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재 (r6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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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재
김성원
여운계
김희준
사미자
(1970년)

김순철[1]
(19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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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원
(1972, 1973년)

이순재
(1974년)


정해창
(19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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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석
(2006년)

이순재
무한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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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강호동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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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희
(1965년)[A]

이순재
김동훈
(1966년)[A]

김동원
(1967년)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제12회
(1976년)


제13회
(1977년)


제14회
(1978년)

김희라
(마지막 포옹)

이순재
(집념)


신성일
(겨울여자)
황해
(부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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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상
최불암
이경진
(1981년)

이순재
(1982년)

박규채
(1983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은관.jpg
연도
2018년
이름
이순재
분야
배우
은관문화훈장(2등급)
파일:문화보관.jpg
연도
2002년
이름
이순재
분야
배우
보관문화훈장(3등급)









이순재
李順載|Lee Soon-jae


파일:SG아카데미원장_이순재.jpg

출생
1934년 11월 16일[1][2](89세)[3]
사망
2023년 9월 29일(향년 89세)[4]
함경북도 회령군 (現 함경북도 회령시)
거주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본관
광주 이씨 (廣州 李氏)[5]
신체
165cm[6][7], 68kg, A형
직업
톱스타 (1956년~현재)[8]
정치인 (1992년 5월 30일~1996년 5월 29일)[9]
가족
어머니 전분녀, 배우자 최희정, 아들 이종혁, 딸 이정은
남동생 이명재(1937~1994)
학력
경성아현공립국민학교[10] (졸업)
서울중학교 (졸업)
대전고등학교[11] (전학)
서울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철학 / 학사)[12]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4
병역 사항
병장 만기전역 (1958~1961)[13]
종교
무종교 (무신론)[14]
소속
SG연기아카데미 원장
데뷔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
데뷔 67년차
서명
파일:이순재서명.png

1. 개요
2. 생애
3. 평가 및 영향력
4. 연예계의 큰 어른
5. 주요 활동
6. 정치 활동
6.1. 정치 경력
6.2. 소속 정당
6.3. 선거 이력
8. 수상 경력
9. 사건사고
9.2. 주례사 관련 사건
10. 여담
11.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배우.

2023년 현재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최고령 현역 연예인이다.

2. 생애[편집]


1934년 11월 16일 함경북도 회령군[15][16]에서 아버지 이용남과 어머니 전분녀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4살 때이던 1937년 가족들과 함께 생계를 위해 만주국 간도성 연변(延邊) 지역으로 이주했다가 이듬해인 1938년 홀로 조부모가 살던 경기도 경성부로 돌아와 6.25 전쟁충청남도 대전군으로 피난간 것을 빼면 대부분의 생애를 서울특별시에서 보냈다. 국민학교 3학년 때이던 1943년 잠시 고향인 회령군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1945년 8.15 광복 후 부모님도 서울특별시로 내려왔다. 유년 시절에는 유치원까지 다닐 정도로 부유했으나, 이후 집안 사정이 나빠져 국민학교 6학년 때 할아버지와 함께 비누 장사를 했는가 하면, 중학생 때는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고 나서 월사금(수업료)을 안 내도 아무 말 없었다고 한다.

서울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0년 6월 25일, 남동생 이명재(1937[17] ~1994)[18]의 수영복을 사러 갔다가 군인들의 부대 복귀를 종용하는 즉, 6.25 전쟁이 일어났다는 방송을 들었다고 한다. 꽃보다 할배 사전 미팅 당시 "배낭 여행을 해본 경험이 있으신지?"라는 PD의 질문에 "6.25 때!"라고 대답해 PD를 놀라게 하거나[19], 2019년 해피 투게더에서 신구와 함께 출연하면서, 만화영화 얘기를 하는데, 유재석이 두 사람에게 어릴 적 본 만화가 있으셨냐는 질문에는 "일제 때 태어나서 볼 리가 있겠나마는 손오공이나 디즈니 만화는 본 적 있는 것 같다."(#)고 하는 등.[20] 6.25 전쟁 발발(勃發)시 고등학생이었다는 언급을 다룬 기사: 스포츠투데이 기사 오마이뉴스 기사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소속으로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반면 2005년에는 열린우리당 이상수의 후원회장을 맡아 화제가 됐었다.


3. 평가 및 영향력[편집]


현 시점 현역 최고령 연예인이자 배우이며 한국 방송 역사의 산증인 중 한 사람으로 동시대 많은 배우들의 롤모델이자 멘토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국민배우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데뷔[21] 이후 젊은 시절부터 지성적인 이미지와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영화, 연극, 브라운관을 오가며 60년 넘게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며 완벽한 자기 관리와 지치지 않는 열정,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열린 마인드로 젊은 세대에게도 진정한 어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tvN 꽃보다 할배를 통해 보여준 여러 모습들이 계기가 된 것 같다. 배우들 사이에서도 그에 대한 존경이 담긴 미담이 많기로 유명하다.

또한 모음 체계상 장단음 구분과 10모음 체계를 가진 옛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명배우이며 후배이자 대배우인 박근형, 윤여정과 함께 현재 큰 줄기의 두 연기론 중 하나인 메소드 연기론과 대척점에 있는 전통적인(재현적) 연기론을 지향하는 대표적인 배우이다.[22] 90세 가까운 고령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뛰어난 암기력, 해박한 지식인의 소양에서 나오는 깊이 있는 작품 분석력, 정확한 한국어 구사에서 나오는 대사 전달력, 허스키 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시원한 발성은 대배우 이순재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장점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현재까지도 아흔 근접한 고령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2021년에는 연극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대작 리어왕에서 최고령 리어왕역을 맡아 3시간이 넘는 장기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2022년에는 안톤 체호프의 대표작인 대작 연극 갈매기의 연출을 맡아 연극 연출가로서의 활동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진정한 어른이 별로 없는 현 시기에서 대중문화예술계에 몇 남지 않은 사표(師表)로서 평가 받으며 올곧게 배우라는 길을 걸어온 인물이다. 60년이 넘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발전 공로를 국가로부터 인정 받아 2018년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이정재, 최지우, 김태희, 김명민, 이서진, 하지원, 이승기, 한지민, 유연석,신세경, 황정음 같은 젊은배우부터 이덕화, 유동근, 김영철, 백일섭, 장용, 정보석, 최수종, 배종옥 같은 대배우들도 대표적으로 이순재를 항상 롤모델이자 멘토로 뽑는 후배 배우들이다.


4. 연예계의 큰 어른[편집]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아서 어른 행세하고 대우받으려고 주저앉아 버리면 늙어버리는 거고, 난 아직도 한다 하면 되는 거예요. #

-

- 꽃보다 할배 스페인 편 中에서[23]


저 개인적인 편견일지는 모르지만은 저는 스타를 두가지로 분류를 합니다. 하나는 이쁘고, 아릅답고, 멋지고. 그러면서도 어떻게.. 연예인이, 프로그램 하나 잘 만나가지고 떠가지고 광고 많이하고 돈 많이 버는 스타. 출연은 잘 안하면서. 나는 이런 스타를 모델 스타라고 합니다. 근데, 인기도 높으면서 또 연기애를 알차게 하는 스타. 이 스타를 나는 액팅(Acting) 스타라고 구분합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액팅 스타가 되길 바라면서..

-

- 2013 SBS 연기대상에서 10대 스타상을 시상하며.[24]


2022년 대한민국 최고령 연예인이었던 송해가 사망하자 국내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최고참 현역 연예인 타이틀을 이제 그가 물려받게 되었다.[25] 그야말로 대한민국 연기 역사의 산증인. 선배나 동년배 중에 더 이상 현역 연예인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이순재를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연예인은 거의 없다. 안티 컨셉인 왕비호로 분한 윤형빈도 이순재를 까라는 요청을 본인이 진짜로 욕 먹을까봐 계속해서 거절했는데 그나마 한 것도 "어이 이순재"라고 했고[26] 그마저도 바로 "죄송합니다"라고 했을 정도.

