에 와서 문묘와 종묘에 모두 배향된 인물은 단 6명에 불과하며, 이들을 배출한 가문은 왕조를 대표하는 가문, 즉 국반(國班)으로 인정받았다. 이들은 다음과 같다.
다만, 이언적은 명종의 배향 공신인데, 명종이 영녕전으로 체천되면서 명종 배향 공신들의 신주는 각자의 문중으로 돌아갔다. 즉, 현재 이언적은 종묘에 배향되어 있지 않다.
3.1. 조선 문묘 18현[편집]
'동국 18현' 또는 '동방 18현'이라고도 한다. 전조(前朝) 예우 차원에서 신라시대 2인(설총, 최치원), 고려시대 2인(안향, 정몽주)을 배향하였다. 나머지 14명은 조선시대 인물이다. 특히 조선시대 인물이 아직 배향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황 등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 소위 '4현(四賢)'의 문묘 배향을 주창하였는데 이황이 곧 죽으면서 이황을 포함한 '5현(五賢)'의 문묘 배향이 주창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년)에 실현되었다.
- 설총 - 신라조
- 최치원 - 신라조
- 안유[98] -고려조
- 정몽주 - 고려조
- 김굉필 - 동방 5현
- 정여창 - 동방 5현
- 조광조 - 동방 5현
- 이언적 - 동방 5현
- 이황 - 동방 5현
- 김인후
- 이이 - 출향·복향[O]
- 성혼 - 출향·복향[O]
- 김장생
- 조헌
- 김집
- 송시열
- 송준길
- 박세채
4. 여담[편집]
4.1. 고려[편집]
- 고려의 배향공신은 태조가 6명으로 가장 많다. 다음은 성종, 예종과 공민왕으로 각 5명이지만, 예종의 공신 왕자지가 취소되어 성종과 공민왕이 태조 다음으로 가장 많다.
- 고려의 배향공신은 기록이 다수 실전되어 생애는커녕 시호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최윤의와 문공원 같은 경우는 고려사에선 실전됐지만 본인의 묘지명에서 찾을 수 있었던 특이 케이스다.
- 고려시대 가장 많은 배향공신을 배출한 가문은 경주 최씨이다. 총 5명. 그 다음은 해주 최씨 가문으로 총 4명. 이천 서씨, 정주 류씨는 각 3명, 강릉 김씨, 무송 유씨, 파평 윤씨, 남평 문씨, 성주 이씨, 횡천 조씨는 2명씩 배출했다.
- 고려의 배향공신은 조선의 배향공신보다 친인척으로 연결된 정도가 더욱 심했다. 이는 고려의 지배 계층이 문벌귀족이었기 때문이다.
- 태조의 배향공신 중 후손도 배향공신이 된 공신은 유금필 뿐이다. 그의 후손 유필이 의종의 공신이 되었다.
- 충혜왕의 배향공신 성산후 이조년은 본인 열전엔 묘정에 배향되었다고 하지만 태묘 예지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4.2. 조선[편집]
- 태조부터 순종까지 종묘에 배향된 공신은 모두 96명이나 현종의 묘정에서 조경이 출향되었고 고종의 묘정에서 이완용의 위패가 쫓겨나면서 94명이 된다. 추후에 배향하는 것을 추배(追配)라고 하는데 원래는 예외적인 경우라 태조 묘정의 추배 건만 하여도 논란이 있었다. 태조의 배향공신은 원래 4명이었으나 고려 태조의 배향공신 6명보다 적어서는 안 된다는 태종의 주장에 의해 3명이 추배되어 7명이 된다. 이후 1833년까지 세조 묘정의 한명회, 효종 묘정의 송시열, 정조 묘정의 김조순 등 당대의 실세 3명을 비롯하여 5명이 추배된다.[99] 그러나 고종 때에 오면 왕실 권위 강화 차원에서 효명세자를 문조로,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고 이들을 포함한 선대 왕들의 묘정에 무려 18명의 공신들을 배향하는 등 종묘 배향공신의 의미가 퇴색된다. 주로 왕실 종친, 외척들의 추배가 많았다. 전체 배향공신 94명[100] 중 추배된 공신은 26명으로 전체의 약 27.7%를 차지했다. 다소 의외인 것은 문묘, 종묘 동시 배향이 된 율곡 이이도 고종 때인 1886년(고종 23년)에 와서야 선조의 묘정에 추배되었다는 것이다. 1610년(광해 2년)에 선조의 묘정에 배향된 이준경, 이황에 비하면 276년이나 늦은 것이다. 가장 때늦은 추배는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으로 1452년(문종 2년 4월) 세종의 묘정에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가 배향된 후 무려 413년이 지난 1865년(고종 2년)에 추배되었다
- 태조와 인조의 배향공신이 7명으로 최다이다. 고려에서는 태조의 배향공신 6명이 최다였으나, 조선에서는 배향공신이 6명인 경우도 효종, 숙종, 순조 등 3명이나 된다.
