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r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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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金大中[1] | Kim Dae-jung


파일:김대중영정.jpg

출생
1924년 1월 6일[2]
전라남도 무안군 하의면 후광리
(現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길 255)[3]
자택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촌로6길 10 (동교동)[4]
사망
2009년 8월 18일 (향년 85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김대중대통령묘소
재임기간
제15대 대통령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m_Dae-jung_signatur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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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김해 김씨 안경공파 14세손[1]
부모
아버지 김운식, 어머니 장수금
형제자매
3남 1녀 중 장남
배우자
차용애 (사별)
이희호 (재혼)[2]
자녀
김소희[3], 김홍일, 김홍업, 김홍걸
학력
목포공립상업학교 (졸업 / 22회)[4]
병역
면제 (징집상한연령 초과)[5][6]
종교
유교 (성리학) → 천주교 (세례명: 토마스 모어[7] )
신체
173cm[8], 69kg, A형
의원 선수
6
의원 대수
5, 6, 7, 8, 13, 14
약칭
DJ

후광(後廣)



파일:김대중대통령초상화.png

공식 초상화
1. 개요
4. 정치적 성향
4.1. 민주화 운동
4.2. 국정 전반
4.3. 외교적 성향
5. 다른 정치인과의 사이
6. 여담
6.1. 방송 출연
6.2. 그의 이름을 딴 시설이나 단체
6.3. 종교
7. 저서
8. 어록
8.1. 북핵 관련
9. 가족 관계
10. 각종 타이틀
11. 대중 매체에서
12. 명예 박사 학위
13. 수상 내역
14. 선거 이력
15. 소속 정당
16. 둘러보기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취임 선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호남 태생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령으로 취임한 대통령이다. 또한 직선제로 선출된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 소속 대통령이며[5] 대통령 직선제 및 민간 정부 출범 이후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2000년 대한민국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가졌으며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09년 8월 18일 폐렴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 부전과 호흡곤란증후군으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7]

호는 '후광(後廣)'으로 그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따와 지었으며, 대중들에게는 이름 영문자 이니셜을 딴 약칭인 'DJ'[8] 또한 잘 알려져 있다. 원래 한자 중은 仲(버금 중)이었으나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中(가운데 중)으로 개명하였다.

2. 일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대중/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대중/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김대중/평가로 분리하였다. 햇볕정책에 관련된 평가는 당 정책의 문서에 분리 서술되어 있다.


4. 정치적 성향[편집]


구 공산권의 붕괴 이후 트렌드에 따라서 중도개혁주의를 내세웠는데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추구했다[9]. 같은 민주화 운동가 출신인 김영삼 대통령과 비교하자면 김영삼 대통령은 자유보수주의 성향에 가까웠고 김대중 대통령은 역시 비슷한 성향이었지만, 점차 좌경화해서 자유주의로 정착했다. 그래서 정치나 문화적으로는 자유주의를 추구하려고 노력했고 경제적으로는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노선을 걷되, 경제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좇고자 노력하는 제3의 길 노선을 병행하였다.[10] 민주화 이후 첫번째로 민주당계 정당이 배출한 대통령으로서 후임대통령들과 비교하자면 가장 보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4.1. 민주화 운동[편집]


파일:external/www.miraetv.net/%EB%A7%8C%EB%8D%B8%EB%9D%BC_%EA%B9%80%EB%8C%80%EC%A4%91%EB%AF%B8%EB%9E%98%EB%B0%A9%EC%86%A1_miraetv.jpg

서구권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민주인권 투사 넬슨 만델라 대통령,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 대통령, 버마(미얀마)의 아웅산수지 여사와 함께 이름이 잘 알려진 민주화 운동가이기도 하다.

특히 만델라와는 70 ~ 80년대 민주 투사로 활동하며 극심한 탄압으로 투옥 및 망명을 거친 행적을 시작으로 대통령 재임, 자신을 투옥하게 만든 전 대통령을 용서한 전적[11], 노벨 평화상 수상 이력까지 두 사람의 생애가 겹치는 부분이 많아 외신에서 '아시아의 만델라'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원래 김대중 납치사건을 제외하면, 70년대 ~ 80년대 초반만 해도 김영삼, 김대중 두 민주화 운동가들이 외신에 비슷한 비중으로 다뤄졌지만, 80년대 중반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으로 망명간 DJ가 재미교포 및 현지 정치인들의 도움으로 활발하게 대외활동을 함에 따라, 해외 인지도를 크게 쌓게 된 것이다. 대통령에 당선되고서도 인도네시아의 위협을 받던 동티모르에 파병을 하고, 세계 여론을 움직였으며, 완전한 정계 은퇴 뒤에도 미얀마의 민주운동에 후원하는 등 꾸준한 민주화 운동 행보를 보였다.

나중에는 만델라와 개인적인 인연도 닿아, DJ가 대선에 출마하자 만델라 측에서 딸을 통해 수감생활 27년을 함께한 낡은 시계를 선물했고, 김대중도 답례로 지난 20년간 정치활동을 하면서 쓴 낡은 가방을 선물했다고 한다. 만델라가 쓴 책을 DJ와 보좌진들이 번역한 저서가 한국에서 출간되기도 했으며, 2001년 만델라의 두번째 방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과 공동 기자 회견을 진행하기도 했다. 위 사진도 당시 사진. 2009년 먼저 세상을 떠난 김대중에 대해 애도했고, 만델라도 세상을 떠나자[12] 이희호 여사가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보편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싱가포르의 리콴유가 주장한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와 충돌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김대중과 리콴유 두 사람 뿐만 아니라 각국의 석학들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학술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4.2. 국정 전반[편집]


사실상 대한민국의 첫 중도 성향 대통령이었으며, 사회, 문화의 전반에 있어서 여러 권위주의군부독재의 잔재를 타파하려 노력했다. 부정부패 논란은 많았지만 어쨌든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지향해 정부 내의 여러 악습들을 사라지게 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또한 여성가족부를 신설하고 페미니스트 운동가 출신 한명숙을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여성주의적 개혁도 시도했다.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햇볕정책 등 당시까지의 대통령들과는 정반대의 외교적 모습을 보여 국제적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리버럴 성향이라고 평가받을 업적이 많은데, 일본 대중문화 개방, 영화사전심의제 폐지를 비롯한 여러 규제 철폐부터, 권위주의 타파 정책 등 사회문화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다수 시행하였다. 또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하고, 대규모 구조조정을 시행하여 IMF 사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여러 경제정책을 시행한 것을 보면 꼭 노동계에 우호적인 성향이었던 것도 아니다. 일각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빅딜 조치나 정부주도의 IT산업 진흥에 대해 관치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한 쪽에서는 신자유주의, 다른 쪽에서는 관치주의라는 지적을 한 셈이다[13].

1996년 연세대 사태 직후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가 연세대를 방문하여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규탄하며 "과격한 학생운동은 이제 끝이 나야 하고 한총련은 자진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대해 북한은 며칠후 "김대중씨는 신념도 양심도 없고 의리와 도덕도 지킬 줄 모르는 너절한 인간"이라며 맹비난했다.# 당시 안기부장이 국민회의 측에 김대중 총재에 대한 신변위협 가능성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을정도.# 이어 임기 첫해인 1998년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다. 99년초 한총련 소속 대학생 3명이 청와대 앞에서 `김대중은 퇴진하라'는 문구가 씌어진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하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99년 7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미국에서 필라델피아 자유메달을 수상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도 북한은 김대중을 강하게 비난하였다.#(99년은 남북관계의 전환점인 2000년 베를린선언과 남북정상회담 이전이었다.)[14][15]

자세한 내용은 김대중/평가 문서로.


4.3. 외교적 성향[편집]


김대중 정부 때는 주변국이나 국제관계에서 마찰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좋은 일본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덕담으로 시작된 일본 대중문화 개방,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선언, 2002 한일 월드컵으로 안정된 일본과의 관계, 햇볕정책으로 대표되는 북한과의 관계, 김대중 대통령을 지지하고 도와주고 구명을 요청하는 데에 가장 적극적인 미국과의 관계가 모두 좋았다.

극우진영에서는 그가 친북/반미주의자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먼저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로널드 레이건 등이 김대중 구명을 전두환에게 요구하기도 했었다. 미국에 잠깐 피신하기도 했고, 그들의 도움을 계속 받아왔기에 김대중 정부는 미국과 별 마찰도 없었고 오히려 클린턴과도 밀월 관계였다고 평가받을 정도이다[16]. 그리고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 때도 일부 극단적인 반미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해서 주한미군 철수같은 주장도 펼치지 않았고 대통령 퇴임 직전까지도 그는 주한미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런데 NLPDR과 같은 반미 성향이 강한 일부 극좌 운동권에선 김대중 대통령을 '미제에 맞선 자주적인 대통령 중 한 분'이라며 칭송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보수 세력에서는 김대중 정부 시기의 대북 정책과 결부시켜 그가 종북주의자였다는 논리[17]를 내세우고 있으나 사실 이것에 대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정권에 이르기까지 36년을 이어온 보수정권 시절 진보나 재야 민주화세력들이 그만큼 억눌린채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소외되었으므로 진보나 NL반미쪽의 목소리가 IMF 외환위기로 여야 정권교체가 터지자 조명받기 시작한 것도 있다.[18]

특히 빌 클린턴 대통령의 경우에는 클린턴 대통령 본인이 학생 시절부터 진보 민주주의 인권운동 사회활동가부터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원조 사회운동 활동가인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존중하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고 본인이 말하기도 할 정도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자 곧바로 클린턴대통령이 김대중 당선자를 만나고 싶다는 메세지를 밝혔으며[19] 당시 청와대 의전 비서관의 증언에도 다른 서구권 지도자와는 달리 빌 클린턴 대통령의 경우 김대중 대통령이 떠날 때나 도착할 때 차가 도착하거나 떠나는 현장까지 와서 차에 탈 때 까지 배웅하고 지켜보며 고개를 숙이면서 까지 인사를 하는 등 인권운동가가 대통령이 된 끝판왕 테크트리 선배의 대우를 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이는 김대중 대통령을 넬슨 만델라와 비슷한 느낌으로 서구권에서 민주진보 계열 세력에서 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토크쇼 등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소개할 때면 아시아의 만델라라고 소개한다. 특히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김대중 대통령김정일에게 제기한 것에 감사를 나타내고 남북 정상회담에서의 합의가 김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대단한 승리라고 칭송하기도 했다.[20]

위에서 상술했듯이 김대중 대통령은 공산주의자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까지 겪은 사람으로서, 반공 친미주의자였다. 박정희의 최측근이었던 김종필DJP연합을 통해 김대중 정부 창출에 크게 기여한 점도 그렇고, 한국논단이 주관한 대선 후보 토론회를 빙자한 사상 검증회에서도 "나(김대중)는 지난 강릉 무장 공비 침투 사태 때 북한 공산당 규탄 대회라도 열어야 한다고 했던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한 것이 김대중이 친북(혹은 종북)이 아니라는 증거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김대중 납치암살 미수 사건에서도 김대중이 암살당하기 직전에 구해낸 것도 미국이었고, 전두환 정권이 사형을 집행하려 했을 때도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거부해서 집행되지 못하고 미국으로 망명시킨 적이 있다는 것도 김대중은 오히려 미국에 도움을 받은 사람이었다.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친북 성향에 대해서도 북한은 체제와 무관한 발언도 사상적으로 의심을 하여 숙청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나라인데, 진짜 종북주의자라면, 비록 남한에 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저렇게 대놓고 북한을 규탄하는 대회를 열자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남한에 살기에 신변의 위협이 없었다고 했는데, 김정일의 처조카로써 남한으로 탈출한 뒤 북한 로열 패밀리의 사생활을 폭로했던 이한영도 북한에서 보낸 조직원에 의해 암살됐다. 그리고 황장엽 전 비서도 북한에서 보냈다고 추정되는 조직원에 의해 살해 위협을 받은 바 있다.

