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군이 되어보세!/개변된 역사/4부

덤프버전 :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
1.1. 철도
4.1. 대한령 미주
4.1.1. 북미주
4.1.2. 남미주
4.1.3. 빙주
4.1.4. 중미주
4.1.5. 서미주
4.1.6. 동미주
4.1.7. 동변
4.2. 캐나다 지역
4.3. 서반아령 신서반아멕시코(맥고국)
4.4. 프랑스령 누벨프랑스 → 누벨프랑스 제국(신불랑국)


1. 개요[편집]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의 4부에서 작중 세상에 생긴 변화들을 소개하는 문서.

4부 시작 시점의 세계지도
대한-신불랑 회담 이후 시점의 세계지도
4부 시점 세계지도


1.1. 철도[편집]


대한으로부터 시작된 철도가 유럽으로도 전파되나 원역사도 그렇지만 궤간 통일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이다.

  • 대한식: 궤간 1500mm(대한식으로 5척, 미국식으로 4피트 11인치)로 원역사의 광궤와 비슷하다. 대한, 건주 양국, 러시아, 대한령 미주, 신불랑, 미국이 채택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태평양 표준궤라고 부른다.

  • 프랑스/라인 표준궤: 궤간 1300mm(프랑스식으로 4피드)로 원역사의 스코틀랜드 협궤와 비슷하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표준궤라고 명명했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독일 연방도 이 규격을 받아들였지만 국가 자존심 상 라인 표준궤라고 명명한다.

  • 영국식: 아직 정확한 수치는 언급이 안되었지만 대한식보다는 약간 좁다고 하니 원역사의 표준궤(1435mm)일 가능성이 높다.

  • 일본식: 아직 정확한 수치는 언급이 안되었지만 일본의 지형과, 타국과 철도망 연결이 어차피 안되는 점 때문에 원역사처럼 협궤를 채택했다고 한다.

  • 후송식: 영조척 3척(대략 960mm)의 협궤. 어차피 수로 운송이 주류고 철도는 보조적인 역할만 맡기에 비용을 절감하고자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매우 좁은 협궤를 채택했다.

2. 대아주[편집]



2.1. 대한[편집]


대한국
大韓國

파일:대한민국 국기(1945-1948).svg
파일:조선(명군이 되어보세)의 국기.png
국기
군함기
위치
한반도, ], 동토[1],
구주총관부, 대남도, 주산 군도,
아모 열도, 연역주,
빙주, 북미주[2], 남미주, 동미주,
동변[3], 중미주, 서미주,
누손주[4], 해사도, 영귀 제도
번국
하와국, 조홀국, 술루국, 유구국, 안남국
역사
[ 펼치기 · 접기 ]

수도
황도 한성부(皇都 漢城府)
민족
한민족, 여진족 등 퉁구스인,
한족, 일본인, 대만 원주민, 묘족, 말레이인, 필리핀인
유럽계 백인
에스키모, 아메리카 원주민, 하와이 원주민
언어
근대 한국어
문자
한자, 국문
종교
유교(성리학, 국교),
불교, 천주교, 무속 신앙
정치체제
전제군주정
국가원수
태황(太皇)(임금)
국성
전주 이씨(李)
연호
건원(建元) (1632년 ~ 1650년)
연가(延嘉) (1651년 ~ 1678년)
건복(建福) (1679년 ~ 1699년)
건흥(建興) (1700년 ~ 1740년)
원강(元康) (1741년 ~ 1775년)
영태(永泰) (1776년 ~ 1782년)
원평(元平) (1783년 ~ 1829년)
광덕(廣德) (1830년 ~ 1834년)
흥녕(興寧) (1835년 ~ )
통화
대한통보, 전(錢)<푼(分)<냥(兩)


2.1.1. 정치[편집]

원 역사에서 1차 왕자의 난으로 조선조 내내 역적 취급 받다가 1860년대에 이르러서야 흥선대원군에 의해 관직이 회복되었던 정도전이 여기서는 원 역사보다 정통성과 권위가 막강한 대한 황실을 배경으로 둔 덕분에 태황 원평제가 대한(조선)이 건국되는데 큰 공훈을 세운 점은 인정해야 한다며 자비를 베풀어 원래 역사보다 40년 빨리 신원되었다. 마찬가지로 왕자의 난과 관련된 태조의 후처 신덕왕후 역시 복권되었다.

원 역사처럼 중앙 정계의 주요 직위는 한양에 세거하는 경화사족들이 점차 독점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진입장벽이 있을 뿐 경화사족으로 편입은 가능하며, 4색 붕당은 있으나 원역사와는 달리 당쟁 없이 공존하고 있다. 영남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동인, 기호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 천주교도들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 압록-두만강 이북 북한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북인으로 나뉘어져 있다. 외지 출신의 관료들은 대체로 비교적 개방적인 남인과 북인에 들어간다. 나라가 큰 굴곡없이 번영해서인지 세도정치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으며, 가문들 간의 긴장관계도 어디까지나 내부의 권력투쟁이지 황권을 넘보진 않으며 분쟁도 의견충돌에서 그치고 있다. 다만 경화사족들이 요직을 독식하고 외지 출신을 차별하는 문제는 있다. 현재 가장 우세한 붕당은 서인이라고 한다.

  • 대명공
명나라 황실의 후예로써 대한에게서 그동안 받은 은혜에, 목종 때 서나라가 운남으로 밀려나면서 한양의 서나라 주재관들이 대명공에게 귀부하는 것을 대한이 허락한 은혜까지 입고, 대명공이 대한 태황에게 보내는 축하 서한이나 공물도 더 격상되는 등 태황에게 더 종속적인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대명동 내부에서는 대명공의 세자인 대공자를 전하라고 부르는 등[5] 외왕내제를 넘은 '외공내제' 놀음을 하고 있다. 물론 대명동 밖에서 그러면 큰일난다는 건 본인들도 잘 알고 있으므로 외부에 나가면 호칭에 단단히 주의를 준다.

무종 이래 한 번도 국력이 쇠퇴하는 일 없이 수백 년 동안 성장만 거듭해 동북아시아 최강의 강대국이 되고, 장조 때 경인왜란을 마지막으로 200년이 넘도록 본토를 침략당한 경험이 없어져 조정, 민간 가릴것 없이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넘어 국수주의가 퍼져있다. 그리하여 엄연히 대등한 황제국이자 황실이 혈연을 맺은 형제국인 건주 양국에 대해서도 조야를 막론하고 오랑캐라고 무시하는 분위기로, 건주 양국도 서서히 불만을 품어가고 있다. 여기에 광덕제와 태자 재석이 서부 캐나다와 옐로스톤 지역을 신불랑에서 구입하려 하자 본토의 시보들이 '미주 놈들이 장난을 쳐서 황상의 눈을 가린다'며 미주 백성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등 지역갈등까지 팽배해 있다. 또한 외지 출신의 관료들은 모두 합쳐도 1할을 넘지 못하며[6][7] 승진에서도 큰 차별을 받는다. 이로 인해 미주 중 먼 외지에서는 불만이 상당하며 그 영향으로 공화주의까지 들어온 상태이다. 이러한 국수주의와 지역주의가 4부에서 재석이 겪을 위기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 유구 번국화와 아모국 포기
1830년 제2차 경인조약에 따라 대한이 유구를, 일본이 아모국을 정식으로 번국으로 들이기로 하고 설득 작업을 거쳐 1831년 양력 4월 한양 천단에서 정식으로 유구 황제 상육이 대한 태황 광덕제에게 유구 황제위를 선양하는 선위식을 갖고 유구는 대한의 번국인 왕국으로 격하된다. 대한 태황의 칭호도 '대한의 태황 겸 유구의 황제'가 된다. 반면 유구 황제의 칭호는 명에 칭신하던 시절로 돌아가 '유구국 중산왕'이 되었다.

  • 역사관
대한의 공식적인 역사관은 단군으로 시작된 천명이 기자를 거쳐 삼한으로 전해지고, 삼국시대 때 갈라졌다가 신라로 합쳐지고, 고려, 그리고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부여, 가야, 동예, 옥저 등의 소국들은 천명을 받지 못한 지방정권, 발해는 신라가 힘이 부족해서 얻지 못한 고구려의 잔재로 취급한다. 또한 대동양 주변 강역을 지배하는 정통성을 문무왕의 유훈에서 찾아 신라 정통론을 밀고 있다.

  • 친왕의 시강원, 익위사 폐지
대한은 칭제건원한 이래 태자 뿐 아니라 적통 친왕들에게도 시강원, 익위사를 배정하였는데, 재석이 흥녕제로 즉위한 후 이것이 자신이 과거 중종이었을때 경험한 것처럼 친왕들의 세력 강화라는 문제가 있으므로 폐지하고, 태자에게만 시강원, 익위사를 배정하게 한다. 친왕들은 다른 종친들처럼 종학에서 공부하도록 하고 경호도 금군에서 맡도록 한다.

2.1.2. 언어[편집]

  • 마트카
폴수국어외래어. 후궁 소생 황자녀들이 친모를 부를 때 쓰는 호칭. 폴수국어로 어머니를 뜻하는 단어인데, 3부에서 귀비 소씨 올렝카가 자기 딸 루시아, 율리아에게 공식적으로는 어머니로 불리지 못하는 법도를 우회하기 위해 자신을 부를 때 알아듣는 이가 거의 없는 폴수국어로 마트카라고 부르도록 했던 데에서 유래했다. 올렝카 사후 이 단어는 후궁 소생 황자녀들이 친모를 부르는 명칭으로 정착하였다. 3부 당시 사람들도 대충 마트카가 무슨 뜻인지는 알았지만 당사자들인 재석과 상희가 그걸 이유로 올렝카를 벌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넘어간 듯하다.

2.1.3. 지역[편집]

3부에서 중종이 경희궁을 세운 이후 크게 발전하여 4부 시점에서는 불야성을 이룬 번화가가 되었고, 유럽의 전란을 피해 온 유럽 이민자들이 정착해 상업에 종사하여 정통 프랑스식 아이스크림 전문점이 있을 정도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서울 연희동 지역. 서나라의 암군 함녕제가 다른 나라 대사관보다 더 크고 화려한 대사관을 짓기를 원하여 은 백만냥을 들여 4층짜리 호화건물 '대서관'을 지었는데, 함녕제가 청나라에 잡혀가고 서나라가 운남에 갇히게 되면서 본국과 연락이 단절되자 청과 후송이 전리품으로 간주하고 소유권을 다투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서나라 주재관들은 청이나 후송에 귀부하기는 싫어 명나라의 후예인 대명공에게 귀부하겠다고 선택하여 대서관은 대명공의 한양 저택인 '대명관'으로 바뀌게 되고, 그 주변에 점차 새로 중원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모여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고 유흥가도 형성되어 '연희동(宴姬洞)'으로 불리다가 좀더 점잖은 한자인 '연희동(延禧洞)'으로 바뀌었다.

신불랑과의 회담에서 나폴레옹이 북부 캐나다 지역 땅을 추가로 대한에 팔겠다 제안했다. 재석은 당장은 춥고 황량해 쓸모없는 땅으로 여겨지지만 향후 자원의 보고가 될 것임을 알고, 대한이 안 산다고 하면 영국에게 팔 가능성이 높아 차라리 사들여 완충지대를 만드는 게 낫다는 점에서 태황 광덕제와 의견이 일치해 매입을 결정하고, 여기에 추가로 천혜의 자연경관인 옐로스톤 지역도 돈을 더 얹어 매입하려 한다. 그러나 조야에서 넓기만 하고 별 쓸모도 없는 땅을 백성들이 낸 세금으로 사들이려 한다며 격하게 반대해서 결국 캐나다 지역은 포기하고 옐로스톤만 샀다.

  • 신도시
영종의 명으로 국상 정약용이 대한 본토의 양 끝 관문인 부산과 의주에 대대적인 신도시 건설을 시행한다. 부산은 부산진과 동래부를 통합하여 종2품 부윤이 맡는 신도시 부산부를 건설하였고, 의주는 실제 역사의 신의주 자리로 옮기고 압록강 건너편 실제 역사의 단둥 지역까지 다스리는 신도시 의주부를 건설하였다. 또한 수원에는 원역사와 같이 수원화성을 건축하였다.

  • 행정구역 개편
북한의 6주 중 국경인 요서주를 제외하고 요동주를 2개, 부여주와 연해주는 3개로 나누고 속말주와 영락주는 명칭만 변경하여 10도로 만들었다. 요동주의 서쪽은 요심도, 부여주의 가장 남쪽은 발해도이다. 연해주는 남쪽의 연해도, 북쪽의 연흑도로 갈라졌고 연해주 관할이던 현토주(사할린) 역시 현토도(玄汢道)로 개편하였다.

  • 주산군도
명목상 명의 마지막 영토였으나 유구 합병 논의와 함께 주산군도 문제도 거론되자 재석이 미리 나서서 대명공부로부터 정식으로 헌납받고 종 3품 도호부사가 파견되어 다스린다.


2.1.4. 인구[편집]

1823년 시점에서 본국 인구는 남한(한반도) 2200만 명, 북한(북방영토) 1200만 명으로 나온다. 그외 미주 8백만명, 누손주 등 해외영토까지 합치면 약 5천만 명 이상이라고 한다. 한양 인구는 100만 명.

4부 256화에서는 남한만 3000만에 근접하고 북한을 포함한 본국 전체는 4500만, 북구주 180만, 대남도 650만, 미주 1200만, 누손주 600만으로 총합 7100만 명 정도로 인구가 증가했다고 언급된다.


2.1.5. 군사[편집]

중종의 3자이자 화학자인 정친왕 이권이 현종 재위기에 뇌홍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고, 그의 차자 웅천공 이헌이 연구를 이어받아 실용적인 퍼커션 캡을 만들어낸다. 영종 시절부터 영국에 뇌홍 특허권을 판매하여 30년동안 80만냥의 특허료를 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뇌관식 총기가 비싸 1823년 시점에서도 금군과 기병대만 뇌관식 총을 장비하고 있다. 연발총도 시제품이 여럿 개발되었으나 실용화는 아직 안 됐다. 하지만 덕후 기질이 강한 광덕제가 현역 관군의 총을 전부 뇌관식으로 교체하도록 하여 신품 생산 외에도 기존 수석총의 격발부를 뇌관총으로 교체하는 사업을 통해 1835년 경에는 교체가 거의 완료된다.

군복은 디자인은 3부와 큰 차이 없으나 재질이 동복은 면직 솜누비옷에서 모직으로, 하복은 면직에서 면마혼방으로 변경되었다. 입대 시에 동, 하복 각각 2벌을 지급하고 추가로 필요할 경우 개인이 구입해야 한다. 가슴의 휘장과 전립에 꽂은 깃털[8]로 소속 군영을 표시하고, 군관과 기병은 장화를 신고 보병은 단화에 각반을 착용한다. 보병들은 투구, 갑옷, 창, 활 장비가 폐지되어 전립과 전복 차림에 총으로만 무장하고, 기병들은 투구와 활은 장비하나 갑옷은 폐지되었으며 친위기병들만이 의장용 금속제 흉갑을 착용한다.

대한의 주력함은 이미 전열함과 증기 장갑함으로 바뀌었지만, 원역사의 HMS 빅토리USS 컨스티튜션처럼 기념함 명목으로 12척의 판옥선과 3척의 거북선이 현역으로 남아있다.

2부 김지 장군의 후손이자 군기시 제조인 김귀훈이 조상 김지의 유지를 이어 발명했다.

증기기관차가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군용 장갑열차가 만들어지고, 군 수송대 호위를 위한 증기 장갑트럭, 장갑버스도 개발되어 배치된다.

중량 제한이 있는 증기 장갑트럭, 버스의 장갑판을 강화하려고 실험하다가, 강철판과 참나무 목판을 몇겹씩 적층하면 같은 두께의 그냥 강철판보다 방호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어 복합장갑의 개념이 만들어진다.

2.1.6. 치안[편집]

  • 총기 소지의 자유
조선의 원래 전통대로 민간의 총기 소지에 규제가 없으며, 시보에도 총포상 광고가 자유롭게 실린다. 외국산 총기도 자유롭게 수입되어 유통되고 있다. 민간에 유통되는 총기는 무종 시대 수준의 화승총부터 뇌관총까지 다양하다.

  • 범죄자 지문 등록
지문이 사람마다 다 다르고 평생 불변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원평제가 한번 수감된 범죄자들의 지문을 찍어 등록하여 재범을 방지하도록 조치한다. 하지만 한번 수감된 범죄자들만 대상으로 하고 감식 기술도 부족하기 때문에 범죄 수사에 활용되기는 아직 어려운 상태.

압슬을 당하면 다리가 상해 장애인이 되는 점을 딱하게 여긴 영종 원평제가 즉위하자마자 폐지했다. 의금부에서 처음엔 난감해했지만 수십년이 지나니 없이 수사하는 것도 익숙해졌다고 언급되는 것을 보면 다른 혹형도 폐지될 가능성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2.1.7. 경제[편집]

  • 포목 산업
기계 성능은 영국에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좋다. 다만 좋은 노동자 대우의 반작용으로 낮은 인건비의 후송제, 영국제 면포를 압도하지는 못하고 있다.

  • 한공과 묘노
대한에서 단순 노무직, 3D업종은 대부분 이들이 맡으며, 같은 한족이어도 청에서 온 자유인 노동자는 한공, 후송에서 팔려온 자는 묘노라고 구별하는 전통도 이어지고 있다. 한공은 자유인이라 계약기간이 끝나면 귀국할수도 있고 대한에 남아 화교로 살 수도 있다.


2.1.8. 외교[편집]

  • 대송관계
3부에서 국교를 수립 후 대한에서는 형제국 청을 더 중시하는 것은 여전하며 군부는 청에 기울어져 있지만, 교역 수익과 안정된 외교 환경의 현상유지를 바라는 관료들은 후송과 사이가 나빠지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서나라 패망 후 서나라 대사관인 대서관의 귀속 문제를 두고 청과 후송이 다툴때 한쪽 편을 못 들고 4년이나 끌 정도로 관계가 호전되었다.