- 선조 때는 명신(名臣)이 많았으나 당파간의 대립으로 1차적으로 이준경과 이황만 선조의 묘정에 배향될 수 있었다. 이이는 1886년(고종 23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추배(追配)되었다. 실록[101] 에 따르면, 당시 배향 공신을 논의하면서 이준경, 이황을 제1로 삼았고, 노수신, 류성룡을 제2로 삼아 의논드렸고, 광해군이 전교하기를, "노수신과 류성룡은 선조(先朝) 때 시종(始終)을 보전하지 못했던 사람이므로 묘정에 배향하는 것은 미안(未安)할 듯하다. 다른 상신(相臣)들도 적지 않은데 하필 그들로 하는가. 부득이하다면 이준경과 이황만을 배향하는 것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실록은 노수신의 만절(晩節)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였고, 류성룡에 대해서는 문학이 단아한 면이 있으나 도량이 작고 식견이 얕았고 10년간 정승으로 있으면서 오직 남의 비위 맞추기를 일삼고 사사로움에 이끌려 파당을 심고 오로지 자기와 뜻이 같으면 좋아하고 다르면 싫어하였으니 정승으로서의 칭찬할 만한 업적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폄하하였다. 영의정 박순과 좌찬성 이이에 대해서는 당시 재상 중에 저지하는 자가 있어 추천하여 올리지 않으니 공론이 애석하게 여겼다고 하였다. 당시 당파간의 격한 대립으로 선조 때 임진왜란 등에서 활약했던 수많은 명신들조차 배향공신이 되는 것이 쉽지 않았다.
- 숙종 시기 이후로 당쟁이 심화됨에 따라 배향공신도 이리저리 달라졌다. 예를 들면 현종의 배향공신에는 원래 조경이 있었는데, 예송논쟁 시기에 윤선도를 옹호했던 일 때문에 서인에게 밉보였는지 경신환국 다음 해인 1681년(숙종 7년) 출향되었다. 김종수는 정조의 배향공신으로 시파의 집권 후 1807년(순조 7년)에 출향되었으나 1864년(고종 1년) 관작이 회복되고 1866년(고종 3년) 복향되었다.