즉, 정치인으로의 행보(외교술)가 곧 그 사람의 사상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셈. 후임이자 같은 민주당계 진영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대미 관계에 있어서 보다 냉정한 모습을 보인 건 맞지만, 김대중은 미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던 정치인이었다.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는 주한미군은 북한의 남침을 억제하고 동북아 균형을 위해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은 필요하다는 입장을 냈다.[21]

1997년 10월, 미국일본이 미일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하고 자위대의 영향력을 해외로 확대하는 법안인 미일가이드라인을 체결하자[22] 당시 미일가이드라인에 대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후보는 "미일가이드라인의 골자는 유사시 자위대한반도에 진출하여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하는 것이 큰 문제"며 "주권국인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이런 법안이 통과된 것과 우리정부의 무관심과 무능에 분노할일"이라고 김영삼 정부 시절 외교부의 일처리를 비판했다.남북정상회담 개최될 것 김대중후보 발언 한겨레 신문이 그 해 10월 20일 대선후보들 응답을 표로 정리한 바에 따르면, 김대중 후보는 통일 후 주한미군 주둔 여부에 대해 "반드시"라 답했고, 유사시 자위대의 한반도 군사개입에 대해 "한국의 사전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97대선 정책대결로(정리 : 한겨레 신문)

또한 1980년 5월 13일에 김대중은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 공산 집단이 우리의 과도기를 이용하여 남한에 대해 폭력에 의한 그들의 야욕을 성취하려는 음모를 획책하려는 일이 절대 없기를 엄중 경고한다"면서 "국민과 학생, 근로자들은 질서를 지키고 사회 안정을 유지하여 북한공산집단이 오판할 계기를 주지 말하야 한다"라고 발표하였던 적이 있다.

또한, 김대중은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시각을 많이 나타냈는데, 예를 들어, 조선로동당 규약에서 남조선의 사회주의화 조항을 삭제하라고 발언하던지, 일본에서 반유신 기자회견을 할 때, '공산주의'와 싸워서 자유를 얻어내야 한다고 하던지 그러하였다.

김대중은 김영삼과 달리 대만에는 방문하지 않았지만, 1997년 대선 때 대만 측에게 IMF 차관을 요청하였다. (물론 거절했지만) https://www.yna.co.kr/view/AKR20130628094900103

이에 따라 사망한 뒤 객관적으로 판단을 하는 경향이 대세가 되고 있는데 당장 영화 공작의 경우처럼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북한 정권이 공식 우편으로 우체국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을 원한다는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는 공작도 있었는데 이런 식의 논란에 대해서도 정말 북한이 자신보다 경제규모가 30배나 큰 대한민국의 대선에 개입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그럴 수 있는 국가적인 여력이나 자금이나 있는지 이런 얼토당토 않은소리에 넘어갈리도 없는 상식적인 판단을 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 당연히 위의 우편물 사건도 반 DJ쪽에서 벌인 정치공작이었음이 드러났다.[23]

그의 임기말이던 2002년 12월, 청와대에서 김대중대통령은 최근(2002년 당시) 붉어진 반미감정에 대해 공무원 190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의정부 여중생 사망사건이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문제로 비약돼 ‘미군 나가라’고 하는 것은 안된다”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필리핀이 수빅만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미군을 나가라고 했을 때 일부에선 설마 나갈까 했지만 미군이 철수, 경제와 국방에 큰 문제가 생겼다”면서 이 같이 말했다. 김 대통령은 이어 “우리는 안보를 위해 미군을 있도록 하는 것이고, 미국은 미국대로 동북아 안정을 위해 와 있다”면서 “미국은 우방으로서 국가 이익에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대통령은 “한미SOFA는 일본 독일과 비슷한 수준”이라면서 “운영에 있어서 개선하기로 미국과 합의했으며 얼마든지 개선하면 된다”고 말하며 주한미군의 여전한 중요성을 밝히며 대통령직을 마무리했다.[24]


5. 다른 정치인과의 사이[편집]



5.1. 동교동계[편집]


동교동계는 김대중의 자택이 마포구 동교동에 있기 때문에 김대중 계파의 일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동교동계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상도동계 및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과 연대해서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민주화 이후 그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영삼이 먼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임기 말에는 1997년 외환 위기 등으로 위기에 처한 뒤 정권 교체의 목소리가 강해졌다. 이로 인해서 1998년, 김대중이 정권을 잡게 된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 각개약진하였다. 권노갑을 비롯한 상당수 동교동계 주류들은 이인제를 지원하였고, 동교동계의 또다른 실력자 한화갑은 스스로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하지만 양쪽 다 노사모를 앞세운 노무현 바람(노풍)에 우수수 떨어지게 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계파였지만 김대중 퇴임 후, 노무현이 정권을 잡고 난 뒤 열린우리당이 새천년민주당과 분리되고 진보적인 색채를 갖추기 시작하였고, 17대 총선에선 노무현 탄핵 역풍으로 줄줄이 낙선했으며, 구성원들도 세월의 흐름을 피해갈 순 없는지 연로해감에 따라 대부분이 정계에서 자취를 감춘데다 남아있는 정치인도 여러 군데로 흩어져 현재 동교동계를 자처하는 인물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상태다.[25] 그리고 구심축이던 김대중까지 사망함에 따라 동교동계도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세대가 되었다. 


5.2. 김영삼[편집]


파일:pM6Rx4M.jpg

김대중 씨는 아주 쉬운 문제를 대단히 어렵게 생각한다.

김영삼[26]


이른바 양김이라 불리면서 민주화 정치인의 쌍두마차였지만 제13대 대통령 선거3당 합당 때문에 둘은 사이가 무척 나빠졌다. 그러나 김대중 서거 직전에 김영삼이 병원에 찾아와서 화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하는데, 혼수상태였던 김대중에게 김영삼은 화해하자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한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김영삼 문서에서 서술.

그리고 2015년 11월 22일에 김영삼이 향년 87세로 서거하면서,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을 보낸 양김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5.3. 노무현[편집]


파일:노무현_김대중.jpg

정치적 동지이자 대통령 선·후임자로서 궂은 일, 좋은 일도 많았고, 서로 사이가 나빴던 적도 없진 않았다. 가장 나빴었던 시절은 노무현 정부 초기 자신의 심복이었던 박지원이 불법대북송금 사건으로 감옥에 갔던 시기다.[27]

하지만 그럼에도, 사적으로는 김대중은 노무현을 굉장히 아꼈으며, 노무현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자 크게 충격을 받았고 장례식에도 일가족들과 직접 참석해 노무현의 영정 앞에서 직접 분향할 때 엄청나게 통곡을 했고, 노무현의 죽음을 두고 "내 몸의 반쪽이 무너진 느낌이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28] 고문 후유증 등으로 병치레는 많았어도 기본적으로 강골이어서 어느 정도는 건강했던 DJ가 그 충격으로 인해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져서인지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3개월여 만인 8월 18일에 결국 서거하고 만다.

6. 여담[편집]



파일:external/ppss.kr/%EA%B9%80%EA%B5%AC4.jpg
전두환의 장남 전재국과 정도경의 결혼 축하 선물로 보인다. 본문 내용은 '야설(夜雪)' 이란 제목의 한시. 작품 오른쪽에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시로 적혀 있으나 사실 조선 후기 문신 이양연(李亮淵)의 작품이다.

  • 서예에 상당히 능하여 경매에서 꽤 비싸게 팔리기도 한다. 최고작은 4100만원의 “행동하는 양심으로 민주회복조국통일”이다.#

  • 죽을 고비만 5차례[29] 겪어 본 흔치 않은 이력의 정치인이다. 군사 정권 시절에는 친정부 성향의 언론들로부터 온갖 마타도어에 시달렸으며, 시국사건에 얽혀 징역을 살았다. 이런 DJ 옆에서 같이 정치 생활을 했던 측근들도 고통 분담(?)에 동참, 연혁이 오랜 측근일수록 감옥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드물며, 김옥두, 한화갑 같은 경우는 김영삼의 측근 김동영과 더불어 고문까지 받은 대표적인 측근 정치인으로 꼽히고 있다. 정치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인 대통령직까지 수행했지만, 그 도달 과정은 한창 능력을 발휘할 40대 ~ 50대 시기에 정권 차원에서 가한 박해를 감내하는 가시밭길이었던 것.[30]

  • 별명은 겨울을 버티고 피어난다는 인동초. 민주화 투쟁에서의 수많은 시련, 대선에서의 수많은 고배를 겪으면서도 기어이 대권을 쟁취한 그에게 붙여진 가장 대표적인 별명이다.

  • 김대중, 노무현의 연설을 모두 담당했던 강원국의 말에 따르면, 김대중은 생각의 과녁이 너무 멀어 맞추기가 어려웠고, 노무현은 과녁은 가까우나 막 움직여서 맞추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비슷한 비유로 유시민김대중은 높은 산이라 우러러보기에는 좋으나 오르기에는 힘들고, 노무현은 낮은 언덕이라 함께 오르기에 좋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두 표현은 김대중과 노무현의 미세한 차이를 잘 보여준다.

  • DJ가 신문을 10여개씩 챙겨보면서 뉴스, 정보를 갈구했던 탓에 그의 측근들은 늘 머릿속에 뭔가 소식을 하나씩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MBC 아나운서 출신인 정동영 의원 같은 경우는 한 발 더 나아가, 막 정계에 입문한 초년병 시절이었는데도, 박지원과 함께[31] 새벽 6시에 김대중 총재에게 일일 브리핑을 하는 생활을 6개월 동안 한 적이 있다. 이 생활이 고됐는지 정 의원은 자신의 후임자가 정해지자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는 소회를 밝힌 적도 있다.

  • DJ는 자신이 신임하는 측근들에 대해서는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이 챙겨주는 것으로 잘 알려졌다. 한 번은 박지원 비서실장이 야당 대변인이던 시절 아침 회의 때부터 술냄새를 풍겨 다른 참석자들이 눈살을 찌푸리면 "대변인이 밤새 을 한 모양이군요. 기자들과 술을 마시는 게 대변인의 가장 중요한 일이지요."하며[32] 이런저런 사람들을 분위기를 풀어주곤 했다.