  • 대청관계
여전히 우호국으로 지내고 있지만 자신들을 여전히 오랑캐로 취급하는 풍조에 대해 불만이 쌓인 상태이다. 또한 이전과 달리 전쟁기록 조공도 중단된 상태다. 때문에 우호관계 유지를 위해 재석이 태자의 신분으로 처음 건주 양국의 명목상 공식 수도인 북경에 방문하였다. 하지만 청나라가 후금의 왕위계승에 개입하여 건주일통을 노리려 하는 점에서 불씨가 남아있다.[9]

  • 대영관계
특별한 마찰 없이 지내고 있으며 서양 국가 중 몇 안되는 상주 공사를 파견하고 있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국이 인도를 대한의 영향권인 뱅골을 제외하고 모조리 장악하며 마찰이 생길 가능성이 생기고 있다. 영국 정부는 아시아 최강국이자 북태평양을 지배하는 대한을 적대시하는 걸 피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뱅골이 당시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인 만큼 영국이 탐을 낼만한 땅이고 또한 원 역사의 그레이트 게임 당시 영국의 편집증적인 태도를 감안하면 대한과 적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대미관계
특별한 마찰 없이 지내고 있으며 서양 국가 중 몇 안되는 상주 공사를 파견하고 있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포경선 기항 문제로 인한 갈등이 있다.


2.1.9. 사회[편집]

  • 신문궤 제도
현종 때 과거의 신문고 정신을 되살려 궐문 앞에 신문궤라는 큰 뒤주를 두고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상소문을 넣고 갈 수 있게 하여 언로를 보장했다. 원칙적으로는 제출자의 이름을 써야 하지만 감독을 느슨하게 하다보니 간혹 무기명 투서도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 건흥옥 난로 보급
중종 건흥제 때 한양 대화재 후 새로 지어진 건물들을 서양식 3층 벽돌 건물(건흥옥이라 불린다)로 지으면서 2, 3층은 온돌을 설치하지 못해 겨울이 되면 2, 3층 거주자들이 1층으로 내려와 더부살이를 하던 문제가 현종 연간부터 서양식 철제 난로가 보급되면서 해결되었다. 하지만 난로를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이 바닥을 파내고 일본식 이로리를 임의로 설치하거나 싸구려 옹기 난로가 팔리는 등 화재, 안전사고 문제도 빈발하고 있다.

난로가 보급되면서 건흥옥 2, 3층 거주자가 1층 거주자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지자 층간소음이나 오물 투척 등의 문제가 빈발하여 사회 문제가 되고 순검들이 출동할 정도의 싸움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 사설 소방대 국유화
소방도감 외에 별도로 존재하던 사설 소방대들은 출동할 때 돈을 받는다는 것이 논란이 되었으며, 일거리를 늘리기 위해 일부러 방화를 저지른다는 소문이 있었고 일부 실제로 적발된 사례도 있었다. 결국 현종 대에 사설 소방대들은 해체되고 그 인력과 장비를 소방도감으로 흡수하게 되어 도성에서는 사설 소방대가 사라졌다. 그러나 지방에는 지역 사정에 따라 남아있는 곳도 있다.

노동조합이 계(契)라는 이름으로 기능하고 있다. 원래는 동향 사람들끼리 돕는 조직인 동계(洞契)였으나 공업도시로 이주한 노동자들이 서로를 돕기 위해 조직한 행계(行契)가 노동조합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성리학 이념 덕분에 노사관계도 대체로 상호 협조적인 편이다.

  • 청소년근로보호법
원평제가 만든 노동법이다. 16세 이하 청소년들은 공장에서 야간 근로를 배제하거나 아니면 저녁식사를 제공해야 노동이 가능하고 임금 체불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으며, 법을 위반 시 장형에 처한다.

노비에 엄청난 과세를 물린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손들고 속량시키다보니 국내에 존재하는 노비의 숫자가 매우 줄어들었고, 1833년 영국에서 노예제를 폐지하며 세계의 추세가 노예제 폐지로 흘러가자 대한 역시 노비제 폐지를 결정하였다. 공노비였던 이들은 무기한 계약을 해주거나 종신 고용하는 형식으로 양인 신분이 되어도 계속 일할 수 있게 해주었고, 궁녀는 양인 중 지원자를 받기로 했다. 기존에 노비가 맡던 궂은일들은 고액을 주어 사람을 고용하거나, 한공 또는 묘노에게 시키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하였다. 예전 같았으면 노비가 되는 형벌을 받았을 범죄자들은 평생 도형수로 삼기로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노비제 폐지 이후 묘노들의 처우는 더 열악해졌다. 기존에는 외국 노예상에게서 묘노를 구입한 후 그들의 노비 신분을 면천해주는 대신 빚을 지워서 일종의 채무 노예처럼 사용했는데, 이때는 어찌되었건 법적으로 대한 호적을 가진 자유인이었으므로 지나치게 가혹한 대우는 할 수 없었고 이론상으로는 빚을 갚고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노비제 폐지 이후 면천을 대가로 빚을 씌우는 것이 불가능해졌는데, 대한인의 노비 소유만 금지될 뿐 외국인 소유의 노비는 금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악용해서 묘노의 소유권은 외국 노예상이 그대로 가진 채로 대한의 사업체에 임대해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말뿐이더라도 대한 국적의 자유인이었던 묘노들의 신분이 외국인 소유의 노비가 되어버리면서 법으로부터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언젠가 빚을 갚고 풀려날 가능성조차 없어져버렸다.

기차를 통해 한양에서 발행된 시보가 늦어도 3일 안에는 본토 전국에 배달 가능해지면서 한양에는 전국지라고 할 정도의 메이저 시보사들이 생겨나 여론에도 큰 힘을 미치게 되었다. 동서남북 4당파별로 하나씩, 중립을 표방하는 곳 2곳 해서 총 6개의 대형 시보사로 정리되었으며, 이들 시보사의 영향력을 통해 여론을 호도하거나 조작하려는 일도 늘어나고 있다.


2.1.10. 교육[편집]

중종 건흥제가 처음 한성부에 소학당을 세운 이후 현종 원강제 시대에 차근차근히 소학당을 지방에도 설치하기 시작하어 원강 34년(1774년)에는 전국 각 현 소재지에 소학당이 세워지고, 원평 9년(1791년)에는 '모든 남아는 학당에 다녀야 한다'는 의무교육 칙령이 반포된다.

  • 여성 의무교육 시작
원평제 말년부터 여성도 초등 의무교육을 시작하자는 여론이 지식층 사이에서 높아졌으나 보수적인 성품을 지닌 원평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신념을 지닌 광덕제[10]는 모두 거부했지만 재석이 흥녕제로 즉위한 후 노비제도 폐지 문제처럼 이미 유럽 각국에서 여성 의무교육을 시작했으니 대한도 늦을수는 없다는 김정희의 제안을 받아들여 여성도 의무교육을 시행하기로 한다. 일반 여학교에서는 기본적인 국문, 산수, 가사, 도덕을 가르쳐 현모양처를 길러내겠다는 것을 취지로 하며, 태황태후와 황태후가 설립하기로 한 이화학당(李花學堂)에서는 사대부 규수들에게 품격있는 신부수업을 시키게 되고, 황후 권나현이 설립한 숙명의숙(肅明義塾)에서는 궁녀 양성 과정, 초등교원 양성 과정, 의학교 입시 예비과정 등 평민 소녀들을 위한 직업 교육을 시키게 된다.[11]


2.1.11. 문화[편집]

원 역사처럼 김조순이 젊었을 때 '오대검협전'이라는 무협지를 썼으며, 재석 빙의 직후에는 백산대인[12]이라는 작가가 쓴 '구대검협전'이라는 무협지가 인기이다. 김조순은 삼국지연의도 한글로 번역했는데 뛰어난 필력 덕분에 4부 시점에서 대한에서는 표준 삼국지연의 판본으로 취급받고 있을 정도.

삽화 자체는 삼강행실도 때부터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글이 아닌 그림이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만화가 등장하여 '화담집'이라고 불린다.

화약 무기의 발달로 더 이상 석전꾼이 전장에서 유효한 시대가 아님에 따라 조정에서도 했다하면 사상자가 생기는 위험한 석전을 금지시키려 여러 번 시도했으나,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뿌리 깊은 민속놀이인 석전을 백성들이 그만두지 않아 여전히 계속된다. 그나마 영종 때 보호장비 착용을 의무화하여 사상자라도 줄인 게 고작.

  • 홍제궁
장조 때 진왕이 명나라에서 사온 가품 장팔사모와 경조가 진왕을 배려하여 사온 가품 청룡언월도,[13] 중종 건흥제가 젊었을때 유럽에서 모은 미술품 등등 황실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건흥제는 경희궁을 완공하면 보물들을 경희궁에 전시하려 했으나 인현황후가 승하하면서 우울해진 건흥제가 관심을 잃어버렸고 후대 태황들도 굳이 일을 벌이고 싶어하지 않아 홍제궁이 그대로 황실 보물 보관소 역할을 하고 있다.

  • 대한축구사
현대의 축구협회 같은 조직으로 14개의 구단이 속해 있다. 과거에는 송상의 후원이 대부분이었기에 개성에서만 열렸으나 현재는 송상의 독점이 깨지며 여러 지역에서 열리고 있다. 경기 방식은 리그전으로 각 팀이 다른 팀과 2회씩 대결해서 가장 승수가 높은 4팀이 준결승, 결승전을 벌인다.

  • 연극
새로 만들어진 연극으로는 박문수를 배경으로 하는 부마어사(駙馬御史), 부마포적(駙馬浦贼)과 하와갑오정난(夏窪甲午靖難)을 소재로 하는 해도지용(海島之龍) 등이 있다.

  • 시조묘
동명왕과 고왕의 사당은 숭현전(崇賢殿), 온조왕의 사당은 숭렬전(崇烈殿), 박혁거세의 사당은 숭덕전(崇德殿), 고려왕들의 사당은 숭의전(崇義殿), 단군의 사당은 숭령전(崇靈殿), 기자의 사당은 숭인전(崇仁殿)으로 모시고 있다.

2.1.12. 식생활[편집]

원역사에서는 1712년에 프랑스군 첩보원 프레지에가 칠레에서 첩보 활동을 하다 발견한 현지 야생 딸기를 시초로 약 100년간 품종 개량을 거쳐 1810년대에 나온 것이 현재의 딸기인데, 이 역사의 대한에서는 태황 원평제가 미식 취미를 갖고 있는 덕에 유럽에서 개량한 최신 딸기 모종을 바로 수입하여 재배 중이나 아직은 궁중에서만, 그것도 태황 본인이 아니면 생과일이 아닌 딸기잼으로나 맛볼 수 있는 귀한 과일이다.

샌드위치. 3부에서 재석이 빙의한 건흥제가 성친왕 시절 미주관리사로 있을때 발명한 그것이다. 그 후로 본국에서는 미주병, 미주에서는 처음 발명됐을 때 이름대로 '전하병'이라 부른다. 재료에 딸기잼이 들어간다고 하여 군대리아를 연상케 하며, 4부에서 재석의 부친인 태자 이순은 막노동꾼이나 군졸들이 끼니를 때울 때나 먹는 허접한 음식 취급을 한다. 한편 영국에서도 원 역사처럼 샌드위치 백작이 샌드위치를 별도로 발명했다고 한다.

우유를 얼려서 만든 진짜 아이스크림. 그간 빙과[14]만 있던 대한에 드디어 들어왔다. 미식가인 태황 원평제가 여름에 즐긴다고 하며, 마포 번화가에서 프랑스 망명객이 경영하는 베르사유의 백합이라는 가게가 맛집이라고 한다.

영종 재위 초기에 미주행 배의 요리사이던 김민생이 의사인 아버지의 의학 책에서 본 압력솥 살균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병조림을 발명했고(원역사대로 같은 시기 프랑스의 아페르도 독자적으로 병조림을 만들었다), 제물포의 철공 박춘제가 주석도금 철판으로 통조림을 만들어 석관식이라고 이름지었다. 원역사와 달리 통조림 따개까지 같이 만든 것은 덤. 김민생과 박춘제는 동업자 관계를 맺고 영등포에 춘생식행(椿生食行)이라는 통조림 공장을 세워 시장을 장악하고 있으며, 영종의 명으로 은 2천 파운드(8천 냥)를 받고 영국에 특허권을 팔았다. 공장에서 압력솥이 폭발하는 산업재해가 종종 일어나는 대신 직원들에게 보수는 후하게 주고 있다.

원역사에서 임오군란 이후에 유입되었으나 대한에서는 타국간 교류가 활발하다 보니 중국계 길거리 간식이 빠르게 전파되었다. 마화는 지금처럼 설탕이 뿌려진 튀긴 빵이지만, 호떡은 본래처럼 고기소가 들어간 모습이다.

장조 때 무굴제국과 바로 국교를 트면서 벵골식 커리가 바로 대한으로 들어왔다. 약재로 쓰는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보양식이라고 알려져 중종 시대에는 대한에서 자리를 잡았고, 군대에서도 여름철 보양식으로 고기국에 까리 가루를 타서 배급하는데 그 색깔 때문에 군졸들은 똥국이라고 부른다. 열대지역인 술루국, 하와국에도 대한을 통해 까리가 전파되어 많이 먹는다고 한다.

  • 양무관
임꺽정의 후손들이 운영하는 명륜동에 위치한 고기집. 양무관 고기를 먹으면 임꺽정처럼 출세할 수 있다는 마케팅을 내세운다.

2.1.13. 의학[편집]

  • 병원 확충
한양의 광혜원은 병상 1200에 달하는 대형 병원으로 확장되었고, 병원장인 광혜원 제조는 종 2품, 진료부원장인 광혜원 정은 정 3품의 고위직이다. 그 외에도 관립 병원으로 100병상급 병원 6개소를 포함해 한양에 있는 병원들을 합치면 총 3천 병상이 나온다고 한다.

발치를 거부하는 충치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신경치료 기법이 있는데, 그 방법이란 충치를 앓는 이에 구멍을 뚫어 고름을 전부 긁어낸 후 묽은 황산을 부어 '이를 갉는 벌레를 박멸한다.'는 방법이다. 물론 아편으로 마취를 하고 시행하지만 마취가 풀린 후의 고통이 상상을 초월하여 의원들도 그냥 발치하는 쪽을 권하는 편.

현종 시대에 우편으로 손금을 봐주는 점집이 늘어나면서 손도장을 찍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문이 사람마다 다르고 평생 불변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원평제가 범죄자는 지문날인을 시키는 등 사회적으로 활용된다.

2부와 3부 사이에서 처음으로 현미경을 발명하고 병의 미생물 기원설, 니코틴의 독성 등을 스스로 알아낼 정도로 의학이 발전한 대한 의학계는 부패도 사람의 질병과 같이 미생물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임을 파악해 냈다. 마찬가지로 음식을 상하게 하는 곰팡이도 대균이라고 부르며 병균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있다.

원역사에서 율리우스 바그너 야우레크가 매독 환자에게 말라리아 환자의 피를 주입해서 1917년에 완치를 증명해 1927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지만 여기서는 누손주의 의원인 김시형이 양매창 환자가 학질에 걸리자 완치했다는 현상을 보고했다. 태황 광덕제가 이 보고에 관심을 가지고 양매창 환자를 거세하는 조치를 중지한 뒤 양매창 환자들을 누손주로 보내 이 방법을 치료법으로 쓸 수 있을지 인체실험을 하도록 지시한다.

영종 초에 한성의학교 연구진들이 아편 추출물을 적절히 조합하여 마취제인 마비산을 개발한다. 안정제 효과를 내는 환약과 수술 마취제 효과를 내는 탕약이 있고, 이 마비산 덕분에 대한 의사들은 절단수술은 물론이고 개복수술까지도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항생제가 개발되지 않아 개복수술의 생존률은 그리 높지는 않은 편이다.

2.1.14. 과학, 공학[편집]

원역사처럼 영국에서 발명되었고, 학용품으로의 활용과, 간단한 제조법으로 대한에도 들어왔다.

  • 철도망 확충
중종 때 처음 만들어진 철도는 그 사이 주요 간선철도는 나주선(호남선), 동래선(영남선), 전라선, 심양선 등이 있고 그외 국내 주요 도시는 철도로 모두 연결되었으며, 심지어 북한산성을 오갈때도 강삭철도를 사용할 정도. 또한 심양을 지나 청의 부수도 북경과 금의 수도 상도까지 가는 국제선 열차까지 생겼다.

3부에서 발명된 증기 자동차가 4부에서는 대중 교통수단으로 실용화되어 한양에서는 승객들을 나르는 증기 버스가 운용되고 있다.

  • 증기기관 수출
무종의 유훈이라 하여 중종 건흥제 치세까지 증기기관을 절대 수출하지 않았고 그 기술도 비밀로 해오다가 형제국인 청이 자체 증기기관을 개발하자 일부 기술지원만 하는 정도였으나, 1755년(원강 15년) 후송이 자체 증기기관을 개발하자 더 이상 기술비밀 유지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증기기관과 증기기관차 수출을 시작한다. 심지어 영국에도 증기기관차를 수출하였다. 단 100우력 미만 출력 기관만 수출 가능하고, 잠재적국인 후송에게는 여전히 수출이 금지되었다.

원역사와 달리 일찍 발명되었다. 묘사된 구조로 내부는 도자기, 중간 사이의 공간은 양털, 외부는 나무로 되어 있고 겉은 모피로 싸였다.

3부까지만 해도 대한에서는 구식 사분의를 항해에 사용했고, 경도 측정에 필수적인 크로노미터도 3부에서 개발은 하였으나 내구성이 약해 배에 싣지 못한 상태였는데, 1779년(영태 4년) 귀국길에 대한에 들른 잉글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목종을 알현하고 신형 육분의와 크로노미터를 진상하여 그 후 대한에서도 복제 생산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대한제 크로노미터는 아직 영국제만 못해 어승선인 동진 함에서는 영국제 크로노미터를 사용한다.

실제 역사와 유사하게 수원성과 화성을 축조하기 위해 정약용이 만든 것으로,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한다. 도성이라면 사복시의 코끼리를 동원했겠지만, 수원은 코끼리를 동원하기엔 멀다 보니 대신하여 만들어,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코끼리'라는 뜻으로 별칭이 기상(機象)이다.

