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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리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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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경주마. 중앙 경마 중상 승리마 중 최다 전승 기록인 11전 전승, 그중 9전이 5마신차 이상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뒀다.[2]
2. 혈통[편집]
모계 4대모는 코이와이 농장의 기초 수입 번식 암말 중 하나인 어스토니시먼트(Astonishment,1902)다.
3. 생애[편집]
데뷔 이전 쓰였던 아명은 토시후지(年藤)였으며, 쿠리바야시 토모지[6] 가 구입한 뒤 경주마명을 쿠리후지로 등록했다. 하지만 각부 불안 때문에 사츠키상[7] 에는 출전하지 못하고 데뷔를 5월로 미루고 말았다.
데뷔전에서 1마신 차이로 이기고,[8] 2주후엔 오카상[9] 우승마인 미스 세프트를 대차로 이기면서 다음주에 열리는 일본 더비에 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출발이 크게 늦어졌고, 그 당시에는 한 경기에 25마리나 출전했기 때문에 초반부터 뒤로 밀려나면 추월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쿠리후지는 4코너까지 모든 말을 제친 후 거기서 멈추지 않고 차이를 점점 벌려 기존 기록을 1.5초 단축 하며 6마신차로 압승한다. 기수인 마에다 초키치는 마지막에 다른 말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무슨 일이라도 있나하고 뒤를 돌아봤다고 한다.[10]
여름 휴양 이후 전년도 킷카상[11] 우승마인 하야타케[12] 를 3마신 차이로 이기고 이어지는 오크스[13] 에선 미스 세프트를 상대로 10마신 차이로 우승했다. 이후 두경기 연속으로 10마신 차이로 승리했고, 킷카상마저 대차로 승리해[14] 변칙 3관을 달성했다.[15]
이듬해에도 현역을 이어나가며 3경기를 더 승리했지만, 천황상[16] 봄 대회 직전에 감기에 걸려 회피하고 그대로 은퇴했다.[17] 당시 태평양 전쟁의 격화로 더이상 경마 대회 자체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향인 시모후사 고료목장[18] 에 돌아온 쿠리후지는 아명이었던 토시후지라는 이름을 다시 달고 번식마 생활을 했으며, 암말 2관마 야마이치[19] 등 중상 승리마 3마리를 배출하고 1964년에 노환으로 죽었다.
4. 여담[편집]
- 쿠리후지의 변칙 삼관은 수말과 직접 격돌하면서 쟁취했기 때문에 트리플 티아라 노선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다고 회자된다.
덤으로 더비에서 6마신차 압승은 1987년의 메리 나이스만이 동률일 뿐 2023년인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2위 기록이다. 더비 최다 착차는 세인트 라이트의 8마신차. 대신 킷카상 대차승 기록은 80년이 지난 아직까지 쿠리후지만이 기록한 위업이다.
- 쿠리후지의 주전기수 마에다 초키치는 이후 육군에 징병되었다 소련군에 포로로 잡혔고, 패전 후 1946년 시베리아에서 사망했다. 소련 붕괴 후 2005년에 유골이 일본으로 돌아왔다. 경마의 목적이 군마를 양성할 종마를 고르는 것이었던 이 당시에는 경마 기수와 마주 중에서 기병 장교들이 적지 않았고, 이들 중 많은 수는 전쟁으로 인해 전사했다.[20]
- 심볼리 루돌프의 조교사 노히라 유지는, 경마 잡지 유슌에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사상 최강의 경주마로 심볼리 루돌프가 아닌 쿠리후지를 꼽았다.
- 쿠리후지의 승부복은 훗날 미호노 부르봉 3관과 메지로 맥퀸의 천황상 3연패를 저지한 라이스 샤워랑 같다. 라이스 샤워의 마주인 쿠리바야시 히데오는 쿠리후지의 마주인 쿠리바야시 토모지의 아들이기 때문.
5. 경주 성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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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기준으로 25세.[A] A B 현 오크스[B] A B 현 킷카상[2] 그 다음으로 많은 무패 행진을 기록한 말이 바로 '환상의 말'로 불리는 10전 10승의 토키노 미노루다.[3] 중상마만 서술, 볼드 표시는 팔대경주 우승마.[4] 波藤(リヨウゴク) - 1936년 제실어상전(도쿄) 우승마[5] ハツピーマイト - 1936년 제실어상전(가을) 우승마. 현역 26전 9승[6] 일본의 해운회사인 쿠리바야시 상사의 회장. 라이스 샤워의 마주인 쿠리바야시 히데오의 아버지이며, 승부복도 동일하다.[7] 당시 명칭 요코하마 농림성 상전 4세 호마.[8] 이게 쿠리후지의 커리어상 가장 작은 차이로 승리한 기록이다.[9] 당시 명칭 나카야마 4세 암말 특별[10] 쿠리후지의 더비 레코드는 8년 뒤 토키노 미노루에게 갱신되기는 했지만 둘다 2분 31초대로 그리 큰 차이는 아니었다. 늦출발이 아니었다면 토키노 미노루가 레코드를 갱신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11] 당시 명칭 교토 농상선 상전 4세 호마[12] 신잔의 모부(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13] 당시 명칭 한신 유슌힌바. 지금처럼 오크스와 더비가 비슷한 시기에 개최하게 된 것은 1953년부터다.[14] 현재까지도 유일한 킷카상 대차 승리 기록이다.[15] 변칙 3관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쿠리후지는 일본 최초의 클래식 2관마 겸 일본 최초의 트리플 티아라 2관마다.[16] 당시 명칭 제실어상전.[17] 참고로 쿠리후지가 감기로 나가지 못한 천황상 봄의 우승마는 쿠리후지가 대차로 승리한 킷카상에서 2착을 기록한 히로 사쿠라다[18] 궁내성 소유 목장이었으며, 현재는 나리타 국제공항이 자리잡고 있다.[19] 최초의 모녀 오크스 제패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20] 레클리스의 어머니 아침해 또한 같은 시기에 기병 대령인 마주와 기병 대위인 주전 기수가 전사하는 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레코드] A B C [21] 제2차 세계 대전의 격화로 인해 능력검정경주로 시행됐기 때문에 마권이 발매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