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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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명나라 제3대 황제. 묘호는 처음에는 태종(太宗), 나중에는 성조(成祖), 시호는 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 휘(諱, 이름)는 체(棣). 태조 주원장의 4남.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정복군주이자 명 왕조의 전성기를 연 황제이지만 신료들에 대한 지나치게 '불필요하고 잔혹한' 숙청 때문에 비판도 많이 받는 인물이다. 환관들을 이용한 측근 정치를 과도하게 하였다는 비판도 있다. 한편, 부황 홍무제의 정책 중 상당수를 뒤집었기 때문에 영락제 시기를 일종의 제2의 명 건국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고 한다.[1]
2. 생애[편집]
2.1. 연왕 시절[편집]
1370년 11세 때 연왕(燕王)에 봉해져 지금의 북경 일대의 제후가 되었으나 바로 이때 북쪽으로 간 것은 아니었고, 어린 시절엔 남경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19살 무렵부터 몽골 원정에 나가 있었던 서달을 따라 종군하면서 남경과 북경을 왕래했고, 완전히 북경 지역으로 간 것은 1380년, 21세 때였다. 이후로 그 지역의 정치와 군사를 총괄했다. 당시로서는 명나라의 최북방 지역으로[2] 주원장의 북진으로 인해 막북으로 물러간 몽골족의 침공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를 막아냈다.[3]
그런 만큼 무골로 성장했고, 성품도 대단히 호방했으며 목표 의식이 뚜렷했다. 이런 능력 때문에 주원장은 주체를 내심 후계자로 염두에 두기도 했으나 장자 우선 원칙에 따라 장남인 주표를 황태자로 삼았고, 주표가 일찍 죽자 그의 아들인 주윤문을 황태손으로 삼았다.[4][5]
2.2. 정난의 변[편집]
1398년, 홍무제가 죽고, 건문제가 즉위했는데, 건문제와 그 측근들은 숙부 주체를 비롯한 다른 숙부들이 막강한 군권을 지니고 있는 것을 황제권을 유린할 수 있는 것으로 우려하여 다섯 번왕을 없애는 등 각지의 번왕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펼치자 주체는 조카와 그 측근들이 자신을 노리는 것을 알아채고 북경에서 거병, 건문제와 내전을 벌였다. 비록 주체의 전력은 건문제에 비해 훨씬 열세였으나 주체 본인의 기량과 건문제의 우유부단함이 결정적으로 작용해 승기를 잡은 정난군은 파죽지세로 수도 남경까지 몰아쳤고 건문제는 궁에 불을 지른 후 행방불명. 결국 남경은 함락되었고 주체는 황제에 등극했다.(정난의 변)
중국의 많은 황제들 중 영락제의 개성적인 점은 일신의 무용과 관련한 기록이 유난히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 기록들이 야사나 설화가 아니라 명나라 정사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는 황위(왕위)를 찬탈한 군주에게 많이 등장하는 내용이다. 실제로 조선에서도 다른 왕과 달리 세조에게 이러한 류의 기록이 남아있다.
여하튼 정난의 변 때 스스로 난전에서 말을 갈아타고 화살이 떨어지면 직접 칼을 휘두르며 처절하게 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다름 아닌 연왕의 신분이었는데도 직접 진두에 서서 시석이 쏟아지는 중에도 앞장서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특히 정난의 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때 영락제의 무인적 기질과 군사적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처럼 보인다. 다만 사서라는 것은 사관이 입시하여 직접 듣고 기록한 사초에 바탕하여 작성되는 것이 기본인데, 세조나 영락제 모두 사관이 전혀 입시하지 못 하는 내밀한 공간이나 전장에서 이뤄진 이야기들이 버젓이 정사에 실린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걸러낼 필요가 있다.