항상 먼저 모범을 보이는 자세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보통 이순재 정도 되는 원로 배우는 촬영 시간을 앞당겨 주는 것이 관례인데도 다른 배우들이 자신 때문에 촬영 시간이 늦춰지는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몇 시간씩 대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야인시대 김두한태조 왕건 궁예로 유명한 배우 김영철은 당시까지만 해도 촬영장에서 제작진들을 갈구며 가장 먼저 촬영하게끔 하는 촬영장의 호랑이로 유명했는데 이순재의 마인드를 보고 반성을 하였다고 한다.[27] 그 후 김영철은 점점 나이가 들면서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져 지금은 존경받는 명배우로 거듭나 있다.

송해는 공적인 자리에서 젊은 연예인들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으나, 이순재는 그와 다르게 후배 연예인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했을 때 따끔한 소신 발언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보통 연예계에서 사고가 터질 경우 조용히 있거나 쉬쉬하는 분위기가 강하지만 이순재는 그런 거 없이 일침을 가한다.

2018년 3월경에는 미투 운동과 관련해서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일침을 날렸다. 한 방송에서 '미투운동을 접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면서 제자나 부하를 내 마음대로 하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보고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분들 다 아는 분들이라 깜짝깜짝 놀란다. 설마설마했는데 사실화됐다"며 "관객들이나 국민들한테 죄송하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성폭력 피해를 입고 꿈을 접은 후배들을 향해서는 "자기 탓이 아니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시 (연기) 할 수 있게 돼야 한다"고 연기 재개를 권유했다. 반면 가해자들을 향해서는 "이 분야를 다 떠나야 한다. 다 끝을 내야 하지 않겠나"라며 "다들 깊이 반성하고 평생을 그렇게 살겠다고 약속했으니 지금 한 약속을 잘 지키고 '나 죽었소'하고 평생 엎드려 있으라"고 충고했다.[28][29]

2018년 4월 20일에 공개된 차이를 넘어 묻고 차이를 넘어 답하다(차문차답) 캠페인에서 5세, 8세, 10세 어린이들이 평소에 궁금해하던 것을 이순재에게 묻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 중 한 여자아이가 '미투가 뭐예요?'라고 묻자 '그런 말을 알 필요도 없고 그런 말을 생각할 필요도 없어. 너희 때는 그럴 일 절대 없을 테니까' 라고 답을 해 주었다.

버닝썬 게이트가 터지자 2019년 3월 21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영화 ‘로망’ 기자회견에서 이 사태에 대해 "연예인은 공인은 아니지만, 행위 자체가 전파성이 있어서 공인 역할과 개념이 있다. 조심하고 절제해야 한다", "연예인이 특권이 어디 있나. 특권의식은 의식에 달린 거다. 연예인이란 결국 인기가 필요한 직업이지만, 요새 착각하는 친구들이 많더라", "'내가 연예인인데 자유분방하면 어때, 그게 예술이야’라고 주접떠는데, 그러면 안 된다", "빌붙어 비즈니스 같은 게 들어와도 넘어가면 안 된다.", "승리 같은 경우도 그렇다. 30살밖에 안 됐는데, 주변에서 바람을 넣는다. 이거 하자 저거 하자 하는 일에 끼어들면 잘못 말릴 수 있다. 우리 선배들도 예전에 그러다가 거덜 난 사람 많다. 나 때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자기들이 자기관리를 열심히 하고 좋은 연기, 좋은 노래 하면 되는데 왜 그런 사업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라고 지적하며 "버닝썬 사건은 사회적 패악에 대한 문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고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고 주변의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면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


2019년 4월 12일 해피투게더 시즌4에 출연해서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하였다. "본인 세대는 인기가 곧 수익성으로 연결되는 세대가 아니었지만[30], 요즘은 달라서 그런지 뭘 잘못 생각하고 사는 것 같다." 라는 말과 함께, 연예인이 비록 공인은 아니지만 대중에게 영향력이 커서 공인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하면서 법적 판단과는 별개로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고 언급했다. 여담으로 당시 방송 흐름상 자연스럽게 나온 말은 아니고, 사전 인터뷰 때부터 해피투게더 측에 양해를 구한 다음 중간에 시간을 마련해서 말한 것이다.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시청할 수 있는 공영방송의 예능 프로그램인 만큼 출연한 김에 작심하고 쓴소리를 날린 것으로 보인다.

2022년 5월 19일 영화 <안녕하세요> 인터뷰에서도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였는데 "연예인은 공인이 아니지만 어느 정도 공인적 성격을 띠고 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있고, 특히 젊은 친구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우리부터 법규를 잘 지켜야 한다."라고 언급을 하였다.[31] 정황 상 바로 전날에 있었던 김새론 음주운전 사건에 대해 간접적으로 둘러 말한 듯한데, 그 기사를 보았다고 했으며 "절대로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연예인은) 대중을 상대한다는 점에서 정치인과 비슷하다. 그런 의미에서 항상 절제를 하고 조심해야 한다. 나로 인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고 근신해야 하며 돈을 많이 벌고 인기가 있다고 해서 어깨에 힘주고 다니지 말고 늘 겸손하고 감사해야 한다"며 쓴소리를 하였다.

하지만 호통뿐만이 아니라 칭찬도 많이 하는 편이다. 범죄도시 2 마동석 때문에 본인의 영화가 기를 못 편다고 너스레를 떨으며 한국뿐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설치게 되어 너무나도 좋다고 범죄도시 2를 칭찬하였으며 방탄소년단에 대해서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우리 방탄소년단'이라고 부를 줄을 누가 알았겠냐고 단순히 알려진 정도가 아니라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방탄복을 벗고 전세계를 석권하러 다닌다고 표현하였다.


5. 주요 활동[편집]


1956년 9월 21일 대학 연극 동호회에서 연극 <지평선 너머>를 공연하며 배우로써 데뷔하였다. 1957년 대한민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대한방송의 드라마에 간간히 출연하며 TV에도 데뷔하였고 이후 1962년 KBS의 첫 TV 드라마인 <나도 인간이 되련다>에도 출연했기 때문에 그의 연기 인생은 대한민국 텔레비전 드라마 역사의 처음부터 맥락을 같이 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참고로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 당시에는 필름 가격이 비쌌던 탓에 웬만한 드라마를 생방송으로 방영했으므로 영상 자료가 없다. 이순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드라마에서는 NG가 나도 그냥 밀어붙였다고 한다. 프롬프터도 따로 없던 시절이라 대본 든 스탭이 밀고 들어오고, 카메라의 줌인 기능이 없다보니 배우한테 들이밀다 부딪히는 장면이 그대로 나가는 등 지금으로선 상상하기도 힘든 열악한 광경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초창기 드라마란 무대에서 하던 연극을 TV 전파라는 신문물에 실어 내보낸다는 개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지금 대학로 연극처럼 표를 끊고 현장에 가야 하는 연극을 TV라는 신수단으로 내보내는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필름이 비싼 이유도 있었거니와 편집 개념 없이 실황 연기가 기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현대의 연극이나 뮤지컬도 NG를 내면 배우가 알아서 애드리브로 때워야 하는 것처럼. 하지만 비디오 테이프가 도입된 이후로도 1980년대까지도 테이프 가격이 비싸다고 테이프를 돌려서 썼기 때문에 1980년대까지의 드라마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당시 이순재가 연기하는 영상은 TV드라마로는 볼 수 없고 주로 영화로 봐야 한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1954학번으로 초엘리트 배우이다. 서울고등학교[32]를 졸업하고 원래 정치학과에 들어가려 했으나 떨어지는 바람에 철학과[33]로 원서를 넣어 재수해서 들어갔다. 이후 서울대 미학과의 이낙훈과 함께 서울대 연극회를 재건해 활동하면서 배우의 길에 접어들었다.[34][35] 1960년에는 서울대(이순재, 이낙훈), 연세대(오현경), 고려대(여운계) 극회와 합심하여 'tv학생극회'[36]라는 모임을 만들고 실험극장을 세우기도 했다. 1964년 12월 7일 동양방송 공채 1기 탤런트로 입사해 본격적인 텔레비전 연기에 들어가게 된다.