  • 상고를 졸업하고 일본 대학 진학을 계획했지만, 재정 문제로 장학제도가 매우 잘 갖춰진 만주 건국대학으로 방향을 바꾸어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징병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진학을 포기했다. 건국대학에 진학해도 병역 혜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며, 만주 건국대는 오히려 평소에도 학업과 무술 연마, 군사 훈련을 병행했던 터라, 재학생들의 징병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2차 대전 말기 무렵, 미국만주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군을 끌어들였으며, 이때까지 만주에서 철수하지 못하고 남아서 부역한 일본인, 한국인 생존자는 대부분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때문에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한이 남았다고 밝힌바가 있다. 대선 공보 및 네이버 프로필에는 경희대학교 석사 학력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명예 석사 학위이다.

  • 평생 정치만 해왔다고 알고있는 사람이 많지만, 20대에 선박 회사와 신문사를 경영한 기업인 출신이다. 덕분에 처음부터 전업 정치인으로 나선 동지 YS(김영삼)보다 경제 현안 파악측면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고, 여기에 DJ 본인이 꾸준한 공부[33]로 시대 조류를 면밀히 파악하고 대응하고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34] 그리고 전쟁 후 모든 게 부족하던 시절에 신문사를 운영했기에, 사장(김대중)이 직접 기사를 작성해 올리는 경우도 많았던 덕분에, 상대방 말을 받아적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고 한다. 김영삼이 선친 김홍조 옹의 장례식장에서 "받아적는 것 하면 김대중 아이가?"라며 옛일을 회상했을만큼, 젊은 시절 국회의원 김대중의 상징적인 모습이었다는 후문.

  • 미국 제46대 대통령 조 바이든과 친분이 있다. 1981년 김대중이 미국으로 망명했을 때부터 인연을 맺었으며, 김대중이 대통령이었던 2001년에 상원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방한하여 오찬 자리에서 넥타이를 교환하며 친밀함을 과시했다.[35] 이때 김대중이 준 넥타이에는 국물이 튄 자국이 있었으나, 바이든은 개의치 않고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2009년 김대중 서거 당시 뉴스, 2020년 뉴스 바이든은 한국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 넥타이를 맨다고 알려져 있다.

  •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기도 하다. 초선 의원 시절 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표결 직전 의사 진행 방해 발언 필리버스터원고없이 관련 내용을 5시간 19분 동안 연설했는데, 이는 '세계 최장 시간 국회 연설'로 기록되었다. 반대로 의회 연설 쪽으론 스트롬 서먼드가 24시간 18분 동안이나 연설을 해 최장 시간을 기록했다. 그러나 스트롬 서먼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련 내용에 대해서만 연설한 게 아니라, 할머니의 비스켓 레시피 같은 다양한 내용 등을 총동원해 시간을 끈 것이었다.[36] 후에 더불어민주당이 테러방지법 처리를 최대한 늦춰보려고 필리버스터 카드를 꺼내들었을 때 (기네스북에 등재된 건 아니지만) 김광진은수미정청래이종걸 순으로 이 최장 기록을 갱신했다.

  • 다음이나 네이버 등지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신사참배를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낭설이다. 실은 히로히토 덴노 사망 때 일본 대사관에 설치된 분향소에서 조문을 한 적이 있어 경향신문에서 이 사건을 취재하여 당시에 다소 논란이 된 바 있었는데[37], 이를 침소봉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외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고등학생이었던 일제강점기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고등학교 교사에게 찾아가 "센세. 와따시데쓰. 아노 다이쥬데쓰요.(선생님 접니다, 그 다이쥬[38][39]입니다)"라고 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실제로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고등학교 일본인 은사인 무쿠모토 이사부로를 만난[40][41] 일화가 과장되어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 2001년 3월, 김대중 대통령 방미 당시 갓 취임한 조지 워커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매우 어색한 분위기를 보이며 부시 대통령과 대북 관계에 대해 심한 의견 충돌을 보이기도 하였다.[42] 부시 대통령은 미국과 합의한 내용을 북한이 지키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구상을 지지하지만(북한에 대해선) 의구심을 갖고 있다 나는 북한의 지도자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라고 하였고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이 북한하고 협상하는 문제는 미국이 결정할 문제로써 우리는 지금 당장 해야 한다든가 그런 의견을 표시한 바 없다. 부시 대통령께서는 북한에 대해서 생각을 솔직하게 저한테 말씀해 주셨는데, 그 점은 참고하겠다.며 양측간의 격한 입장차만 표명한 채 둘의 어색한 만남은 마무리되었다.[43][44]

  • 고향 음식인 홍어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14대 대선에서 패배하고 1993년 영국으로 떠났을 때에는 동교동계흑산도 홍어영국으로 공수하는 정성까지 들였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홍어를 좋아했던 것과 관련해 일화가 하나 있다. 야당 총재 시절 당직자가 김대중의 심부름으로 목포의 수산물 시장에서 홍어를 샀는데, 그 당직자가 계산을 한 다음 혼잣말로 "선생님께서 이거 보시면 참 실하다고 좋아하시겠네."라고 말하자 돈을 세던 주인이 깜짝 놀라 혹시 김대중 총재를 얘기한 거냐고 되물었다. 이에 당직자가 맞다고 얘기하자 주인이 황급히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더 큰 홍어를 가져왔다고.[45]

  • 바닷가에서 자라서 어류로 하는 요리는 웬만한 미식가 수준으로 잘 알았는데, 제일 좋아하는 해산물이었던 홍어는 맛만 보고도 신선도를 알아 맞추는 수준이었다고 한다.[46] 또 입맛도 까다로운 편이어서, 홍어를 먹었을 때 본인 입에 안 맞았으면 '오늘 홍어는 별로였다'고 꼭 짚고 넘어가곤 했다고 전해진다. # 이 밖에도 설렁탕을 먹을 땐 깍두기 국물을 넣어서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우곤 했고,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에는 종종 야식으로 라면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 전 대통령의 건강을 염려한 이희호 여사가 김 전 대통령에게 잔소리를 해 야식 메뉴를 견과류로 바꾸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 그 외에는 중화요리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종류도 다양하고, 맛과 양도 만족스러워서라고 할 만큼 대식가적인 면모도 있었다. 그런데 김정기 전 경호원의 말에 따르면 식사량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군것질을 매우 좋아해서, 음식을 조금씩 자주 먹는 성향의 사람이었다고.군것질을 너무 좋아한 것도 건강에 안 좋지만(...)

  • 김정기 전 경호관의 증언에 따르면 아이스크림인 빵빠레를 엄청나게 좋아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건강 문제 때문에 이희호 여사가 빵빠레를 못먹게 하려고 청와대 인사들에게 남편 빵빠레 금지령을 내렸는데, 당연히 몰래 잘만 먹었다고 한다. 가끔씩은 이희호 여사 앞에서 '나 오늘 빵빠레 먹었다~~!'(...) 이러면서 놀리기도 했다고.

  • 스트레스 받는 날은 아이스크림 메뉴가 비비빅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풀릴 때 까지 비비빅을 2~3개까지 우적우적 씹어먹었다고 한다. 팥을 좋아해서 비비빅 말고 붕어빵도 좋아했다고 한다.

  • 장옥추 전 비서의 음식 일화에 따르면, 식사량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5년도에 프라이드치킨을 처음 접했을 때 치킨을 처음 맛보고선 점심과 저녁에도 치킨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다며 치킨을 비서진들에게 하나씩 권했다고 한다. 치킨을 나눠주면서 꺼내던 말이 '아까운 건데, 정말 맛있다.'라며 치킨을 찬양했다고 한다. 퇴임 이후에는 배달 음식을 자주 시켜먹었다고 했는데 치킨이랑 족발을 자주 시켜먹었다고 한다. 라면도 좋아해서, 남편이 라면 먹는걸 싫어하는 이희호 여사가 외출하는 날이면 오늘은 라면 먹는 날이라고 라면을 끓여먹었다고 한다. 라면은 청와대 입성 이후 주치의가 건강 문제로 라면을 먹지 말라고 한 이후로 끊었다고 한다.

  • 손성실, 문문술 청와대 조리사들의 말에 따르면 된장을 좋아했다고 한다. 청와대 시절 밥상에는 항상 생야채와 된장을 함께 올렸다고 한다. 홍어회도 된장만 있으면 한 접시를 전부 비웠다고 한다. 청와대 주방장들은 DJ의 찌개로 된장찌개를 꼽았다.

  • 정계 은퇴 번복[47]을 통해 항간에서는 대통령병에 걸린 환자라는 비난까지도 있었다. 사실 이건 서슬 시퍼런 군사 독재 정권에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측면도 있는 것으로, 김대중은 과거에 정부의 비밀 요원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죽기 일보 직전의 위기를 겪은 적이 있어 큰 공포가 있었다. 또한 신군부는 김대중을 사형시킬 명분을 만들기 위해 측근들을 체포해 잔인하게 고문하였고 그 중 장남은 고문을 버티지 못해 자기 머리를 모서리에 찧어 자살 시도까지 했던 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정계 은퇴를 강요받은 것이었다.


  •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 영결식 때 추도사를 직접 써서 읽기로 했지만 당시 이명박 정부가 난색을 표해 무산되었다. 김영삼, 전두환 등의 다른 전직 대통령이 참석하는데 김대중 한 사람만 추도사를 읽으면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표면상의 이유였다. 김대중이 읽으려던 추도사는 한 달 가까이 지나서야 공개되었다.관련 기사

  • 공인된 장소에서는 표준어를 사용했지만, 사석에서는 서남 방언을 고집했다고 한다. 측근들이 자제하라고 당부했지만 끝끝내 고집을 피웠다고 한다. 스스로를 호남의 자랑이라고 생각했으며, 매체에서 서남 방언을 하는 캐릭터가 부정적인 역을 자주 맡는 것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예:모래시계#)

  • 일각에서는 김대중이 군사정권에게 밉보인 이유가 이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김대중이 박정희에게 맞서 선거에 출마했을 때 유세를 이렇게 해서였다고 한다.
군인이 병권을 장악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 유럽이나 미국을 보십시오. 그런 선진국들은 민간인이 국방장관이 되어 군대를 지휘합니다.[48] 한국도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 뉴욕한인회장이자 성공한 사업가였던 박지원 의원은 1983년 미국 워싱턴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난 이후 인생이 변하게 되었다. 박지원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큰 감명을 받고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 제가 잘못 살아왔습니다. 저의 삶이 부끄럽습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벽돌 하나라도 놓는 그런 생각으로 살겠습니다." 이후 박지원은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뒤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기도 했고 다선 국회의원, 민주당 원내대표, 비대위원장을 거쳐 국민의당 원내대표, 비대위원장, 당대표 등 굵직한 정치 경력을 추가해 왔다.