  • 석탄가스 기구
기존의 열기구가 승룡대에서 많은 양의 화목을 때서 뜨거운 공기를 만들어내는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처음에는 수소기구를 연구했으나 폭발성 때문에 실용화되지 않고, 수소보다는 부력이 약하지만 더 취급이 쉬운 석탄가스를 봉입한 가스 기구가 군기시에서 개발, 실용화된다. 적재량 1톤 가까이 되는 초대형 기구도 만들어지지만 아직 동력원을 구하지 못해 비행선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다. 원평제 때 이 기구로 대한해협을 건너 북구주로 가는 실험도 했으나 무동력이라는 한계 상 추락하여 사상자를 내거나, 불시착으로 목숨은 건지거나 무사히 착륙해도 엉뚱한 곳에 닿는 등 목적지 도착에 실패하는 일이 잦자 보다못한 원평제가 실험을 중단시켰다.

4부 표지에 그려져 있다. 4부 201, 202화에서 묘사되기로는 원평제가 친히 비행선이라는 이름을 짓고 석탄가스 기구에 동력원만 달면 충분히 비행선이 될 수 있으니 개발하도록 지시해서 유선형 기낭과 소형 증기기관까지는 완성되었으나, 프로펠러가 배는 추진시키지만 비행체를 추진시키지는 못할 것이라는 장인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퍼덕이는 날개를 단다거나 하는 다른 추진 방식만을 연구하다 실패하기를 거듭하여 광덕제 재위기까지도 실용화에 실패하고 있다. 그러다가 재석이 흥녕제로 즉위한 후에야 프로펠러를 실제로 장착해보고 작동되는 것을 알게 되어 비행선 개발에 속도가 붙고 있다. 1837년에 길이 48미터, 직경 12미터에 1백 관(375kg) 중량의 2우력 증기기관을 달고 승무원 3명이 탑승하는 시제기가 개발되어 재석과 군기시 제조 김귀훈이 탑승하여 한양 상공에서 첫 비행에 성공한다.

3, 4부 사이에 기구가 고장난 경우 비승군 군사가 비상탈출 할수 있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직 성능이 미흡해 생명을 완전히 보장할 수는 없는 상태.

대한에서는 증기선을 세계 최초로 만들었지만 외륜선 기술이 너무 발달하다보니 프로펠러 추진에 대해서는 연구만 하고 있다가 19세기 초 영국에서 스크루 프로펠러를 실용화하자 한발 늦게 프로펠러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대한 자체 기술로는 외륜선보다도 성능이 떨어지자 재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덕제는 영국에 특허료를 물고 프로펠러 기술을 사오기로 했다.

원 역사에서는 1839년 찰스 굿이어가 발견하여 고무의 산업적 이용이 가능해졌는데 여기서는 대한 서학당 화학자들이 발견했다. 대한에서는 고무를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처음 접했기 때문에 스페인어로 고마라고 부른다.

재석이 신불랑 황제 나폴레옹과 협상을 통해 텍사스에서 석유 채굴 권리를 얻어내고, 청나라로부터 고대부터 소금물을 캐내던 사천 기술자들을 지원받아서 시작된다. 원래는 바로 텍사스로 보낼 예정이었지만 당시 조정 중신들 입장에선 허황된 이야기라 검증하고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평소 국정에 관심 없던 광덕제가 하필 관심을 보여서 만주 일대를 헤매면서 시간을 낭비했고, 결국 광덕제가 사망한 후 태황이 된 재석이 당대 기술로 캐낼 수 있는 요하 일대를 채굴하도록 명령해서 본격적으로 석유산업이 시작된다.[15] 처음에는 고래기름을 대체할 조명용 등유부터 일반에 판매하기 시작하며, 등유는 일반 등잔을 사용하면 폭발 위험이 있어 내수사에서 등유에 맞는 호롱도 대량으로 만들어 함께 판매한다. 상인들이 '땅의 영험한 기운을 받은 신령한 기름'이라고 선전하여 날개돋힌 듯 팔리지만 석유냄새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1835년(을미년)에 서학당 화학부에서 볼타 전지보다 수명이 길고 전압도 높으며 안전한 축전지를 개발해 을미전지로 이름붙였다.

재석은 미주의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서는 전신기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서학당 물리학부에 개발을 명하였고 시제품도 나왔으나 전기 신호를 중간중간 증폭시키는 부분의 해결이 안되어, 결국 미주합중국에 유학생 6명을 보내 이 부분을 배워오기로 한다. 한글 모스 부호는 재석이 힌트를 주어 이미 개발되었고, 한자 모스 부호는 재석은 굳이 필요없다고 생각했으나 서학당에서 자체적으로 4자리 숫자 코드를 이용해 상용한자 1만자를 배당한 코드를 개발한다.

1837년 군기시에서 전지 실험을 하던 중 엎질러진 질산+황산 전해액을 닦은 면 걸레로 실험용 주정 화로 불을 끄려고 덮는 순간 폭발사고가 난 것을 계기로 발명. 부상자 6명이 나왔지만, 이 일을 통해 왕수로 면을 질산화시켜 면화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1.15. 환경, 생물[편집]

  • 외국 포경선과의 갈등
미국을 비롯한 유럽 포경선들이 대한 영역인 북대동양에 들어와 마구잡이로 포경을 하고, 고래기름만 빼내고 바다에 버리는 행동을 하여 대한 포경업자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원평제가 1811년 북대동양에 외국 포경선의 진입을 금하는 법령을 반포했지만 외국에게는 무시당하고 있다.

  • 자연발생설 부정
서양에서는 아직 자연발생설이 정설로 여기나 대한에서는 성리학의 기반인 효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이유로 자연의 모든 생물은 부모가 존재해야 발생이 성립한다는 주장을 한다.

서양권에서는 원역사와 달리 최초로 실물을 본 쿡 선장의 이름을 따 '쿡 해우'라고 부른다. 쿡 선장이 표본을 얻기 위해 사냥을 하려 했으나 경비를 맡은 한국군이 막아서 실패하였다. 때문에 서양에는 표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비글호 탐험대에서 태황의 허락을 받고 대한에 방문하여 표본을 얻어간다.

  • 한지후단론
원역사의 알렌의 법칙과 베르그만의 법칙에 해당하는 내용. 대한의 영토가 적도 부근부터 시베리아까지 넓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기후에 사는 동물들을 비교하게 되었고, 추운 곳에 사는 동물들이 상대적으로 덩치가 크고 말단 부위가 작다는 법칙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아직 진화론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으며, 여러 형태로 태어난 동물들이 자신에게 맞는 기후를 찾아 이주하며 흩어졌다고 여기고 있다.

2.1.16. 종교[편집]


2.1.16.1. 불교[편집]

일본측 국혼사인 미즈노 타다아키라에게 예물로 높이가 다섯 자나 되고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7만냥 가치의 금동탑을 기증받았다.


2.1.16.2. 예수교[편집]

원역사와 동일하게 교황에 의해 예수회는 해체되었고, 41년 후 재건되긴 했으나 대한 내 천주교의 주도권은 이미 파리 외방전교회로 넘어갔다.


대한 조정은 선교 금지 기조를 유지했으나 미국 선교사들이 유입되며 대미주에 반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미주 최대 유지인 원씨 가문은 집안 전체가 개종한다. 초기에는 탄압이 있었으나 본래 대한의 정책은 '반주교 선교 금지'였지 '반주교를 믿는 자국민 처벌'이 아니었고, 법왕청의 예수회 해체에 대한 항의도 겸해 선교가 공식적으로 허용된다. 반주교라는 멸칭도 개신교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으면서 대체되었지만 아직 미주에만 신자가 있기에 본토에 퍼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보이고, 무엇보다 대한식 국가 제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관직에 진출할 가능성이 없어 재석도 위험요소로 보지는 않고 있다.


2.1.16.3. 회회교[편집]



2.1.16.4. 덕성도[편집]

3부에서 타락의 조짐을 보여 사이비 종교가 되어 태평천국의 난과 비슷한 사건을 일으킬 것이라는 독자들의 추정과 달리 정상적인 종교로 발전하여 기성 종교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대한에서 난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후송에서 난을 일으켰다. 예수교와 불교 양쪽 모두에서 사이비 취급을 받는다.

  • 상징
덕성도의 상징은 세 번 나타나는 부처를 상징하는 세 개의 원과 그 셋을 연결하는 광진을 의미하는 작은 원이다. 십자가처럼 덕성도의 상징이 되어 깃발에 사용하거나 귀걸이로 만들어 달고다니곤 한다.

  • 대종사
덕성도의 교주. 그러나 중앙집권과 거리가 멀고 개인의 수양과 기도를 중시하는 덕성도의 특성상 법왕과 달리 신도들에 대한 통제력은 약한 편이다.

  • 시조대천사
천사를 자칭했던 창시자 광진은 사후 '시조대천사'라고 불리며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생전의 광진이 자신을 신격화하지 말라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씁쓸한 결말. 그래도 이후의 대종사들은 신격화되지 않은 것을 보면 광진의 뜻이 일부나마 지켜지긴 했다.

석가모니와 예수를 동일시하는 교리상 불교의 부처님오신날과 기독교의 크리스마스를 모두 성탄절이란 명칭으로 부르며 명절로 삼았있다.

광진이 덕성도를 창시하고 죽은 뒤 묻힌 구월산은 덕성도의 성지가 되었으며 모든 덕성도 신도는 평생에 한 번은 참배하고 싶어 한다. 이슬람의 순례처럼 의무까지는 아닌 듯.

  • 해외 선교
주변국으로도 많이 전파되었는데 청으로는 대한에서 노동하다 돌아간 한공들을 통해, 후송에는 교역선을 통해 덕성도가 전파되었으며 중원의 신도 수는 대략 100만이 넘는다. 후송의 소태제는 외래 종교인 덕성도 신도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학살을 시도하고 이 때문에 덕성도의 난이 일어나 무려 5년간 지속된다.


2.1.17. 연도별 주요 사건[편집]

스포일러가 될 정도로 자세하게 기술될 경우 문피아 측에 대한 이익 침해로 항목이 삭제될 위험이 있으므로 지나치게 자세한 기술은 자제 바람.

  • 무신지변 - 1788년
원평제의 장남과 차남이 병으로 죽은 틈을 타 목종의 후궁인 귀비 오씨가 원평제를 독살하고 자기 소생인 숙왕 이정의 아들을 태황으로 추대하려던 음모. 계획 단계에서 발각되어 관련자들은 처형당하고 오씨는 누손주로, 이정 일가는 북변으로 종신 유배를 당한다.

  • 원릉 도굴 미수 사건 - 1809년
원평 27년, 성친왕의 첫 왕비였다 사후 황후로 추존되었던 인선황후 강씨가 묻힌 원릉(元陵)이 도굴당할뻔했던 사건. 생전 남편 성친왕(3부 재석)에게 선물받은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부장품으로 같이 매장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도둑들이 이를 노리고 땅굴을 파 도굴을 시도하다 발각되어 붙잡힌 뒤 주모자들은 모두 거열형을 당하고 일가족은 전원 북변으로 유배, 능을 관리하던 능참봉과 경계를 서던 수릉군 및 해당지역 수령인 양주목사까지 전원에게 책임을 물어 해우도로 종신 유배형에 처해지고 대신들도 여러명 사직해야만 했다. 원 역사의 임진왜란 당시 선릉과 정릉 도굴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고 대한이 세계에 많이 알려진 강국이 돼서 오페르트 도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이니 작중 대한 사상 최악의 도굴 미수 사건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원 역사와 똑같이 탐보라 화산이 분화하여 전 세계적으로 몇 년간 흉년이 이어지고 이를 틈타 종교계 일부와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과거에 경신대기근 등 몇 차례 대재앙을 겪으며 기근 대비 노하우가 쌓이고 물류망과 구휼 대책 등 사회적 인프라를 충분히 갖춘 대한은 큰 사회적 혼란 없이 무난하게 넘어갔다.

  • 기묘년의 변 - 1819년
원평 37년 일어난 대한 해군 사상 최악의 사고. 누손주 남부통제영에 배속된 2등 대선 한 척이 관리부실로 화재가 발생하여 1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 대한-신불랑 회담 - 1828년
대한 황태손 이진(재석)과 신불랑 황제 나폴레옹의 정상회담을 통해 신불랑의 괴뢰국인 멕시코 공화국이 뉴 멕시코 주 일부, 서북부 소노라 주 전체와 치와와 주 ⅔를 900만 달러에 대한에 판매하고, 대한 미주와 신불랑을 잇는 대륙횡단철도 건설에 합의한다.[16]

  • 제2차 경인조약 - 1830년
대한 태황 광덕제를 대리한 대한 태자 이진(재석)과 일본국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츠구 사이에 맺은 조약. 광덕제의 뜻인 유구의 독립 박탈과 대한 번국 편입에 대해 일본이 허용하는 대신 일본도 아모국을 일본의 번국으로 편입하여 균형을 맞추도록 하고, 유구, 아모국에서의 양측 군사력 현상 유지 및 양측 민간인의 재산, 상업 활동은 그대로 보장하며, 양국의 무역항을 상대국에 추가 개방하고, 유구-아모국 편입 조치 명분으로 대한 태황의 조카딸을 이에츠구의 외조카이자 천황의 친족인 간인노미야 나루히토에게 시집보내고 일본측도 상응한 국혼을 시행한다.

  • 유구 제위 선위식 - 1831년
1831년 양력 4월 한양 천단에서 정식으로 유구 황제 상육이 대한 태황 광덕제에게 유구 황제위를 선양하는 선위식을 갖고 유구는 대한의 번국인 왕국으로 격하된다.

  • 남응중의 난 - 1832년
광덕제의 이복동생인 소왕 이청이 광덕제와 태자 재석을 동시에 암살하고 제위를 찬탈하려는 야망을 품고 문객들과 함께 국구 김조순의 장례식장에 광덕제와 태자가 모이는 틈을 타 폭탄 테러로 암살하려고 소왕저에서 폭탄을 제조하다가 실수로 폭발하면서 들통이 난다. 수사 책임을 맡은 재석은 소왕의 아들인 종성공이 일본과의 국혼 대상자인 점 때문에 소왕이 역모 주동자임을 공표할 수 없어 폭탄 제조 책임자인 남응중 등 문객들이 벌인 짓이라고 공표하고 소왕 일가는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자진해서 북변으로 이주하며 종성공은 화재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처리하고 국혼 대상자도 영왕의 아들 명주공으로 바꾼다. 주동자 30여명은 참수되고 가담자 200여명은 광덕제의 서양 취향 때문에 판옥선의 노젓는 노예로 20년간 일하는 벌을 받는다.

  • 백두산 봉선 의식 - 1835년 음력 5월 5일
흥녕 3년에 예부에서 대한도 당당한 천자국이니 예전 중원 천자들처럼 봉선 의식을 치루자고 건의하고, 재석은 시큰둥했지만 의외로 조정 대신들의 호응이 높아 백두산[17]에서 봉선 의식을 치루기로 한다. 수행원만 3천명[18]에 외교관, 전국에서 모여든 유생들, 각 종교 지도자들, 평민 구경꾼까지 포함하면 약 2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 축제가 열린다. 이 소식을 접한 후금에서는 제물에 보태시라고 소 1천마리를 보내주며, 청나라에서는 태산에서 자기들도 봉선 의식을 치루기로 한다. 후송에서도 진정한 중원 천자의 봉선을 보여주겠다는 경쟁심을 보이나 중원에서 봉선 의식을 올리는 장소인 태산이 청나라 강역이라 형산에서 봉선을 하게 된다.[19] 재석은 봉선을 마친 후 3개월간 속말주, 연해주 지역까지 순행하고 현지 민심을 돌본 후 돌아온다.


2.2. 대한의 해외 영토(대한령 미주 제외)[편집]



2.2.1. 대남주[편집]

외지 출신 대과 합격자 중 절반 이상이 대남도 출신이라 한다.


2.2.2. 북구주[편집]

여전히 대한령이지만 명목상으로는 일본이 관리를 위임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일인들의 성향상 문과보단 무과 합격자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20]


2.2.3. 누손주[편집]

대한이 스페인령 동인도 제도를 구입한 뒤 누손주 관할로 묶었다. 인구는 미주의 절반 정도이나 그 절반은 토인이다. 양반 이주자는 거의 없으며 대과 합격자가 한명도 없는 해가 허다하다고 한다.


2.2.4. 해사도[편집]

요충지인 해사도는 대한 직할령으로 병력 8천명과 함선 30여척이 항상 주둔하여 말라카 해협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조홀국을 위협하는 아체 술탄국섬라국을 견제하고 있다.


2.3. 대한의 번국[편집]



2.3.1. 심왕[편집]

4부 시점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초대 심왕이었던 이준이 처음 심왕부가 설치되었을 때 한청금 세 나라로부터 받은 재산을 낭비하지 않고 철도와 포경선을 비롯한 생산적인 사업들에 투자하였고 이후의 후손들도 재산을 늘리는 데 공을 들인 덕택에 심왕부의 자산이 3부에서 연수익 10만냥이었던 게 4부 시점에서는 50만 냥으로 다섯 배 이상 늘었다.

그동안 심왕부가 부유해진 덕분에 새로운 요리가 계속 추가되어, 70가지 요리가 차려진 상 7개가 나오는 것으로 메뉴가 크게 늘어나 더 대단한 요리가 되었다.


2.3.2. 술루국[편집]

현종 말엽부터 본국에서 파견하던 집정이 폐지되고 술루국왕이 내정을 스스로 통치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술루 왕족들은 대한식 이름과 스페인식 이름을 같이 짓는 것과 술루 왕자들이 본국에 일정 기간 건너와 친위군에서 복무하는 전통은 유지되고 있다.

인구는 약 40만명 정도이며 그중 절반은 원주민과 안남인, 나머지 절반은 한인, 스페인인, 일본인이 3:1:1 정도 비율로 차지하고 있다. 인구가 부족하기에 보르네오섬 내륙은 직할령이 아니며 원주민들에게 선물을 주며 교류하여 신속시킨 상태이다. 국교는 가톨릭이지만 이슬람교도 제후들도 봉신으로 받아들이고 종교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등 융통성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보르네오섬 남부의 이슬람 토후국들과의 전쟁이 지속되어 대한 본국에서 군비 지원은 계속 받고 있으며, 가톨릭 왕국이란 점이 국가 정체성을 구성하는 나라임에도 보르네오 내륙의 무슬림 원주민 부족들을 회유하여 번국으로 끌어들이는 외교정책을 펴면서 대한 남방을 지키는 번국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군대는 인구에 비해 좀 과한 규모인 3만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재정부담은 대한의 보조금으로 충당한다.