동아방송 라디오 드라마 삼국지 녹음도중 하마터면 큰 사고를 당할 뻔했었는데 이 당시에는 녹음실에 무지향성 마이크 하나밖에 없어서 라디오 드라마 방송 때는 배우들 바로 옆에서 효과음을 넣어야 했다. 그런데 삼국지 녹음 당시 음향 스테프로 일하던 김벌래가 옆에서 식칼로 칼싸움 효과음을 내던 중, 식칼에서 날이 빠져서 이순재의 목덜미를 스치고 날아가 벽에 박혀버렸다. 조금만 운이 나빴으면 정말 끔찍한 일이 일어날 뻔했던 것이다. 이 사고를 계기로 녹음실에는 효과음 콘솔이 따로 만들어졌다.

또한 대한민국 괴수물 <대괴수 용가리>[37]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았다. 1967년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의 괴수물 매니아들에게도 컬트적인 인기를 끌면서 높게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38]


파일:external/image.donga.com/001.jpg

이순재의 30대 시절

참고로 동의보감의 저자인 허준을 소재로한 드라마 세 작품(1975년 MBC 드라마 집념[39], 1991년 MBC 드라마 동의보감[40], 1999년 MBC 드라마 허준[41]에서나 스승인 유의태역을 맡았고, 같은 제목의 1976년작 영화에서는 무려 허준 역으로 등장한다.

1991년1990년대 이래 역대 한국 TV드라마 평균 시청률 1위(59.6%)를 자랑하는 사랑이 뭐길래에서 주연을 맡아 대발이 아버지로 열연했다. 말 끝마다 "여자는~"을 붙이는 전형적인 그 시대의 가부장적 아버지지만 다양한 사건을 겪으며 아내를 위해 밥까지 지을 정도로 변하는 캐릭터를 연기했고, 이 때의 인기로 국회의원까지 당선되는 등 배우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파일:attachment/yadong.jpg

▲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특히 2006년의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우연히 본 야동에 빠져 가족 몰래 보던 것이 들켜 빈축을 사게 된 일명 '야동 순재' 캐릭터로 인해 젊은 층에 친숙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여지껏 그가 맡았던 역할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역할이었으나 완벽하게 소화해내면서 작품의 인기에 일조했다. 하이킥은 젊은 출연자들도 고충을 토로한 일일 시트콤이었던 것을 당시 70이 넘은 배우임을 감안한다면 힘든 일인 것이다.[42][43]

거침없이 하이킥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으며, 엄마가 뿔났다에서 보여준 '노년의 사랑'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아마도 신구와 함께 가장 인지도 있는 남성 장년 연기자일 것이며, 그 실례로 그가 라이나생명 실버 보험 광고에서 말한 대사[44]개그 콘서트도움상회에서 패러디 되며 좋은 개그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보험 가입을 위해 실제로 전화를 해보면 이름부터 물어본다. 그래서 텔레비전 보험광고에서는 보험가입에 필요한 기본 사항은 물어본다는 자막을 띄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에는 무자격자의 보장내용 설명이 금지되어 광고내용이 변경되었다. 이후 보험설계사 자격을 취득해서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45]

거침없이 하이킥의 후속작인 지붕뚫고 하이킥에도 이순재 역으로 출연했다. 전작을 이어 출연하는 단 두 명인 배우.[46] 야동순재보다는 못하나 방구를 자주 끼는 것에서 비롯된 '방구순재'나 줄리엔이 부르는 '미스터 순대(이순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09년에 픽사 애니메이션 영화 에서 주인공 칼 프레드릭슨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일반적인 연예인 더빙' 수준이 아니라 '역대 애니메이션 연예인 더빙 사상 최고의 목소리 연기', '원작 초월' 소리를 들을 정도의 평가를 받을 만큼 절륜한 연기력을 선보였다.[47] 평론가는 "초콜릿"이 아닌 "쪼꼬렛"이라는 할아버지 캐릭터에 맞는 발음을 구사한 것을 극찬하기도 했다.[48] 이순재가 맡은 배역의 오리지널 목소리를 연기한 배우인 에드워드 애스너도 연극활동은 1940년대[49], 영화산업에서는 1950년대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꾸준히 활동하는 베테랑 명배우다. 여담으로 당시 이순재는 디즈니 시리즈에 한국어 더빙을 한 배우&성우들 중 최고참이었다. 정작, 이순재 본인은 훗날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더빙이 잘 됐고 안 됐고를 떠나서 자신이 더빙에 참여한 것이 다른 젊고 유망한 성우들의 자리를 뺏는 것 같아서 오히려 미안했다고 한다.[50] 여담으로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극중 아들이었던 정준하 역시 우수한 목소리 연기로 큰 호평을 받았다.

종합적으로 이순재는 타고난 천재 배우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올라운드 그 자체다. '풍운'에서의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가, '사랑이 뭐길래'에서의 완고하고 가부장적인 가장, '허준'에서의 엄격하지만 제자와 환자를 위해 헌신하는 참스승이자 의원, '거침없이 하이킥'에서의 나이값 못하는 돌팔이 의사, '야인시대'에서는 자상한 할아버지 등 어떤 캐릭터를 맡겨도 100% 소화해내는 모습은 시청자가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방송국 원로대접 받는 지금은 상상이 되지 않지만 악역도 많이 했다.[51] 최근의 사례라면 상도에서 보여준 이윤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냉혹한 사업가 연기가 대표적이었다.

하이킥 이후 원로 연기자로서 굵직한 사건이 터지면 그의 의견을 묻는 인터뷰가 잦다. 특히 못마땅해 하는게 젊은 배우들이 대본은 안 보고 딴짓한다든가 합 안맞춰보고 혼자 밴에 틀어박혀 있는 것. 남에게 훈련을 강조하며 본인 스스로도 매일 발성 연습을 몇 시간씩 거르지 않고 하고 있다. 일단 이게 기초작업이고 연기로 가면 시간이 더 왕창 들어간다. 본인은 오랜 연기 인생의 비결로 암기력, 금주, 연구를 꼽았다. 특히 예전에 깡소주(강소주)를 마시던 배우들은 일찍 죽거나 지금 대부분 연기에서 은퇴했다고 금주를 강조했다.

스스로 작품 복은 좋은데, 상복은 없는 배우라 말할 정도로 히트작은 많지만 굵직한 상과는 인연이 없다.[52] 하이킥의 야동순재 역으로 무한도전 팀과 2007년 MBC 방송연예대상을 공동 수상한 게 가장 큰 상일 정도였다.[53][54] 연기대상을 탈 뻔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김혜자강부자에게 밀려 상을 받지 못했다.

이순재는 젊은 시절에 주연급 톱스타는 아니었다.[55] 이순재는 활동 초창기부터 자기보다 유명한 배우를 많이 만났다. 한국영화계의 전성기이자 TV의 여명기였던 60년대에는 신성일, 신영균, 남궁원 등이 여러 영화에서 주연으로 활약할 때, 이순재는 주로 이들을 받쳐주는 조연을 했고, 이 스타들이 스케줄이 바빠 출연 못 할 때 대신 주연배우로 나오기도 했다. 당시 영화계는 주연배우의 외모와 체격을 중요시했고, 이순재는 그 영화계 톱스타들보다는 이런 면에서 다소 부족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영화들은 후시녹음이었으므로 발음, 발성 등의 연기력이 덜 중요시되기도 했다. 영화산업이 쇠퇴하고 TV가 흥하던 70년대 들어서도 노주현, 한진희, 박근형 등 외모가 받쳐주는 1940년대생 후배들이 TV 멜로드라마의 주연을 많이 했었고, 이순재는 나이 때문에 멜로드라마 주연보다는 조연쪽에서 빛을 발했고 시청률이 멜로드라마에 비해 덜 나오는 형사물이나 사극 등에서 주연을 맡았고, 사극에선 임사홍, 광해군, 김좌근, 변학도, 민태호(1973년 드라마 '연화'의 악역) 등 악역도 마다하지 않았으므로 동양방송의 창설멤버인 방송사의 기둥이긴 했으나 동양방송의 간판스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1978년에는 자신의 입지가 줄어든데다 동양방송의 섭섭한 대우에 실망해서 MBC로 이적할 생각까지 했었다고 하는데 결국 옛정 때문에 동양방송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순재가 무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위에서 볼 수 있다시피 젊은 시절 TBC 드라마 남우주연상도 2회 이상 받았을 정도로 예나 지금이나 입지가 탄탄한 배우이며, 당시에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한 마디로 이순재는 최고의 스타는 아니었으나 철저한 자기관리와 노력으로 구도자의 길을 걸은 덕택에 자기보다 인기 있던 스타가 모두 자취를 감춘 오늘날에도 꾸준히 활동하는 배우로 거듭난 것이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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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풍운'

자신의 긴 연기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배역으로 1982년 KBS 사극 <풍운>에서 맡았던 흥선대원군역을 꼽았다.[57] 또한 다시 한 번 더 연기하고 싶은 배역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현대사를 다룬 드라마에서는 윤보선 대통령 역을 자주 맡았다.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코리아게이트, 삼김시대에서 4번했었다.

