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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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일본 해군항공대의 육상중폭격기에 대한 내용은 G5N 신잔 문서 참고하십시오.
반형제 형에 1958년 교토 4세 특별 우승마 린덴(リンデン, 父 : 토사 미도리), 전형제 형으로 1961년 나카야마 기념 우승마 온워드 스탄(オンワードスタン)이 있다.
모계 5대모는 코이와이 농장의 기초 수입 번식 암말 중 하나인 뷰티풀 드리머(Beautiful Dreamer,1904)다.
데뷔 이전 아명은 마츠카제(松風)였으나, 하시모토 코키치 마주에게서 이름 붙이는걸 부탁받은 조교사 타케다 분고가 손자인 쿠리타 신이치(栗田伸一)[8] 의 이름에서 伸을 따오고, 처음 들어왔을 때 산처럼 듬직하게 있는 모습에서 따온 山을 합쳐 신잔(伸山)이라고 이름붙였다. 기수는 타케다의 사위이자 신이치의 아버지인 쿠리타 마사루가 맡았다.
데뷔 초반에는 체구가 작고 태도가 영 아니었기 때문에 큰 기대는 받지 못했었다. 함께 달리기를 시키면 뒤에서 어쩔수 없이 뛴다는 태도에 설렁설렁 뛰기만 하니[9] 조교사들 사이에서도 꽝복권 취급이었고 실제로 나이토 켄타로 구무원이 담당이 되자 놀림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토 구무원은 보다보니 '이 녀석 사실 엄청난 녀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훗날 기수가 되는 쿠리타 마사루도 한번 기승을 한 이후 "이녀석, 어쩌면 코다마보다[10] 위일지도 모른다." 라면서 고평가를 했다.
그리고 이는 타케다 분고도 마찬가지로, "이녀석이라면 어쩌면..."이라며 기대를 하게 되었고, 이후 데뷔 전에 마주 하시모토 코키치가 자금난으로 소유마 중 한마리를 팔 계획을 세웠을 때 그나마 돈을 좀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신잔을 팔려 하자 "팔겠다면 날 먼저 죽이시오"라며 맹반대를 해서 겨우 지켜낼 정도로 고평가를 하게 된다. 그리고 진영 측의 이런 기대는 훌륭하게 보답받는다.
하지만 아직은 불안이 있었기에 초기엔 유망주들이 출전하는 경기를 회피하며 승리를 따냈다.
클래식 시즌이 되자 각성하여 사츠키상과 더비를 이기며 2관을 차지했다. 타케다도 처음엔 온워드 세컨드[11] 보다 약하다는 평가를 내렸지만, 신잔이 사츠키상을 우승한 후 이정도로 대단할 줄은 몰랐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여름에 더위 먹고 컨디션을 망쳐 조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픈 경주에서도 2착했다. 이로 인해 킷카상에는 2번 인기를 얻게 되지만, 직선에서 1번 인기였던 우메노 치카라를 제치며 우승하고 세인트 라이트 이후 23년만에 역대 두번째 삼관마가 되었다.
이때 오카상-오크스 2관을 차지한 카네 케야키가 출전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당시에는 암말 삼관의 세번째 경주가 따로 없어서 킷카상이 그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12] 현재까지 사츠키상-더비 2관마와 오카상-오크스 2관마가 3관을 두고 맞붙은 유일한 경주다.[13] 물론 암말이 수말보다 경주능력이 떨어진다는 인식 때문에 9번 인기로 낮은 평가를 받았지만, 5착으로 입착에 성공하면서 예상외로 선전했다.
아리마 기념 인기투표에선 3위를 차지했지만 컨디션 회복을 위해 회피했다. 당시 킷카상은 11월에 열려서 킷카상-아리마 기념 연전은 상당히 빡빡한 스케줄이었다.
이듬해에는 천황상 봄 대회에 출전하려고 했으나, 발굽에 염증이 생겨 회피하고 말았다.[14] 다행히 곧 회복하고 타카라즈카 기념에 출전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천황상 가을 대회도 제패한 후 아리마 기념에 1번 인기로 출전했다.