2.3.3. 조홀국[편집]

정주신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말레이인과 화교를 탄압하고 그 대신 노동자로 영국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인을 이민시키는 정책을 펴서, 1823년 현재 인도인이 30만명이 되어 가장 인구가 많고, 말레이인 인구는 15만 명, 화교 인구 6만 명, 대한인 14~15만 명, 일본인 14~15만 명 정도라 한다.

정주신은 아체국과는 정면 충돌 대신 냉전 상태가 되지만, 말레이 반도의 소국들을 대부분 병합하고 섬라와 국경을 맞대게 된다. 정주신의 손자인 충정왕 정인선은 전쟁을 피하고 교역과 산업 진흥에 힘쓰고 있다. 특히 대한에서 석관식(통조림) 산업이 발달하면서 깡통의 원료인 주석 수요가 늘어나 조홀국은 주석 광산업으로 큰 이익을 본다. 그러나 정인선의 아들 정윤진은 왕위에 오른 후 어차피 대한이 지켜줄 것이라며 최정예 왜병들을 해고해 3만 명이던 군대를 1만으로 감축하고 남는 돈을 서양식 궁궐인 태서궁을 짓고 주지육림에 빠져 국가 안보와 산업 발전에는 게으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대한령 연해주에서도 주석 광산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다. 조홀국 주석 산업에 타격을 입으면 더이상 주지육림을 즐기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긴 했어도(...) 어쨌든 각성하게 되어 간신들을 몰아내고 충신들을 재등용하였으며, 세자 정호석이 재석에게서 들은 고무 산업의 유망성에 대해 전하자 즉시 남미에서 고무 묘목을 들여와 고무 플랜테이션을 세우게 하면서 다시 부흥할 모습을 보이고 있다.

2.3.4. 하와국[편집]

  • 지역
수도는 하와이 섬(빅아일랜드)에 있는 홀랄루로 왕궁은 본래 하와도 여왕 케아케알라니와히네가 살던 궁을 '무우궁'이라 하여 사용했으나, 1778년 터진 하와무술지변 때 궁이 불타고 그 후 방어에 용이한 언덕 위에 요새화한 새 궁인 마우카 궁(마가궁)이 세워진다. 한편 오아후 섬 진주만의 대한 해군기지에 있던 유흥업소들이 군기를 문란케 한다고 판단한 원평제가 명령을 내려 유흥업소들이 모두 인근 호놀룰루로 이전하면서 호놀룰루는 원역사처럼 번화한 관광지가 된다.

  • 대한식 성씨
강녕왕의 후손들은 당연히 전주 이씨를 사용하고, 그 외에도 벼슬아치들이나 대한 본국에 파견된 근위병 등은 대한식 이름을 사용하는데, 용맹함을 숭상하는 기풍 때문에 대한식 성씨로 용(勇), 감(敢), 맹(猛), 호(虎), 상(象), 저(猪), 응(鷹), 교(鮫) 등 무예나 맹수와 관련된 한자를 사용한다고 한다.

  • 외국 상선 기항 허용
중종 시대에는 외국 상선들을 통해 전염병이 퍼진 경험 때문에 대한 국적 상선의 기항만 허락했으나, 중종 사후 진주만 해군기지 때문에 돈이 궁하지 않은 오아공을 제외한 하와국왕과 나머지 다섯 공들이 돈맛을 알아 외국 상선 기항을 다시 허용한다. 물론 전염병도 다시 퍼지는 바람에, 대한에 복속된 지 80년이 지났고 대한의 선진의료를 받아들였음에도 인구가 30만 정도로 중종 때에 비해 크게 늘지 않았다. 심지어는 대한 본국에서 금하는 미국 포경선들까지 구휼 명목으로 몰래 기항시킨다.

  • 산업
대한 본국의 행단들이 하와국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들을 세우고, 하와국 토인이나 묘노들을 임노동자로 삼아 경영한다. 벼농사는 쌀의 장기보존이 가능하지만 품이 많이 든다는 점 때문에 군량미나 구휼 대피 비축 용도로 재배하고, 각 섬에서 국왕에게 바치는 세금도 , 설탕, 고래기름, 어물 등 상품작물로 바뀌었다. 일반 토인들의 주식은 예전처럼 고구마토란, 돼지고기, 생선 등이다.

  • 경기대회
3부에서 대한에 복속되면서 각 섬 간의 전쟁 대신 대표를 뽑아 각종 스포츠로 겨루는 풍속이 계속 발전하고, 대한 본국에도 알려져 일부러 직관하러 가는 관광객이 생길 정도로 발전했다.

  • 군사 파병
멧돼지 사냥대회에서 큰 공을 세운 최정예 전사들을 대한 본국의 금군에 파견하여 친위대 복무 및 술루, 조홀국 전장에 파병하여 큰 전과를 올린다.

  • 노예 사냥
하와국 독자적으로 대한에서 받아들인 조선기술로 대형 쌍동선 카누들을 건조하여 남태평양 섬들에 대해 약탈 원정을 간간히 시행하고 매년 천 명 이상의 노예를 잡아온다. 어머니가 노예 출신인 하현생도 본인이 노예 사냥을 다니면서 무리를 모아 반정에 성공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른 후에도 노예 사냥을 금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폭정과 식인을 일삼는 야만족 추장들에게서 백성들을 구해내어 왕화를 입게 해주는 숭고한 의무라고 포장하기까지 한다. 그나마 잡혀온 노예들 대부분이 하와인들과 같은 폴리네시아인이라 다음 대에는 대부분 속량되어 평민이 되기는 한다고.

  • 하와본궁
강정왕 하상운과 의순공주 사이에서 태어나 대한 문화에 관심을 더 갖게 된 4대 국왕 하원식이 함흥본궁을 본따 하와국 왕실의 발상지가 된 와가촌에 지은 별궁으로, 이후 와가촌을 성역화해서 외국 배의 기항을 금했다. 문제는 유교를 어설프게 받아들여서 마우이의 옛 집터를 뒤집어 엎고 카우이의 별궁도 허물어서 오히려 문화파괴가 되었다는 것.

  • 역사 편찬
3부에서 현도왕 카우이가 죽기 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50만 자짜리 구술을 남겼는데, 이를 적은 당시 하와국 학무대신 격인 이종이 1747년 '하와국사'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단지 성친왕을 제일 먼저 만난 일개 추장이었던 카우이의 부친 마우이가 하와국왕이 되기까지 벌인 각종 음모와 뒷공작들의 핵심 인물이 카우이였던지라, 그 전모가 죄다 담겨 있어서 대한은 번국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금서로 지정했고, 규장각과 집현전에만 몇 권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애초에 트릭스터마우이를 조상으로 여기는 하와국에서는 이를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이종이 괴력난신이라며 제외한 하와이 창세신화가 수록되지 않았음을 문제 삼아서, 다시 11년간 작업한 끝에 이 신화를 덧붙이고 마우이가 태초의 영웅 마우이의 후예라고 저술한 '하와본사'가 출간되었다.

  • 교주어해가
하원식이 용비어천가를 흉내내어 편찬한 하와국 역사를 담은 서적. 하와이 신화에서 상어가 가장 신성한 동물이기에 군주를 상징하는 신수가 상어이며, 서문에 의하면 하늘은 대한을 의미하는 천룡이, 그 하늘 밑에서 가장 으뜸인 대동양과 하와이는 상어가 변신한 교룡이 다스린다고 한다.

3부에서 재석이 성친왕 시절 미주에 있을 때 재미 삼아 몇 번 만들어 먹은 것이 전부였는데, 피자를 좋아하던 강녕왕이 하와이에 피자를 전파하고 한자로 피자라는 이름까지 붙여 4부에서는 하와이의 대표 아침 해장 음식이 되었다. 남만시봉리는 이것저것 넣다보니 잘 어울려서 추가되었다고 한다.

  • 하와무술지변
1778년 터진 하와이판 왕자의 난. 하와국에서는 정당한 왕이 돌아왔다고 하여 왕의 귀환이라고 부른다. 4대왕 하원식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면서 평소 눈밖에 난 적장자 하정응이 대한에서 호환을 당해 죽자 후계자 자리를 두고 왕자들과 왕비들을 피흘려가며 경쟁시키다가 나중에 모두 상어밥으로 만들고 가장 총애하는 왕비이자 강녕왕의 후손인 13번째 왕비 울라오칼라니의 소생인 어린 하정일을 세자로 삼은 후 노환으로 사망하자 울라오칼라니가 수렴청정을 하며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폭정을 하여 민심이 들끓으나 상국인 대한에서는 우유부단한 목종이 울라오칼라니의 폭정을 그대로 방치해둔다. 3년 뒤 하정일도 어린 나이에 병사하자 울라오칼라니가 웬 갓난아기를 하원식의 서자라며 왕위에 올리려한다. 이에 하와이인들이 전면적으로 반발하고 추방된 하정응의 아들이자 하원식의 적장손 하현생(카메하메하)이 반정을 일으켜 울라오칼라니를 처형하고 보위에 오른 후 관용정책을 펼쳐 하와도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 하와갑오정난(夏窪甲午靖難)
하와국의 제1왕비 칼레이아가 죽은 후 8대 국왕 하민상이 제2왕비 카네카폴레이의 참소에 넘어가 하진교를 폐세자하고 카네카폴레이 소생인 쿠아이와를 세자로 삼는 짓을 벌였으나 하와국으로 귀국한 하진교가 호위무사 40명을 데리고 본궁으로 처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21] 이에 쿠아이와도 직접 나가 하진교와 일 대 일로 붙었으나 하진교가 쿠아이와를 쓰러뜨리고 카네카폴레이가 항복하면서 끝났다.
사태를 정리한 하진교의 보고를 받은 광덕제는 하민상은 하진교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어 남은 여생을 대한 본국에서 보낼 것과 카네카폴레이와 쿠아이와는 현토도로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2.4. 중원[편집]


  • 남북조 체제의 고착화
서나라는 완전히 몰락했으나 서나라의 영토를 나눠가진 청과 후송은 오히려 이로 인해 심각한 내부 문제를 겪게 되었고, 왕조가 세워진지 2세기가 지나면서 여느 중원 왕조들처럼 각자 국가 체제들에 누수가 생기고 있다. 결국 청과 후송은 오랜 전쟁 끝에 자신들에게 서로를 정복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가끔 국지전만 벌일 뿐 더 이상 대규모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


2.4.1. 후송[편집]

대송국
大宋國

국호
대송국(大宋國)
별칭
후송(後宋)
위치
직예, 절강, 강서, 양광, 복건, 호남, 호북
번국
남월국
수도
남경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22]
국성
(趙)
국가원수
황제
연호
천개(天開) (1633 ~ 1668)
홍광(弘光) (1669 ~ 1680)
융무(隆武) (1681 ~ 1684)
소무(紹武) (1685 ~ 1736)
태안(太安) (1737 ~ ?)
태녕(○○) (? ~ ?)
소태(紹泰) (? ~ 1804)
영강(○○) (1805 ~ 1834)
함화(咸和) (1834 ~ )
언어
중국어(오어)
문자
한자
종교
유교, 대승 불교, 도교, 덕성도
민족
한족


3부와 4부 사이에 황제였던 혜종 태녕제 조경소는 19세에 즉위해서 12년 동안 재위하면서 사치와 향락에만 몰두하다 31세에 복상사로 사망한 암군으로, 작중에선 연산군을 대신해서 '흥청망청'이란 표현을 만들어냈다.

조경소 사후 제위에 오른 소태제 조승번은 부황의 막장짓 잔재를 수습하고, 서나라의 암군 함녕제가 안남 내란에 개입했다가 20만 대군을 날려먹은 틈을 타 1777년 정주도통사 홍사옥의 지휘 하에 양광을 침공한다. 서나라 양광총독 임호관이 중과부적으로 항복하자 홍사옥의 주선으로 황제 조승번이 임호관을 그대로 양광총독에 유임시키고, 이에 분노한 서나라 함녕제가 40만 대군을 보냈으나 양광군과 합동으로 이를 격파하고 양광 지역 정복에 성공하여 국력을 크게 끌어올리나, 황제 소태제 조승번이 덕성도를 괜히 의심하여 탄압하다가 덕성도의 난이 일어나 5년간 혼란에 빠진 데다, 운남산 아편의 창궐로 기껏 끌어올린 국력을 다시 소모한다. 소태제가 덕성도의 난으로 마음고생을 하다 1804년 사망한 후 4부 시점의 황제인 영강제 조형윤 대에 와서는 도통사들은 완전히 지방 군벌화되어 자식에게 직책을 세습하고 조정에는 사후에 표문만 올리는 데가 황궁에서도 환관의 힘이 커지는 등 완전히 당나라 말기같은 상황이 되버렸다. 영강제는 황제 직할령의 경제력을 끌어올려 간신히 도통사들에 대한 힘의 우위를 유지했으나, 후계자 문제로 인해 황후 송씨와 환관들에게 독살당하고, 뒤를 이은 태자 조심원은 어리석고 향락만 즐기는 암군인데다 태후가 된 송씨가 국정을 농단하고 있고, 아편 잠상들을 단속하기 위해 덕성도 탄압을 중단하고 덕성도에게 아편 잠상 단속권을 부여한 것도 덕성도 내에 홍수전의 배상제회가 세력을 키우고 있어 큰 위험요소로 작용 중이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무시당하고 있는 처지이다. 서구권에서는 태평양을 재패한 한국은 물론이고, 용병업으로 영향력이 큰 일본, 천주교를 우대하는 건주 양국에게 인지도가 밀리는 처지이다. 동방 국가들과 수교해서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는 프로이센도 후송은 무시할 정도. 서양에서는 시니카로 부른다.

  • 증기기관 자체개발
후송의 저력을 두려워한 대한, 청, 일본 등이 후송에게는 절대 넘기지 않았으나, 프랑스에서 수입한 백과전서에 실린 증기기관 자료를 기반으로 1755년(대한 원강 15년) 자체 개발에 성공한다.

  • 증기선
기존의 인력 철갑선 대신 증기기관을 탑재한 철갑선을 실전 배치에 성공하고 양광 원정에 투입한다.

덕성도의 난과 탐보라 화산 폭발을 겪고 사회가 혼란해진 후송에 운남산 아편이 퍼지면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후송 조정은 아편을 단속하지만 많은 농장주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이 딴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는 수단으로 아편을 외려 장려한다. 이 때문에 아편중독 치료제로 대한제 인삼이 각광받고, 품질이 떨어진다는 미국산도 수요층이 있다. 황실에서는 당연히 아편을 단속하려 하지만 황실 직할지 바깥에 있어서 번왕이나 다름없는 양광, 형주, 복건, 한양 도통부에서 황실을 무시하고 아편의 유통을 묵인해버렸다. 이를 통해 막대한 세금을 거두고 아편 거래로 황실 직할지의 부를 빨아들이면서 황실 직할지를 발전시켜서 군사력을 확충하고 다른 도통사들을 제압하려고 한 후송 조정의 계획도 망쳤는데 아마 여기까지 의도하고 한 것으로 보인다. 나름 명군인 영강제가 임칙서의 계획을 받아들여 덕성도를 합법화해주는 대신 덕성도에게 아편 단속을 맡기면서 아편 밀매가 약간 줄어들긴 했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안되는 상황. 또한 서나라산 아편의 유통이 임칙서와 덕성도의 단속으로 줄어들면서 아편 가격이 오르자, 벵골산 아편이 대한 벵골 상관의 중개로 서양 무역상들을 통해 유입되면서 원역사 아편전쟁 직전과 비슷한 상황이 되어간다.

  • 덕성도의 난(1796~1801)
후송 소태제가 양광 정복 후 백련교의 난으로 혼란해진 청나라를 치려다가 대한을 뒷배로 둔 종교인 덕성도가 사회 불안요소라고 의심하여 반란 따위는 생각지도 않던 덕성도를 탄압한다. 소태제가 1796년 덕성도 신도 10만명을 학살하자 전국의 덕성도 신도들이 봉기하여 5년 동안 후송 전국을 뒤흔들고, 간신히 난을 진압하긴 했지만 북벌도 무산되고 마침 탐보라 화산 폭발로 인한 기근까지 덮치자 운남산 아편이 퍼진다.

  • 덕성도 합법화
덕성도가 그동안 탄압을 받아왔지만 아편을 엄금하는 교리를 가진데다 대한의 총본산에서 어느정도 통제력이 있다는 점에 착안한 임칙서의 건의를 영강제가 받아들여 덕성도를 합법화하고 아편 잠상 단속권을 부여한다.

후송 조정에서는 엄히 금지하고 있으나 금령이 미치지 않고, 지역에서 한번씩 계투가 터졌을 때 패배해 사로잡힌 포로들이 광동, 복건, 홍콩을 통해 대한, 일본, 영국 상인들에게 묘노로 팔려나간다.

태조 조승복 때만 해도 황제에게 꼼짝도 못했던 도통사들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사실상 군벌에 가깝게 변했고, 태녕제 시기에는 사치와 향락으로 중앙 재정을 낭비하면서 중앙군의 전력이 약화되어서 통제도 불가능할 지경이 되었다. 양주, 회주, 요주, 항주, 명주, 한양, 형주, 정주 총 8개의 도통부와 양광총독부를 두고있다. 암군 태녕제조차도 도통사들이 거두는 세금은 손을 댈 수 없었기 때문에 도통사의 군사력은 유지되어서 정주도통사의 병력으로 양광을 함락할 수 있었지만, 그 때문에 원래 귀순한 임호관이 아닌 황제의 측근을 양광에 임명하려고 했으나 홍사옥의 청을 거부하지 못했다. 영강제 시기에 황제가 직접 통치할 수 있는 지역은 직례, 절강, 강서 단 3개 성 뿐이며 통제할 수 있는 도통사는 양주도통부, 회주도통부 둘 뿐이고 심지어 그 직할지에 있는 요주도통부, 항주도통부, 명주도통부도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그나마 몇 년이 지나면서 황제 직할지는 중원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이라 그 경제력과 영강제의 노력에 힘입어 금군과 직할 2개 도통부는 가장 정예 전력으로 육성하여 직할지의 3개 도통부도 다시 황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황제 직속 병력을 동원하면 다른 도통부도 제압할 순 있지만 그러면 청나라와 대치하는 북쪽 전선에 구멍이 뚫리니 감행하진 못한다.