- 이완용이 종묘에 최소 4년간 배향되는 대참사가 있었다. 1928년 5월 순종 부태묘(종묘 위패 봉안식)를 앞두고 영친왕으로부터 이왕직 장관을 경유해 박영효 후작, 민영휘 자작 이하 원로대신 및 종친들 19명에게 배향할 신하를 협의하여 상품하라는 분부가 있었다.[102] 후보 9명 중에서 최고점을 얻은 충문공 김병시(6표), 충숙공 이경직(4표), 문헌공 송근수(2표), 효문공 서정순(2표)을 선출하여 보고하였으나 이왕직 장관 한창수의 주장에 따라 최고점인 김병시와 이경직은 보류되고, 대신 이완용이 첨입되어[103] 3인으로 재결되었다.[104] 이에 박영효 등 9명이 불가함을 통지해 회답을 기다렸으나, 사흘 뒤 최종 배향공신 명단은 위 3인으로 결정되었다. 사실 최익현은 시호가 없다고 제외되었는데 이완용은 시호도 없이 '이왕직 종묘 배향공신록'에 오른 것이다. 이왕직은 동년 7월 6일 종묘 위패 봉안식을 옛 의례 대신 신식으로 치르려고 했으나 원로들이 불참하여 보류되었다. 13년이 지나 1941년 3월 11일 오전 11시 종묘에서 배향의례가 열렸고 문헌공 송근수가 공신당(功臣堂)에 배향됐다. 다음 날인 12일 이완용을 배향하였고 시호가 없어 '대훈(大勳) 이완용'이라고 하였다. '대훈'은 대한제국 시절 받은 대훈위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을 뜻했다. 13일에는 효문공 서정순이 배향됐다.[105] 그리고 당연하게도 광복 이후 이완용의 위패는 출향절차도 기록도 없이 어느 날 말 그대로 치워졌다.
5. 같이보기[편집]
[A] A B C D 개국일등공신, 삼한벽상공신[1] 개국이등공신[B] A B C 개국공신[2] 태조의 고명대신[3] 광국익찬공신(匡國翊贊功臣)[4] 공신[5]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6] 추충좌리동덕공신(推忠佐理同德功臣), 광국공신(匡國功臣)[7] 치성공신(致盛功臣), 수충창궐공신(輸忠創闕功臣)[8] 현종이 당시 무신정변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하여 왕씨 성을 하사하였다. 원래의 이름은 이자림(李子琳).[9]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 수정공신(守正功臣)[10]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11] 이 집안은 살아서는 3대가 모두 재상을 지냈고 죽어서는 3대가 모두 종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다.[12] 추충진절문덕광국공신(推忠盡節文德匡國功臣)[13] 여요전쟁 때 불타버린 실록을 복원한 '7대 실록'의 편찬자.[14]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15] 추성좌세보사공신(推誠佐世保社功臣)[16] 추충찬화강정수제공신(推忠贊化康靖綏濟功臣)[17] 추충찬화탕구정새공신(推忠贊化蕩寇靜塞功臣)[18] 협모공신(協謀功臣)[19] 보정공신(輔正功臣), 추성봉국공신(推誠奉國功臣)[20]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21]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22] 탐욕이 심하고 부정부패했다 하여 배향이 철회되었다.[23]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24]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동덕찬화공신호(同德贊化功臣)[25] 본명은 최우(崔瑀)이나 집권 이후 개명.[26] 정식 호칭은 알 수 없다. 시종공신(侍從功臣)·호종공신(扈從功臣)·친종행리공신(親從行李功臣)이라고도 한다.[27] 수종공신(隨從功臣)[26][28]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29]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30] 단성좌리공신(端誠佐理功臣)[31]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誠直節同德贊化功臣)[32]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33]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城直節同德贊化功臣)[34] 연저수종일등공신(燕邸隨從一等功臣), 안사공신(安社功臣), 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35] 분충동덕분의개국정난정사공신(奮忠仗義同德開國靖難定社功臣)[36] 동덕분의개국정난정사좌명공신(同德奮義開國靖難定社佐命功臣)[37] 순충분의개국정사좌명공신(純忠奮義定社佐命開國功臣)[38] 수충좌명개국공신(輸忠佐命開國功臣)[39] 순충분의개국공신(純忠奮義開國功臣)[40] 동생과는 달리 무인정사 당시 이방원의 편에 속해 있었기에 살아남았고, 이후 부귀영화를 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태종이 태상왕이 된 뒤 그 동생이랑 같이 배향공신에 추가되었다.