2.3. 대내적 업적[편집]
우선 정치적으로는 수도를 남경에서 자신의 세력 기반이었던 북경으로 옮겼다. 본래 남경은 건문제의 세력 기반이었는데 북방에서 들어온 영락제로서는 찜찜했고, 아직 북방에서 몽골족의 침입이 계속되던 상황이다 보니 중간쯤에 위치한 곳으로 수도를 옮긴 것. 그리고 원나라가 버리고 간 도성 위에 아예 새로운 궁성을 축조했는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자금성이다. 이후 북경은 지금까지도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고 있다.
또한 문화 사업에도 힘을 쏟아 《영락대전》을 대표로 하는 많은 학술 서적을 편찬했으며,[7] 이를 통해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황제 독재권을 강화하기 위해 번왕 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에 어사를 파견해 지방까지도 효과적으로 황제의 권한이 미치도록 했다. 경제 발전에도 힘을 쏟아 효과적인 농사를 위해 수리 시설도 보완했으며 대운하를 개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2.4. 대외적 업적[편집]
이런 내정적인 면도 뛰어났지만, 외정적인 업적은 정말 화려하다.[8] 연왕 시절부터 전장을 누빈 무인이었던 만큼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쳐 1410년 고비 사막을 넘어 친정한 이후 재위 기간 동안 무려 다섯 차례나 몽골을 친정했다. 역대 중국 황제 중 고비 사막을 넘어 친정한 황제는 북위의 세조 태무제, 명의 성조 영락제, 청의 성조 강희제 세 명뿐인데 그나마도 태무제는 북방 선비족 탁발부 출신이었고, 강희제는 만주족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영락제는 막북 친정을 감행한 유일한 한족(漢族) 황제라고 할 수 있다.[9]
하지만 막북 친정은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았는데 영락제는 영락 8년에서 22년까지 전후 5차례에 걸쳐 대군을 이끌고 막북에 출정했다. 그 중 네 차례가 달단[10] 과 올량합('우량카이')를 대상으로 삼았고, 한 차례는 와자[11] 를 작전 대상으로 삼았다. 그의 친정은 앞서 세 차례가 규모면에서 컸고, 그 작전 지역도 알난하(현 몽골 악눈하)·홀란홀실온(현 몽골국 오란파탁 이남)·활란해자(현 내몽골 호륜호)와 굴렬인하(현 내몽골 내의 도하 지류인 귀류하) 등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후 두 차례의 친정은 모두 타타르의 아룩타이(Aruqtai)나 오이라트의 마흐무드(Mahmud)가 곧바로 도주함으로써 직접 교전을 하지 못하고 귀환하게 되었다.
이렇게 영락제는 막대한 병력과 거액의 군비를 들여 15년간에 다섯 차례나 친정을 했다. 물론 이 친정으로 북변 몽골 초원 각 부족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달단, 즉 북원과 와자, 즉 오이라트의 명제국에 대한 위협을 제거했다는 효과도 있었으나, 다섯 차례에 걸친 장기간의 친정으로 말미암아 인력, 물자, 재정 등의 낭비를 가져오게 되었으니, 이후 인종·선종 양조의 정치에도 후유증을 남겨 주었다. 무엇보다 원정에 대한 노력과 투여된 재정을 고려한다면, 결과적으로 얻은 성과는 별로 없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몽골 부족 중 어느 부족도 확실히 격파하거나 명나라의 영향권 내에 편입시키지 못했고, 영락제가 붕어하고 불과 25년 뒤에 중국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패전들중 하나인 토목의 변을 당하게 되어 예방효과도 거의 없었다. 과거 전한 세종 무황제 역시 흉노 원정에 엄청난 물자와 인력을 소비했지만 그만큼 보람이 있어 중국은 5호16국시대 때까지 흉노의 위협에서 수백년간 안전했던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12] 더욱이 영락제가 최후의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유목천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친정의 목적이 몽골 부족을 제압하는 데 있었다고 한다면,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북방 민족에 조종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더군다나 다섯 차례의 친정 가운데 실제 전투가 일어난 것은 영락 8년의 제1차 원정과 12년의 제2차 원정뿐으로, 제3차 이후는 거의 직접적인 전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즉, 수십만 명의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사막을 행군한데 그쳤으니 영락제의 친정이 있었다는 것을 외부에 알리는 정도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 영락제의 외정과 정치적 의의