가상의 대통령 역도 몇 번 맡았는데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 대물, 한반도 등이 그 예. 그런데 이렇게 가상의 대통령일 때는 주로 차기 대선을 앞둔 임기 후반이고, 후임 대통령이 될 등장인물에게 우호적이다. 대체역사물인 마이 프린세스, 더킹 투하츠에서는 국왕이 아닌 국왕의 최측근(국왕 비서실장) 역을 맡았다.

2010년부터는 케이블TV 생명보험 광고, 상조회사 광고에 고정 출연 중. 특유의 칼칼한 목소리로 죽을 걸 생각하라고 강권 중.

특히 금융감독원에서 보험 광고에 출연하는 모델 규정을 더욱 강화해서, 이순재 역시도 생명보험공사가 주관하는 보험설계사 자격증 시험에 응시해야 했다고. 그 결과, 역시 서울대 출신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동중에 모의고사 문제 풀기에, 보험사의 교육팀으로부터 교육, 자격요건에 해당하는 30시간 온라인 교육을 이수하고, 생명보험 관련 문제에서 60점 이상으로 낙방 한 번도 없이 합격하여 78세의 보험설계사가 되었다.



▲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2008년 방영된 MBC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김명민과의 연기 대결을 보자.[58]

2013년에는 tvN의 여행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신구, 박근형, 백일섭과 함께 H4로 출연[59] 꽃할배 열풍을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출연진중 가장 나이가 많으면서도 왕성한 체력을 자랑하며, 빠른 걸음과 멈추지 않는 직진본능으로 '직진순재'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촬영 내내 엄청난 학구열과 열정을 보여줬고 여행지마다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거나 동물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동물사랑의 면모를 보여 주기도 했다. 자막으로 뜨는 별명은 '숲속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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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돈키호테'

활동 초기에는 텔레비전 외에 연극 무대에서 열연하기도 했는데, 2010년 12월 10일부터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되었던 돈키호테에서 오랜만에 연극 배우로 출연했다. 기존에 많이 상연되던 뮤지컬 버전인 맨 오브 라만차의 각색이 아닌 프랑스 극작가 빅토리앵 사르두의 중후한 희곡 버전을 택했고, 여기에 일부 한국식 풍자 요소를 더해 연출했다고 한다. 이순재의 배역은 타이틀 롤인 돈키호테. 다만 단독 캐스팅은 아니고, 후배인 한명구가 번갈아가며 출연했다. 종연 후에도 꽤 인기가 있었는지, 2012년 초순에 같은 극장에서 한 차례 더 공연했다. 2017-2019년에도 연극 <장수상회>, <앙리 할아버지와 나>,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에 나오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앙리 할아버지와 나는 김슬기와 함께 나온 2018년에 이어 채수빈과 함께 2019년 재공연이다.


6. 정치 활동[편집]



6.1. 정치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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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선거벽보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선거벽보
대한민국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88년13대 총선에도 민주정의당으로 나왔지만, 평화민주당의 이상수에게 근소한 차이(32.3% 대 31.4%, 759표 차이)로 패했다. 첫 번째 선거에서는 따로 선거운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당시 현역 의원이었던 민주당 이상수 후보를 제치고 서울 중랑구 갑에서 당선되었다(48.7% 득표, 46,297). 이후 1993년 잠시 민자당 부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비록 선거에서 경쟁 후보로 만났지만 이때 만난 이상수 전 의원과 친해져서 이후 총선에서 이상수 전 의원이 2005년 재보궐선거열린우리당으로 출마했을때 선거운동(정확히는 선거후원회장)도 약간 해줬다고 한다. #

매우 친했던 동료 배우이자 같은 대학 출신인 이낙훈이 먼저 정치 활동을 하면서 같이 하자고 권유한 것이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

선거 이력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본래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 소속이었지만 1996년에 정계를 은퇴와 동시에 탈당한 이후로는 당적을 가진 적이 없다.

당시엔 정치 활동을 해도 연예 활동을 제한하는 규정이 없어서 계속 연예 활동을 이어갔다. 참고로 고바우 영감에서 이를 다룬 적도 있다.[60]


6.2.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1981 - 1990
정계 입문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0 - 1995
합당[61]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1996
당명 변경

[[무소속|
무소속
]]

1996 - 현재
탈당
정계 은퇴


6.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중랑 갑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26,483 (31.40%)
낙선 (2위)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46,297 (48.71%)
당선 (1위)
초선

역대 선거 벽보

[ 펼치기 · 접기 ]

파일:이순재 선거벽보1.jpg


파일:이순재 선거벽보2.jpg

제13대 총선 (서울 중랑 갑)
제14대 총선 (서울 중랑 갑)



7. 출연 작품[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순재/출연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여기에 기재된 작품이 전부는 아니다. 이순재 본인이 해피투게더 출연 당시 말하길, 영화는 100여편 정도 했고, 드라마는 본인도 다 모를 정도로 많이 했다고 한다.[62][63]


8. 수상 경력[편집]


  • 1966년 제2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연기상
  • 1968년 제11회 부일영화상 신인남우상
  • 1970년 TBC 연기대상 대상
  • 1970년 제6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애독자인기상
  • 1971년 제7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애독자인기상
  • 1972년 제8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애독자인기상
  • 1972년 제15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 1974년 제10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애독자인기상
  • 1974년 TBC 연기대상 남자 주연상
  • 1977년 제1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 1979년 TBC 연기대상 특별공로상
  • 1982년 제9회 한국방송대상 TV 연기상
  • 1984년 제11회 KBS 우수프로그램평가상 연기상
  • 1996년 KBS 연기대상 공로상
  • 2000년 MBC 연기대상 연기자부문 특별상
  • 2000년 SBS 연기대상 공로상
  • 2002년 MBC 명예의 전당
  • 2002년 문화관광부 문화의 날 보관문화훈장
  • 2004년 SBS 연기대상 연속극부문 연기상
  • 2007년 제41회 납세자의 날 동대문세무서장 표창
  • 2007년 제1회 엠넷 20's 초이스 베스트 캐스팅상
  • 2007년 제1회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 공로상
  • 2007년 제8회 대한민국 영상대전 탤런트부문 포토제닉상
  • 2007년 MBC 방송연예대상 대상
  • 2007년 MBC 연기대상 사극부문 황금연기상
  • 2008년 MBC 연기대상 PD상
  • 2009년 제45회 백상예술대상 공로상
  • 2009년 제9회 대한민국청소년영화제 원로배우부문 인기영화인상
  • 2009년 MBC 방송연예대상 공로상
  • 2010년 제1회 서울문화예술대상 문화예술인부문 대상
  • 2010년 제10회 대한민국청소년영화제 원로배우부문 인기영화인상
  • 2011년 제20회 금계백화장영화제 남우주연상
  • 2011년 제11회 대한민국청소년영화제 원로배우부문 인기영화인상
  • 2011년 대한민국 CEO 그랑프리 특별상 문화CEO부문
  • 2012년 제1회 K-드라마 스타 어워즈 공로상
  • 2016년 tvN10 Awards 예능아이콘상
  • 2017년 제27회 이해랑연극상 특별상
  • 2018년 대한민국지식기업인 문화부문 대상
  • 2018년 제13회 골든티켓어워즈 인기상
  • 2018년 제13회 골든티켓어워즈 연극 남자배우상
  • 2018년 제9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 2018년 제7회 대한민국 베스트 스타상 베스트 주연상
  • 2018년 제18회 대한민국청소년영화제 원로배우부문 인기영화인상
  • 2019년 제27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문화연예대상