  • 시대적인 배경으로 인해, 그 시절을 산 어르신들이 그렇듯 일본어가 능숙했으며, 영어는 감옥에서 영문법 책을 읽으며 독학해, 미국 방송국의 토론 프로그램에[49] 봉두완 아나운서와[50] 함께 출연할만큼 실력을 쌓았다. 외국어 어휘를 늘리는 데는 그 나라 문학 작품을 읽는 게 매우 도움된다는 외국어 공부 지론도 갖고 있었다고. 2차례의 외국 망명을 거치며 외국의 주요 인사들을 만났는데, 덕분에(?) DJ는 대통령 당선 전부터 나름 풍부한 외교 경험을 쌓으며 일가견을 갖게 되었으며, 수십 년에 걸친 민주화 투쟁으로 쌓은 세계적인 지명도를 바탕으로 미국, 중국, 일본 등과 역대 최고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해외 순방을 그리 많이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 역대 대통령들 중에 김대중만큼 미국, 중국, 일본의 행정수반과 두루 원만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주도적인 포지션을 가졌던 자는 없었을 정도로 능수능란한 외교를 했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 때문인지 영어 발음은 그다지 좋지 않고 영어에서 사투리 억양이 나온다.#7분 20초경 부터

  • 젝키 팬덤 이야기와 관련해서 나무위키조작질 해놓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도 그렇다. 아래와 같이 써놨다.

대통령이었던 시절 손녀가 청와대에서 뮤지컬 '알리바바와 도적들' 를 공연하러 왔던 젝스키스의 매니저에게 맞은 적이 있다. 정작 본인은 못 봤다고 한다.[51] 사실 당시 젝스키스의 소속사는 문제가 많은 기획사로 지금은 망해가는 중이다.

사실관계를 보면 청와대에 공연하러 왔을 때 일도 아니고, 젝키 영화 개봉 때 극장에서 팬들이 저지선을 무너뜨려 제지하는 도중 매니저한테 맞았다고 한다. 매니저 본인이 밝힌 이야기다.기사

그리고 때린 것이 분명 잘못된 행동이지만, 당시 젝키 팬덤의 행동이 막장인 측면이 컸다. 젝키 멤버의 불알을 잡고 자기 것인 마냥 안 놓은 일도 있고, 달리는 차 뒤에 매달려서 대형사고가 날뻔 한 적도 있고, 한 멤버는 팬들이 계속 쫓아와 울면서 경찰서로 들어가 도와달라 한 적도 있다.[52] 팬들은 막장으로 굴고 그걸 매니저는 때려서 막고... 미개했던 시절이다. "문제가 많은 기획사"라고 하는 얘기도 사실관계를 보면 허위 루머가 태반이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로.

  •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최고령인 나이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당시 나이는 만 74세 1개월. 다만 재임 시점 기준으로 최고령이었던 대통령은 1960년 4월 하야 당시 만 85세였던 이승만 대통령이다.[53]

  • 인권을 중시하던 대통령이다보니 국민의 정부 때부터 한국에서는 사형이 한 번도 집행되지 않았으며 더불어 사형수를 감형해주기도 했다.[54] 참여정부에서도 이 기조를 이어 몇몇 사형수를 감형했다. 정권이 바뀐 이후 사형수의 감형 사례는 없지만 사형은 여전히 집행하지 않고 있다. 연합뉴스 따라서 2017년 5월 25일 기준으로 한국은 사형제는 존재하나 실시하지 않는 '사실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되어 오고 있다.

  • 2017년 10월, 대한민국 검찰청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과 보수 단체 관계자가 서로 주고받은 이메일을 입수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에 작성된 이 이메일에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김 전 대통령을 폄훼하며 고인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취소해달라는 청원을 넣을 계획이 담겼다고 한다. YTN 보도 게다가 노벨평화상 수상 취소를 위한 사전 공작으로 반독재 인권상이기도 한 라프토상의 수상 취소도 획책했다.경향 보도 이 사실이 알려지자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잇는 민주당국민의당 호남계의 반응은 당연히... 민주당은 "이명박이야말로 정치 보복의 화신이다"라며 비난을 퍼부었고, 박지원 의원은 본인 페이스북에 "천하의 못된 짓은 다 모아 자행한 이명박과 이명박 정부 주동자, 그리고 가담자는 철저히 발본색원해서 처벌해야 한다. 이명박을 당장 구속 수사해야 한다"고 격정적으로 주장했다. #


  • 선거 후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대통령이다. 수많은 선거에서 지고, 정계은퇴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대통령이 되어서 그런지, 선거 후에 가장 많이 언급이 된다. 이는 보수, 진보정당 가릴 것 없다. 최근에는 장제원이 황교안에 대해 평가하면서 언급하기도 했다.


6.1. 방송 출연[편집]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도전과정 중, DJ에게 의미가 있었던 문화계 사건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당시 인기가도를 달리는 MBC의 예능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출연한 것. '이경규가 간다' 코너에서 이경규예고도 없이 DJ의 자택(동교동 자택이 아닌 일산 자택)을 기습 방문[55]하였고, 김대중은 그동안 자신에게 심어졌던 이미지를 180도 바꾸는 데 성공한다. 당시만 해도 기성 정치인들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대단히 생소한 편이었고, 특히 DJ는 언론에 줄곧 과격, 투쟁, 사상가, 마키아벨리의 이미지로 비춰졌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발휘하여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옆에서 김영희의 웃는 모습이 그치지 않을 정도로 이경규를 들었다 놨다 했다. 몰래카메라를 의심하는 부분이 백미.
이로 인해 김대중은 앞서 말한 강한 이미지를 희석하고 인간적이고 유머있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다. DJ는 이게 고마웠는지 나중에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DJ의 재택근무 비서였던 장성민의 증언에 따르면, 김영희가 사고를 친 것을, 이경규가 일산의 DJ 자택까지 동행해 방송이 나갈 수 있도록 도운 것이라고 한다. 방송이 나간 후 박지원 대변인이(훗날 청와대 비서실장)이 “DJ의 정치인생 40년 가운데 웃는 모습이 TV로 나간 것은 처음”이라며 고마워 했다는 후문.

둘째, KBS에서 절찬리에 방영되는 사극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이 탄 말에 DJ라는 인장이 지워지지 않은채 방영되는 방송사고가 일어났다. 사실, 진짜 방송사고가 맞았지만[56], 언론들이 한 마디씩 하는 바람에.. 파장이 갈수록 커졌다. 배추머리 김병조 같은 거물도 말 한 마디(망한나라당)에 방송인 생활이 끝나는 등 '오독고'가 아직 과한 시대였던터라, 언론에서 주목할수록 호주 목장에서 말을 수입한 드라마 관계자의 속은 바싹 타들었다고 한다.

한편 1997년에는 체험 삶의 현장에 출연해서 직접 일한 적도 있었다. 일의 종류는 남대문시장에서의 옷 판매.

임기 첫해인 1998년, 한국관광공사의 대한민국 홍보영상에 직접 출연하기도 하였다.

"한국이 변하고 있습니다. 오셔서 새로운 한국을 만나십시오."





6.2. 그의 이름을 딴 시설이나 단체[편집]




  • 행사
    • 김대중마라톤대회


6.3. 종교[편집]


위의 프로필에서 봤듯이 생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세례명토마스 모어. 원래는 특별한 종교를 두지 않았고, 김대중의 부모 역시 그 시대 여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교(성리학)를 신봉했기에 김대중도 그 영향을 따랐으나, 정치 신인이던 1957년, 은사이자 독실한 가톨릭 정치인이었던 장면 요한과의 인연으로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게 되었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참고로 세례를 서울대교구 약현성당에서 받았는데, 당시 세례를 주었던 신부가 "교회를 위해 순교할 마음으로 정치하며 살아가시오!"라며 토머스 모어를 세례명으로 정해주었다고 한다.[57] 김대중 본인은 처음 세례명을 전해들은 순간 "'하필 목 잘린 사람 이름을 지어주시나...? 싶어 깜짝놀랐다고 한다.[58] 이 세례명대로 김대중은 이후 파란만장한 정치 여정을 걷게 됐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정의구현사제단 등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던 천주교 인사들과 교류하며 지냈고, 미국 망명을 떠난 이후에도 미국 성당에 꾸준히 출석했다. 1997년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명동성당에서 축하미사를 봉헌했다. 청와대에 있는 와중에도 신부가 꾸준히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했고, 퇴임한 이후에는 자택 근처 서교동 성당에 다니며 신앙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보니 2009년 선종 당시 장례 방식도 거의 천주교적인 양식으로 치루어졌다. 이외에도 천주교계에서 직접 각 성당에 빈소를 마련했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집전으로 명동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치뤄주기도 했었다.[59]

원불교와도 인연이 깊은데,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시절인 1987년 11월 24일에 익산시에 위치한 원불교 중앙총부를 내방하여 당시 종법사인 대산 김대거로부터 '중산(中山)'이라는 호를 받기도 했다. 그 외에도 1994년 3월 17일에는 원광대학교에서 한국 대학 첫 명예정치학박사를 받았다. 또한 총무처에 지시해 원불교 교정원장을 15대 대통령 취임식 단상으로 올려 의전해줬다. 즉, 원불교가 정부 행사에서 4대 종교로 참여할 수 있도록 큰 협력을 해준 셈이다. 대통령 취임 후 2001년 8월에는 부산원음방송, 9월에 서울원음방송[60]을 개국하도록 협력해줬다. #1 #2

참고로, 영부인 이희호 여사의 종교는 개신교(감리회)이다. 혼인성사를 받을 당시 특별히 관면을 본 듯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살아생전 서로의 종교를 존중하며 살아왔고, 김대중은 이희호의 교회 행사나 기도회 등을 같이 다녔다. 김대중과 김홍일, 김홍업은 천주교, 이희호와 김홍걸은 창천교회에 다녔다.


7. 저서[편집]


생전에 모은 책들이 있는 서재가 통째로 도서관이 될 정도로 독서를 즐겼고, 이를 바탕으로 적지 않은 수의 책들을 집필했다. 이를 두고 김종필은 김영삼과 김대중을 비교하며 '김영삼이 읽은 책보다 김대중이 쓴 책이 더 많을 것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자신의 생각을 쓴 책부터 맨 마지막 자서전까지 차곡차곡 저서들을 썼지만 그중에서도 자서전이 주목할 만한데, 일부 다른 대통령의 그것처럼 변명으로 일관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본인의 치부가 될 수 있는 출생 이야기까지[61] 솔직하게 꺼냈다. 물론 정치인의 자서전이니만큼 각도의 문제가 있지만 매우 솔직한 것에는 틀림없다.