이외에도 영락제는 베트남을 영토화시키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하여 호왕조 베트남을 정복하기도 했으며 명나라 해안에 자주 쳐들어오던 왜구를 엄중히 단속하기 위해 조선의 태종[13] 과 협력하여 대마도 정벌[14] 을 추진했다. 또한 왜구 관리를 위해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와 협력하기도 했다. 특히 혜종 건문제 시절 일본 국왕에 봉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를 일본 국왕으로 봉하고 감합무역을 실시했으며, 요시미츠가 죽자 그에게 '공헌'이라는 시호를 내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많은 외정 중에서도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바로 정화의 대원정이다.[15] 1405년에 제1차 함대가 파견된 이후 1433년 선덕제 치세까지 무려 7회나 대함대를 파견하면서 동남아시아, 인도양, 심지어 동아프리카의 케냐 해안까지 명나라의 함대가 진출, 나라의 위세를 크게 떨치고 많은 나라의 조공을 받았다.[16] 하지만 선종 선덕제 재위 시기의 항해를 마지막으로 더이상의 해상 원정은 없었고, 이후 명나라는 해금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내정과 외정 양면으로 명나라를 대제국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그의 치세는 영락성세(永樂盛世)라고 불리며, 후임 군주들인 인종 홍희제와 선종 선덕제의 인선지치(仁宣之治)와 더불어 명나라의 최전성기로 불린다. 이런 일세의 호걸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1424년 5번째 몽골 원정에 직접 나섰다가 병을 얻었고[17] 결국 진중에서 죽음을 맞았다. 향년 64세. 영락제가 붕어하자 국정의 혼란을 우려한 신하들은 마치 황제가 살아 있는 것처럼 식사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홍희제가 워낙 순한 나머지 영락제의 죽음이 홍희제의 동생들에게 알려지면[18] 국정에 혼란이 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영락제 본인의 원정은 아니지만, 서쪽 티무르 제국의 영웅 티무르 바를라스가 영락제가 다스리던 명나라 침공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19] 다만 티무르가 명나라로 진군해 오던 도중에 죽어서 무산된다. 이걸로 인해 당대 최강대국의 정복군주였던 둘의 싸움이 꽤 큰 떡밥으로 남았다.
3. 평가[편집]
혈족과의 권력 다툼과 그 끝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번영시킨 명군의 반열에 올랐고, 숙청을 통해 권력을 유지했으나, 일부 실책을 벌여 국운을 조금 약화시켰다는 점에서 조선의 세조와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이다. 반란을 일으켜 조카를 폐위하고 즉위한 부분은 거의 판박이다.[20] 환관들의 도움으로 황제가 됐다는 이유로 환관들의 세력을 키워 나라의 국운을 약화시킨 것도 세조가 계유정난의 공신들을 토사구팽하지 않고 우대해 나라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한 것과 비슷하다. 영락제의 차남인 주고후도 비만이었던 형 주고치에 비해 부황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훗날 조카 선덕제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되려다 발각되어 본인과 그 가족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몰살당했다.
3.1. 비판[편집]
대체적으로는 훌륭한 황제 중 한 명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만, 실책을 많이 저질렀고 비판점도 많이 존재한다.