9. 사건사고[편집]



9.1. 매니저 관련 사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순재 매니저 관련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2. 주례사 관련 사건[편집]


2023년 이승기 - 이다인 부부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맡았는데, 주례사에서 "왕성하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해라"라며 "일주일에 5번은 해라. 힘 빠지면 못 한다. 같은 목표를 갖고 힘차게 행진하길 바란다"며 '19금 주례사'를 해 하객들의 웃음을 터트렸다.# 다만 정식 주례가 아닌 현장에서 갑자기 덕담을 요구한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한 것. # 이에 대해서 일부는 불편함을 표하기도 했으나,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왕성하게 사랑하라는건 오히려 꼭 필요한 덕담이다란 의견도 많았기에 큰 이슈가 되진 못하고 넘어갔다.

2012년 고수 - 김혜연 부부의 결혼식에서도 주례를 맡아 신부에게 "(고수의) 베드신 촬영을 이해하라"는 19금 주례사를 했던 바 있다. #

애초에 이승기, 이다인과 이순재는 매우 친한 사이로 이순재는 원래 주례사를 부탁받으면 저런 야동이나 부부관계 드립으로 유명하며, 저런 소리를 듣기 싫었으면 미리 연락을 드렸거나 애초애 초청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알고 부른 것.

10. 여담[편집]


  • 한국방송연기자협회를 만든 인물로 초대~2대, 11대 회장을 역임했다. 특히 11대 회장 시기에는 여당의 지구당 위원장까지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계와 협회의 연결을 할 수 있었다.

  • 포털 사이트에 실시간 검색어 제도가 있던 시절 송해와 함께 이름이 검색어 1위에 오르면 불안감을 느끼게 만드는 연예인 중 한 명이다. 나무위키에서 실시간 검색어가 부활한 후에는 소식이 뜸하다가, 2022년 6월 8일 송해가 세상을 떠나면서 연예계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연예인 최연장자가 되어 같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왔다.[64]


  •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인배. 연예계 최고참 연배이며 더군다나 이력서를 열어보면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에 독일어·영어·일본어 구사[65], 심지어는 국회의원 활동의 정치 경력까지 있는, 그야말로 넘사벽 스펙의 보유자이다. 이런 엄청난 경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배역이든 불만없이 묵묵히 수행하며, 어떤 연기든 연출자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편이라 한다. 촬영이 아무리 길어져도 아무 군소리 없이 그냥 조용히 기다려주기만 할 뿐이다. 사랑이 뭐길래에서 악역을 맡아도, 야인시대에서 고문 당하는 연기도,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그 유명한 야동순재까지도 해낸걸 보면 정말 대인배가 따로 없다.[66] 또다른 사례로 공주의 남자에 출연했을 당시 촬영장에서 가장 악명 높은 배우로 소문난 김영철[67] 차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쉬고 있는 이순재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먼저 찍으시라고 권했는데 이순재는 "나는 신경쓰지 말고 너희 먼저 찍어." 라고 했지만 김영철이 계속 권하자 그제서야 일어나 해가 뜰 때까지 촬영을 마치고 돌아갔다고 한다. 후에 이순재가 밤 10시에 촬영장에 도착해 새벽 3시까지 불평 한 마디 없이 후배 배우들이 다 찍을 때까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자 김영철은 크게 뉘우치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 진짜 배우와 광고쟁이의 구분을 명확히 한다. 액터(Actor)와 스타(Star)는 엄연히 다르다며, 진짜 배우는 아끼고 좋아하지만 광고쟁이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배용준에 대해 겨울연가 하나밖에 없는 배우이다. 태왕사신기는 배용준이 할 배역이 아니었다.#라며, 배우가 아닌 스타가 된것에 대해 매우 쓴 소리를 했다. 사실 배용준은 주연으로 출연한 드라마 여러편을 히트시키고 데뷔초부터 연기력 논란도 없었던 배우지만, 겨울연가의 예상치 못한 일본 대흥행으로 인해 배우 노선이 완전히 달라져 사실상 연기 활동이 끝나버린 것에 대한 비판인듯.

  • tvN 꽃보다 할배에선 유럽을 누비는 와중에 배운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독일어도 유창하게 구사하는 데다 남다른 시사 상식을 뽐냈고 집사부일체에서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부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까지의 역대 미국 대통령들을 막힘없이 술술 말하는 장면은 여러모로 진행자와 게스트들 할것 없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68]

  • 건강의 비결에 대해선 술담배를 안하는 것을 꼽았다. 술은 일찍부터 배운 적이 없으며[69], 담배는 1982년도에 끊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당으로 유명한 신구에게 회식 때면 "술 맛 떨어지니까 빨리 가라"라며 쫓겨난다고 한다.[70]

  • 일본 대부업체 아프로서비스그룹 계열사인 OK저축은행에 광고모델인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이 있다.

  • 주민등록상으로는 1935년생이지만 실제로는 1934년생인데, 이는 이북 출신자들이 6.25 전쟁 이후 가호적을 신청할 때 흔히 생겼던 착오라고 한다. 본인의 할머니가 그냥 나이를 말하면 동사무소 직원이 역산해서 생년을 적었는데 이 때 죄다 음력 기준으로 되어버려서 그런 것 아니겠냐고 추측하고 있다. 참고로 차지철과 생년월일이 같다. 이순재와 차지철 모두 정치 활동도 했다.

  • 일제강점기 때 창씨개명을 했다고 한다. 일본식 이름은 히로키 준사이(広木順才).[71] 사실 창씨 안 하면 가족들 전부 불이익[72]을 당하거나 심하면 끌려가기까지 하던 시대였다.

  • 서울고등학교 5회 졸업생이다. 2007년 5월 스승의 날을 맞아 유명인사 일일교사 체험으로 모교를 방문했는데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았다. 그 당시에 하필 '야동순재'라는 별명을 얻었던 시기였다. 강연 시에 '학생들은 야동 보면 안된다고' 강의했다.

  • 출연작 중 지붕뚫고 하이킥서울대학교 출신으로 오해받아 각종 에피소드를 만드는 가짜 서울대생 과외선생에 의해 벌어지는 학벌 관련 에피소드가 주요 갈등 소재인데, 출연진 중 유일하게 진짜 서울대 출신인 이순재의 학력(서울대학교 철학과)이 뒤늦게 주목을 받기도 했다.[73] 아들 최다니엘은 서울대 출신 의사 배역이고, 과외교사 황정음은 서울대 영문과 출신으로 사칭하는 배역이지만 이순재는 진짜로 서울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 제자들 결혼식 주례 볼때 '부부싸움후에 야동을 봐라'라고 하였다.

  • 인기 연예인일 때는 예명 이순재(李純才)를 사용하였으나,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 경력 이후에는 본명인 이순재(李順載)로 한자 표기가 바뀌었다.

  • 1930년대 서울 출신의 배우이자 의식적으로 발음을 신경쓰는 측면에서, 60-70년대 근대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현대 한국어변화를 겪지않은 보수적 발음을 구사한다.
    • 대표적인 10모음 체계 구사 배우이다. 이순재는 ㅙ를 /wɛ/, ㅚ/ø/로 구분하여 구사한다. 이는 20세기 초반의 한국어 형태로서, 오늘날 두 모음은 /we/로 중화된 상황이다. ㅟ 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단모음 [y] 으로 발화한다.
    • 모음의 장단음을 구분한다. 20세기 초반의 장단음의 구분은 제1음절에서만 선택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마저도 선명성이 뚜렷하지 않아 언어변화이론 상 이미 매우 과정적인 상황이었다. 의식적으로 규범주의 훈련을 하지 않았다면[74], 그 시대에 출생한 화자더라도 장단음의 구분이 가능한 한국어 화자는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다.
    • 이순재는 지금도 '후배들이 발음을 틀리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자주 지적할 정도로 오래된 규범주의적 언어관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장단음의 소실과 이중모음화 및 전설모음중화는 60-70년대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인구이동이 가져온 자연스러운 한국어의 발전과정이므로 어떤 발음이 '맞다/틀리다'할 문제는 아니다.[75] 만약 이순재의 규범주의적 언어관을 이순재 본인에게 들이댈 경우, 이순재는 역사적 ㅐ/aj/를 이중모음으로 발음하지 않고 단모음으로 발음하므로 이순재 본인의 발음도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규범주의와 기술주의 참조.