하지만 이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는데, 타케다는 나카야마에서 한번도 경기를 치룬 적이 없는 만큼 확실하게 이기기 위해선 아리마 기념 전주에 전초전을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쿠리타는 신잔은 처음 나가는 경기장에서도 이길 수 있는 강한 말이라며, 아리마 기념 일주일 전에 경주를 나가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반발했다. 그러자 타케다는 자신의 동생을 기수로 태워[15] 전초전을 강행하고 여기서 2착을 하고 만다. 그러자 쿠리타는 분노하여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리다 급성 알콜 중독으로 병원으로 실려갔다.[16][17] 이때문에 쿠리타는 아리마 기념에서도 신잔에 타지 못하고 마츠모토 요시토가 대타를 서게 됐다.
아리마 기념에선 인코스 상태가 좋지 않아 바깥쪽으로 크게 돌았다. 이때 얼마나 크게 돌았는지 중계 카메라에도 잡히지 않았고, 해설자는 "신잔이 사라졌다"(シンザンが消えた!)고 외쳤다. 마지막에 앞에서 도주하던 미하루카스를 제치며 우승했다.[18] 이로서 신잔은 그당시 8대경주 중 수말이 우승할 수 있는 5개의 경주를 모두 제패해 오관마로 불리게 된다.[19] 마츠모토는 인터뷰에서 누가 타도 이길 수 있는 말이라며 감탄했다. 현 시점 기준으로보면 G1 6승에 춘추 그랑프리 연패 및 일본 4대 중앙 경마장[20] G1 경주 승리라는 대기록이다.[21]
팬들은 다음해에도 신잔이 현역 생활을 이어나가고, 특히 미국 원정을 하길 바랐지만 진영은 그대로 은퇴를 결정했다. 전년도에 미국으로 원정한 류 포렐이 그곳에서 부상당하고 은퇴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1966년 1월 9일에는 도쿄 경마장에서, 1월 16일에는 교토 경마장에서 은퇴식이 열렸다. 은퇴한 다음 해인 1967년부터 교토 경마장에선 현 G3 경주인 신잔 기념이라는 경주가 열리고 있다. 1968년 10월 13일 교토 경마장에 신잔의 동상이 세워졌다.
[출처]
은퇴 이후 홋카이도의 타니가와 목장에서 종마 생활을 시작하지만, 당시 일본산 종마는 약하다고 기피되었기 때문에 신잔은 주로 주변 목장의 암말들과 교배했다. 하지만 점점 중상을 차지하는 산구가 나왔고, 1972년엔 리딩 사이어 17위를 차지하며 20위 이내의 종마 중 유일한 일본산마가 되었다. 신잔을 시작으로 "일본산 종마도 강하다"는 인식이 생기자 애로우 익스프레스, 토쇼 보이 등 일본산 종마도 본격적으로 번식 기회를 얻게 되었고, 미스터 시비와 같은 부내국산마가 태어날 기반이 되었다. 때문에 신잔은 일본산 종마의 발판을 깔았다고도 평가된다.
1969년부터 1992년까지 산구 24년 연속 승리 기록을 세울 만큼[22] 산구들의 저점은 높았으나 유독 팔대 경주를 제패하는 산구만은 나타나지 않았다. 때문에 그 신잔마저도 후계 종마를 낳는 것은 어려운 일인가 생각되었으나, 종마 생활 말년에 가까운 1981년에 미나가와 만나가 킷카상을 우승하면서 처음으로 팔대 경주를 우승한 산구를 배출했고, 1985년에는 대표 산구가 되는 미호 신잔이 나타나 2관을 제패했다.
1987년에 종마를 은퇴하고, 타니가와 목장에서 여생을 보내다 1996년 7월 13일에 35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죽었다. 이는 당시 일본 서러브레드 최장수 기록이었다. 이후 2014년 애로 하마키요가 일본 서러브레드 최장수 기록을, 2019년 마이네르 다비드가 중상마 최장수 기록을 깼지만, GI급 우승마로 한정할 경우 여전히 신잔이 최장수 기록을 갖고 있다.[23] 이처럼 장수한 덕에, 자마인 미호 신잔의 은퇴 당시 같이 불려나와 사진을 찍기도 했다. #[24]
신잔의 손자인 밀키 웨이(경주마 명칭은 실버 타이세이)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승마 장애물 종목에 출전하기도 했다. 당시 기수는 사와이 타카오(澤井孝夫, Takao Sawai). 서울만 출전한건 아니고 다음 올림픽인 바르셀로나 올림픽도 다른 기수와 출전했으며 밀키 웨이는 일본에서 퇴역경주마 출신 중 외산 웜블러드를 재치고 승마 국가대표로 출전한 3마리중 하나다.[25]
1. 개요[편집]
일본의 경주마. 1984년 그레이드제 도입 이전 '팔대경주'라고 따로 분류되었던 최상급 경주 8개 중 참여 조건이 안 되는 3개를 제외한 나머지 5개를 모두 제패[5] 하고 은퇴할 때까지 연대율 100%[6] 를 유지하며 신마(神馬)라는 별명을 얻었다.최강의 전사.