  • <분노의 메아리> (1967년)
  • <내가 걷는 70년대> (1970년)
  • <독재와 나의 투쟁> (1973년, 일본어판)
  • <김대중 옥중 서신> (1984년)
  • <행동하는 양심으로> (1985년)
  • <대중경제론> (1986년, 한•영어판)
  • <민족의 새벽을 바라보며> (1987년)
  • <공화국 연합제> (1991년)
  • <한국 :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 (1992년)
  • <세계 경제 8강으로 가는 길> (1992년)
  • <한국의 통일> (1993년)
  •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3년)
  • <나의 길 나의 사상> (1994년)
  •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넬슨 만델라 자서전)(1994년) - 번역서
  • <김대중의 21세기 시민 경제 이야기> (1997년)
  • <나의 삶 나의 길> (1997년)
  • <대중참여경제론> (1997년)
  • <내가 사랑한 여성> (1997년)
  •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 (1997년)
  •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8년)
  • <김대중 자서전 -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1999년)
  • <경천애인> (2002년)
  • <21세기와 한민족> (2004년)
  • <통일지향의 평화를 향하여> (2007년)
  • <김대중 자서전> (2010년) - 유고작


8. 어록[편집]


DJ는 당대의 일류 달변가이며 연설가였다. 직설적이고 강하게 정의를 호소하는 연설에도 뛰어났으며 독재 정권에 아부하는 관료를 주례 서는 신부에 비유한다거나, 미국이 아폴로 호를 발사할 때 그런 사람들도 달나라에 보냈으면 좋겠다는 발언 등 재치있는 유머를 사용해서 시사를 비판하는 연설 방식도 사용했으며 굉장히 호평을 받았다. 아래의 글을 보듯이 수많은 숱한 어록을 남겼다.

(1) 미국이 다른 나라는 그냥 두고 대한민국만 경제적 식민지로 만들 계획을 세운 걸까요? 만일 우리가 미국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 더 많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기업인들이 외자와 시설재를 도입할 때, 정부와 결탁하여 외국의 시설재 판매 기업에 요구하여 도입 가격을 늘리고, 허술한 물건을 불리한 조건으로 반입해 온 경우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2) 1천만달러짜리 시설을 1천3백만 달러로 늘려 계약해 가지고 3백만 달러를 빼돌리는 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를 싸게 사올 수도 없고, 애프터 서비스도 제대로 못 받고, 로열티도 비싸게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니 물건 값을 깎을 대로 깎고 좋은 시설을 유리한 조건으로 사들인 나라들과 경쟁해서 이길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중략...)

(3)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 정부와 기업인의 잘못은 덮어두고 일방적으로 미국이나 일본을 비난할 수 있습니까? 국민 다수는 나의 이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받아들이는 주장을 해야 합니다.

- 93년 회고록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74쪽 ~ 175쪽. 일부 재야 인사들의 과격한 반미 주장에 대해 답한 말.


삼촌네 호떡도 맛있어야 사먹는 법입니다.

- 정대철 전 의원에 따르면, DJ는 의 대로 긴장된 분위기를 풀곤 했다고 한다.[62]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여러분.

2009년 연세대 김대중 도서관에서 열린 '6.15 남북 공동성명' 9주년 기념 행사 연설 中[63]

[64]


용 그려놓고 눈 안 그린 격입니다.

-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한 측 국가정상 서명을 김영남[65]

의 것으로 하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제안에 답한 말.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ㅡ2009년 1월 7일 그의 마지막 일기장에서.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 경제, 남북관계의 3대 위기에 처해있다.

ㅡ 2009년 1월1일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에서 열린 신년인사회에서.


비서실장 : 골프가 재밌는 운동이라는 데요, 한 번 배워보시죠?

DJ : (시간이)얼마나 걸립니까?

비서실장 : 한 3 ~ 4시간 걸립니다.

DJ : 이 한 권이요, 책이! 그걸로 책을 한 권 읽을 수 있어요.

- 골프를 배워보라는 권유에 답한 말


실사구시(實事求是)

ㅡ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중시했던 사조로, 본래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 생전의 DJ는 "서생적(= 선비의)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문장과 더불어 이 어구를 전매특허처럼 사용했다고 한다. YS대도무문처럼 DJ상징하는 사자성어이다.[66]


민주주의는 절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어느 역사를 보나 민주화를 위해서는 희생과 땀이 필요하다.

ㅡ 저서 '옥중서신'(1984년) 중에서.


(중략)... 우리는 우리 시대에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훌륭한 지도자를 가졌던 것을 영원히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바라던 사람답게 사는 세상[67]

, 남북(南北)이 화해하고 평화적으로 사는 세상을 위해 우리가 계속 유지를 계승하여 반드시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면 노무현은 사망해도 사망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무리 500만이 나와서 조문했다고 해도 노무현의 그 한과 억울함을 푸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노무현의 주검은 하나의 주검에 그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영웅', '쾌남아' 노무현 대통령을 역사에 영원히 살리도록 노력합시다.

노무현 前대통령 장례식추도사.[68]


전진해야 할 때 주저하지 말며 인내해야 할 때 초조하지 말며 후회해야 할 때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

ㅡ 옥중서신 중에서.


정치 안해요, 제가 안해요. 이건 내 문제니까 내가 안하는거요 누가 날 강제로 시킨다는거요.

- 1994년 북핵 위기 당시 귀국한 DJ에게 기자들이 정계 복귀 여부를 질문하자 답한 말.[69]

[70]


"우리나라(한국)가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는데, 그 요인 중 하나가 내부 분열 때문이에요. 구한말을 보세요. 서재필 박사는 개화로 가자, 녹두장군 전봉준은 외세를 배제하자 했지만, 두 분 다 봉건 체제를 타파하자고 했어요. 개혁을 하자는 입장에서 보면 서재필과 전봉준이 다르지 않아요. 그리고 서로 비슷한 시대를 살았어요. 그런데 한 번도 서로 만나 생각을 교환하지 못했어요. 만일 두 사람이 만났더라면, 우리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나는 김일성 주석이 살아 있을 때 꼭 대좌를 해서 우리 민족의 진운을 논의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안 돼서 안타까운 심정이에요."

ㅡ 1994년 7월, (김영삼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을 며칠 앞둔 날, 북한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듣고[71]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72]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며 통일의 희망이 무지개같이 떠오르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

1992년 대통령 선거 연설


국민이 주인대접을 받고 주인역할을 하는 참여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국민에 의한 정치' '국민이 주인되는 정치' 를 국민과 함께 반드시 이루어내겠습니다.

ㅡ 1998년 대통령 취임사 연설 중


올 한 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자는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 (머뭇) 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중략) 잘못은 지도층들이 저질러놓고 고통은 죄 없는 국민이 당한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여러분과 같이 금할 길이 없습니다.

ㅡ 1998년 대통령 취임사 연설 중


국민은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지막 승리자는 국민입니다.

ㅡ 1993년 출간된 저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에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지, 거짓말을 한 적은(= 상대를 속이려 든 적은) 없습니다.

- 거짓말장이라는 비난에 대해 DJ가 답한 요지.[73]


"죄송합니다."

- 95년 7월 정계 복귀 회견에서 기자들의 집요한 은퇴번복[74]

질문에 답한 말. 달변의 DJ도 이날만큼은 맥을 못추었다고 한다.


두렵지 않기 때문에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지만,나서야 하기 때문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게 참된 용기 입니다.

ㅡ1987년 9월 8일 광주 그랜드 호텔 간담회에서.


내가 정권을 잡으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내는 동시에 돈이 많다고 해서 나라나 사회의 형편도 생각지 않고 사치와 낭비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부유세와 특별세를 받는 일대 조세혁명을 단행할 것을 공약합니다.

ㅡ1971년 4월 18일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후보 장충단 공원 연설


마지막으로, 이 사람은 온갖 정성과, 온갖 결심으로써 박정희 씨에게 마지막 충고하고 호소합니다. 박정희 씨여! 당신에게 이 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일천의 양심이 있으면, 당신에게 국민과 역사를 두려워 할 지각이 있으면, 당신에게, 4.196.25때 죽은 우리 영령들 주검의 값에 대한 생각이 있으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3선 개헌만은 하지 마라!

ㅡ1969년 효창운동장 연설[75]

[76]


이번에 정권 교체를 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총통시대가 오는 것입니다![77]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의 연설.


통합을 하려면 상대에게 내 것을 다 준다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70%를 주고 30%를 갖는다는 마음으로 해야 가능하다.[78]

[79]


전쟁은 40대 이상의 장년층이 일으키고, 전쟁터에서는 20대가 죽는다.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40대 이상을 전선으로 보내자.

노무현 대통령 추모 연설 중에서[80]

[81]


망원경으로도 현미경으로도 (해당 사안을) 들여다봐야 한다.


논리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잡담이며, 경험의 검증을 거치지 않는 논리는 공론이다.


(1)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의 틀을 가지고 인간의 역사를 해석했습니다. (중략) 살다 보면 역경도 만나고 순경도 만나는 게 인생입니다. 늘 고난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역경이라도 잘 대처하면 득이 되고, 순경이라도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는 아무리 힘들고 감당하기 벅찬 삶이라 하더라도 극복하지 못할 역경은 없는 법입니다. (중략)

(2) 나는 주역에 대해 왈가왈부할 만큼 잘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만물은 음(陰)과 양(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음(陰)이 있고 양(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음(陰) 속에 양(陽)이 있고 양(陽) 속에 음(陰)이 있으며 그것이 음양설의 핵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가만히 살펴보면,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어 보이는 역경도, 지나고 나면 그렇게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그리고 대응 여하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것이 큰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커다란 행운이 굴러 들어온 것으로 알고 기뻐했던 일이 오히려 불행의 씨를 잉태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대응을 잘못해 복이 화근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

(4) 결국 우리의 대응 여하에 따라 행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찾아오는 순경과 역경을 마음대로 선택하여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어떠한 경우라도 슬기롭게 대처하여 역경을 순경으로 만들거나 그 피해를 최소화 하는 것입니다. 또 순경을 잘 활용하여 성공의 길로 나가며 좋은 환경의 유혹에 끌려 자기 자신이 타락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세는 항상 이러한 마음의 자세와 최선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저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 내용 중[82]


“한국은 국민들의 피와 으로 민주주의를 일궜습니다. 한국은 이제 민주주의의 튼튼한 뿌리 위에서 세계의 큰 봉우리가 될 것입니다. 반면 일본은 민주주의를 스스로 일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은 군국주의에 사로잡혀 급격히 우경화되고 주변국과 큰 갈등을 일으킬 것입니다.”

2006년 10월 강연회 ‘한반도의 현실과 4대국’에서.영상[83]


"대한민국 건국은 공산주의자들의 극단적인 반대 속에 이루어졌습니다. 그 당시 우리 국민은 상상 이상으로 침착하게 대응해서 압도적인 투표율로 대한민국의 제헌 국회의원을 선출시켰습니다. 그때 UN에서는 한국의 선거를 시찰하러 왔습니다. 시찰단은 전국을 돌아본 결과 국민의 압도적인 참여와 질서정연한 선거를 보고 어떠한 문제도 제기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남한만 선거하는 데 대해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던 사람들도 국민의 의사가 우선 가능한 지역에서 정부수립을 하겠다는 데에 일치했습니다. UN은 대한민국 수립의 과정이 모두 합법이고 국민의 의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보고함으로써 우리는 UN의 승인을 받고, 공산권을 빼놓고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출발부터 이렇게 가혹한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ㅡ199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50주년 기념사 일부.