후송은 옛 남송의 계승을 표방하여 남송의 관제를 사용하는데, 추밀원은 본래 군정을 관장하는 기관이었으나 청과의 전쟁이 반복되고 도통사들의 군벌화가 심해지면서 실제 역사에서 조선의 비변사처럼 모든 국정을 사실상 관장하게 되었다. 좌 ·우 지추밀원사도 종 1품이지만 정1품인 상서령보다 실권이 강하여 좌 ·우 승상이라고 불린다.

  • 봉선으로 인한 국론 분열
태후 송씨가 대한과 청나라의 봉선의식을 보고 질투심에 불타 자국령인 형산에서 아들 함화제의 봉선의식을 올리게 하면서 호화찬란한 봉선의식 준비를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게 되어 민심이 동요하고 배상제회의 세력이 퍼지는데다, 태산이 아닌 형산에서 봉선을 한다는 것은 북벌의 의지를 버리고 강남 왕조로써의 현상을 유지한다는 정치적 의미가 되어 화북에서 내려온 귀족 가문들인 북인들은 반발이 심하고, 토착 강남 귀족 가문들인 남인들은 북벌 포기를 적극 찬성하는 등 국론이 크게 분열되었다.

2.4.1.1. 배상제회[편집]

원역사와 다르게 홍수전이 덕성도 접주 출신이었기에 기독교가 아닌 덕성도의 분파로 출범했으며, 교리가 많이 변질되고 구월산의 통제도 받지 않으면서 사실상 완전히 다른 종교가 되었다. 홍수전은 장기적으로 배상제회를 바탕으로 후송을 멸망시키고 태평천국을 세울 계획이다. 태평도라는 멸칭으로도 불린다.

  • 천왕(天王)
배상제회의 교주 홍수전의 칭호. 천왕 홍수전은 전생에 수많은 공덕을 쌓아 예수불의 동생이자 상제의 둘째 아들로 환생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신도들에게도 배상제회의 가르침을 잘 따른다면 내세에 자신처럼 상제의 아들로 환생할 수 있을 것이라 가르친다.

  • 신벌(神罰)
배상제회가 덕성도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으로, 덕성도는 자발적 기부를 통한 부의 재분배를 중시하는 반면 배상제회는 부자들을 약탈하고 죽여서라도 재산을 빼앗아 분배하라고 가르치며, 이러한 약탈 행위를 신벌이라고 부른다. 때문에 배상제회의 공격을 당하는 부자들은 이들을 도적떼로 취급한다. 이렇게 신벌을 통해 빼앗은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분배하는 것으로 배상제회는 빠르게 교세를 확장한다.

  • 교세
홍수전의 말빨 덕에 배상제회의 신도 수는 4년만에 10만명으로 불어났다. 또한 노예가 되어 각국으로 팔려나가는 쿨리(묘노)들 사이에 신도들을 침투시키는 방식으로 해외 선교도 노리고 있다.

2.4.2. [편집]


대서국
大西國

국호
대서국(大西國)
위치
운남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23]
국성
장(張)
연호
대순(大順) (1635 ~ 1656)
영창(永昌) (1657 ~ 1715)
승평(承平) (1716 ~ 1728)
흥시(興始) (1729 ~ ?)
광안(廣安) (? ~ 1759)
함녕(○○) (1760 ~ 1787)
복흥(復興) (1788 ~ 1820)
영무(○○) (1821 ~ )
문자
한자
민족
한족, 그외 소수민족


원래도 다른 두 중원 국가에 비해 국력이 딸리는 서였는데, 암군 함녕제 장시원의 활약(?)으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 놀고먹던 장시원은 무리한 안남 원정으로 주력군을 죄다 날려먹는다. 이 빈틈을 타서 양광 지방에 후송이 쳐들어왔고, 그러자 배후의 청은 생각하지 않고 사천의 병력을 다 뺐다가 청까지 빈집을 노리고 쳐들어온다. 결국 후송과 청이 영토 대부분을 갈라먹었으며, 함녕제는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 죽고, 서는 운남 지방만 남은 내륙국이 되어 더이상 다른 두 국가와 대등한 경쟁이 불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그나마 운남인들이 예전 청나라가 화북에서 저지른 대학살을 기억하여 서나라 유지를 택했기 때문에 국가가 유지되는 것으로, 서나라 황제는 세금만 받아먹는 허수아비이고 각 지역 호족들이 멋대로 할거하는 상태이다.

청에서는 함녕제의 항복으로 서가 멸망했다고 간주하며 운남에 남은 서는 그냥 변방을 장악한 반군으로 간주하고 있다. 운남이 워낙 지형도 험하고 인구도 산업도 별볼일 없는 땅이라 놔두고 있지만 청이든 후송이든 서를 정복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바로 무너질 수준. 내륙국이 되면서 대한과의 외교도 단절되어 한양에 있던 서나라 주재관들은 명나라 황실의 후예인 대명공에게 귀부하였다. 그 후 탐보라 화산 분화로 인한 흉년과 벵골에서 들어온 콜레라까지 겹쳐 큰 피해를 입자 어떻게든 식량을 수입하기 위해 아편을 대량 재배해 의화당의 주도로 후송과 청으로 밀수출하여 특히 후송에 큰 사회 문제를 일으킨다. 호족들이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도 아편팔이로 마련한 것이어서 황제 영무제가 자괴감에 괴로워할 정도. 벵골산 아편과 경쟁이 붙자 호족들이 황제에게 압력을 넣어 벵골 칸국에 항의 서한까지 보내게 할 정도다.

서나라 일대에 널리 퍼진 종교로 백련교의 분파이다. 본래 서 조정의 후원을 받아 널리 퍼졌고, 청이 사천 지방을 정복한 후 서 조정에서 후원하던 도교와 백련교를 싸잡아 탄압하려 하자 1793년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이후 지하로 숨어든 의화당은 아편 밀매에 손을 댄다.


2.5. 건주[편집]


여전히 대한과 우호관계지만, 대한에서 건주 양국을 자신들보다 아래인 오랑캐 취급하는 풍조가 있다는 걸 알기에 내심 대한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다. 건주 양국은 여전히 북경을 공동수도로 여기는 등 겉으로는 가까운 사이지만 물밑에서는 청이 후금을 합병할 계획을 세우는 등 대립관계가 될 위험이 보이고 있다. 서양에서는 이 두 나라를 호엔촐레른 가문처럼 본가와 분가로 보고 있으며, 후송과 구분하여 건주 양국을 카타이라고 부른다.


2.5.1. [편집]

대청국
大淸國

국호
대청국(大淸國)
위치
직예, 산동, 산서, 하남, 섬서, 사천, 귀주, 감숙
수도
북경 > 동경 개봉부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
국성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애신각라)
국가원수
황제
연호
천명(天命) (? ~ ?)
숭덕(崇德) (? ~ 1663)
만방(滿邦) (1664 ~ 1671)
순치(順治) (1672 ~ 1695)
중통(○○) (1696 ~ 1728)
홍화(○○) (1729 ~ ?)
건강(建康) (? ~ ?)
강희(康熙) (? ~ ?)
계정(契正) (? ~ ?)
도광(道光) (? ~ ?)
언어
중국어(관화), 만주어
문자
한자, 만주문자
민족
만주족, 한족


군사적인 재능이 출중한 계정제가 황위에 올라, 서나라가 후송과 양광을 놓고 싸우느라 전 병력을 양광으로 보낸 틈을 타 서나라의 중심지인 사천 지역을 기습 공격, 33일 만에 서나라 황제 함녕제를 사로잡아 항복을 받고 사천과 귀주 지역을 장악한다. 하지만 그 후 백련교의 난과 기근으로 국력이 약해지고 운남산 아편이 들어온다. 여기에 입관한 지 2백 년이 지나서인지 새로 영토로 편입한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청 도광제는 후금의 황위 계승 분쟁을 물밑에서 조장하며 후금을 장차 합병하여 건주일통을 이루겠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 인구
현재 청나라 인구는 약 1억이다. 그 중 한족이 대략 9천 4백만이고 지배층인 기인(旗人)은 만주인에다 몽골인, 왜인, 한인까지 다 합쳐도 6백만이 되지 않는다.

  • 증기기관 전파
3부에서 어렵게 자체 개발한 증기기관을 대한의 물밑지원을 통해 개량해서 후금, 유구에 수출할 정도가 되었다.

사천을 정복한 청나라 계정제가 서나라에서 흥하던 도교와 백련교를 위험요소로 보고 탄압하자, 백련교도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한다. 백련교 결사대가 개봉부 황궁을 습격해 계정제가 직접 총을 들고 싸워야 했을 정도로 위협적이었으며, 살아남은 백련교 잔당인 의화당이 서나라에서 아편을 밀수해다가 팔고 있어 사회불안요소가 되고 있다.

  • 종교
원역사와 달리 티베트를 차지하지 못했고 티베트 불교를 믿는 준가르와 대립하고 있기에 티베트 불교가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한다. 때문에 원역사에서는 티베트 불교 사원이 가득했던 열하에는 티베트 불교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24]

대한 흥녕제가 백두산에서 봉선 의식을 치루자, 청에서도 마침 1837년이 누르하치의 건주 건국 4갑자(240주년)임을 들어 태산에서 봉선 의식을 치루기로 한다.

2.5.2. 후금[편집]

대금국
大金國

국호
대금국(大金國)
위치
몽골
수도
상도, 카라코룸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25]
국성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애신각라)
국가원수
대칸(大汗)
연호
천총(天聰) (? ~ ?)
명창(明昌) (? ~ ?)
천권(天券) (? ~ ?)
대덕(大德) (? ~ ?)
태화(○○) (? ~ 1722)
천정(天正) (1723 ~ 1760)
장락(長樂) (1761 ~ ?)
함녕(咸寧) (? ~ ?)
승광(承光) (? ~ ?)
덕창(德昌) (? ~ )
언어
만주어, 몽골어
민족
만주족, 몽골족, 한족
종교
천주교


가장 숭무적인 성향이 강했고 유목민족의 습속을 최대한 보존한 나라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4부 들어서는 준가르 원정이나 청나라의 후송 공격에 지원병을 보내는 것 외에는 천주교를 보호하고 교역을 하며 가장 안정적으로 평화를 누린다.[26] 게다가 청과 후송이 장서 잔당이 퍼트린 아편으로 큰 사회 문제를 겪고 있는 것과 달리 국교인 천주교가 아편을 엄금하는 데다, 국민 대부분이 유목민인 몽골족과 수렵민인 만주족인지라 아편에 취해 있다가는 굶어죽는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한족 노예들 일부를 제외하면 아편도 퍼지지 않아 내정도 안정되어 있다. 주변국 중 대한과 청은 형제국이고, 준가르는 신장 지역만 간신히 유지할 정도로 약화되었고, 러시아와도 부수의 난 이후는 우호 관계인데다가 향후 남진과 서진에 더 주력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아래에 나오는 후계 문제를 제외하면 4부에서도 큰 문제가 있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후금의 유일한 문제는 대칸 계승 문제로, 몽골족과 만주족의 옛 습속을 간직하여 선대 대칸들도 형제들과 서로 암살 음모를 꾸며가며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거는 싸움을 벌이고 패배한 황자들은 눈을 뽑히거나 수도원에 유폐되는 등 동로마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현임 대칸인 박락이 서자만 셋 있고 청 공주인 대복진 소생 적자가 없어 박락의 서자들과 야심 많은 박락의 동생들 사이에 서로 자객을 보내는 암투가 벌어지고 있고 청 황실이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박락의 동생들은 대한의 개입도 요청하고 있어, 박락이 후계 문제를 매듭짓지 못하고 죽을 경우 후금 판 왕좌의 게임이 벌어지고 이에 청과 대한이 말려들 위험성이 높다. 게다가 청 도광제는 이 기회에 후금을 아예 삼키려는 야심을 갖고 있어 4부 전반부에 일어날 대전쟁은 후금 황위 계승전쟁이 될 가능성이 높다.

  • 증기기관 도입, 철도망 확충
중종 건흥제의 장례식에 후금 성종 부수가 대칸임에도 직접 조문하러 온 것에 대한 태황 현종이 감동하여, 증기기관 수출 금지를 해제하자마자 후금에 증기기관차를 수출하고 대한 서북선, 심왕부 노선과 연결한 국제 철도망이 확충되었다. 대한과 후금 사이 교역의 70%가 철도를 통해 운송될 정도,

후금 근위 팔기병들의 경례구호로 사용된다.


2.6. 일본[편집]


도쿠가와 막부는 대한과의 우호정책을 잘 지켜가며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이다. 일본 용병들은 3부에 이어 여전히 좋은 평가를 받으며 아메리카 대륙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한이 북태평양을 사실상 호수로 만들며 본국은 고립됐지만 동서양의 교류와 해양활동이 활발해진 기조를 정면으로 거스르지는 않은 덕분에 일본인들의 활동 영역은 원 역사보다 훨씬 넓어진 모양새로,[27] 준가르 라자국이 국교를 정토진종으로 개종하게 하는 성과도 거뒀다. 쇼군의 권위 역시 쇼군가의 혈통이 6대인 이에노부 이후로는 끊어지지 않았고 계속 범군 이상은 되는 자들이 즉위한 덕분에 원역사보다 훨씬 강력하다.

  • 증기기관 도입
대한, 청에게서 증기기관 도입이나 기술제공을 받지 못했는지, 영국에서 증기기관을 도입했다고 한다.

원역사처럼 7년을 끌면서 최소 10만 명 이상 아사자를 내고, 대한의 식량 원조로 겨우 극복한다. 이 과정에서 대한의 식량 원조와 해외 교역을 독점한 에도 막부와 미쓰이 상회의 힘이 커지고, 각 번들의 힘은 더 약해지게 된다.

3부에서 미토 번 국학파의 태동을 묘사했는데 4부 시점에서도 원역사처럼 막부의 탄압 하에서도 천황이 있는 교토를 중심으로 서서히 세를 불려가고 있는 모습이다. 재석은 2부에서 강항을 일본에 보내 성리학을 전한 결과가 이렇게 되어가는 것에 대해 쓴웃음을 짓는다. 다만 원역사랑 달리 존왕파 사이에서도 친한 성향인 자들이 상당히 있는 등 존왕파 간 노선 차이가 커 보인다.[28]

을미동정 때 파괴된 오사카 성은 재건되었으나 화재로 인해 또 천수각이 소실되었다. 나고야 성은 원역사보단 소규모로 건설되었다.[29] 아즈치 성은 처음 세워진 그대로 보존된 상태이다. 그리고 에도 성의 천수각이 9대 쇼군 이에나리에 의해 재건되었다.

  • 일본 황통 보완계획
일본 황실의 피가 흐르는 쇼군의 조카와 대한 태황의 조카딸을 결혼시키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황실의 양자로 입적, 그리고 그 아이를 차기 천황의 자리에 올리려는 계획. 대한 황실의 혈통을 아시아 전체에 흩뿌려 종주 노릇을 하고 싶은 광덕제, 미토파를 위시한 일본의 존왕파 국수주의자들이 천황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친한파인 막부를 몰아내고 대한을 적대하는 것을 우려한 재석, 그리고 쇼군가의 피가 흐르는 자를 천황 자리에 앉혀서 막부의 통제력과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쇼군 이에츠구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탄생한 계획이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대한의 조정에서도 모르고 있으며 막부 측도 일부 중신 외에는 비밀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광덕제의 이복동생 전왕의 딸 황양현주가 화번공주가 되어 외가가 쇼군가인 간인노미야 나루히토 친왕과 혼인하였으며, 닌코 덴노가 원역사처럼 외동아들밖에 없어 황양공주가 만약 딸만 낳으면 그 딸을 태자와 혼인시키는 식으로 일본 황통에 대한과 도쿠가와의 혈통을 넣으려 한다.

원 역사의 고산케는 오와리 번, 기슈 번, 미토 번이였지만 여기서는 히로시마 번이 고산케로 추가되었다.[30] 6대 쇼군 이에노부가 후사없이 사망하여 쇼군가의 대가 끊어진 이후 히로시마 번의 혈통이 쇼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막부를 보좌하라고 만들어진 번들이지만 미토 번과 오와리 번이 존왕파에 기울어져 있어 막부의 불안요소가 된 상태이다.

강항에 의해 성리학이 퍼진 영향으로 슈도가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는 다이묘와 고위 사무라이에게만 해당되는지라 민간에는 아직 암암리에 존속되고 있다.

  • 통선산
대한에서 자국산 마취제인 마비산에 특허를 걸자 일본에서 개발한 마취제. 아편 농도가 높아 마비산보다 마취효과가 높은 대신 조금만 잘못 써도 환자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거나 실명하는 등 의료사고 위험성도 높다고 한다.

간인노미야 친왕에게 시집온 대한 황양공주가 친정에서 즐겨먹던 명란젓을 계속 친정에서 갖다 먹자 일본 상류층 사이에서 대한의 공주가 드시는 귀한 반찬이라면서 먹기 시작하고 괜찮은 가성비 덕분에 서민들에게도 명란젓의 인기가 높아져, 명란젓의 주산지인 연해주는 대박이 난다.


2.7. 유구국[편집]


유구국
琉球國

국호
유구국(流球國)
위치
오키나와
수도
슈리(首里, 수리)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
국성
상(尙)
국가원수
유구국왕 > 유구황제 > 중산왕
연호
영락(永樂) (1710 ~ 1711)
천안(天安) (1712 ~ ?)
영원(永元) (? ~ ?)
○○(○○) (? ~ ?)
○○(○○) (? ~ ?)
대흥(大興) (? ~ ?)
성평(成平) (? ~ 1831)
언어
유구어
민족
유구인
국교
유구 신토, 불교, 유교, 신토

황제국으로 자처하며 자신들의 역사가 1만 8400년으로 대한, 일본보다 더 길다는 허세는 여전하나, 오히려 대한 주둔군이 8천 명으로 늘어나 유구군 5천 명을 숫자로도 압도하게 되어 사실상 대한의 속국인 상태가 지속된다. 대한이 유구를 번국으로 합병하지 않는 것은 순전히 일본 도쿠가와 막부와 유지하는 평화를 깨트리기 싫어서이다. 그러나 새로 대한의 태황으로 즉위한 광덕제는 인구가 대구 정도밖에 안되는 초약소국 류큐가 대한과 감히 맞먹으려 한다는걸 매우 아니꼽게 보고 류큐를 번국으로 들이거나 아니면 아예 동군연합을 통해 병합하려는 계획을 신하들의 의견을 모조리 물리치고 추진하여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해있다. 여기에 류큐병합계획이 대한 전국에 퍼지는 바람에 광덕제의 유구와의 관계를 완벽한 상하관계로 재정립한다는 정책이 민간 여론을 등에 업고 더욱 탄력을 얻었다. 결국 광덕제가 태자 재석을 일본에 보내 제2차 경인조약으로 일본 도쿠가와 막부와 합의하여 유구 황제 직위는 대한 태황이 가져가고 유구 황제는 중산왕으로 격하, 대한에서 실질적 총독인 집정대신의 파견, 외교권은 박탈하고 자치권과 치안 유지를 위한 경찰 병력 유지만이 허용된 대한의 번국으로 삼도록 합의한다.[31] 유구 조정에서는 이를 어떻게는 막으려 하고 있으나 이미 현실을 깨달은 유구 국민들은 나라를 지키는 것을 포기한 상태다.[32] 결국 1831년(신묘년) 음력 1월 22일(양력 3월 6일) 유구 조정이 대한의 요구를 모두 수락하며 독립을 잃었다.