일단 영락제의 숙청은 당시 기준으로 봐도 지나치게 잔혹했다.[21] 게다가 그 대부분이 아버지 주원장처럼 어느 면에서는 그보다 더 심하게 안 해도 되는 불필요한 숙청을 한 것이라 더욱 문제다.[22] 특히 방효유 일족에 대한 처형은 (물론 이게 사실이었다는 전제하에서)[23] 악명이 높은데 물론 방효유 본인이 대놓고 연적 찬위[24] 등의 글을 쓰는 등 도전한 이상 죽이는 것까지야 전제 군주제인 명나라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일가족, 친척, 친구, 마지막에는 거주하던 마을 전체 주민[25] 들을 끌어와 방효유 앞에서 차례대로 죽인 것은 명백한 잔혹행위에다 학살이라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물론 중국에서는 황제에게 거역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을 연좌하는 일이 흔했지만 진짜 반역이 아니면 당사자만 처벌하는 게 보통이고 가족은 기껏해야 추방만 했으며, 반역을 했다고 쳐도 영락제 수준으로 마구잡이로 잡아죽이는 경우만큼은 거의 없었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잔혹했을 지가 답이 나온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바른 말 하면 진짜로 목숨을 거두어가는 바람에 명나라에는 충언하는 사람이 잘 나오지 않게 되었고, 그 대가는 이후 명나라와 주씨 황족들이 치르게 되었다.[26][27]
또한 영락제의 지나친 대외 활동은 겉만 번지르할 뿐 딱히 실속은 없었다는 주장도 많다. 대외 원정해서 명의 위상을 떨쳤다곤 하지만, 정작 그게 이후의 명에 어떻게 큰 도움이 되었는가에 대해선 물음이 남고[28] 국가 재정만 악화되어 후대 황제들의 부담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주요 주장이다. 위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그는 한평생 몽골 원정에 매진했고 정화의 대항해 또한 그의 시대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대외 활동은 겉보기에는 화려해 보일지 모르지만 원정을 통한 실익은 거의 없었고 결국엔 나라 재정과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게 된다. 특히 정화의 항해 같은 경우는 명나라 스스로도 너무나 실익이 없어서 그 후로 두번 다시 같은 짓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몽골 원정 역시 몽골부족들을 명나라 영향권 아래에 복속시킨다던가, 몽골족을 몰살하여 오랫동안 국경을 안전하게 만든다던가 하는 구체적 성과 자체가 그닥 없다. 명나라의 최전성기라 불리는 영락제의 치세지만 당시에 명나라는 결코 부유하거나 평온하지 않았다. 당시 명나라는 내부적으로 기근과 흉년, 천재지변, 전염병이 계속되었고 영락제가 일으킨 잦은 전쟁으로 인한 징병과 높은 세금을 견디다 못한[29] 농민들의 폭동과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물론 영락제는 이 반란들을 잔혹하게 진압했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30] 즉, 영락제 시대의 발전된 것처럼 보인 모습은 빛좋은 개살구였다는 것. 이러한 모순의 심화가 정강의 변과 함께 한족 왕조의 2대 치욕으로 평가받는 토목의 변이 일어나는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한다.[31]
또한 황제 독재권의 강화를 위하여 환관들에게 지나치게 큰 권한을 주었는데 이로 인해 후대의 환관들이 전횡을 부릴수 있는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 또한 강하다. 처음 태조 주원장은 환관들이 권력을 가지거나 요직을 맡지 못하게 했다. 또한 환관들이 글을 알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미 글을 아는 환관들도 가차없이 내치거나 죽였다. 이는 잔혹하지만 그래도 환관들을 글자 그대로 황제의 손발로 만들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건문제 때까지 환관들의 업무는 황제를 보좌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를 따라다니면서 이런저런 잡다한 일이나 해주는 심부름꾼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정난의 변'으로 철폐되는데 조카를 몰아내고 즉위한 영락제에 대한 사대부들의 비판과 저항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때 명의 많은 사대부들이 영락제에 협력하기를 거부했고, 방효유와 같이 끝까지 영락제를 비판하다가 십족이 처형된 사례도 있었다. 그래서 영락제는 이러한 사대부들에 대한 불신으로 인하여 사대부(=못 믿을 놈)들이 장악한 조정을 통해 나라를 통치하는 대신 자신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환관들을 통해 나라를 통치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거기다 영락제는 건문제 축출과 정적들의 감시와 제거, 사대부와 군부, 관리 등의 신하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환관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 소련의 KGB 비슷한 성격의 동창이라는 비밀경찰 제도를 활용하였다.[32] 이는 환관들이 명 왕조 멸망 때까지 권력을 전횡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주었고, 실제로 명 왕조는 후한, 당과 함께 환관들의 전횡이 가장 심했던 왕조 중 하나였는데, 명나라의 멸망에 일조한 유근, 왕진, 위충현 등은 모두 환관 출신이다. 환관의 권한이 얼마나 컸는지, 그리고 그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알 수 있다. 결국에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될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해졌다.[33] 이들은 자국에서만 욕심을 채우는 걸로는 부족했는지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으로 가서 은 내놓으라며 깽판을 쳤고, 조선에서는 명나라 환관이라면 이를 갈았다.