과거 독재 정권의 통치를 받으면서 반독재투쟁을 하다가, 갓 해방된 나라의 지도자들과 대화를 해보면 (...중략...) 아마도 독재 치하에서 하도 억압을 받으며 할 말을 못하고 살았기 때문에 자기 주장을 먼저 피력하려는지도 모릅니다. 대화란 아예 존재할 수도 없는 환경에서 살아온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중략...)

노태우 대통령은 한때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이었으나, 차츰 자신이 말을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세 사람 중에 제일 나은 편이었을 것입니다.

군사정권 사람뿐만 아닙니다. 그들과 싸운 재야인사나 학생들과 대화를 해보거나, 그들의 회의 장면을 보면, 정말 말을 많이 합니다. 한 번은 10여 명의 재야인사들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한 분이 말을 하기 시작하더니 장장 한 시간을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매우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허물없이 농담을 했습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길게 합니까? 나 같으면 그 말을 10분이면 하겠소. 그리고 민중 민중 하는 분들이 왜 그렇게 민중이 알아먹기 힘든 어려운 말을 사용합니까?"해서 유쾌한 폭소가 터진 일이 있습니다.

김대중의 저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


가장 대화가 힘든 상대는 운동권 학생이나 노동자 대표들입니다. 매우 이성적이고 이쪽 말을 경청하는 사람도 많지만, 상당수는 자기 주장만이 옳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타락했고 반동이라는 식으로 단정하곤 하여 참 어이가 없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중략) 민주주의를 위해서 독재와 싸운다는 사람들이 남에게 말할 권리를 주지 않고, 내 주장만 한다는 것은 하나의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대중의 저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


또한 감옥 복역 당시 영어를 독학[84], 83년 10월 테드 카풀이 진행하는 심야 뉴스 프로그램 <나이트라인(Nightline)>에서 5공 정부를 대표한 패널 봉두완과 영어로 토론을 하기도 했다. 1994년 미 의회에서 이북측에서도 신뢰할만한 대북 특사 파견 필요성을 설득하는 연설도, 영어로 원고를 작성해 40여분간 진행한 것이었다고.

봉두완 : (토론 종료 직전에) 지금까지 김대중 씨가 말한 인권 유린은 박정희 정권 때의 일이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모든 인권을 보장하고 있다. 어떤 형태의 인권 유린도 없다.

VS

김대중 : 지금까지 한국 정부의 인권 유린에 관해 내가 한 말은 나의 개인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국제사면위의 82년도 보고서에 있는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정부의 미국 국무성 82년도 인권 보고서에도 그대로 적혀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당신네 정부가 보증합니다.



8.1. 북핵 관련[편집]


클린턴 : 햇볕정책이 무엇입니까?

DJ : 햇볕정책은 우리가 독창적으로 만든 게 아닙니다. 미국에서 이미 검증된 정책입니다. 중국이 화해-협력을 하니깐 개방을 하고 나왔습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주의 국가는 강공으로 몰아칠수록 꽁꽁 빗장을 닫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햇볕을 쬐면 국제 사회로 나옵니다. (햇볕정책은)미국이 이미 검증을 한 정책입니다.

클린턴 : (경청 후..) 제가 조수석에 앉겠습니다. 남북관계는 김 대통령께서 운전석에 앉으십시오.

- 1998년 6월, 한-미 정상회담 자리에서[85]


"북한은 핵을 만들 의사도 능력도 없다. 만약 그들이 핵을 만든다면 내가 모두 책임지겠다."

김대중 본인의 말이 아니라, 누군가 "짜깁기"한 것이다. 91년 6월 북한 김영남 외무상의 핵능력 발언 + 03년 대북송금특검 책임발언의 결과물.


2000년대 들어 북한 핵 관련, 정말로 발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복한 민족이고, 천추의 한이다."

ㅡ대통령 퇴임 후 예방한 정청래 등 민주당 의원들에게 했던 말. 미국-북한, 일본-북한 수교 지원을 시작으로, 종래에는 북한의 핵 불능화, 남북불가침선언,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 남북철도를 연결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했던 김대중-클린턴 구상이,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의 당선으로 무산되었던 일에 대한 아쉬운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86]


"미국은 악을 행한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고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1953년 북한과 전쟁중에 대화를 해서 휴전협정을 성립시켜 오늘날까지 한반도에서 50년의 평화를 유지하게 만들었습니다. 닉슨은 중국을 찾아가 모택동을 만났습니다. 그 결과 중국을 개혁, 개방으로 유도해 오늘날 변화를 가져오게 만들었습니다. 레이건은 소련을 악마의 제국이라고 비판했지만, 그 악마와 대화해 소련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여, 오늘의 민주화를 실현시켰습니다. 대화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 이익이나 세계평화에 필요하면 악마와도 대화를 해야합니다. 오늘의 한반도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당사자는 미국과 북한입니다. 그 당사자가 대화하지 않고 어떻게 이 문제가 해결 되겠습니까?"

ㅡ2006년 10월 18일, 세계지식포럼에서, 내용전문(11번째 문단부터)


"북한의 핵야욕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선택 가능성이 있다. 첫째, 군사력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중국, 한국, 러시아뿐 아니라 일본조차도 이에 대해 반대하고 있고, 북한이 군사적 공격에 대해 저항할 경우 한반도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또다시 참혹한 재앙을 겪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한국 국민들은 이 같은 재앙을 겪을 가능성에 대해 확고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두 번째로는, 경제적 징계조치로 평양정권의 숨통을 죄어서 넘어뜨리는 방법이다. 그러나 북한은 궁핍함도 견딜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그리고 그 경우 중국이 원조를 거부한 채 북한을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궁지에 몰린 북한이 군사 기술을 팔아 넘기려는 유혹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징계의 효율성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대화만이 유효한 선택 가능성으로 남는다... 좋든 싫든 북한체제는 중국 또는 베트남의 자취를 따라 변화해 가고 있다. 지금까지 속도는 느리지만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움직임이다. 대화를 하며 접촉 및 교류 기회를 확대하는 것만이 신뢰의 분위기를 만듦으로써 개방을 촉진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외부로부터 강요될 수 없다. 북한에서든 다른 어느 곳에서든."

ㅡ2007년 프랑스 르몽드<Le Monde>지와의 인터뷰에서.#



9.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김운식 (1895년 ~ 1974년)
  • 어머니: 장수금 (1893년 ~ 1972년)
    • 남동생: 김대의 (1927년 ~ 1997년)
      • 제수: 민병숙 (1930년 ~ )
    • 남동생: 김대현 (1932년 ~ )
      • 제수: 이숙자 (1933년 ~ )
    • 여동생: 김진찬 (1933년 ~ 1976년)

  • 前 배우자: 차용애 (1927년 ~ 1959년)
    • 장녀: 김소희 (1946년 ~ 1947년)
    • 장남: 김홍일 (1948년 ~ 2019년)
      • 며느리: 윤혜라 (1951년 ~ )
    • 차남: 김홍업 (1950년 ~ )
      • 며느리: 신선련 (1954년 ~ )
  • 배우자: 이희호 (1922년 ~ 2019년)
    • 3남: 김홍걸 (1963년 ~ )
      • 며느리 : 임미경 (1966년 ~ )


10. 각종 타이틀[편집]


  • 최초의 기업인 출신 대통령
  • 유일한 전라도 출신 대통령
  • 첫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대통령
  • 유일하게 연합정권을 세운 대통령[87]
  • 정당 최고직(총재)과 대통령직를 겸임한 마지막 대통령
  • 대한민국 역대 최고령으로 취임한 대통령
  • 대선에서 최다 낙선당선된 대통령[88]
  • 역사상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한 대통령
  • 역사상 유일한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89]
  • 유일하게 3명의 자녀가 국회의원에 당선된 적이 있는 대통령[90]
  • 유일하게 지하철역에 이름이 들어간 대통령[91]
  • 윤보선과 함께 사별 이후 재혼 경험이 있는 둘 뿐인 대통령[92]



11. 대중 매체에서[편집]


김영삼, 김종필처럼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장식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를 다룬 드라마도 많다. 다만 삼김시대를 제외하면 모두 그가 야인이거나 야당 총재 시절에 방영된 작품이어서 그런지 JP, YS와는 달리 전문 배우가 없다.

  • 제3공화국(MBC, 1993) - 백윤식
  • 제4공화국(MBC, 1995) - 최민식
  • 코리아게이트(SBS, 1995) - 민욱
  • 삼김시대(SBS, 1998) - 유인촌
  • 야인시대(SBS, 2002) - 한영수
  • 영웅시대(SBS, 2004) - 김동석[93]
  • 제5공화국(MBC, 2005) - 임동진[94]
  • 격동 50년(MBC) - 이철용, 김명수


12. 명예 박사 학위[편집]


  • 1983년 에모리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 1992년 미국 가톨릭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 1992년 모스크바대학교 외교대학원 명예 정치학박사
  • 1994년 원광대학교 명예 정치학박사
  • 1995년 포틀랜드 주립 대학교 명예 인문과학박사
  • 1996년 시드니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 1998년 조지타운 대학교 명예 인문과학박사
  • 1998년 경희대학교 명예 경제학박사
  • 1998년 고려대학교 명예 경제학박사
  • 1998년 워시번 대학교 명예 인문과학박사
  • 200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 2002년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 2006년 영남대학교 명예 정치학박사
  • 2006년 전남대학교 명예 인문과학박사
  • 2006년 공주대학교 명예 교육학박사
  • 2007년 전북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 2007년 리츠메이칸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 2008년 포틀랜드 대학교 명예 인문과학박사
  • 2008년 말라야 대학교 명예 인문과학박사


13. 수상 내역[편집]


  • 1981년 -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 1987년 - 미국 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AFL-CIO) 인권상(조지 미니상)
  • 1987년 - 북미주 한국인권연합 인권상
  • 1993년 - 한국애서가클럽 애서가상
  • 1994년 - 미국 유니온신학대학교 유니온메달
  • 1998년 -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 1998년 - 무궁화 대훈장
  • 1998년 - UN 인권협회 인권상
  • 1999년 - 미국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
  • 2000년 - 라프토 인권상
  • 2000년 - 노벨평화상
  • 2000년 - 국제평화상
  • 2000년 - 노르웨이 라프토 인권상
  • 2001년 - 세계정치지도자상
  • 2002년 - 국제행동을 위한 의원연합의 민주주의 수호자상
  • 2003년 - 늦봄통일상
  • 2003년 - 제7회 만해상
  • 2003년 - 칠레 대십자 훈장
  • 2003년 - 제11회 춘사대상영화제 한국영화 발전을 위한 공로상
  • 2006년 - 코리아 소사이어티 선정 밴플리트상
  • 2007년 - 제1회 자유상(베를린 자유대학)
  • 2011년 - 제1회 동학농민혁명대상


1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2)[95]

[[무소속|
무소속
]]

3,391 (9.98%)
낙선 (5위)

1959
6월 재보궐선거 (강원 15) [96]


8,483 (28.13%)
낙선 (2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민의원, 강원 15)
6,538 (30.98%)
낙선 (2위)