이후 유구 주둔 대한군의 주둔비를 부담해야 하고 대한군의 대민 행패가 심해지고 대놓고 해우 밀렵을 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났으나, 이에 무관심했던 광덕제와 달리 흥녕제는 자체적으로 자국민의 범죄 행위를 처벌하고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유구 왕실에는 누손주산 최고급 가구들을 선물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아서 유구 왕족과 신하들도 대한의 번국이 된 것에 더이상 불만을 품지 않게 되었다.


2.8. 아모국[편집]


3부에서처럼 여전히 정치적으로 통합되지 않았고 미주로 가는 도중에 들러 아모국의 실상을 확인한 재석도 답이 없다는 판단을 내릴 정도로 일본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가는 중이다. 태황 광덕제도 아모국이 사실상 일본에게 종속되었다 여겨 유구를 병합하는 대가로 아모국을 일본에게 넘기기로 일본 막부와 합의한다. 유구국처럼 아모국 국왕의 직위를 쇼군의 신하로 낮추는 대신 자치권과 기존 추장들의 권력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자 아모국 추장들도 압도적인 찬성을 보여 일본의 번국으로 확정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막부는 본색을 드러내서, 기근을 빌미로 수많은 일본인 난민들이 아모국에 몰려들면서 아모국을 난장판으로 만드는데도 이를 제지하려는 시도를 무력 시위를 동원해서 막으면서 손놓고 바라보는 처지에 놓이면서, 수세기 동안 자주성을 유지하려는 어떠한 노력을 하지 않고 허송세월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 인구
30만 명 정도. 일본인이 벌써 반을 차지한 상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서 아모국을 영향력 하에 넣기 위해 이주시킨 일본인들이[33] 원주민 영주들이 훨씬 적은 세금을 걷자[34] 일본인보다는 아모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화되어서, 막부에서는 아모국은 천황의 내린 영지가 아니니 존황양이파와 맞설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는 기뻐하면서도 일본계 아모인들의 동향은 향후 통치의 불안요소로 인식하게 되었다.

  • 정치
여전히 600여명의 추장들 중에서 국왕을 뽑으나 명목상 자리일 뿐이다. 수도 오타올내에는 2부에 나온 초대 국왕 석탈왜가 지은 한국식 궁전과 그 후 일본 미쓰이 상회에서 지어준 일본식 성채가 있으나, 국왕도 평소에는 자기 부족 마을에서 살기 때문에 텅텅 비어있다. 1년에 한 번 '깨어난 곰들의 모임'(추장 회의) 때나 사람이 모이는 정도. 특히 최대 도시인 토카부치 지역에서는 추장이 용병을 고용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추장직을 세습 영주 직으로 바꿔버렸다. 일본의 번국이 된다는 소식에도 추장회의에서 기존 추장들의 권력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는 것을 듣자 오히려 대한에 조공을 안내도 되는 것이 더 좋다며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된다.

  • 경제
여전히 과거처럼 소규모의 수렵, 어업, 채집, 텃밭 농업으로 자급자족하고 있다. 일본인 거주자가 바치는 세금으로 사치품을 구입하며 편하게 지내는 상황에 맛들려 마치 원 역사의 나우루인들 같은 상황이다. 일본인들은 대규모 농장, 어장, 광산, 항만 경영을 하고 있으나 아모인들은 그런 험한 일은 하기 싫어해서 후송에서 팔려온 묘노들이 험한 일을 도맡고 있다.

  • 도시
최대의 도시는 토카부치 항구로, 대한이나 일본에서 미주로 가는 배들이 꼭 들려 보급품을 싣고 가는 요충지가 되었고 인구는 8천여명인데 대부분 일본인이나 묘노들이고 아모인은 10%도 되지 않는다. 수도 오타올내에는 3천여명이 살고 있다.

2.9. 대남국[편집]


대남국
大南國

국호
대남국(大南國)
별칭
안남, 남월
위치
베트남
수도
후에(化, 화)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완(阮)
국가원수
황제(외왕내제)
연호
가륭(嘉隆) (? ~ ?)
명명(明命) (? ~ )
종교
유교, 불교


원 역사처럼 떠이선 농민 봉기가 일어나 북쪽의 찐씨 정권과 남쪽의 광남국 응우옌씨 정권을 모두 멸망시키고, 명목상의 황제인 후 레 왕조가 서나라에 청한 원군까지 모두 격파하여 떠이선 왕조를 세우나, 응우옌씨 정권의 후손 응우옌푹아인대한의 지원을 받아 떠이선 왕조를 다시 멸망시키고 응우옌 왕조를 세운다. 응우옌 왕조는 외왕내제 체제를 유지하여 대한에 칭신하여 안남국왕 책봉을 받고 매년 조공을 바치며 복승항에 대한 육군 4000명과 대한 수군 함대의 주둔을 허용하는 한편 후송에게도 칭신하여 남월국왕 책봉을 받는다. 대한에서는 안남이라 부르지만 공식 국호는 대남이다. 또한 원 역사처럼 주변국인 진랍, 남장을 침략하며 섬라와 갈등을 빚고 있다. 유럽에서는 대한의 속국으로 인식하고 있어서 원 역사와 달리 식민지가 되는 운명을 피하게 됐다. 하지만 2대 황제 명명제가 천주교를 매국노라고 인식하여 탄압하는 바람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대한군이 주둔한 복승을 통해 술루국으로 망명하고, 명명제의 호족 탄압 정책 때문에 제대하여 호족이 된 고참 왜병들이 동족 왜병들까지 불러들여 반란을 일으키고 북쪽에는 레 왕조의 후예를 자칭하는 반군이 준동하는 등 내부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다.


2.10. 준가르 본국[편집]


원 역사에서 건륭제에 의해 진작에 학살당해서 세상에서 사라진 것보다는 상황이 낫지만 본국에서 쫒겨난 로브 샨쇼노의 무리가 인도에서 벵골을 정복하고 잘 사는 데 반해, 준가르 본국은 러시아와 후금 사이에 끼어 거의 망하고 간신히 신강지역만을 지키고 있다. 결국 러시아의 위협에 굴복한 대칸 타마치가 러시아 차르에게 복속을 택하면서 러시아의 속국이 되고, 5년에 한번씩 칸이 직접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조해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런 현실에 절망해서 동족의 나라인 남쪽 벵골로 떠나는 전사들도 종종 있다고 한다.

수도는 '굴자'라는 도시이지만 성벽은 따로 없다.


2.11. 천축국[편집]


시크 왕국과 벵골 칸국을 제외한 인도 대부분을 원역사처럼 영국 동인도 회사가 지배하게 되었다. 굴람 카디르의 난을 계기로 무굴 황제는 완전히 동인도 회사의 허수아비가 되고 동인도회사 총재가 무굴 제국 재상을 겸임하게 된다.

1833년에는 시크 왕국도 영국에게 굴복하여 대한이 지원하는 벵골 칸국만이 유일한 독립국으로 남게 된다.


2.11.1. 준가르 라자국(벵골 칸국)[편집]

나디르 샤의 무굴 정벌에 용병으로 따라왔던 준가르 왕자 '로브 산쇼노'가 벵골 태수와 관계가 틀어진 대한의 골가타 상관의 지원을 받아 벵골 태수를 죽이고 벵골을 정복, 명목상 나디르 샤의 봉신국인 벵골 칸국을 세우고 본인을 구르칸으로 선포한다. 나디르 샤가 죽은 후 구르칸은 공식적으로 독립국을 칭하고, 마라타 동맹 등 다른 인도 국가들과 싸우면서 대한과 다시 정식 외교관계를 맺어 지원을 받는다. 티베트가 네팔과의 전쟁에 자신들을 계속 끌어들이려 하자 티베트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해 국교 또한 준가르 시절 믿던 티베트 불교에서 일본 승려들이 포교한 정토진종으로 바꾸고, 무력으로 벵골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한다. 그래서 새로운 카스트 제도가 생겼는데 최상위는 준가르인,[35] 2위는 일본 용병, 3위는 인도인 관료나 군인,[36] 4위는 인도인 평민, 5위는 후송에서 팔려온 묘노, 그리고 불가촉천민으로 개종을 거부한 유랑민이 있다.

벵골을 제외한 인도 전역이 영국의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대한의 지원이 더 절실한 상황이 되었다. 다행히 현재 영국 정부는 대한의 국력과 거리의 차이, 그리고 대한과의 우호관계의 중요성 때문에 벵골을 무력으로 병탄할 생각은 없다.[37] 가혹한 수탈을 일삼는 영국과 달리 정당한 값을 치루고 교역을 하는 대한의 보호에 만족하고 있으며, 주변국들도 고만고만하여 준가르의 가장 큰 적은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라고 할 정도로 안정된 상태.


3. 대유주[편집]


세부적인 진행은 다르지만 이 세계선에서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났다.

한편 유럽에도 증기기관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며,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철도망이 깔리기 시작하고, 7년 전쟁 중 도버 해협에서 프랑스 해군의 증기선 전투함과 영국 해군의 장갑함이 해전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대한보다는 기술이 딸려 전함이라기보다는 모니터함 수준이라고 한다. 열기구도 전쟁 중에 널리 사용된다. 특히 나폴레옹이 최초로 철도망을 이용한 병력 이동, 야포 견인용 증기자동차 도입 등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과거 중종이 성친왕 시절 빈 공방전에 참전한 일화랑 이를 소재로 비발디가 창작한 오페라의 영향으로 4부 시점에서 대한 황실이 귀비 소씨(올렝카)의 후손이란 오해가 퍼져 3부에 이어 '조선인 백인설'이 더 만연해질 조짐이 있다.

대한 황실의 유별난 태자 교육, 그리고 명군만 배출되는 결과가 유명해졌는지 유럽 왕실들에서도 대한을 본받아 자식들을 빡새게 교육시키는 열풍이 불고 있다. 이 때문에 빅토리아처럼 대한에 악감정을 가진 사람이 나올 정도.

  • 아시아에 대한 인식
동아시아의 3대 문명국을 '대한, 일본, 키타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대한은 명실상부한 동아시아 최강국이자 어지간한 유럽 열강을 능가하는 강대국이며 일본은 교역과 용병업으로 큰 영향력을 가졌고 키타이는 동아시아 유일의 기독교 독립국이기 때문. 건주 양국을 묶어서 키타이라고 칭하며, 한 국가처럼 여기고 있다. 후송의 경우 '시니카'라고 부르는데, 별다른 교류가 없기에 인구수가 많아서 덩치만 큰 비문명국으로 여기고 있다.


3.1. 외수터국[편집]


3부 시점까지는 '황제령'이라고 불렸으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외스터라이히를 음차한 외수터국으로 불리고 있다.

요제프 1세가 종두를 맞아 장수하는 바람에 동생 카를 6세가 늦게 즉위하여 국사조칙 반포가 늦었지만 원역사처럼 마리아 테레지아프란츠 1세 부부가 즉위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동맹의 역전, 7년 전쟁을 치뤘다. 7년 전쟁 후 요제프 2세는 동맹이던 폴란드 왕국의 뒤통수를 치고 제2차 폴란드 분할에 참여한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는 등 큰 피해를 입는다. 나폴레옹 전쟁 후에는 원역사처럼 재상 메테르니히의 활약으로 국력을 상당히 회복하기는 한다.


3.2. 프로이센 왕국[편집]


프리드리히 대왕이 원역사처럼 군사적 천재성을 발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거듭 승리한다. 원 역사와 달리 폴란드 왕국도 대 프로이센 동맹에 가담하여 '네 여인 동맹'과 싸웠지만 홀슈타인 공작 카를 페터 울리히가 스웨덴 국왕이 되면서 초장부터 스웨덴과 동맹한 데다, 러시아도 루시아 태후 사망과 함께 동맹에서 이탈하여 원역사처럼 승리를 거두고 폴란드를 분할하며 동유럽의 강대국 반열에 들어선다.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원역사처럼 나폴레옹에게 털렸지만 나폴레옹이 신대륙으로 도망친 후로는 멸망한 신성로마제국의 영방 국가들이 재통합된 독일 연방에서 2인자격 위치에 올랐으며 의장국인 오스트리아를 재치고 독일어권을 통합하려 한다.


3.3. 불랑국[편집]


증조부 루이 14세를 본받으려던 루이 16세가 7년 전쟁 패전에 충격을 받고 사망하고, 그 아들 루이 17세는 영국에 보복하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에 원역사처럼 미국을 도와 참전한다. 루이 17세가 1780년 사망한 후에도 그 아들 샤를 10세가 아예 프랑스 육군을 파병까지 하며 미국을 지원한다.

  • 철도 부설
샤를 10세가 국영 철도회사를 통해 프랑스 전역을 철도망으로 연결하겠다는 계획을 무리하게 추진하여 엄청난 재정 적자를 낳는다. 하지만 이 철도망은 곧 나폴레옹이 군사용으로 유용하게 사용하게 된다. 나폴레옹 몰락 후에는 공화파 반군을 진압하고 체제를 굳히는데도 유용하게 쓰였으니 장기적으로는 좋은 투자였던 셈.

샤를 10세와 마리아 카롤리나 부부가 원역사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보다 훨씬 강압적인 대처를 하여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에 대해 바로 무력진압으로 대응하면서 프랑스 전역이 내전 상태에 빠져든다. 결국 혁명군 총사령관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국왕 부부를 생포했으며, 혁명정부에 의해 처형된다.

원역사와 비슷한 양상으로 일어났으며,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 패배 후 한인 사략선장 홍경래의 도움으로 루이지애나로 파천하여 누벨프랑스 제국을 세운다.

  • 부르봉 왕정 복고
샤를 10세의 왕세자 루이 18세가 귀국해 왕정 복고를 이루고,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 하에 반동정치를 편다. 원 역사와 달리 알제리 원정을 미루고 본국을 지켰기 때문에 프랑스령 알제리는 원역사보다 좀 늦게 정복되고, 철도망을 잘 활용해서 7월 혁명과 뒤따른 반란도 철저히 진압했다.

원역사와 달리 루이 19세가 알제리 원정 등을 하지 않고 혁명에 대비하여 병력을 파리 주변에 유지하고 있었던 데다 철도망을 통해 추가 병력 증원도 원활했고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지원까지 받아 두 봉기를 진압했다.

원역사와 비슷하게 루이 19세가 알제리 침공 주력부대로 창설한다. 외인부대이므로 프랑스인 부대와 달리 루이 19세에게만 충성할 것이라는 점을 노려 알제리 침공에 성공하면 신불랑 침공에도 투입할 계획을 갖고 있다.

원역사와 같은 프랑스 대사 모독 사건이 구실이 되어 루이 19세가 4만 대군을 투입해 정복하고 프랑스령 알제리를 세운다.

3.4. 루스국[편집]


차르 알렉세이 2세가 사망한 후 아들 표트르 2세가 즉위했지만, 루시아 태후가 아들이 성년이 되었는데도 섭정을 거두지 않아 표트르 2세는 이에 반감을 품었다. 루시아 태후는 딸 카타지나를 도와 7년 전쟁에서 대 프로이센 동맹에 참여했지만 표트르 2세는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친근감이 있던 데다 어머니에 대한 반감, 폴란드를 차지하려는 여동생 카타지나에 대한 미움 때문에 어머니가 죽고 친정을 선포하자마자 동맹을 이탈하고 프로이센 편으로 편을 바꿔 이 세계에서도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이 일어난다. 표트르 2세의 배신으로 카타지나가 충격을 받고 사망하자 거리낄 것 없이 폴란드를 분할하여 동폴란드를 점령한다. 하지만 그 후 프랑스 대혁명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차르 알렉산드르 1세와 표트르 3세가 모두 짧게 재위하고 죽고, 어린 알렉산드르 2세의 섭정태후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우유부단한 대처로 국력에 큰 손실을 입었으며 알렉산드르 2세가 모후를 끌어내리고 친정하면서 국력 회복에 시동을 걸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 때는 대한 원평제의 무기 지원을 받기도 했다.

재석은 3부 중종일때 표트르 1세와 의형제 관계와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러시아의 진출 방향을 동로마제국 계승을 명분삼아 콘스탄티노플로 돌리려 했지만, 후대 차르들은 오스만 제국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난관 때문에 원 역사처럼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로 남진하려고 하며, 무굴 제국이 원역사보다 빨리 영국의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중앙아시아 소국들의 수입원이던 무굴 제국에 대한 군마 수출도 끊기게 되어 국력이 크게 약화되자 그 틈을 노리고 중앙아시아 소국들을 합병하면서 인도와 페르시아를 향해 남진하고 있어 영국과 조만간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3.5. 폴수국[편집]


암군인 루드비크 2세 대신 국정을 맡은 카타지나 왕비가 주도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 오스트리아와 동맹하여 참전하나 프리드리히 2세에게 거듭 패전하고 만다. 7년 전쟁의 결과 친오빠 표트르 2세에게 배신을 당한 데다, 패전으로 국왕 친위군을 날려버리자 그동안 카타지나의 중앙집권 정책에 반감을 품었던 폴란드 귀족들도 배신을 때려 카타지나 왕비는 충격으로 1765년 사망하고, 후임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가 최후의 노력을 했지만 결국 폴란드 분할을 당해 독립을 잃게 된다. 그 후 나폴레옹 전쟁나폴레옹 1세가 원역사처럼 바르샤바 공국을 세우나 이 역시 나폴레옹이 유럽전선에서 패배하고 루이지애나로 파천하면서 멸망하고, 많은 폴란드인들이 나폴레옹을 따라 신불랑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과거 카타지나 왕비가 비발디를 시켜 만든 오페라의 영향으로 지금도 상당수 폴란드인들이 대한 황실이 귀비 소씨(올렝카)의 후손인 줄 안다.