[H] A B C 추배(追配) : 추후에 배향하는 것. 1410년(태종 10년) 태조의 묘정에 배향된 조준, 의안대군, 이지란, 조인옥에 이어 1422년(세종 4년) 추배되었다.[41] 순충분의좌명개국공신(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42] 경순공주의 남편이다. 무인정사 당시에 정도전과 함께 정안군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었으나 후일 태종이 태상왕이 된 뒤 좀 미안했는지 배향공신에 추가되었다.[43] 순충분의좌명개국공신(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44] 무인정사 당시 정도전과 함께 정안군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었으나 후일 태종이 태상왕이 된 뒤 배향공신에 추가되었다. 이쪽의 경우 태종이 진짜로 제거해버린 걸 후회하는 말을 했다.[45] 순충분의좌명개국정사공신(純忠奮義佐命開國定社功臣)[46] 분충장의동덕정사좌명공신(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47] 추충장의정사정난좌명공신(推忠仗義靖難定社佐命功臣)[48] 추충분의개국정사공신(推忠奮義開國定社功臣)[49] 추충정난정사좌명공신(推忠靖難定社佐命功臣)[50] 추충분의좌명공신(推忠紛議佐命功臣)[51] 양녕대군의 세자 시절 글스승이기도 하다.[52]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53] 4군의 개척자로 조영무와 더불어 몇 안되는 무장 정승이며 배향된 걸로는 조영무와 최윤덕이 유일하다.[54] 세종의 대군 시절 글스승이기도 하다.[I] A B 추배(追配) : 추후에 배향하는 것. 1452년(문종 2년 4월) 세종의 묘정에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가 배향된 후 413년이 지난 1865년(고종 2년) 추배되었다.[55] 수충위사협찬정난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同德佐翼功臣)[56] 명나라 영락제, 선덕제의 처남이기도 하다.[57]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協策靖亂同德佐翼功臣)[58]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보사병기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保社炳幾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C] A B 4차례에 걸쳐 공신에 책봉되었다.[59] 추배(追配) : 추후에 배향하는 것. 한명회는 1470년(성종 1년) 한확, 권람이 세조의 묘정에 배향된 이후인 1489년(성종 20년) 추배된다.[G] A B 1504년(연산 10년) 연산군에 의해 출향되었으나 중종 반정(1506년) 이후 복향되었다.[60] 추충좌익정난익대공신(推忠佐翼定難翊戴功臣)[61]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보사병기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保社炳幾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62] 수충경절좌익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輸忠勁節佐翼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63]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좌리공신(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佐理功臣)[64]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추성보사우세정난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推誠保社祐世定難功臣)[65]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추성보사우세정난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推誠保社祐世定難功臣)[66]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67] 중종 때 두 차례에 걸쳐 14년이나 정승을 맡았고 그중에 11년은 영의정을 한 중종대의 명재상이다.[68]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69] 본인, 아들 홍섬, 장인 송질이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부인인 여산 송씨는 아버지, 남편, 아들이 모두 영의정을 지낸 조선조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례가 되었다.