1961
5월 재보궐선거 (민의원, 강원 15)
7,698 (36.5%)
당선 (1위)
초선[97]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3)

파일:민주당(1963년) 흰색 로고타입.svg

22,513 (56.10%)
당선 (1위)
재선[98]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3)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29,279 (56.28%)
당선 (1위)
3선
1971
제7대 대통령 선거
5,395,900 (45.25%)
낙선 (2위)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4,969,050 (44.28%)
당선 (2번)
4선[99]
1987
제13대 대통령 선거

[[평화민주당|
파일:평화민주당 글자.svg
]]

6,113,375 (27.04%)
낙선 (3위)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3,783,279 (19.26%)
당선 (11번)
5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6,004,578 (29.17%)
당선 (1번)
6선[100]
1992
제14대 대통령 선거
8,041,284 (33.82%)
낙선 (2위)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4,971,961 (25.30%)
낙선 (14번)

1997
제15대 대통령 선거
10,326,275 (40.27%)
당선 (1위)
[101]


1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
]]

1945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45 - 1946
정당 해산

조선신민당

1946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46 - 194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1947 - 1949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49
탈당

파일:대한청년단 글자.png

1949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49 - 1956
정계 입문

1956 - 1961
입당

1961 - 1963
5·16 군사정변으로 인한 정당 해산

1963 - 1965
창당

1965 - 1967
합당[102]

1967 - 1969
합당[103]

1969
자진 정당 해산

1969 - 1972
정당 재등록

1972 - 1985
납치 사건
내란음모 조작 사건
미국 망명

1985 - 1987
창당

198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87
창당

198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87 - 1991
창당

1991
당명 변경

1991 - 1995
합당[104]
정계 은퇴

1995
정계 복귀
신당 창당을 위한 탈당

1995 - 2000
창당

2000 - 2002
합당[105]

2002 - 2009
정계 은퇴

16. 둘러보기[편집]