最強の戦士。
그의 앞에서는 모든 말이 도전자였다.
彼の前では すべての馬が挑戦者だった。
아직인가, 아직인가. 그를 넘는 히어로는 아직인가.
まだか、まだか。彼を超えるヒーローはまだか。
-JRA 히어로 열전
2. 혈통[편집]
반형제 형에 1958년 교토 4세 특별 우승마 린덴(リンデン, 父 : 토사 미도리), 전형제 형으로 1961년 나카야마 기념 우승마 온워드 스탄(オンワードスタン)이 있다.
모계 5대모는 코이와이 농장의 기초 수입 번식 암말 중 하나인 뷰티풀 드리머(Beautiful Dreamer,1904)다.
3. 생애[편집]
데뷔 이전 아명은 마츠카제(松風)였으나, 하시모토 코키치 마주에게서 이름 붙이는걸 부탁받은 조교사 타케다 분고가 손자인 쿠리타 신이치(栗田伸一)[8] 의 이름에서 伸을 따오고, 처음 들어왔을 때 산처럼 듬직하게 있는 모습에서 따온 山을 합쳐 신잔(伸山)이라고 이름붙였다. 기수는 타케다의 사위이자 신이치의 아버지인 쿠리타 마사루가 맡았다.
데뷔 초반에는 체구가 작고 태도가 영 아니었기 때문에 큰 기대는 받지 못했었다. 함께 달리기를 시키면 뒤에서 어쩔수 없이 뛴다는 태도에 설렁설렁 뛰기만 하니[9] 조교사들 사이에서도 꽝복권 취급이었고 실제로 나이토 켄타로 구무원이 담당이 되자 놀림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토 구무원은 보다보니 '이 녀석 사실 엄청난 녀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훗날 기수가 되는 쿠리타 마사루도 한번 기승을 한 이후 "이녀석, 어쩌면 코다마보다[10] 위일지도 모른다." 라면서 고평가를 했다.
그리고 이는 타케다 분고도 마찬가지로, "이녀석이라면 어쩌면..."이라며 기대를 하게 되었고, 이후 데뷔 전에 마주 하시모토 코키치가 자금난으로 소유마 중 한마리를 팔 계획을 세웠을 때 그나마 돈을 좀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신잔을 팔려 하자 "팔겠다면 날 먼저 죽이시오"라며 맹반대를 해서 겨우 지켜낼 정도로 고평가를 하게 된다. 그리고 진영 측의 이런 기대는 훌륭하게 보답받는다.
하지만 아직은 불안이 있었기에 초기엔 유망주들이 출전하는 경기를 회피하며 승리를 따냈다.
3.1. 1964년[편집]
클래식 시즌이 되자 각성하여 사츠키상과 더비를 이기며 2관을 차지했다. 타케다도 처음엔 온워드 세컨드[11] 보다 약하다는 평가를 내렸지만, 신잔이 사츠키상을 우승한 후 이정도로 대단할 줄은 몰랐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여름에 더위 먹고 컨디션을 망쳐 조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픈 경주에서도 2착했다. 이로 인해 킷카상에는 2번 인기를 얻게 되지만, 직선에서 1번 인기였던 우메노 치카라를 제치며 우승하고 세인트 라이트 이후 23년만에 역대 두번째 삼관마가 되었다.
이때 오카상-오크스 2관을 차지한 카네 케야키가 출전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당시에는 암말 삼관의 세번째 경주가 따로 없어서 킷카상이 그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12] 현재까지 사츠키상-더비 2관마와 오카상-오크스 2관마가 3관을 두고 맞붙은 유일한 경주다.[13] 물론 암말이 수말보다 경주능력이 떨어진다는 인식 때문에 9번 인기로 낮은 평가를 받았지만, 5착으로 입착에 성공하면서 예상외로 선전했다.