러시아령 폴란드는 명목상의 폴란드 왕국이 남아있는 동군연합으로 러시아 차르가 폴란드 국왕을 겸하며, 실권은 없지만 세임 의회도 남아있다.

3.6. 수배국[편집]


원 역사에서 러시아 황제 표트르 3세가 되었던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 카를 페터 울리히와 예카테리나 2세였던 조피 프리데리케 부부가 이 역사에서는 스웨덴 국왕 '칼 13세' 부부가 되었다. 칼 13세는 원 역사처럼 프리드리히 대왕을 숭배하였기 때문에 7년 전쟁에서 처음부터 프로이센과 동맹하여 참전했으나, 승전했음에도 순수한 덕질이 목표였기에 아무 대가도 받지 않자 이에 반발한 귀족들과 아내 조피에 의해 강제로 퇴위, 연금된다. 조피 왕비는 원역사와는 달리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고 어린 아들 파울 1세를 국왕으로 옹립한 다음 스스로 섭정태후가 되어 의회를 억눌러 왕권을 강화하고 스웨덴의 국력을 회복시키는 업적을 쌓는다.


3.7. 잉글국[편집]


7년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원 역사와 같은 양상으로 북미 식민지가 미주합중국으로 독립해버린 데다 인도에서도 경제적 가치가 높은 벵골 영유에 실패하여 원 역사보다는 손해를 봤다. 미영전쟁도 원역사처럼 치뤘고,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신불랑 건국을 방조했다고 한다.

몰락한 서나라에서 아편을 제조해서 후송에 퍼지면서 원 역사의 악행을 저지를 일은 없어졌지만,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하고 함대를 인수할 때 기습해서 몰살시키고,[38] 누벨프랑스 건국 후 바다로의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미시시피강 하구를 점령하는 등 원 역사의 명성에 부끄럽지 않게 활약하고 있어서 대한 조정에서도 앞으로 대한의 세력권인 벵골과 말레이 지역으로 잉글국이 손을 뻗칠 것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원 역사처럼 1833년 노예제 완전 폐지 선언을 하여 대한, 미국 등 다른 열강에도 영향을 준다.


3.8. 내달국[편집]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에게 본국을 점령당했으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지는 나폴레옹에 반감을 가진 대한 원평제가 본국 해군, 조홀국과 술루국 육군을 파병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프랑스를 막아내고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텨낼 수 있었고, 독립을 회복한 후에도 대한에 저자세를 취하고 있다.


3.9. 서반아[편집]


3부에서 성립된 비텔스바흐 왕조 호세 페르난도 1세의 증손자인 페르난도 6세가 젊은 혈기에 프랑스 혁명전쟁에 반혁명군을 도와 마르세유를 침공하려다가 나폴레옹에게 박살나고, 1804년 나폴레옹이 친히 13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여 페르난도 6세는 과달라하라 조약을 맺고 폐위,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원역사처럼 괴뢰 군주가 되고 페르난도 6세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 아비뇽에 유폐되었다가 35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한다. 그 아들 호세 페르난도 2세가 나폴레옹 패배로 16세에 복위했지만 스페인 본국도 전쟁의 여파로 폐허가 된 데다 아메리카 식민지도 모조리 독립해버려 2류 국가로 전락한다.

대한의 제안으로 가치가 없어진 태평양의 스페인령 북마리아나 제도를 흔쾌히 팔게 되었다.


3.10. 돌궐국[편집]


원역사처럼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영불러 연합군이 그리스를 지원한 때문에 패배하여 그리스를 잃고, 이집트도 메흐메드 알리가 자립해 명목상의 봉신국으로만 남은 등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4. 대미주[편집]



4.1. 대한령 미주[편집]


  • 인구
원평제 즉위 초에는 6백만 명, 탐보라 화산 폭발로 본국이 기근을 겪은 후인 1826년에는 8백만명으로 늘었다.

  • 철도 부설
현종 때인 원강 24년(1764년)에 지선성과 태호성을 잇는 간선철도가 개통되고 원강 30년(1770년)에 지선성과 유타성을 잇는 간선철도도 개통된다. 그 후 재석과 나폴레옹 1세의 협정에 의해 지선성부터 누벨오를레앙을 잇는 대륙횡단철도가 1833년 착공되며 대부분의 노동력은 묘노와 한공들이 맡는다.

  • 반강제 머슴제 폐지
미주의 인구와 납세가 충분히 늘어나, 장조 시절부터 있었던 새로 건너온 이주민을 관에서 원 거주자들에게 반강제로 수년간 머슴으로 일하게 만들던 제도가 원평제 재위 중 폐지되었다.

  • 개신교 전파
미주합중국에서 무역상을 따라 넘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개신교를 전파하여 초기에는 탄압을 받았으나 원평제가 개신교 금지령을 해제한다. 아직 대한 조정에서 미주까지는 초등 의무교육이나 의료 시설 개설이 부족한 틈을 노려 미국 선교사들이 학교와 병원을 세워 미주인들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북미주 최고의 명가인 미주 원씨 가문이 개신교로 개종하는 등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특히 후송에서 미주로 팔려온 묘노들이 개신교에 귀의하는 수가 늘어났으며, 재석이 미주 순행에 나선 시점에서는 미주 개신교도의 숫자가 5만 명 정도이다. 그후 재석이 흥녕제로 즉위한 지 2년째인 1837년이 되면 미주에 있는 교육기관의 30%가 개신교 미션스쿨일 정도로 미주에서 무섭게 세를 불려가고 있다.

  • 백정
수백년이 흐르면서 원래의 백정들은 본국에서도 동화되거나 변경으로 흩어져 도적이 되었는데, 미주에서도 변경으로 흩어지면서 3부 장길산 패거리처럼 다민족 도적단으로 변화하여 4부 시점에서는 백정은 변경의 도적단을 가리키는 멸칭이 되었다.

  • 미주순검대 편성과 미주 속오군 해체
신불랑에게서 구입한 멕시코 2개 주 지역에 신설되는 동미주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편성되는 부대. 신불랑과의 조약 상 대한 정규군을 국경에 배치할 수 없게 되어 별도의 부대를 편성하게 되었으며, 본국에서 전역했다 재입대한 베테랑 3천명이 기간요원으로 파견되어 현지에서 기존 속오군 중 정예병을 전속시켜 총 3만명으로 편성할 예정이며, 순검대 완편과 동시에 미주 속오군은 소집훈련도 중단하고 명목만 남겨두기로 한다.

  • 천부공화론
미주 개척 200년이 넘도록 미주인이 본국 관직을 얻는데 차별이 있고 미주대총관 등 미주의 요직은 전부 본국인이 차지하는 현실에 미주 청년들이 점차 불만을 가지며, 신불랑의 자유주의자들, 미국에서 온 개신교 선교사들에게서 전해진 천부공화론 사상에 빠져드는 청년들이 많다. 대부분은 대한 태황은 군주로 모시되 모든 관직과 법률은 미주에서 자체적으로 정하는 동군연합 체제로의 전환을 바라지만 완전 독립과 공화정을 바라는 사람들도 있어 4부에서 미주 독립전쟁이 터질 복선이 되고 있다. 심지어 태황의 미주 봉선을 청원하는 상소문에 서명을 받으러 다니던 동빈 김씨의 아버지 김재정에게 대놓고 공화정을 주장하다가 김재정의 신고로 잡혀가 곤장을 맞은 인물도 있었다고 할 정도.


4.1.1. 북미주[편집]

  • 인구
인구는 200만이고 그 중 토인이 16만이다.


4.1.2. 남미주[편집]

  • 인구
인구는 420만이고 그 중 토인이 24만이다.


4.1.3. 빙주[편집]

  • 인구
정주민이 거의 없어 인구 통계가 아예 없다.


4.1.4. 중미주[편집]

  • 인구
인구는 140만이고 그 중 토인이 8만이다.


4.1.5. 서미주[편집]

  • 인구
인구는 23만이고 그 중 한인은 14만 명, 토인은 1만 명 미만, 그외에는 대부분 멕시코인, 극소수 스페인 크리올이 있다.


4.1.6. 동미주[편집]

신불랑국, 멕고국과의 협상을 통해 구입한 멕고국 북서부 영토.

  • 인구
인구는 약 30만이다.

  • 아파치 사포대
안핵사 이용태가 조직한 아파치족 민병대. 대한의 통치에 저항하는 산적들과 토호들을 토벌하고 전리품의 2/3를 갖는 조건으로 복무하나 대한에 복종하는 토호까지 털어서 향후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4.1.7. 동변[편집]

  • 인구
인구는 17만이고 한인과 토인이 반반이다.
  • 지역
동변관리사가 주재하는 치소는 유타성으로 이동하였고, 150년 전 3부에서 중종이 동변관리사일 때 원주민 유트족에게 유타성 토지 사용료로 매년 말 50마리를 주기로 한 계약이 150년 동안 그대로 이행되고 있다. 긴 세월 동안 대한의 은혜를 입은 셈이 된 유트족도 덕분에 대한에 충성한다.

  • 산업
주된 산업은 목축, 3부에서 중종이 처음 개발하기 시작한 광산업, 청구호 연안의 염전업 등이다.


4.2. 캐나다 지역[편집]


캐나다 서부는 신불랑 제국의 영토가 되어 대한령 북미주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캐나다 중부는 원역사처럼 영국의 '허드슨 베이 회사'가 지배하는 '루퍼츠랜드'가 있고, 캐나다 동부는 영국령 캐나다 총독부가 있다.

1830년대 들어서 퀘벡의 프랑스계 주민들이 영국 총독의 영국 풍습 강요에 반발하여 잦은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4.3. 서반아령 신서반아멕시코(맥고국)[편집]


원역사처럼 멕시코 독립운동이 일어나 멕시코 제1제국을 선포하지만 아직 스페인과 전쟁 중이다. 대한 태황 원평제는 스페인으로부터 반란한 반적들이라면서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다.

스페인 정부군 잔존세력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은데다 아구스틴 1세의 독재정으로 민심이 혼란한 틈을 타, 1823년 텍사스를 노리던 신불랑국의 침공을 당하여 2년 만에 수도 멕시코시티가 신불랑군에게 함락되고 아구스틴 1세는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제1제국은 붕괴되고 신불랑의 보호령 신세로 전락한다. 그러나 신불랑군도 병력이 적어 멕시코시티와 동부 해안지역만을 확고히 장악한 상태이고 나머지 지역은 군벌과 도적들이 날뛰는 무법상태로 전락한다. 나폴레옹은 텍사스는 신불랑에 합병하고 나머지 멕시코 지역은 괴뢰국인 멕시코 공화국을 세웠으나 명목상의 정부인 상황이다.


4.4. 프랑스령 누벨프랑스 → 누벨프랑스 제국(신불랑국)[편집]


3부에서 묘사된 것처럼 많은 한인들이 루이지애나로 넘어와 농사와 교역이 발달하면서 원 역사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풍요한 지역이 되었다. 때문에 7년 전쟁에서도 캐나다는 원역사와 똑같이 영국에게 할양했지만 루이지애나는 원역사와 달리 스페인에게 넘기지 않고 그대로 프랑스령으로 남았다. 원역사에서 나폴레옹이 미국에게 루이지애나를 판 루이지애나 구입 역시 일어나지 않았고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한인 사략선장 클로드 홍(홍경래)의 도움으로 루이지애나로 탈출해 누벨프랑스 제국을 세웠다.

3부의 재석은 대한령 미주가 루이지애나를 장악하면 너무 커져서 독립할 것 같고, 그렇다고 미국이 가지게 두면 미국이 너무 커져서 대한령 미주를 노릴 것 같아 완충국으로 두기 위해 미주 토인들이 국가를 건설하도록 유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건국의 주체는 달라도 원하던 위치에 완충국 역할을 할 세번째 국가가 생겨난 셈이니 미주는 이렇게 3강 구도를 유지할 듯하다.

문제는 후계자인데 나폴레옹 1세는 친아들 나폴레옹 2세 외에는 내 후계자가 없다고 고집하고 있으나 오스트리아에 잡혀있던 나폴레옹 2세가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해버렸고, 자기 아들 샤를 루이를 후계자로 미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야심도 있다. 게다가 미국의 앤드루 잭슨은 남부 노예주들의 지지를 얻어 신불랑을 장기적으로 침공, 정복할 음모도 꾸미고 있다.

  • 명칭
공식적으로 누벨프랑스 제국이며 대한에서는 신불랑국으로 불리고 있다. 나폴레옹 프랑스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 영토
프랑스 식민지였던 누벨프랑스 지역에 건국되었으며 1823년 멕시코 원정에 성공하면서 텍사스를 준주로 편입했다. 본래 신불랑 지역 유일한 대도시였던 누벨 오를레앙을 수도로 삼았으나 국토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데다 미주합중국과 지나치게 가깝다는 이유로 신도시를 건설해서 수도를 이전하기로 한다. 새로운 수도는 현실의 휴스턴의 위치이며 이름은 여러 논의 끝에 나폴레옹의 고향 아작시오의 이름을 따서 '누벨 아작시오'로 결정된다.

  • 정치
작중 언급에 따르면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다고 하지만 나폴레옹 1세의 개인적 카리스마로 건국된 국가이므로 사실상 전제군주제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나폴레옹에 대한 의존도가 크지만 그의 카리스마에 끌려서 유럽의 혁명가들, 계몽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이 대거 이주했기 때문에 나폴레옹 사후 정국 불안정의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주민들 중에 관료는 적어서 행정에 문제가 있던 것도 미국인들이 대거 이민와서 해결되고 있다. 의회는 기존 루이지애나의 토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하원과, 나폴레옹을 따라 이주한 유럽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원으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고 있다.

  • 외교
원 역사에선 군사적 능력에 비해 과소평가되었던 나폴레옹의 외교적 능력이 절정으로 발휘되어서, 건국 직후 국경을 접하는 대한, 미국, 스페인과의 국경을 확정해서 안정을 도모했고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미국과는 나폴레옹이 프랑스 통령이던 때부터 미시시피 강의 자유통항권을 허용하는 등 우호관계를 맺고 있고, 제퍼슨 총통이 대한령 미주로 가는 길을 찾으라고 보낸 탐험대의 통과도 허락하는데다가 신불랑국 건국 이후로는 공동으로 '나폴레옹-먼로 공동선언'을 1823년 겨울 발표할 정도로 우호적이다. 하지만 신불랑이 미주합중국의 확장을 막아버렸기에 언제든지 관계가 악화될 수 있으며 이를 대비하기 위해 대한과의 관계도 신경쓰고 있다.[39] 대부분의 유주 국가들이 여전히 대한을 조선이라고 표기하는 반면 신불랑은 대한이라고 제대로 불러주는 등 우호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40] 대한에서는 원평제의 성향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불랑국의 번국으로 간주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국임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완충국의 필요성도 이해하고 있기에 원평제 말년 정식으로 제국으로 인정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유사시 미주합중국과 신불랑국의 전쟁이 발발하면 신불랑국을 도울 것으로 보인다.

  • 군사
나폴레옹이 도주에 성공한 후 프랑스 왕 루이 18세는 니콜라 장드듀 술트 원수에게 5만 병력을 주어 토벌군으로 보내지만 누벨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술트가 나폴레옹에게 투항하는 바람에 5만 정예병만 거저 준 꼴이 되고 말았다.건국 선물 이를 기반으로 루이지애나 전역을 안정시켰으며, 이후 나폴레옹을 따라 망명한 옛 부하들, 루이 19세가 보냈다가 투항한 병력 1만에 원래부터 거주한 프랑스계 이주민, 유럽계 이민자들, 미주 한인들, 인디언들, 심지어 흑인들까지 징집해서 인구에 비해 비대한 12만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에 힘입어 멕시코 원정을 성공시키는 강병이 되었다. 다만 영토에 비해 적은 군대이므로 향후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해군은 정규 해군은 없고, 홍경래 총사령관이 포섭한 미국 사략선들로 구성된 사략함대가 활동한다.
나폴레옹이 신불랑 건국 과정에서 직접 격파하고 복속시킨 아파치 부족들은 나폴레옹을 위대한 전투추장으로 받들며 신불랑국 기병대로 활동한다. 하지만 나폴레옹에 반발하고 복속을 거부하는 아파치 부족들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원 역사에서 텍사스 레인저를 창설했던 스티븐 오스틴이 이 세계에서는 신불랑국 땅이 된 텍사스로 이민왔다가 나폴레옹의 신임을 받아 텍사스 준주 주지사가 되어 텍사스 레인저를 창설한다.

  • 인구
본래 100만 정도였으나 건국 후 이주민이 급격하게 유입되어 순식간에 약 200만으로 2배 가까이 급증한다. 대한령 미주에서 이주한 한인계, 미합중국에서 이주한 미주계는 물론 유럽에서도 폴수국계 등이 유입되고 있으며, 정치적 박해를 피해서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우는 신불랑국으로 오거나 경제적 목적으로 오거나 옛 주군인 나폴레옹을 따라 오거나 모험을 찾아 오는 등 이유는 다양하다.
  • 한인
3부에서 언급된 한인 도망자들이 상당히 많이 늘어나서 제국 인구의 10%를 차지할 정도이다. 인디언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으나, 내륙에 사는 인디언들과 달리 논을 만들 수 있는 강가에 주로 살아서 충돌은 많지는 않은 편. 1세대는 여전히 한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아서 재석이 방문하니 어쩔 줄 몰라하며 꿇어 엎드리지만, 이후 세대는 언어도 프랑스어, 인디언 말, 한국어가 섞인 크레올어를 구사하며 한인의 정체성이 없을 정도로 동화되었다.
  • 인디언
원 역사의 미국인들과 달리 인디언을 제국민으로 인정하고 있다. 인디언들을 병사로 쓰고 수우족, 샤이엔족 등 주요 부족의 추장들에게는 작위를 뿌리고 수우족 추장의 딸을 후궁으로 들이기도 한다. 대부분은 충성 서약서에 서명만 하고 원래 살던 대로 살고 있다. 재석이 나폴레옹에게 장차 이주민들이 늘어나서 인디언들의 생활 공간을 잠식하게 되면서 생길 갈등에 대해서 묻자 국법으로 공정하게 결정될 것이라고 원론적인 말을 하므로, 말뿐이거나 생각이 없는 모양.