  •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일로, 녹음 중에 죽을뻔한 일도 있었다. 삼국지 라디오 드라마 녹음 중에 음향효과를 녹음용 마이크에서 그대로 내다보니, 당시 음향 담당이었던 김벌래가 칼 부딪치는 소리를 실제 부엌칼로 내다가 부엌칼 날이 빠져서 이순재의 목 뒤를 스친 것. 이 사건을 계기로 녹음실에 효과음 콘솔이 따로 생겼다.

  • 배우 이순재가 66년의 연기 인생을 걷는 동안 빌딩 한 채 소유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간 모은 돈은 다 어디갔냐는 지문에 이순재는 "돈 없어. 우리는 돈이랑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예술가가 돈이랑 무슨 상관있냐"고 답했다. #

11. 둘러보기[편집]





[1] 주민등록(호적)상으로는 1935년 10월 10일생인데, 실제로는 저 생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국회의원이던 당시나 현재 대한민국 헌정회에는 1935년으로 표시되어 있다.최근에는 2022년 6월 8일 1927년생인 송해가 향년 9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 자기도 당한다.[2] 네이버 인물정보에는 1935년 10월 10일 생으로 표기되어 있다.[3] 세는 나이 2023년 기준 90세이다.[4] 오늘 9시 50분 경에 죽었다.[5] 21세 재(載) 항렬.[6] 이순재 본인이 170cm만 되었어도 키에 대한 아쉬움이 적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여담으로 노인의 신체항목만 보면 노화로 인해 키가 많이 줄었고 그 시절 평균신장은 작았으니 현재로 치면 평균 이상이다라는 코멘트가 항상 달리는데 이순재 본인은 아는형님에서 학창시절에 키가 작아 별명이 꼬마였다고 언급했다.[7] 자료가 미비한 1930년대 출생자의 평균키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동아일보에서 교육부 통계라고 밝힌 자료에 따르면, 1965년도 만 17세 남성의 평균키는 163.7cm로 알려져 있다. 또한, 월간조선의 기사에 나온 표에선 1956년도 한국 남성의 평균키가 166.4cm로 나온다. 이순재가 성인이 된 시점인 1956년~1965년에 한국 남성의 평균키는 최소 163cm 이상, 최대 167cm 이하 정도로 보이기에 이순재는 평균 정도의 키였다. 하지만 학창시절엔 성인 때보다 많이 작았을 수도 있고, 현재 한국 20대 남성의 평균키가 174cm 내외지만 배우라는 직업 특성상 180cm 이상의 남자배우들이 많은 걸 생각해보면 당시에도 일반인으로서 평균 정도의 키가 배우로서는 평균이 아닐 수도 있다.[8] 한국 드라마가 아직 후시녹음 체제이던 1950-60년대에는 모든 연기가 다 더빙이었다. 사실상 성우로서 먼저 데뷔한 셈.[9]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였으나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 서울 중랑구 갑에 당선되었다. 15대 국회부터 겸직금지가 시행되었다. 그 전에는 겸직금지가 없어서 국회의원 시절 연기활동이 가능했었다. 대표적인 예가 제3공화국.[10] 現 서울아현초등학교[11] 한국전쟁으로 대전으로 피난을 가 1년 반 정도를 청강생으로 재학했으며 이후 다시 상경하여 서울고등학교에서 졸업을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대전고 재학 시절 처음으로 연극을 관람했다고. #. 당시 같이 수학한 이가 나웅배 전 경제부총리로 이후 민주정의당에서 다시 재회하게 된다.[12] 1년 재수해서 54학번이다. 원래는 정치학과에 가고 싶어했으나 낙방하고 이듬해에 철학과로 진학했다. 입학한 후에도 전과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철학과에 관련 석학들이 모두 교수로 있어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13] 서울에 위치한 부서에서 군 생활을 했다고 한다.[14] http://m.dailywrn.com/5977[15] 그 유명한 김종서4군 6진 개척에 나오는 6곳 중 하나. 소설가 최인훈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이순재가 최인훈에겐 고향 2년 선배지만, 최인훈이 대학에 일찍 들어갔기 때문에 이순재가 최인훈에게 서울대학교 2년 후배가 된다. 다만 그 당시엔 출생신고가 실제 출생연월일과 크게 불일치하는 경우가 많아서 두 사람의 정확한 실제 나이는 불명. 최인훈이 실제로는 이순재와 동갑인 1934년생이라는 말도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최인훈이 중학교 시절 1년 월반을 했고, 이순재가 서울대에 재수해서 들어갔음을 생각할 때 동갑인 두 사람의 서울대 학번 2년 차이는 설명이 된다.[16] 현대에는 북한에서 탈북이 가장 흔한 지역이기에 탈북민 출신으로 여러 유명 인사가 있는 곳인데, 그곳 출신 당시 20대였던 배우 김아라 씨를 두고 KBS 인간극장에서 고향이 같다고 하기도 했다. #[17] 1992년 당시 55세라는 기사가 있다.[18] 남동생의 아내 이름은 중견 탤런트 정혜선과 동명이인이다.[19] 당연히 피난을 가기 바쁜 와중에 배낭을 매고 어디 놀러갔을 리는 만무하고, '짐을 짊어지고 멀리 피난을 가는 행위와 배낭을 둘러메고 멀리 여행을 떠나는 행위가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는 뜻 정도로 보면 무난하다. 해당 인터뷰가 예능 프로에서 했던 인터뷰니까 가능한 유머다.[20] 의외로 일제강점기 때에도 잡지나 신문에 연재되는 만화들이 있었다. 물론 검열 제도가 있어 체제에 비판적인 내용이 있으면 삭제 조치로 끝나면 다행이고 즉시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서 코로 오야코동을 먹을 수도 있었다.[21] 명문 서울고-서울대를 졸업한 당시로는 초엘리트 출신이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했다는건 정말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대중예술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하위 중에서도 최하위 인식을 갖고 있던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이순재 같은 엘리트 출신들의 연예계 참여는 사회전반에 연예인이라는 직업 인식을 상승 시키는데 굉장한 영향을 미쳤고 실제로 배우 윤여정이 배우에 길을 가고자 할 때 이순재 같은 당시 초엘리트도 하는 일이니 결코 창피한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해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방송사 시험을 봤다고 한다.[22] 이순재는 젊은 시절부터 가장 존경하는 배우로 영국의 위대한 배우 중 한명인 로런스 올리비에를 뽑는데 그의 작품을 통해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다만 앤소니 홉킨스, 게리 올드만, 케이트 블란쳇과 같이 메소드 연기를 이해 할 수도 없는 연기론이라며 냉혹하게 비판하는 배우들과 달리 이순재의 경우 메소드 연기를 비판적으로 보지 않고 하나 연기론으로 인정하면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자신이 한국 배우 중 가장 존경하는 배우로 선배 최무룡을 뽑으며 한국 메소드 연기의 시초이자 최고의 배우로 평가한 적이 있어. 오히려 메소드 연기에 대해 긍정을 넘어 좋아하는 듯한 느낌도 드러낸 적이있다.[23] 여행 도우미(표시된 자막으로는 짐꾼)인 이서진 없이 숙소를 찾아가야 하는 상황이라, 비행기에서 잠도 마다하고 스페인어를 속성 공부해서 결국 공항부터 숙소까지 동생들을 이끌고 온 뒤 한 말. 이 내용은 틀딱충 문서에도 있는데 나이 먹은 걸 벼슬(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일부 무개념한 노인들에게 일침을 날리는 명언이라 할 수 있다.[24] 운 좋게 프로그램 하나 잘 만나서 떴을 뿐인데 그게 자기 능력인 양 착각해서 콧대 높이고 오만해지지 말고 겸손해지고 활동도 열심히 하라는 말이다. 연예인병 걸려서 거만하게 행동하는 일부 연예인들에게 일침을 날리는 명언.[25] 2023년 기준 세는나이로 90세(호적상 세는나이로는 89세)이다.[26] 이때 옆에 있던 동료 개그맨들이 놀라서 전부 굳어버렸고 관중석 반응도 쇼크였다.