아리마 기념 인기투표에선 3위를 차지했지만 컨디션 회복을 위해 회피했다. 당시 킷카상은 11월에 열려서 킷카상-아리마 기념 연전은 상당히 빡빡한 스케줄이었다.
3.2. 1965년[편집]
이듬해에는 천황상 봄 대회에 출전하려고 했으나, 발굽에 염증이 생겨 회피하고 말았다.[14] 다행히 곧 회복하고 타카라즈카 기념에 출전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천황상 가을 대회도 제패한 후 아리마 기념에 1번 인기로 출전했다.
하지만 이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는데, 타케다는 나카야마에서 한번도 경기를 치룬 적이 없는 만큼 확실하게 이기기 위해선 아리마 기념 전주에 전초전을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쿠리타는 신잔은 처음 나가는 경기장에서도 이길 수 있는 강한 말이라며, 아리마 기념 일주일 전에 경주를 나가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반발했다. 그러자 타케다는 자신의 동생을 기수로 태워[15] 전초전을 강행하고 여기서 2착을 하고 만다. 그러자 쿠리타는 분노하여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리다 급성 알콜 중독으로 병원으로 실려갔다.[16][17] 이때문에 쿠리타는 아리마 기념에서도 신잔에 타지 못하고 마츠모토 요시토가 대타를 서게 됐다.
아리마 기념에선 인코스 상태가 좋지 않아 바깥쪽으로 크게 돌았다. 이때 얼마나 크게 돌았는지 중계 카메라에도 잡히지 않았고, 해설자는 "신잔이 사라졌다"(シンザンが消えた!)고 외쳤다. 마지막에 앞에서 도주하던 미하루카스를 제치며 우승했다.[18] 이로서 신잔은 그당시 8대경주 중 수말이 우승할 수 있는 5개의 경주를 모두 제패해 오관마로 불리게 된다.[19] 마츠모토는 인터뷰에서 누가 타도 이길 수 있는 말이라며 감탄했다. 현 시점 기준으로보면 G1 6승에 춘추 그랑프리 연패 및 일본 4대 중앙 경마장[20] G1 경주 승리라는 대기록이다.[21]
팬들은 다음해에도 신잔이 현역 생활을 이어나가고, 특히 미국 원정을 하길 바랐지만 진영은 그대로 은퇴를 결정했다. 전년도에 미국으로 원정한 류 포렐이 그곳에서 부상당하고 은퇴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1966년 1월 9일에는 도쿄 경마장에서, 1월 16일에는 교토 경마장에서 은퇴식이 열렸다. 은퇴한 다음 해인 1967년부터 교토 경마장에선 현 G3 경주인 신잔 기념이라는 경주가 열리고 있다. 1968년 10월 13일 교토 경마장에 신잔의 동상이 세워졌다.
4. 종마 생활[편집]
[1] 당시 기준으로 36세.[2] 1983년까지는 3200m.[3] 현 JRA상 최우수 3세 수말.[4] 현 JRA상 4세 이상 수말.[5] 팔대경주는 사츠키상, 도쿄 우준(일본 더비), 킷카상, 오카상, 우준 빈마(오크스), 춘추 천황상, 아리마 기념의 총 8개다. 이 중 암말 경주인 오카상, 오크스는 참여할 수 없었고, 천황상은 한 번이라도 우승하면 이후 봄과 가을 모두 출주가 불가능하다는 규정이 있었기에 때문에 숫말인 신잔이 이론상 우승할 수 있는 경주는 총 5개였다.[6] 연대율은 경마에서 1착이나 2착으로 들어온 횟수를 출주횟수로 나눠 백분율로 나타낸 것이다. 즉 신잔은 통산 19전을 뛰는 동안 단 한번도 2착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는 것. 이 19전 연속 연대는 현재까지도 JRA 최고 기록이며, 2위는 15전 연속 연대 기록을 세운 비와 하야히데, 연대율 100%로 한정하면 12전 연속 연대를 기록한 다이와 스칼렛이다.