[P] A B 추배(追配) : 추후에 배향하는 것. 인종은 1547년(명종 2년) 9월 부묘(종묘 위패 봉안)되었는데 당시에는 배향된 공신이 없었다. 1554년(명종 9년) 9월 홍언필과 김안국을 추배하였다.[Q] A B C 을사사화의 결과로 보익공신(위사공신)이 되었으나, 1577년(선조 10년) 보익공신(위사공신)이 혁파되면서 삭훈(공신칭호 박탈)되었다.[70] 특이하게 인종의 묘정에 배향된 사례이다. 실록에서는 "김안국은 중종조에 졸하였으므로 인종이 즉위한 뒤에는 신하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래 동궁을 모시며 보도(輔導)한 바가 많았기 때문에 당나라에서 마주를 고종에게 배향한 고사를 들어, 특별히 인종의 묘정에 들여놓은 것이다. 대개 살아서나 죽어서나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이고 예나 지금이나 보기드문 일이다."라고 하였다.[71] 추성정난위사공신(推誠定難衛社功臣)[72] 명종의 장인인 청릉부원군 심강의 아버지. 그의 손자가 붕당정치의 시작과 관련된 인물인 심의겸이다.[73] 추성정난위사공신(推誠定難衛社功臣)[D] A B C D E F 조선조 역사상 단 6명 뿐인 문묘·종묘 동시 종사 배향공신이다.[J] A B C D E 추배(追配) : 추후에 배향하는 것. 1886년(고종 23년) 선조의 묘정에 이이를, 효종의 묘정에 민정중을, 현종의 묘정에 김수항을, 숙종의 묘정에 김석주와 김만중을 추배하였다. 고종 때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무려 18명이 배향공신으로 추배된다.[74]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75] 선조의 고명대신 7명중 하나이다.[76]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효충분위병기결책영국공신(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效忠奮威炳幾決策寧國功臣)[E] A B C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공신(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功臣)[K] A B C D 추배(追配) : 추후에 배향하는 것. 1865년(고종 2년) 인조의 묘정에 능원대군을, 효종의 묘정에 인평대군을, 순조의 묘정에 남연군과 조만영을 추배하였다. 고종 때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무려 18명이 배향공신으로 추배된다.[77]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아들이자 수제자로, 그의 제자에는 대표적으로 송시열, 송준길이 있다. 김집과 송시열은 조선조 역사상 문묘·종묘에 동시 배향된 6인 중 2명이고, 송준길은 문묘 배향공신이다.[78] 추배(追配) : 추후에 배향하는 것. 1661년(현종 2년) 효종의 묘정에 배향된 김상헌, 김집에 이어 1778년(정조 즉위년) 추배되었다.[L] A B 추배(追配) : 추후에 배향하는 것. 1890년(고종 27년) 효종의 묘정에 민유중을, 현종의 묘정에 김만기를 추배하였다. 고종 때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무려 18명이 배향공신으로 추배된다.[79] 경신환국 다음 해인 1681년(숙종 7년) 출향되었고 끝내 복향되지 못했다. 숙종실록 9권, 숙종 6년 7월 13일 경자 2번째 기사에 의하면, 조경은 출향 전 현종의 묘정에서 배향의 첫자리에 부제되었다고 한다. 정태화가 출향된 후 첫자리에 부제되었다는 것인지는 불분명.[80] 대동법 시행의 핵심 인물인 김육의 장남. 김좌명의 동생인 김우명은 현종 비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이고, 김좌명의 아들인 김석주는 숙종의 배향공신이다.[F] A B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奮忠效義炳幾協謨保社功臣)[81] 최명길의 손자.[82] 김좌명은 현종의 배향공신이다.[83] 김장생의 증손이고, 김만기의 동생이다.《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저자.[84] 1721년(경종 1년) 신축옥사 때 왕세제의 대리청정 주창을 이유로 사형당한 노론 계열의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소위 '노론 4대신'의 한 사람.