또한 명 제국의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진 점도 비판이 있다.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한 이유야 당연히 그 당시 기준으로는 영락제 본인의 본거지로 세력을 옮기는 편이 그에게는 훨씬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에게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자주 했던 영락제의 입장에서는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기에도 북경이 남경보다 훨씬 나은 곳이었다. 그러나 북경의 수도로서의 지정학적 위치는 유목민계 정복왕조 입장에선 훌륭하지만 한족왕조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실제로 북경이 수도가 된 역사는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 유목민족들이 세운 정복왕조일때 였고 한족왕조는 단 한번도 수도로 삼지 않았다가 명나라가 최초사례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최전방에 수도를 두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중국이 강력해서 유목세력들에게 계속 공세를 퍼붓는 입장이라면 몰라도 중국이 쇠약해질때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는데 북방의 몽골족과 만주족 등이 세력을 떨치면서 명은 수도가 적군의 근거지와 너무 가까워서 무방비로 노출되고 공격받는 사태가 자주 벌어지게 되었다.[34]
한마디로 훗날 명나라의 멸망을 부른 무능한 황제들의 막장 행태로 대표되는 국가 막장 테크의 씨앗들이 이미 영락제 시절부터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영락제는 명나라판 세조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세조와는 매우 유사한 점이 많았었는데 집권 과정은 물론이고 서로의 손자인 선덕제와 성종이 명군이며 증손자인 정통제와 연산군이 암군이었다.[35] 군사적 업적이 많고 국가 체제를 완성시켰다는 점까지 보면 거의 도플갱어 수준이다. 그나마 조선의 세조보다는 나은 점이 있는데 일단 영락제의 외정 업적은 중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크다.[36] 또한 영락제는 환관에게 힘을 실어주었을망정 세조처럼 자신의 정치력만 믿고 유력한 공신들을 방조하지는 않았다.[37] 물론 집권 과정의 부당함과 무자비함, 저지른 실책은 세조랑 닮고 스케일에서는 더 심해서 욕을 먹는다.
4. 조선과의 관계[편집]
그의 치세는 조선의 태종[38] (1400년 ~ 1418년) 시대와 거의 겹치며 세종(1418년 ~ 1450년)의 재위 초반과 겹친다. 영락제는 태종과 직접 만난 적도 있었다. 태종이 왕자 시절 명에 사신으로 갔을 때 연왕으로 있던 영락제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조선에 돌아와서 태종은 "연왕은 왕에만 머무를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태종이 간파한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태종도 정변으로 즉위했고 영락제 본인도 정변으로 즉위해서 그랬는지, 태종을 완전한 조선 국왕으로 인정해 준 것도 영락제였다.[39]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 둘은 참 궁합이 잘 맞았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는 태종이 직접 영락제에게 보낼 말을 골랐는데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평범해보이는 말을 골라서 바치라고 하니 영문을 모른채 영락제 앞에 보냈더니 영락제가 매우 기뻐하면서 조선 왕이 최고의 명마를 바쳤다고 기뻐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조선의 여자들이 상냥하고 아름답다는 소문에 사신(황엄)을 여러 차례 보내 공녀(貢女)를 차출하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조선인 후궁을 원한 것은 영락제의 생모가 고려에서 원나라로 온 공비(貢妃)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는데, 아무튼 명나라로 건너간 공녀들은 각각 첩지를 받아 후궁이 되었다. 