[7] 중상마만 서술[8] 이후 기수, 조교조수로 활동했으며, 2004년에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9] 이게 얼마나 심했냐면 은퇴 직전까지 조교에서는 일부러 미승리마한테도 질 정도였다고 한다.[10] 같은 타케다 분고 마방에 주전 기수도 신잔과 같은 쿠리타 마사루 기수가 탔던 2관마로, 신잔과 같이 JRA 현창마로 뽑힌 정도의 명마였다.[11] 당시 타케다가 맡았던 또다른 말로, 처음에는 기대를 모았지만 이후 부진하여 25전 4승이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었다.[12] 1970년에 빅토리아 컵이 생기면서 독자적인 트리플 티아라 체계가 완성되었고,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배-슈카상이 그 역할을 이어받고 있다.[13] 1952년에 수말 2관마 쿠리노 하나와 암말 2관마 스위 수가 킷카상에서 붙을 뻔했으나, 쿠리노 하나가 부상으로 회피하면서 무산됐다. 여기서 스위 수는 2착하면서 아쉽게 3관 달성에 실패했다. 그나마 이와 비슷하게 근접했던 경주가 2007년 슈카상에서 남은 1관을 두고 오카상마 다이와 스칼렛과 더비마 보드카가 맞불은 레이스 정도다.[14] 여담으로 신잔이 회피한 천황상 봄의 우승마 아사호코는 이 경주를 7마신차로 승리하였고 이를 본 신잔의 구무원인 나카오 켄타로는 이 경주에 출주하지 못하였던 것이 행운이었다는 반응을 보였다.[15] 그 전에도 대타로 탄 적은 몇번 있긴 했었다. 그런대 그것도 전부 조교 대용으로 출주한 오픈 경주였다.[16] 신잔이 패배하였던 4패는 전부 조교 대신 출주한 경주였으며 심지어 그 중 3패는 오픈 경주였는데 거기서 신잔을 꺾고 우승한 경주마는 전부 빈말로도 강하다고 할 수 없는 약한 말들이었다. 분노하는게 정상이다.[17] 사실 조교 기술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져도 상관없는 경주에 출주하여 연습 대용으로 쓰는 사례는 꽤 흔했으며 쿠리후지가 1944년에 달성한 일본 최다 연승 기록인 11연승이 21세기까지 갱신되지 않는 이유도 조교 기술이 발전한 현재는 그런 방식이 너무 비효율적이기에 출주 횟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경마 평론가가 신잔의 조교 방식을 두고 팬과 평론가로서 화가난다고 평한적이 있고 심볼리 루돌프의 기수인 오카베 유키오가 신잔을 그런 방식으로 쓰고도 이겼다고 평가한 것을 보면 신잔 현역 당시에는 이미 없어진 조교 방식인 모양이다.[18] 여담으로 이때 미하루카스를 탄 기수인 카가 타케미는 미하루카스와 함께 신잔과 3번 맞붙었다. 첫번째 메구로 기념때는 정공법으로 싸웠지만 깨졌고 2번째인 천황상때 기습적인 대도주로 도망갔음에도 신잔에게 패배했다. 그래서 이번 아리마 기념때는 아예 바깥으로 돌아서 신잔이 마장 상태가 심각하게 안 좋은 인코스를 달리는 것을 강요할려고 했었다. 그런데 정작 신잔이 카가와 미하루카스의 예상을 뛰어 넘어 미하루카스보다 더 바깥으로 돌아서 제치고 우승했다.[19] 사실상 원조 고마왕도 완전제패라고 볼 수 있다.[20] 도쿄, 교토, 나카야마, 한신 경마장[21] 오카상과 오크스는 암말 한정 경주고, 그 당시에 천황상은 한번 우승한 경주마는 봄 대회든 가을 대회든 다시는 출전할 수 없는 규정이 있었다.
은퇴 이후 홋카이도의 타니가와 목장에서 종마 생활을 시작하지만, 당시 일본산 종마는 약하다고 기피되었기 때문에 신잔은 주로 주변 목장의 암말들과 교배했다. 하지만 점점 중상을 차지하는 산구가 나왔고, 1972년엔 리딩 사이어 17위를 차지하며 20위 이내의 종마 중 유일한 일본산마가 되었다. 신잔을 시작으로 "일본산 종마도 강하다"는 인식이 생기자 애로우 익스프레스, 토쇼 보이 등 일본산 종마도 본격적으로 번식 기회를 얻게 되었고, 미스터 시비와 같은 부내국산마가 태어날 기반이 되었다. 때문에 신잔은 일본산 종마의 발판을 깔았다고도 평가된다.