[27] 자세히 말하자면, 공주의 남자 촬영 중에도 김영철은 1순위로 촬영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가려고 나오던 도중 웬 차 한 대를 보고 안을 봤다. 그 안에는 이순재가 잠을 자며 대기 중이었고, 김영철이 먼저 찍으시라고 말씀드렸지만 이순재는 나 신경 쓰지 말고 너희 먼저 찍으라며 거절했고 동이 틀 무렵에 촬영을 마치고 귀가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전날 밤 10시에 와서 기다린 것이었다. 김영철이 이순재를 발견한 게 새벽 3시였으니 그 후로도 5시간을 대기한 것. 공주의 남자 촬영 당시 이순재는 80세를 바라보고 있는 78세의 고령의 나이였으며 김영철은 59세였다. 공주의 남자 촬영 당시 김영철의 깨달음[28] 그래도 본인 역시 구시대를 살아와서 나이가 있다보니 걱정되었는지 한 방송에서 하이킥에 같이 출연한 후배 배우 박해미와 같이 식사하면서 하이킥 찍을 때 자신도 그런 적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참고로 박해미는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근데 오히려 박해미는 "당시 별명이 야동 순재였음에도 전혀 없었다"고 말한다.[29] 당시 세대의 경우 사회 분위기 자체가 노골적으로 남녀 차이를 두는 게 당연시되던 시기였다. 그래서 "여자는..." "여자 주제에..."같은 차별적인 말투나, 몸매나 성기 등을 주제로 지금 따지면 성희롱으로 여겨지는 멘트들이 자연스럽던 시기였다. 당장 이순재보다 한참 뒤에 태어난 세대만 해도 자연스럽게 아버지-큰아들-작은아들 순서로 밥을 퍼고, 가난한 집은 "기집애가 무슨 공부냐"고 차별하는 집안이 흔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보기에도 성 관련 의식에서 전혀 그런 면이 없었다는 것은 진보적인 것과 동시에 평상시 인권이나 성평등 등에 대해 관심이 많고 이순재 본인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늘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이다.[30] 그러면서 "신구나 나나 평생 연기를 했지만 빌딩 한채 없다"는 너스레를 떨었다.[31] 이는 국내 연예인 뿐만 아니라 전세계 연예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32] 당시로서는 경기고-서울대와 맞먹는 대단한 학맥 라인이다. 그가 국회의원이 될수 있었던 계기중 하나도 서울고-서울대라는 학맥도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33] 이 시절의 철학계는 독일이 그야말로 대세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번역본이라는 것 자체가 생소했기 때문에, 독일어가 필수였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마누엘 칸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등의 전공책들을 독일어 원서로 읽으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독일어 실력을 꽃보다 할배 스위스편에서 독일어로 쓴 지명을 부드럽게 읽음으로써 보여 줬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유럽에서 만난 일본인 팬들과 일본어로 문제 없이 소통 가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70년대 이전 명문대 출신들은 비록 회화는 어렵더라도 웬만한 일본어 원서는 그냥 읽을 만큼 일본어가 능통했으며, 일제 강점기에 유년기-청년기를 보냈던 노년층들은 지금도 회화 수준의 일본어 정도는 알아듣는 편이다. 애당초 대학교 교재들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거나 국내에서 쓸 만한 교재들이 쓰이기 이전이기 때문이다.[34] 원래 있던 극회가 적자를 너무 내서 해산당한 상태였는데, 과거의 장부를 살펴보니 하루에 계란을 150개씩 먹은 것으로 되어있었다고 한다.[35] 여담으로 이 당시 연극부 부원 중에는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도 있었다. 그리고 채현국 이사장을 건너 고건 전 국무총리와도 아는 사이다. 사실 고건 전 총리의 아버지 고형곤 박사가 이순재를 가르쳤던 주임교수였다. 한 번은 4학년 때 연극 합숙 연습 때문에 수업을 두 차례 빠져야 해서 찾아가 말했더니 '그래, 연극도 잘하면 철학이야' 라며 흔쾌히 봐주었다고 한다.[36] 이 모임은 대한방송의 전신인 HLKZ-TV의 주관 아래 학생들을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고 전해진다.[37] 심형래 괴작이 아니라 판문점에서 솟아난 원조.[38] 해외에서 인기를 끌면서 여러 나라에 각 나라의 더빙판이 수출되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대한민국에는 손상된 판본뿐이고, 오히려 미국 더빙판이 더 온전하다는 것. 2013년 7월 21일 EBS에서 HD 리마스터링된 미국 더빙판을 방영했다.[39] 허준 역은 김무생[40] 허준 역은 서인석[41] 허준 역은 전광렬[42] 힘든 촬영일정 소화도 그렇지만 과거 작품들에서 점잖고 위엄있는 역할을 많이 맡은지라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본인에겐 큰 도전이었을듯 하다. 하지만 베테랑 연기자답게 시트콤 속의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하였다.[43] 후일담에서 밝히기를, 해당 캐릭터를 처음 받았을 때 어떻게 이런 연기를 하냐며 본인도 반감을 가졌으나 정작 결과물이 나가고보니 주변의 반응도 덩달아 좋았다고 한다.[44]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도움상회 때문에 보람상조에서 나온 멘트라고 착각하기 쉬우나 라이나생명 광고 멘트이다. 이 멘트가 이순재를 대표하는 멘트가 되어서인지, 광동제약의 헛개나무 숙취해소 음료 광고에서도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보험처럼 마시자라는 어레인지된 멘트를 쓰기도 했다.[45] 이 조치 때문에 보험 광고를 촬영하는 연예인인 손범수, 문천식, 정은아, 김상중 등이 보험설계사 자격증을 땄다.[46] 다른 한 명은 풍파고 교감 분의 홍순창. 참고로 홍순창 분은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풍파고 교장으로 승진한다.[47] 강수진 성우가 맥심 인터뷰에서 '대가는 어디를 가나 통하더라'며 칭찬을 했다. #[48] 사실 이순재는 옛날의 후시녹음 체제 때부터 활동해온 배우라 발음과 발성이 좋은 편이고, 한국 드라마가 제대로 정착하기 전이었던 옛날 젊은 시절에는 성우로 일하면서 더빙을 해서 얻는 수입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방송환경이 개선되면서 오래도록 목소리 연기를 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그냥 이순재의 자기 관리와 연기력이 뛰어난 거다. 본인은 카메라 연기와는 방식이 달라서 쉽지 않았다는 겸손한 소감을 밝혔다. # 적당히 유명세 마케팅으로 투입된 배우, 아이돌, 개그맨들과는 내공이 다르다. 애초에 가벼운 마인드로 연기하는 사람이 아니다.[49] 대학생이던 1947년도부터 활동했다.[50] 실제로 수준 미달의 연예인 더빙이 나올 경우 이런 결과물을 만들거면 왜 성우들의 자리를 빼앗았냐는 비판 역시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이순재 본인은 성우 출신인데도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51] 수미옥 13화에 게스트로 출연했을때 술회한 바에 의하면 TBC 범죄수사극 검은수첩에 범인 역으로 고정 출연해 미성년자 강간치사범이라는 지금 이미지로는 상상도 안되는 역을 했었다고 한다. 강간치사범을 포함해서 33번이나 범인으로 출연해서 이미지 회복하는데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다고 한다.[52] TBC 시절 이후에는 큰 상을 받은적이없다.[53] 아무래도 연예대상 시상식인 만큼 같이 수상한 무한도전팀에 초점이 맞춰졌고, 이순재 또한 겸연쩍다는 내용의 수상소감을 했다.[54] 이해 MBC에서 대상을 탈만한 사람은 사실상 유재석 뿐이었다. 