[1] 일제강점기 말기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은 '도요타 다이쥬(豊田大中)'[2] 신분상 공식적으로는 1926년 1월 6일인데 사망 당시 생년월일이 기사마다 제각각으로 보도하여 김대중 측근에서 1924년 1월 6일로 통일적으로 표기해달라고 부탁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에는 1925년 12월 3일생이라 되어 있다.[3] 원적은 신안군 하의면 대리. 인근의 오림리와 함께 김해 김씨 집성촌이며 이 곳에 선영이 있다.[4] 생전 거주지. 동교동계의 뜻이 바로 이 집이다.[5] 민주당계 정당 소속 첫 번째 대통령은 민주당 구파 소속으로 당선됐던 윤보선이다. 다만 이 당시에는 국회 간선제로 선출된 대통령이고 의원내각제 시대였기 때문에 대통령 중심제 상황에서 선출된 민주당계 정당 소속 대통령으로는 김대중이 첫 번째가 된다.[6] 사실 당뇨, 관절염 등 각종 질병들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체질이 강골인지라 잔병들을 다 가지고도 상당히 장수한 편. 사망의 주 원인 중 하나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이후 충격을 받아서 기존 지병에 이어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7] 또한, 김대중 본인이 음주를 비롯한 흡연도 동시에 같이 한 원인 때문에 많은 질병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은근 대식가 기질도 있어서 이것 때문에 당뇨와 관절염등을 앓았을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이희호 여사의 내조와 나이를 먹으면서 건강에 신경써서 그런지 흡연과 음주를 동시에 한 사람치고는 엄청 장수했다.[8] 본래는 군사 정권 시절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 이름을 언론에서 직접 거론하는 걸 높으신 분들이 거북해했기 때문에, 기자들이 두 사람의 영문 이니셜을 적기 시작한 게 대명사 수준으로 유명해진 것이라고. 현대판 피휘[9] 김대중이 일본으로 잠시 피신가 있었을 때의 인터뷰를 보면 민주주의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다.라고 언급했기에 김영삼과 같이 자유주의를 지향했었다.[10] 92년 대선 패배 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하면서 3가지 주제(제3의 길, 지리와 국가 발전의 상관관계, 영국 명예혁명사)를 고민해보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제3의 길을 주창한 영국 석학 앤서니 기든스(1938년생)가 한창 활동 중이라 관련 자료, 정보를 구하는 것도 쉬웠다.[11] DJ 본인만 용서하는 게 아니라, 영국 명예혁명 사례를 들어 지지자들을 설득하려 노력하기도 했다. 영국인들은 쫓겨난 제임스 2세의 망명길을 사실상 막지 않았고, 프랑스에 거점 세력을 마련해 손자대까지 왕권 수복을 꾀했는데도, 이를 손대지 않고 자연스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도록 놔두었다는 것. 그러면서 정치 보복 대신 당사자가 명예 회복을 하는 게 더 낫다는 것과, 악행을 저지른 이들은 그에 상응하는 명예의 손상이 이뤄지는 정도면 된다는 일종의 선까지 제시하였다[12] 2013년 12월 5일 2014 브라질 월드컵 조 추첨식 하루전에 세상을 떠났다.[13] 물론, IT산업 진흥 덕분에 나중에 대한민국이 IT산업 상위권에 올라갈 수 있도록 초석을 마련해주었었다.[14] 반(反)김대중 파벌 중 왜곡론자들이 색깔론으로 김대중을 자주 공격했지만 정작 김대중은 자신을 몇 번이나 구해준 미국과의 관계를 우선시했었다. 그래서 한총련과 같이 종북관을 가진 시민단체들에게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본인도 과거 한국전쟁 당시에 인민군에게 죽을 뻔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평화주의를 선호하기는 했으나 공산주의는 절대로 좋아하지 않았다.[15] 김대중이 박정희랑 대선싸움 당시에 국민들 앞에서 말한 연설문을 보면 "남북관계 문제도 북한이 파괴공작원을 보내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끼리 스포츠 관람도 하고..."라는 대목을 보면 김대중도 김영삼과 같이 반공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16] 애초에 미국과 많이 갈등을 빚었던 정권이 바로 군사독재정권 시절이었었다. 당장 지미 카터 대통령은 박정희에게 한국의 인권문제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으며 주한미군 감축을 내걸며 한국을 압박했었다. 그리고 다음 정권을 받은 메카시즘을 달렸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조차도 전두환의 5.18 광주 민주항쟁 당시의 끔찍한 행보와 지미 카터의 부탁으로 김대중 구출에 힘썼고 나중에 6월 민주항쟁 당시에 전두환을 향해서 간접적으로 압박해 시위대를 향해서 공격하지 말라고 전보를 전할 정도로 군사독재 시절의 한미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17] 특히, 정병국 의원은 김대중이 뭐한 게 있냐며 김영삼을 치켜세우겠다고 김대중을 비난했다가 당내에서 비난 받은 적이 있다.[18] 그러나 이런 보수쪽의 불신과는 별개로 그의 임기말이던 2002년 12월, 청와대에서 당시 김대중대통령은 최근(2002년 당시) 붉어진 반미감정에 대해 공무원 190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의정부 여중생 사망사건이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문제로 비약돼 ‘미군 나가라’고 하는 것은 안된다”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필리핀이 수빅만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미군을 나가라고 했을 때 일부에선 설마 나갈까 했지만 미군이 철수, 경제와 국방에 큰 문제가 생겼다”면서 이 같이 말했다. 김 대통령은 이어 “우리는 안보를 위해 미군을 있도록 하는 것이고, 미국은 미국대로 동북아 안정을 위해 와 있다”면서 “미국은 우방으로서 국가 이익에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대통령은 “한미SOFA는 일본 독일과 비슷한 수준”이라면서 “운영에 있어서 개선하기로 미국과 합의했으며 얼마든지 개선하면 된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 반미감정 반대 메세지[19] 클린턴, 김대중 당선자 만나고 싶다[20] 김대통령 핵,미사일 등에 대해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전화[21] 김대중 후보 1997.7.31 대선토론회 연설[22] 미국.일본 방위협력지침 개정, 주변국들의 우려 높아져[23] 안기부의 야당후보 낙선공작 청와대 반응[24] 김대중 대통령 반미감정 반대 메세지[25] 예외적인 사람이 있다면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 현재는 민주평화당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26] 재미있게도 김영삼에 대한 평가와는 정반대였다.# 썰전에서 일화를 분석한 바 있는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김영삼과는 달리 궁핍했던 삶 때문에 매사에 신중한 자세가 생긴 것이라고 보았다.[27] 그러나 질병치료로 인한 형집행정지 때문에 형량에 비하여 실질적으로 박지원이 감옥에 있던 기간은 짧았고, 최종적으로 박지원의 형집행정지 기간에 노무현이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박지원을 풀어주면서, 김대중과 노무현은 화해를 하게 된다. 기자들이 보도한 풍문의 후일담으로는 사면 후 김대중이 청와대에 사람을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도 하고,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는 설도 있다. 참고로 박지원은 형집행정지 기간에도 김대중의 자택에 자주와서 살다시피하며, 당시 80대가 되어 건강이 많이 상한 김대중을 사실상 모셨다.[28] 여담으로 노무현의 영결식에서 하려던 추도사는 이명박 정부의 반대로 인해 현장이 아닌 한 책의 기념문으로만 남게 되었다.#[29] 전쟁, 교통사고, 납치, 사형선고.[30] 그나마 김대중의 역량과 사람보는 안목을 높이 평가한 노태우가 집권한 88년(60대 중반)부터 상황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31] 정동영이 일산의 총재 자택으로 출근하면, 전날까지 이런저런 사람들과 을 마셨던 박지원이 차 안에서 운전사와 졸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고.[32] 정가에서는 흔히 "기름칠한다"는 은어를 쓴다. 언론인들과 시간을 내어 소식을 주고받거나, 관계개선의 소통창고로 이용된다고. 동아일보를 제외한 기존 보수언론들과 관계가 껄끄러웠던 DJ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하단에도 나와있지만, 박지원은 원래 미국에서 사업을 하며 뉴욕 한인회장까지 맡을만큼 확실하게 기반을 다졌던 사람이라, 그 사업가 경험을 활용하고자 한 인사로 추정.[33] 읽은 책만 2만권에 달했다고 한다. DJ의 자택을 방문한 사람들이, 서재에 소장된 수많은 책 대부분이 하나하나 손때가 묻어있는 걸 보고 놀라곤 했다는 일화가 있다.[34] 박태준을 영입하는 대 공들인 주된 사유 중 하나가 "기업체를 운영해본 덕분에, 규모가 큰 실물 경제에 매우 밝은 인물이기 때문"이었다는 후문이다.[35] 국민의 정부 초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장성민이 밝힌 말에 따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넥타이를 매우 좋아했으며 기분이 좋으면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 선물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조 바이든이 받은 녹색 넥타이는 본래 장성민씨가 2001년 1월 생일선물로 드린 것이었다고. [36] 이게 일반적인 필리버스터의 모습이다.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원고 뿐만이 아닌, 연사가 지금까지 머릿속에 담은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기 때문에 별의별 내용이 다 나오며, 어떻게든 관련 현안과 연계할 만한 내용을 고르는 것 또한 연설자의 역량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요소. 2013년 미국 버락 오바마의 의료보험 개혁에 맞서고자 21시간 동안 연설한 테드 크루즈 의원의 경우는, 쓸만한 소재가 떨어지자, 동화책 내용부터 영화 스타워즈 대사까지(..) 끄집어내기도 했다. 사실 한국의 필리버스터와 다르게, 미국에선 성경책을 읽든, 전화번호부를 읽든 상관이 없어서 가능했던 이야기다. 한국의 필리버스터에서는 관련이 없는 내용을 1분동안 하거나 아예 연설을 멈추면, 자동으로 다음 주자에게 넘겨야 하고, 화장실같은 해결도 일일이 의장의 허가를 받아야한다.[37] 김대중 平民黨 총재가 9일 상오 駐韓일본대사관저의 히로히토日王의 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38] 김대중 대통령의 창씨개명한 이름은 '도요타 다이쥬'다.[39] 물론,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것이지 정황상 친일민족반역자스러운 행위는 보이지 않았기에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애초에 친일민족반역자 명단에도 없으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40] 김대중(金大中(김대중))대통령은 8일 오후 숙소인 영빈관에서 목포상고 재학시절 은사였던 무쿠모토 이사부로(椋本伊三郎(양본이삼랑)·80)와 20여분 동안 만났다.[41] 김대통령 일본인 은사 모쿠모토 해후[42]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43] 부시 대통령 '북한 믿을 수 없어'[44] 부시는 이후 공식 석상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this man', 노무현 전 대통령을 'easy man'으로 부르는 결례를 저지른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45] 자료에 따라선 먼저 흑산도 산이 아닌 수입산을 내놓았고, 김대중의 이름을 언급하자 그제서야 흑산도 산이 아님을 고백했다는 이야기도 있다.[46] 대통령 임기 시절에는 가끔씩 고향의 해산물을 공수해왔다.[47] "정치 안 해요. 내가 안 해요. 이건 내 문제니까 내가 안 하는 거요. 누가 날 강제로 시키는 거요."라고 했으나 곧 복귀.[48] 여기서 말하는 '민간인'이란 장성급 장교출신이 아닌 사람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군 복무 경험이 아예 없는 사람(모병제 국가) 또는 최소한의 군복무만 한 사람(징병제 국가)을 뜻한다.[49] 테드 카플이 진행하는 미국 ABC 나이트라인[50] 70년대의 대표적인 언론인으로 능변으로도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51] 젝스키스의 당시 매니저는 소녀팬들을 때리는 걸로 유명했다.[52] 전부 다 멤버 본인들이 증언한 내용들이다. 141218일자 해피투게더, 160423일자 무한도전, 160601일자 라디오스타 등 방송에 나온다.[53] 김대중의 퇴임시 나이는 만 79세 1개월[54] 김대중의 목표는 모든 사형수의 감형이었지만 사법당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55] 사실상 '기습'이 맞다. 김대중의 회고에 따르면 아침 운동을 하러 집 대문을 열었더니 이경규와 제작진들이 있었다고.[56] 호주 말 목장주를 취재한 기자가 이를 확인.[57] 공교롭게도 약현성당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이 순교한 순교터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58]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현하다 참수형을 당했다.[59] 다만, 장례미사에서 김대중의 시신은 국장을 위해 국회에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 없이 미사를 진행했다.[60] 이 당시에는 원음방송 본사가 익산에 있었다.[61] 모친 장수금 여사가 원래는 소실이었다는 요지[62] 역시 달변이었던 JP(김종필) 역시 비유법과 사자성어 활용을 깊이 연구하였다. '상대를 논리적으로 설득하고자 진력'한 DJ와는 좀 다르게 VS 중요한 행보 결정 순간마다 '시의적절한 짧은 문구'를 올린 모습이 많이 비춰졌으며, 나중에는 중화권 국가 지도부 인사들이 JP의 이런 면모에 호감을 표할만큼 화제가 되었다고.[63] 4분 15초~~. 본인이 추진했던 일에 대한 기념행사였지만, 발언 서두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덕담으로 시작해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였다. 위의 발언도 "양심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의로운 사람들이 계속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64] 84년 12월 미국에서 귀국 하기 전에 열린 송별 자리에서도 행동하는 양심이란 표현을 썼다. 늘 새로운 표현을 강구하고자 한 노무현과 달리, DJ는 유권자가 기억하기 좋도록 사전에 심사숙고한 어구를 꾸준히 반복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연설문 비서관 강원국이 DJ가 사례로 제시한 일화 대신 다른 이야기로 바꿔오면, 다시 이전의 것으로 내용을 고쳐 활용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65] 행정(김영남)-국방(김정일) 2원화 체제로 통치되는 북한의 행정수반.[66] 2000년 6월에는 국정 공동운영자인 JP도 이 사자성어를 휘호로 발표해 언론에서 그 의미를 유추해보기도 하였다.[67]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줄곧 언급하고 재단 명칭(사람사는세상 노무현 재단)으로까지 썼던 문구이다. 참고로 이때가 2009년 6월로 DJ가 세상을 떠나기 2달 전이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기력을 짜내어 고인의 특징과 바라던 바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2017년 1월,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노 전 대통령의 고향 봉하마을(김해)에서 묘역 참배를 하고 방명록에 이 문구를 언급했지만, 기억착오로 실수가 나와 묘한 대조를 이루기도 하였다.[68] 자료의 영상은 일부분인 2분 54초로 편집된 것이다. 당초 장례식 현장에서 읽고자 했으나 여권에서 반대의사를 표명해 시일이 지나 공개되었다고.[69] 하지만 이듬해 5월 전국 1회 지방선거(6월)를 앞둔 시점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는, 지방선거 결과가 정계 복귀 여부를 가늠할 기준점이 될 거라는 암시를 남긴다.[70] 이건 정확히 말하자면 김대중도 사람인지라 한 발언에 가깝다. 1994년 기준으로 김대중은 정계복귀 여부와는 상관없이 지쳐서 이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71] 출처, 장성민-김종혁 공저 <김대중 다시 정권교체를 말하다>[72] 성경 아모스 5,24("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에서 발췌한 것으로 보인다.[73] 80년대 YS의 비난에 대해(46번째 문단), 97년 DJT 연합(김대중 + 김종필 + 박태준)을 성사하고자 김대중 - 박태준 두 사람이 대담을(9번째 문단) 하는 자리에서, 그리고 동년 10월 관훈 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모두 이런 요지로 답변하였다.[74] 위의 '거짓말장이' 단어와 결합, DJ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공통관심사로 굳혀진 파괴력 강한 단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구도를 고안하고 + 87년 대선 당시 DJ에게 직접 질문하며 몰아세운 사람의 이름도 김대중(기자).[75] 15분 23초 즈음부터 나온다. 당시 시대가 시대인지라 음질은 다소 좋지 않지만, 들리기는 다 들린다.[76] 연설 전문은 여기에 있으며, "마지막으로~" 부분은 거의 연설 끝에 있다.[77] 실제로 이 선거 이후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해버려 결론적으로는 맞는 말이 되었다. 한편 그 시기 박정희 당시 대통령도 거짓말은 아닌 말을 했는데, 그게 바로 유명한 "이번에 다시 저를 뽑아주신다면 다음 부터는 국민에게 표 달라고 안하겠습니다."였다.[78] 설령 이쪽의 세가 더 강할지라도 마음가짐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말. 1990년, 여권의 3당합당에 합류하지 않은 통일민주당 소속 의원 6명(이기택, 김상현,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 이철, 박찬종)이 DJ의 옛 평화민주당과 동등한 비중으로 민주당을 창당할 수 있었던 것도 이기택 의원의 완고한 "지분" 요구를 DJ가 양보하고 수락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79] 김대중 대통령이 추진한 햇볕정책이 이 문장과 흡사하다.[80] 장 폴 샤르트르의 명언과 비슷하다[81] 2020년 시점, 한국은 "유사시 국무총리령에 의거, 50세 남성까지 현역으로 동원 가능"하다.[82] 역시 토인비를 접해본 다른 정치인의 수사와(맨 밑에서 2번째 문단) 비교해보도록 하자. 단, 원 발언이 경어로 이루어졌음을 감안하여 볼 필요가 있다.[83]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6년 10월 11일 전남대에서 ‘한반도의 현실과 4대국’이라는 강연회에서 스스로 민주주의 일군 한국과 달리 일본은 민주주의 주체세력이 없어 군국주의가 부활할 것이라며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예언을 한 적이 있었다.[84] 외국어 공부를 하려면, 그 나라 문학작품을 읽는 게 가장 낫다는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문법을 정확하게 준수하며 말할 경우, 상대방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문법 공부에도 공을 들였다고[85] 클린턴 행정부가 유화적이기만 한것은 아니었다. 유럽 코소보 사태에는 무력 공습(코소보 전쟁)을 감행했으며,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도 한때 대북 선제 타격을 계획했으나 한국의 막대한 피해가 우려되어 그만뒀다고 자서전에서 언급한바 있다.[86] 2002년 일본과 북한간에 국교정상화 기조로 정상회담과 '북일평양선언'이 있었는데, 고이즈미와 김정일의 협력에 DJ가 상당한 영향을 준것으로 알려져있다. 북일평양선언에는 국교정상화 교섭 재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사과와 경제협력, 일본인 납북 문제 재발 방지 등이 담겨있다.기사[87] 물론 끝까지 같이 가지 못하고 임기 중 대북문제를 놓고 시각차를 보여 자민련과는 결별한다.[88] 7대 대선, 13대 대선, 14대 대선에서 3번 낙선[89] 다만 1904년 대한제국 부산에서 출생한 미국인 찰스 피더슨이 여덟살때까지 살다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가 호스트게스트화학 분야의 연구 실적을 인정받아 1987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 위원회 홈페이지상 출생지가 한국으로 표기돼 있다.[90] 장남 김홍일이 3선 의원, 차남 김홍업과 삼남 김홍걸이 초선 의원 출신이다.[91] 광주 도시철도 1호선김대중컨벤션센터역.[92] 이승만과 박정희도 재혼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사별 이후 재혼이 아닌 이혼 이후 재혼이다.[93] 작가의 전작 야인시대에서 김형사 역을 맡았다. [94] 전작인 제4공화국에서는 김영삼 역으로 출연했다.[95] 현재의 전남 목포시 일대.[96] 현재의 강원 인제군 일대.[97] 전임자 전형산, 반민주행위자 공민법 제한법(즉, 자유당 독재 부역)으로 자격 상실. 5.16 군사정변으로 자격정지, 당선 통보 후 실제 임기는 약 12시간.[98] 현재의 전남 목포시 일대, 1965년 민중당으로 흡수.[99] 1972년 10월 17일 자격 박탈 (10월 유신)[100] 1992년 12월 19일 사퇴 (대선 패배로 정계 은퇴)[101] 자민련과 선거연대 (DJP연합)[102] 민정당과 신설 합당[103] 신한당과 신설 합당[104] 민주당과 신설 합당[105]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