1969년부터 1992년까지 산구 24년 연속 승리 기록을 세울 만큼[22] 산구들의 저점은 높았으나 유독 팔대 경주를 제패하는 산구만은 나타나지 않았다. 때문에 그 신잔마저도 후계 종마를 낳는 것은 어려운 일인가 생각되었으나, 종마 생활 말년에 가까운 1981년에 미나가와 만나가 킷카상을 우승하면서 처음으로 팔대 경주를 우승한 산구를 배출했고, 1985년에는 대표 산구가 되는 미호 신잔이 나타나 2관을 제패했다.
1987년에 종마를 은퇴하고, 타니가와 목장에서 여생을 보내다 1996년 7월 13일에 35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죽었다. 이는 당시 일본 서러브레드 최장수 기록이었다. 이후 2014년 애로 하마키요가 일본 서러브레드 최장수 기록을, 2019년 마이네르 다비드가 중상마 최장수 기록을 깼지만, GI급 우승마로 한정할 경우 여전히 신잔이 최장수 기록을 갖고 있다.[23] 이처럼 장수한 덕에, 자마인 미호 신잔의 은퇴 당시 같이 불려나와 사진을 찍기도 했다. #[24]
신잔의 손자인 밀키 웨이(경주마 명칭은 실버 타이세이)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승마 장애물 종목에 출전하기도 했다. 당시 기수는 사와이 타카오(澤井孝夫, Takao Sawai). 서울만 출전한건 아니고 다음 올림픽인 바르셀로나 올림픽도 다른 기수와 출전했으며 밀키 웨이는 일본에서 퇴역경주마 출신 중 외산 웜블러드를 재치고 승마 국가대표로 출전한 3마리중 하나다.[25]
5. 여담[편집]
- 신잔의 활약은 당시 일본 경마계에서 최강의 기준이 되었고, 은퇴 후에도 '신잔을 넘어라'는 하나의 슬로건이 되었다. 이는 20년 뒤 무패 삼관과 G1 7승을 달성한 심볼리 루돌프가 등장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재미있게도 이 문서 상단에 있는, '신잔을 뛰어넘는 히어로가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는 내용의 히어로 열전은 미스터 시비가 신잔에 이어 삼관을 달성하고 루돌프가 데뷔전을 치르는 1983년에 제작되어 일종의 자기 실현적 예언이 되었다.
- 참고로 신잔이 우승했을 당시에는 경마계에 그레이드 제도라는게 존재하지 않았으며[26] 당시 일본 경마계에서는 가장 격이 높은 8개의 경주를 팔대 경주라고 칭하였다.[27] 이 때문에 현 시점에서 G1인 경주를 6개나 승리했음에도 공식적으로 신잔의 G1 우승 경력은 0이다.
- 경주를 보면 명성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이기는 모습은 그다지 나오지 않았다.[28] 이때문에 당시 경마 팬들 중에선 신잔이 이렇게 대단한 말인줄 몰랐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잔은 골 지점이 어딘지 아는 것인 마냥 스스로 페이스를 조절하며 달렸고,[29] 쿠리타도 작정하면 레코드를 세울 수 있지만 '코 차이여도 이긴 건 이긴 거다'라는 생각에 굳이 보채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에 전초전으로 내보내는 경기는 지기도 하면서 큰 경기에선 반드시 승리하는 패턴까지 선보였기에 이런 아슬아슬한 승리를 거듭하면서 관중들에게 더욱 인기를 끌었다.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우스갯소리로 '경마를 아는 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조교 도중 기수를 태운 채 뒷다리로만 50m 가량 걸어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서러브레드는 신체구조상 두 다리로 일어서도 금세 내려오지만, 신잔은 허리 힘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이족보행 퍼포먼스'를 보여준 뒤에도 전혀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
- 뒷다리 힘이 너무 강해서 평상시에도 걷다가 앞다리와 뒷다리가 자꾸 부딪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특수하게 가공한 '신잔철'이라는 편자를 신었다. 생김새는 대략 이렇다. 이는 보통의 편자보다 두배는 무거워서 평범한 말은 부상당했을 수도 있었지만, 신잔은 이때문에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다. 다만 장착하기는 꽤 힘들어서 신잔은 편자 갈기를 매우 꺼렸다고 한다. 물론 경기 중에는 평범한 편자를 신었다.[30]
- 2000년에 열린 인기투표 Dream Horse 2000에선 7위를 차지하여 그레이드를 도입하기 전의 경주마들중 하이세이코와 함께 10위권안에 들어왔는데 여기엔 50대와 60대 이상에서 가장 많은 지지와 표를 얻었다고한다.