  • 경제
아직 미주합중국도 스페인 은화를 쓰고 있는 시점이라서 건국 이전부터 루이지애나 일대에 유통 중이던 스페인 주화를 그대로 사용한다. 단위는 달러. 대신 누벨 프랑스라는 뜻으로 NF라는 글자를 덧씌워 사용한다. 세간에서는 나폴레옹 달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국가 규모에 비해 비대한 군대를 갖고 있어서 부채가 4천만 달러에 달하고 유럽에서 나폴레옹의 악명을 모르는 미국 은행들에서 텍사스 유전을 미끼로 대출을 받아서 대륙횡단철도 건설비의 상당 부분을 충당한지라 대한에서 사업을 하루 빨리 개시하라고 독촉하고 있다.
  • 텍사스 유전
대한에서 보내준 청나라 사천성 염정 기술자들이 1836년 텍사스 유전 개발에 성공한다.

  • 노예제
나폴레옹의 건국 이념상 노예제를 인정할 수는 없으나 건국 이전부터 이미 루이지애나 지역에 노예와 대농장을 소유한 토호들이 많았기에 국법으로는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고 국법으로 제정하는 시도도 차단하고 있지만 각 주의 자율에 맡긴다는 식으로 하여 노예제는 사실상 아래에 나오는 노예계약제로 바뀌어 존속하고 있으며 존 칼훈이 미국에서 대사로 오는 등 노예주들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미주합중국 남부 노예주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노예제가 남아있는 주에서도 노예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거나 의식주를 제공하지 않거나 가족들을 따로따로 팔아버리는 일은 국법으로 엄금하고, 해방된 노예는 정식 시민권을 부여하는 등 노예의 처우가 상당히 개선되어 미국 흑인 노예들이 부러워할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신불랑 정부와 나폴레옹도 말로만 노예제에 반대할 뿐, 실제로는 채무 관계에 얽혀 노예나 다름없는 자유민 노동자들을 동원해 플랜테이션을 운영 중이며, 이들은 원 역사대로 쿨리라고 불린다.[41] 중국계가 다수이긴 하나 중국계만 쿨리라고 부르지는 않으며, 흑인이나 백인도 채무관계에 얽혀 강제노역을 한다면 역시 쿨리라고 불린다.

  • 아메리카 국가 회의
나폴레옹이 설립한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회의 기구로 신불랑국을 맹주로 미국, 멕시코,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베네수엘라, 에콰도르가 가입되어 있다. 신불랑의 괴뢰국인 멕시코를 제외하면 가맹국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되 외부의 침략에는 공동 대응하는, 작중 나폴레옹-먼로 선언을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기구로 보인다.

  • 신불랑-맥고국 전쟁(1823년~1825년)
1823년(원평 41년), 나폴레옹은 텍사스를 빼앗고 아직 취약한 신불랑국의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멕시코 제1제국이 혁명의 이상을 더럽힌 것을 벌한다는 명분으로 멕시코를 침공한다. 마침 멕시코는 아구스틴 1세의 실정과 스페인 정부군 잔존세력의 준동으로 혼란 상태였으며, 프랑스 왕 루이 19세가 나폴레옹을 치려고 한 것도 개전의 원인이 되었다. 바다에서는 사략 면허를 발급해서 통상 파괴전을 펼친 덕분에 1825년 멕시코시티가 신불랑군에게 함락되고 아구스틴 1세는 이탈리아로 망명, 멕시코는 신불랑의 보호령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나폴레옹이라도 병력이 적어 맥고국 전역을 장악하지는 못하여 여기저기서 맥고국 잔당, 스페인 왕당파, 도적패 등이 날뛰고 있다.


4.5. 미주합중국[편집]


원역사와 같은 양상으로 7년 전쟁 후 전쟁 비용 감당 문제로 영국 본국에서 세금을 늘리자 식민지인들의 반발이 일어나 보스턴 차 사건을 시벌점으로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났고 조지 워싱턴을 초대 총통으로 미주합중국이 독립했다.[42] 프랑스는 원역사처럼 미국을 지원했고, 영국은 대한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대한은 개입을 원하던 목종을 신료들이 영국 견제를 위해 방관하자고 말렸고 곧 목종이 죽는 바람에 방관만 했다고 한다. 이 역사에서는 북쪽은 영국령 캐나다가 있고, 서쪽은 그 나폴레옹이 다스리는 신불랑국이 있어 확장할 방향이 마땅치 않다.

  • 인재 유출
원 역사의 미국이 초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이 수많은 이민자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기 때문임을 감안하면 "확장할 곳이 없다"는 따위 정도로 여겨질 큰 피해다. 나폴레옹이 신불랑국을 건국하면서 폴란드인들을 포함해서 유럽에서 오는 이민자들은 나폴레옹의 카리스마와 혁명 정신을 따라 신불랑으로 이민하고, 심지어 모험을 찾거나 미국 내의 경쟁에서 밀려서 관료들이 신불랑국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다.[43]

원 역사와 비슷한 양상으로 치뤄졌다고 하는데, 뉴올리언스 전투는 대승이긴 했지만 피해가 더 컸다.

1823년 겨울 미국의 먼로 총통과 신불랑국의 나폴레옹 황제가 공동발표한 선언, 원역사의 먼로 선언과 골자는 같지만 유럽 뿐 아니라 아시아의 초강대국, 즉 대한도 대상에 포함된다.

  • 합중국 산삼
북아메리카 동부가 인삼의 주요 산지인 만큼 상인들이 인삼을 채취해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대한산 인삼의 품질과 명성을 따라가지 못해서 후송 등에다 저렴하게 팔고 있다.

  • 한미관계
북미 중부에 신불랑국이 건국되어 대한과 직접 영토를 접하고 있지는 않으나 상인들이 1786년 무역선을 타고 대한을 방문하면서 민간 교역부터 시작하고 이후 국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지시로 본격적인 교역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토마스 제퍼슨 정부 때 루이스 & 클라크 사절단이 루이지애나를 거쳐 대한령 미주를 방문하여 교섭 끝에 육로를 통한 교역이 주를 이루게 된다. 고래잡이 문제로 갈등 요소가 있다.[44]

신불랑국의 존재로 인해 대륙횡단철도가 미국 남부를 거쳐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올라가는 선로로 부설되게 되었고, 재석은 이 경우 남부에서 먼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남북전쟁이 아예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게 되었지만... 이는 원 역사에서 노예제가 경제적 문제 이상으로 이념적인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앤드루 잭슨의 지지기반인 개척민들은 더 넓은 개척지를 원하는데 인디언의 땅을 뺏는 것을 막고 인디언들에게 작위를 뿌려서 이들에게 고개 숙여야 하는 신불랑국의 상황을 굴욕적이라고 받아들이며, 노예제 유지를 원하는 남부 노예주들은 신불랑국의 존재를 불편하게 여기며, 여기에 노예세를 신설해서 잭슨의 지지기반을 꺾으면서 대륙횡단철도를 놓으려고 하는 헨리 클레이 행정부와 신불랑국까지 얽히면서 더 큰 전쟁이 될 가능성이 생겼다.

4.6.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편집]


원역사처럼 멕시코 독립전쟁의 혼란을 틈타 독립했으나 멕시코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이어서 멕시코의 산타 안나는 중앙아메리카를 정벌해 멕시코에 편입시킬 속셈이다.


4.7. 아이티 공화국[편집]


원역사처럼 프랑스 대혁명의 혼란을 틈타 흑인 노예들의 봉기로 독립했고 나폴레옹 1세의 군대와 싸워 독립을 지켜냈다. 그때문에 신불랑과는 공식적인 적대관계이며 아메리카 국가회의에도 가입을 거부했다.

5. 대삼주[편집]



5.1. 그란 콜롬비아 합중국 → 그란 콜롬비아 연맹[편집]


원 역사처럼 시몬 볼리바르가 지도한 독립운동으로 건국되었으나, 대한 태황 원평제는 멕시코와 마찬가지로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있다. 볼리바르 사후 해체되어서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 베네수엘라, 에콰도르가 되었으나 나폴레옹의 중재로 그란 콜롬비아 연맹을 결성하고 나폴레옹이 만든 아메리카 국가 회의의 회원국이 되었다.


5.2.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편집]


그란 콜롬비아의 해체 후 건국했다.


5.3. 영귀(英龜)제도[편집]


중종이 안용복을 보내 갈라파고스땅거북들을 데려오면서 대한에 알려졌다. 무주지여서 해적의 소굴이 되어있었는데, 대한 목종이 결단을 내려 함대를 보내 해적을 전부 쓸어버리고 하와국에게 관리를 맡긴다.[45] 하와국왕이 매년 한 차례 전사들을 보내 그 해 잡을 분량의 땅거북을 잡아와 등딱지로 잔치용 솥 등 사치품을 만든다.
1835년 원역사처럼 영국 탐험선 비글 호가 도착하여 연구 도중 하와국에서 온 거북 사냥대와 접촉하게 된다.


6. 대상주[편집]



6.1. 알제리[편집]


프랑스 국왕 루이 19세가 국내의 자유주의자들과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 벌인 1830년 7월 봉기1832년 6월 봉기를 진압하느라 외부로 군사력을 투사할 겨를이 없어 일단은 프랑스의 침공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 공사의 걸림돌인 바르바리 해적 토벌을 위해 알제리 침공의 필요성을 느끼던 중 원역사와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당시 알제리에 진 식량값 상환 문제로 프랑스 대사와 싸우던 알제리 태수가 프랑스 대사를 파리채로 때린 일이 구실이 되어 루이 19세가 전면침공하면서 시간차만 있을 뿐 원역사대로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6.2. 이집트[편집]


원역사처럼 오스만이 임명한 이집트 총독 메흐메드 알리가 자립하여 사실상의 독립국이 된다.


7. 오세아니아[편집]



7.1. 신홀란도[편집]


3부에서 영국이 개척을 시작한 이래 4부 시점에서는 호주 해안 지역은 전부 영국 식민지가 들어섰고 아직 내륙 진출은 안한 듯. 원역사와 달리 죄수보다는 자코바이트 같은 정치적 추방자나 일반인 개척민의 인구가 더 많다. 개척을 네덜란드령 바타비아와 가까운 북서부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총독부 소재지는 여전히 북서부 조지타운이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7 21:59:16에 나무위키 명군이 되어보세!/개변된 역사/4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레나 강 이동 이르쿠츠크 주 극동 연방관구[2] 워싱턴 주, 브리티시 컬럼비아[3] 네바다, 유타 주[4] 남변(累蓀) → 누손주[5] 즉, 대명공은 대명동 안에서는 폐하라고 불리고 있을 것이다.[6] 여기서도 절반 이상이 대남도 출신이다.[7] 다만 한 독자가 문의한 것에 대해 작가가 대답한 바에 따르면, 과거 급제자의 출신지 집계는 응시 지역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실제 출신지가 외지였어도 내지에서 응시했으면 내지 출신으로 집계된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 출생지를 기준으로 하면 북구주인들은 대부분 영남에 유학하여 영남에서 응시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므로 순위가 뒤바뀔 수 있다.[8] 군관은 공작 깃털, 사졸은 꿩 깃털.[9] 대한 측에서야 후금의 대칸이 누가 되는 별다른 손익이 없기는 하나 청나라가 후금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경계할 문제이다.[10] 개방적인 성향인 광덕제가 유독 여성 의무교육에는 반대했던 걸 두고 일부 독자들 사이에서 '광덕제 미래인 빙의자설' 떡밥과 엮어 미래에 벌어진 젠더갈등들을 겪고 학을 떼 그런 거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었다.[11] 처음 여성 의무교육 이야기가 나오자 문피아에서 몇몇 독자들이 여성 의무교육이 시작되면 출산률이 저하되어 한참 서구 열강들과 경쟁해야 할 이 시기에 대한의 성장 동력을 잃는 것이 아니냐, 페미니즘이 너무 빨리 시작되어 사회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냐는 등 우려를 제기해 논쟁이 있었다.[12] 김조순이 정체를 숨기기 위한 필명이다[13] 김좌근이 청나라 사기꾼에게 속아서 구입한 가품 쌍고검도 이 컬렉션에 추가될 예정이다.[14] 곱게 간 얼음이나 눈에 꿀을 뿌린 간식.[15] 재석이 광덕제가 미래인이 아닐까라고 의심하게 된 또다른 근거로, 다칭유전에 대해서 듣기만 하고 깊이 파묻혀 있어서 1960년대가 돼서야 캐낼 수 있었다는 것을 모른게 아닐까라고 추정한다.[16] 원 역사와 달리 신불랑 수도인 뉴올리언스를 잇고 미국 남부를 통해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라, 작중 역사가 또 대격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17] 백두산이 명분상으로도 최적인데다 서울 남산, 구월산, 금강산도 건의가 나왔지만 남산은 수도와 너무 가깝다는 기각, 구월산은 덕성도의 성지여서 기각, 금강산은 선대 태황이 사고를 당한 장소이므로 기각되어 결국 백두산으로 결정되었다.[18] 환웅이 하늘에서 3천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으로 내려온 것을 유래로 하여 고조선의 후예이자 삼한발해, 그리고 고려를 계승하는 대한 역시 수행원을 3천으로 해야한다는 대신 및 관료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정되었다.[19] 이는 곧 태산이 있는 화북을 수복하겠다는 국가 목표를 포기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에 추후 후송의 정세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20] 북구주 거주 한인들은 경상도로 가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21] 하진교의 외숙부 카마우아와와 국사 윤호원은 하와첨사진으로 피해 태황의 도움을 받자고 제안했으나, 하진교는 시간이 오래 걸리며, 그 틈을 타 카네카폴레이가 어떤 암투를 벌일지 모르고, 대한에서 배운 무인정사계유정난의 사례를 들어 최대한 빨리 본궁으로 들이쳐 사태를 정리하는 방법을 선택했다.[22] 다만 각 성을 점유한 도통사들의 권한이 봉건군주수준이라 봉건제도도 혼재되어 있다.[23] 하지만 운남으로 쫓겨난 이후로는 황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황태자가 호족에게 암살당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등 연맹왕국 수준으로 떨어졌다. 전제군주정의 탈을 쓴 연맹왕국.[24] 대신 그 자리는 청황실에 신자가 많은 일반 불교 사원과 후금의 국교이자 청에서도 우대받는 천주교 성당이 차지하였다.[25] 청나라와는 달리 몽골 귀족들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각지에 영지까지 가진 대영주들이 존재하여 봉건제도 섞여있다.[26] 대한은 나폴레옹이 완충지대였던 루이지애나 지역에 신불랑국을 건국하면서 새로운 안보 환경에 접어들었고, 청은 귀주와 사천을 획득하면서 국력을 신장했지만 주적인 후송 역시 양광 지역을 획득해서 여전히 국운을 걸고 대치 중이다.[27] 당장 대한의 번국인 조홀국과 술루국에 각각 15만명, 4만명 정도의 일본인이 살고 있으며 건주 양국의 왜인팔기 역시 존속되고 있다. 왜군 용병의 명성 역시 여전해 누벨프랑스에서도 고용하려 할 정도이다.[28] 특히나 원역사에서 존왕운동과 확장주의의 필두였던 조슈 번은 북구주와의 밀무역으로 얻는 수익 덕분에 친한파 번이 되었다고 한다.[29] 원역사에서는 도요토미 잔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거점으로 지어졌기에 오사카 성에 밀리지 않는 규모로 만들었지만 본작에서는 도요토미가 일찍 몰락하였기 때문.[30] 미토 번은 히로시마 번에 밀려난 것으로도 보이나 함께 고산케로 묶여 언급되기도 하는 등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것으로 보인다.[31] 원역사의 을사보호조약과 비슷한 상황이다.[32] 오히려 번국이 아니라 차라리 대한의 직할령이 되면 대한에서 과거시험도 볼 수 있고 관세를 안 무니까 더 좋지 않냐는 여론도 상당히 있다.[33] '아모인'이라고 하면 대한에서는 원주민들을 지칭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본에서 이주해서 아모국 호적으로 옮긴 일본인들로 지칭한다.[34] 일본에서는 기본세율 70%에 잡세도 있지만 아모국에서는 기본세율 50%만 내고 잡세도 없다.[35] 다만 카자흐 등의 타민족 출신이여도 북방계면 일단 준가르인으로 취급한다.[36] 고위에 오른 인물은 일본인 급으로 취급된다.[37] 다만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왕자 한 명을 친영파로 포섭하려 했으나 그 왕자가 콜레라로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38] 작중에선 트라팔가 해전을 대체하게 된다.[39] 나폴레옹도 이를 의식하는지 대륙횡단철도를 미국에서 지척인 세인트루이스가 아니라 뉴올리언스로 연결하고자 한다.[40]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한 정서에 밝은 클로드 홍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41] 플랜테이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현실에서 노예제가 없어진 후의 플랜테이션도 작중에서 묘사되는 것과 크게 다르진 않은 편이다. 오히려 국가가 감독하니 작중 시대에서는 선진적이라고 평가할 여지가 있긴 하다.[42] 여기서는 합중국 국가원수인 'president'를 '대통령'이 아닌 '총통'으로 번역하는데 원 역사에서 대통령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한 거지만 여기선 대한이 일본을 거치지 않고 먼저 합중국의 존재를 인지하였기에 차이가 생긴 것. 재석은 총통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원 역사의 그 인물이 떠오르는지 속으로 움찔거린다.[43] 유능하더라도 정치가 체질이 아니라서, 정치하는 능력만 떨어져서, 운이 안 좋아서 경쟁에서 밀려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44] 개변된 역사로 인해 기술발전은 빠르게 이루어졌지만 석탄•석유로의 연료 전환이 늦어 고래 기름을 얻으려는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자 고래잡이가 기존 역사보다 크게 증가하면서 동양 바다까지 침범하는 것이다.[45] 하와국에선 영토를 하사한 것으로 여긴다. 하와국이 대한의 충실한 번국인 때는 실질적으로는 크게 다를 바 없으니 문제될 일도 없지만, 만약 훗날 하와국이 독립한다면 영토 분쟁이 생길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