이때 MBC예능 중 단연 잘 나가던 건 하이킥과 무한도전이었는데, 박명수의 전성기긴 했지만 무한도전 외에 두각을 나타내는 프로그램이 있는 건 아니고, 무한도전 내에서도 단연 1인자인 유재석을 제치긴 그랬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멤버들을 줄 수도 없는 노릇. 또한 하이킥은 인기 출연진은 있어도 어느 한 명이 주인공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 부각되는 건 아닌 시트콤인데 누구 한 명을 대상 주기도 애매하다. 공정하게 따지면 유재석을 줘야했지만 유재석은 작년 수상자이기도 하고, 무한도전이 전성기에 오르기까지 박명수, 노홍철, 하하 등 조력자들의 공이 너무 커 무시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작년처럼 대상 유재석/최우수상 박명수를 하는게 가장 나았겠지만 그러면 너무 무한도전만 해먹는 꼴이 나고 하이킥을 무시하게 된다. 그렇다고 폼이 절정이던 박명수를 인기상 이하로 내리면 그의 공헌도가 무시되는 꼴이 되고, 한창 물오른 노홍철 등이 또 빈손으로 가게 된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두 간판 프로그램 자체에 상을 준 꼴. 이순재가 머쓱해한 것도 사실상 하이킥의 공인데 본인 이름으로 받게 되었고, 더군다나 본인은 예능인도 아닌 정극 연기자이자 대배우인데 연기대상도 아닌 연예대상을 받았으니 당연하다.[55] 이순재 본인이 직접 자신이 항상 첫번째는 아니고 신성일처럼 스케줄이 넘치는 스타의 대타였다고 밝혔다.[56] MBC에서 최민수의 노인폭행 누명을 다룬 특집 방송을 방영한 적이 있는데 제작진은 연예인들을 둘러싼 각종 악성루머들을 조명하며 한번도 구설수에 없는 이순재를 찾아가 비결을 물었다. 이순재가 말한 비결은 무조건 '아이고,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고개를 숙이라는 것이었다.[57] 해당 드라마 출연 당시 금관조복을 착용한 모습이 모 백과사전에 수록되기도 했다.#[58] 당시 연기를 함께했던 김명민은 이순재 선생님의 연기가 워낙 뛰어나서 자연스럽게 대사와 표정이 흐름에 따라가졌다고 전했다. # 그 이후에도 사석에서 크게 친분을 쌓으며 존경심을 드러냈다.[59] 나중에 김용건도 합류하였다.[60] 인기 드라마에 힘입어 출마했는데 그 과정에서 유열이 진행하던 라디오에 출연했던 것이 사전 선거 홍보 아니냐는 내용이었다.[61]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62] 이순재가 한참 활동하던 당시에는 배우로서 먹고 살려면 여러 작품을 동시에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 번에 20작품을 동시에 한 적도 있다고 한다.[63] 연배가 연배라 커리어의 상당기간이 기록보존보다는 비용절감이 우선인 시기였다. 그 시대에는 비용절감을 위해 방송국들이 쓰던 릴을 재활용했던 경우가 많기에 남아있는 기록영상만으로는 배우의 작품출연 수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이순재처럼 출연작품이 많으면 배우 본인도 기억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니다. 이는 연배가 비슷한 1938년생인 배우 김영옥 또한 마찬가지이다.[64] 송해보다 한 살 어린 신영균도 있고 이순재보다 7살 위인 명국환도 있지만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 이순재와 달리 신영균, 명국환은 현재는 활동을 잘 하지 않는다. 배우 신구보다는 2살 연상이다.[65] 당시에는 아직 한국 학계 사정이 열악하여 한국어 번역판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서울대학교에서는 영어, 독일어 등 서양어 원어와 일본어 원서로 공부를 했었다. 특히 철학과에서는 독일어가 필수나 다름없었다. 일본어는 그 세대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다녀서 더 잘 구사하는 편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나서도 여전히 외국어를 제법 술술 잘 말하고 심지어 늘그막에 스페인어까지 공부할 정도면 정말 배움의 열의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66] 단 '야동순재' 때는 PD에게 이런 걸 해도 괜찮겠느냐 물었다고 한다. 본인의 품위 때문이라기보다, '야동'이란 소재가 텔레비전에 대놓고 나오는 게 걱정스러웠던 듯하다. 사람들이 이 캐릭터를 받아들이고 좋아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걸 실감했다고.[67] 무조건 자신이 1순위로 촬영을 해야한다고 스탭들을 달달 볶았다고 한다.(...)[68] 여담이지만 이순재의 출생 당시 미국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1932년 취임, 1945년 임기 중 사망)이고, 이순재의 출생 이후 루즈벨트와 현직인 바이든까지 총 15명의 미국 대통령5명의 영국 국왕 (조지 5세,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엘리자베스 2세, 찰스 3세 4대를 보고 계시네...)이 재임했으며 출생당시 신생국이던 소련은 이순재가 정치 활동 할 당시 붕괴되어 러시아 및 여러 공화국으로 바뀌었고 스탈린부터 고르바초프까지 7명의 소련 최고지도자와 3명의 러시아 이 지나갔다. 또한 동독서독, 유고슬라비아는 덤이다.[69] 뉘앙스를 봐서는 술을 못 마시는 체질인 것 같다. 다만 꽃할배 시즌 3까지는 딱 한 잔 정도는 가능은 한듯. 하지만 80대 후반인 현재는 아예 마시지 않는 듯하다.[70] 그래도 신구 역시 나이가 든 후 건강관리 차원에서 술을 많이 줄였으며 예전 사람들처럼 하루 종일 술자리에서 폭음하는 스타일은 아니였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 배우 김영옥과 식사 중 간단하게 반주를 하면서 자신이 젊었을 때 밤새도록 술마시고 담배피웠던 연극계 선배나 동료 배우들 모두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다며 술회하기도 했다.[71] 창씨개명을 했다고 문제가 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한용운이나 김영랑 정도의 강성 독립운동가들이나 산 속에 숨어지내는 사람 빼고는 없었다. 윤동주마저도 일본 유학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창씨를 했다. 창씨를 안 하면 도일 허가를 안 내줬기 때문. 송해가 창씨를 했을 때가 14~15살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렇다면 이순재는 7~8살 무렵이었을 것이니 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친일 청산할 때도 단순 창씨는 제외 대상이다.[72] 쌀을 배급 안 한다거나 병원 진료, 행정 민원, 상급학교 진학 등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다니고 있던 학교에서도 창씨를 할 때까지 정학을 먹이거나 심하면 퇴학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73] 예전 서울대가 지금 서울대보다 입학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피는 경우가 많은데, 예전엔 가난한 사람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거나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중학교를 보내지 않는 등 부유한 사람끼리의 경쟁이었기 때문에 문사철의 위상이 낮았고, 서울대라고 하여도 만족할만한 직장에 취업하기 어려운건 사실이나 지금의 서울대 철학과가 더 들어가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본인도 무릎팍도사에서 서울대에 들어가는 건 지금(2009년)보다 그때가 더 쉬웠다고 말했다.[74] 지속적으로 발성 연습을 해야 하는 배우 생활을 반백년 넘게 한 만큼 훈련을 의식적으로 계속해온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지속적으로 규범주의를 지켜가며 훈련을 한 것은 놀랍다고 할 수 있다.[75] 참고로 현대 한국어 음운론에서는 60년대 출생자 이후는 장단음 구분이 없는 7모음체계, 그보다 나이가 많은 경우 장단음 구분이 없는 8모음체계를 가진 것으로 본다. 매우 규범주의적인 '표준어발음법'에서조차 이순재식 10모음도 허용되지만 'ㅚ' 'ㅟ'를 이중모음으로 취급하는 8모음체계도 허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