- 2021년 11월 11일, 마주의 증손을 자칭한 사람이 우마무스메 실장을 예고했다.정리[31][32] 같은 날 공식이 "11월에 지금까지 등장한 적 없던 우마무스메가 등장한다"라고 발표한 것이 절묘하게 엇물려 2차 창작 규제로 시끌하던 분위기가 단번에 넘어갔지만 실제로 나온 건 메지로 브라이트였다.
다만 현재 인게임 내에서 신잔 기념이 존재하고 심볼리 루돌프가 베테랑 취급이며 가장 나이가 많은 것으로 묘사되는 마루젠스키와도 10년 이상 차이나는 시기가 걸림돌이 되지 않나 하는 의견이 존재한다. 향후 나오더라도 플레이 불가능한 형태로 나오거나, 차라리 자마인 미호 신잔이나 손자마인 마이 신잔 쪽이 나올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는 중. 또 다른 추측으로는 그레이드제 도입 이전의 옛날 말들과 관련된 팔대 경주 시나리오 실장을 예측하는 케이스도 있다[33] . 이후 2023년 실장된 미스터 시비의 육성 스토리에서 '19전 15승, 사상 2번째의[34] 클래식 삼관 우마무스메'라고 더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우마무스메 세계관에도 신잔의 업적은 존재한다는 게 밝혀졌다.
6. 경주 성적[편집]
[출처] #[22] 이 기록은 훗날 노던 테이스트가 넘는다.[23] 킷카상 우승마로 한정하면 아예 신잔과 미호 신잔 부자가 최장수 기록 1위와 2위를 나란히 차지하고 있다.[24] 이러한 이벤트가 가능했던 것은, 신잔과 미호 신잔의 방목장이 서로 이웃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25] 순서대로 나열하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던 오가타 토키치가 조교하고 기수로 기승한적이 있던 애스콧,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했던 인터 니혼, 그리고 서울올림픽의 밀키웨이 총 셋이다.[26] 유럽에서 그룹 제도가 시행된 년도는 1970년, 미국에서 그레이드 제도가 시행된 년도는 1973년이다.[27] 재팬컵이 창설된 이후 재팬컵까지 합쳐서 구대경주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28] 다만 신마전 및 3세 중거리 특별, 65년 1600미터 오픈 경주에서는 4마신차 압승이였다. [29] 실제로 골 표시봉을 지나자마자 스스로 감속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30] 그러나 이 신잔철조차도 앞다리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 신잔의 각력을 오래 버틸 수가 없어서 마모가 너무 빨라, 사용 수명이 보통 편자의 1/3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31] 해당 인물이 실제로 마주의 증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마주의 혈족 또는 매우 가까운 관계일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거의 없는 편. 해당 시점까지 공개된 적 없었던 신잔 우승기의 컬러 사진을 증거로 제시했었기 때문이다.[32] 현재 신잔의 마주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같은 중앙 마주인 그 동생이 명의를 관리하는 중이다. 동생의 소유마로 가장 유명한 말로는 역배의 전설로 이름 높은 다이유우사쿠가 있다.[33] 마침 신잔과 마루젠스키 사이 시기의 활약마인 타이 템의 소유주가 공식적으로 우마무스메 실장을 요망한 바 있으며 마루젠스키와 동 시기에 활약한 3강마 TTG의 경우에도 토쇼 보이 / 그린 그래스의 경우 같은 관명의 말들이 이미 실장되어 있어 (스윕 토쇼, 그래스 원더) 실장에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TTG의 경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텐 포인트의 이야기를 구현할 수 있을지 여부가 팬덤에서 관심사이다.[34] 일본 경마계에서 최초로 클래식 삼관을 달성한 경주마는 세인트 라이트라는 이름의 경주마다. 다만 당시엔 삼관이란 개념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하필 중일전쟁으로 사회 분위기가 경직되던 시기라 그렇게 큰 관심을 받진 못했다고 한다.[35] 천황상(가을)은 현재는 잔디 2000m의 중거리 경기지만, 1983년까지는 봄, 가을 천황상 모두 3200m의 장거리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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