[85]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輸忠竭誠決幾効力奮武功臣)[M] A B 추배(追配) : 추후에 배향하는 것. 1899년(고종 3년/광무 3년) 10월 고종은 사도세자를 장종 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莊宗 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으로 추존하였다가 동년 12월 태조 및 4대조 추존에 포함하여 장조 의황제(莊祖懿皇帝)로 재추존하였다. 이때 장조의 묘정에 이종성, 민백상을 추배하였다. 고종 때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무려 18명이 배향공신으로 추배된다.[86] 1807년(순조 7년)에 출향되나 1864년(고종 1년) 관작이 회복되고 1866년(고종 3년)에 복향되었다.[87] 추배(追配) : 추후에 배향하는 것. 1802년(순조 2년) 정조의 묘정에 배향된 김종수, 유언호를 이어 1833년(순조 33년)에 추배되었다.[88] 소론으로 대왕대비가 중용했다. 그러나 대왕대비의 2차 수렴시도를 저지시켰다.[R] A B C 추배(追配) : 추후에 배향하는 것. 1834년(헌종 즉위년) 헌종은 부친인 효명세자(孝明世子)를 익종(翼宗)으로 추존하고 추존 국왕은 영녕전에 모신다는 관례를 깨고 종묘 정전에 배향한다. 1875년(고종 12년) 고종은 익종의 묘정에 남공철, 김로, 조병구를 추배한다. 고종 때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무려 18명이 배향공신으로 추배된다. 한편, 대한제국 성립 후인 1899년(고종 36년/광무 3년) 고종에 의해 익종은 익황제(翼皇帝)로 추존되고 묘호는 문조(文祖)로 개칭된다.[89] 조만영의 아들이다.[90] 이완용이 대한제국 시절 받은 대훈위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을 뜻함. 배향 당시 이완용에게는 시호가 없어 이것으로 대신함.[91] 상세한 내용은 아래 여담 항목 참조.[92] 1945년 광복 이후 어느 날 출향 절차나 기록 없이 말 그대로 쫓겨남.[93] 측천무후가 즉위한 뒤 황제로 추존했다.[94] 653년, 아들인 방유애가 역모를 모의하여 배향이 철회되었다.[95] 그냥 당사자들만 되고 당사자 가문들만 혜택보고 그걸로 끝인 종묘 배향 공신들과 달리 문묘 배향은 사림과 유학자들에게 있어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조선 사림은 중요 기반과 결집의 구심점은 학통이며 자신들이 잇는 학통에 속한 선대 유학자가 문묘 배향이 되느냐 마느냐는 사림과 사림에 속한 양반 사대부들에게 있어 굉장히 중대한 사안이였다. 때문에 이 문묘 배향이 의논되었다 하면 관료들의 거센 주장에, 성균관 유생들, 지방 사림들의 집단 상소 러쉬가 비일비재했고 심지어 임금과 사림간의 정치적 줄타기가 오갔다.[96] 조선 성리학의 거목인 퇴계 이황 선생만 하더라도 문묘 배향을 해야 한다는 사림들의 거센 성토에도 왕이 허락하지 않아서 결국 문묘 배향 요청 41년이 지난 뒤에 문묘 배향이 되었을 정도다.[97] 소론은 박세채가 18현 중 마지막 인물로 배향되긴 했다.[98] 본명은 안향(安珦)이나 문종(文宗)의 휘(諱)인 향(珦)과 동일하여 이를 피해 초명인 안유(安裕)로 고쳐부르게 되었다.[O] A B 1682년(숙종 8년) 배향, 1689년(숙종 15년) 출향, 1694년(숙종 20년) 복향.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 등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영향을 미쳤다.[99] 나머지 2명인 홍언필, 김안국의 경우는 다소 특이한 경우이다. 권력의 힘으로 뒤늦게 추배된 것이 아니라 인종의 부묘(종묘 위패 봉안) 당시 배향된 공신이 없어 뒤늦게 추배한 것이었다.[100] 출향된 조경, 이완용 제외.[101] 광해군일기(중초본) 26권, 광해 2년 3월 7일 계미 7번째 기사[102]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純宗孝皇帝純明孝皇后祔廟主監儀軌) 상권 하교급품의(下敎及上稟) 5월 3일자 '四人抄啓別單書入之意敢稟答曰知道(4인을 초계하여 별단으로 들이니 품의에 대해 답하시기를 알았다)'[103] 이왕직 장관의 부탁을 받은 백작 고희경이 찍은 1표밖에 얻지 못했다. 이완용의 형 이윤용도 이완용을 찍지 않았다.[104]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 상권 하교급품의(下敎及上稟) 5월 9일 '下敎曰忠文公金炳始忠肅公李耕稙姑爲保留內 閣總理大臣李完用添書以入(하교하기를, 충문공 김병시·충숙공 이경직을 보류하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추가 기재하여 넣으라)'[105] 이상 종묘숙직일지(宗廟宿直日誌) 1941년 3월 11-13일 기사. 1938년의 종묘숙직일지와 달리 양력으로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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