현인비 권씨[40] , 여미인[41] , 강혜장숙여비 한씨[42] , 임 순비, 이 소의, 최 미인, 정비, 송비, 황비. 그중 한 명인 권씨가 현인비로 봉해졌고, 한확의 누나인 한씨는 여비로 봉해서 총애를 받았다. 이 중 현인비 권씨는 상당히 이례적인 대우를 받았는데, 당시 영락제의 황후 서씨가 죽고 없어서 후궁의 관할을 조선에서 온 지 얼마 안 되는 권씨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러나 권씨는 얼마 안 되어 병사했는데, 독살로 밝혀지자 한바탕 난리가 난 끝에 같이 조선에서 온 여 강비(여 미인, 이후 여 첩여로 추존)가 범인으로 몰려 고문 끝에 사망했다. 헌데 나중에 실은 한족 출신인 여 장비가 독살범이고 그 죄를 여 미인에 뒤집어 씌운 것이라고 밝혀졌으며 여기에서 그치지 잃고 여 장비가 다른 궁녀인 어씨랑 공모한 것도 모자라서 함께 환관과 간통까지 했다는 사실도 드러나서 분노한 영락제가 폭발[43] , 관련자 2,800여 명이 죽었다. 여기에 얽힌 조선인 후궁 황씨와 이씨는 참형, 임씨와 정씨는 고문을 못 견뎌 결국 자살. 관련자를 처형하던 도중 어떤 이가 이왕 죽는 거 이판사판 격으로 영락제에게 일갈했는데, 그 내용이 "네 양기가 쇠해서 환관과 간통을 한 것인데 누굴 혼내냐"는 엄청난 독설이었다. 이야기의 출처는 엉뚱하게도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 실록 26권, 세종 6년 10월 17일 무오 2번째 기사로, 같이 갔던 공녀가 용케도 살아남아 영락제 사후 조선으로 귀환해 증언한 것. 이 일화는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소개되기도 했다.[44]
한편 여비 한씨의 경우, 같이 갔던 황하신의 딸 황씨가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대국을 우습게 본 거냐고 노발대발하는 영락제를 한씨가 여염의 일을 국왕이 어떻게 알았겠냐고 말렸다.[45] 그 말에 감동한 영락제가 황씨에 대한 처벌을 그녀에게 맡기자 한씨는 황씨의 뺨을 때리는 처벌을 내렸다고 한다. 이 한씨는 영락제 사후 불과 24세의 나이로 궁인 30명과 함께 순장당하고 말았다. 죽기 전 한씨는 유언으로 공녀로서 같이 왔던 자신의 유모인 김흑(金黑)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명 인종(홍희제)에게 부탁했다. 홍희제는 이를 들어주려 했으나 궁녀들이 위에 언급한 독살 사건 이야기를 조선에 알릴 수 있다며 반대해서 결국 들어주지 않았다. 김흑은 이후 홍희제에게 공인(恭人)이란 작호를 받고 태황태후를 모시는 일을 하다가 세종 17년에 홍희제의 황후 장씨가 김흑을 비롯한 공녀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위에 언급한 독살 사건을 증언한 공녀가 이 김흑이다.
넘어간 조선 여인들이 하나같이 고초를 겪어 조선에서 말이 많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태종이 겉으로라도 명나라에 대해 저자세로 나온 대가로 조선에 엄청난 무역 특혜를 제공했다.[46] 황제국은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들에게 조공의 물량보다 더 많은 회사(回賜)를 내리는데, 태종은 이를 철저히 이용해 실리를 챙겼다. 본래 명나라는 조선과 베트남, 시암(태국)은 3년에 1회, 일본과는 10년에 1회, 류큐 왕국과는 2년에 1회 조공 무역을 하였다. 그런데 아직 몽골 세력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태종 이방원이 친명 노선을 천명하자 명 측이 1년에 3회씩이나 조공 무역을 허용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 줬다. 이후 명나라는 손해가 컸는지 수시로 조공 무역을 줄이자는 얘기를 꺼냈지만 조선은 강하게 거부.[47] 태종이 명나라에 호의적인 정권이기도 했지만 태종이나 영락제나 모두 머리가 비상한 명군들이었고 무엇이 두 나라 관계에 도움이 되는것인지 알았기 때문에 조명 관계는 정도전이 버티고 있고 매우 꼬장꼬장했던 태조 이성계 시기에 비해 매우 우호적으로 변하였다.
태종이 연부(燕府)를 지날 때는 연왕(燕王)【즉 성조 황제.】 이 친히 대해 보았는데, 곁에 시위하는 군사가 없고 다만 한 사람이 모시고 서 있었다. 온순한 말과 예절로 후하게 대접하고, 모시고 선 사람을 시켜서 술과 음식을 내오게 하였는데, 극히 풍성하고 깨끗하였다. 태종이 연부를 떠나서 도중에 있을 때, 연왕이 서울 〈금릉〉에 조회하기 위하여 편안한 연(轝)을 타고 말을 몰아서 빨리 달려갔다. 태종이 말 위에서 내려 길가에서 인사하니, 연왕이 수레를 멈추고 재빨리 연의 휘장을 열고서 오래도록 온순한 말로 서로 이야기하다가 지나갔다.
태종이 명나라 황제의 우대를 받고 돌아오다.#
그리고 태종과는 위의 일화처럼 연왕 시절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있었고, 태종이 정도전을 숙청하면서 조명 관계가 개선되었기 때문에 개인적 친분과 정치적 이해를 같이 한다는 점도 꽤나 작용했을 것이다. 여하튼 두 나라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명나라의 멸망까지 지속되어서 명이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섰음에도 지속적으로 명을 찾는 목소리가 많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태종은 영토만큼은 지킨다는 방침을 세워 재위 내내 이 방침을 고수했다. 명나라가 조선의 동북 지역에까지 살고 있던 여진족을 직할로 통치하겠다는 소식을 듣자 태종은 즉시 관련 역사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토대로 명나라의 주장을 반박했으며 심지어는 마지막에 "폐하 아버지께서도 이건 인정하신 거니까 태클 걸지 마셈."이라는 말까지 덧붙여 결국 동북 지역 여진족을 계속 조선이 관리하라는 말을 받아냈다. 물론 입만 살진 않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북방 경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그저 저자세로만 나가지는 않은 것이다. 이러한 방침은 영락제 치세를 살았던 세종대왕 대에도 더욱 강력한 대 여진 정책과 함께 그대로 유지된다.
이런 태종도 영락제가 베트남을 정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는 '사대의 예'를 게을리하다간 조선도 베트남처럼 명나라에게 침공의 빌미를 줄 수 있다고 말하며 100여명이 넘는 문신들을 모아놓고 영락제의 베트남 정벌을 축하함을 주제로 글을 쓰게 하고 태종이 직접 심사를 하였다고 한다.#
또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무과(武科)에 합격한 자는 항상 스스로 병서(兵書)를 숙독(熟讀)하는가? 숙독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들으니, 황제(皇帝)가 베트남(安南)을 정벌할 때에 베트남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임을 당했고 대적할 자가 없었다 한다." 하니,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내(李來)가 대답하기를, "천하(天下)의 군사로 이 조그마한 나라를 정벌하니, 누가 감히 대적할 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군사는 정(精)한 데에 있지 많은 데에 있지 않다. 어찌 한 가지만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 또 베트남 국왕(安南國王)이 황제에게 달려가서 고(告)하였으니, 황제의 거사(擧事)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황제가 본래 큰 것을 좋아하고 공(功)을 기뻐하니, 만일 우리 나라가 조금이라도 사대(事大)의 예(禮)를 잃는다면, 황제는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죄(罪)를 물을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한편으로는 지성(至誠)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성(城)을 튼튼히 하고 군량(軍糧)을 저축하는 것이 가장 오늘날의 급무(急務)라고 여긴다."
편전에서 병조 판서 윤저 등과 궁방 대책에 관해 의논하다. #
하지만 한편으로는 태종은 신료들이 영락제가 침공하면 대적 할 자가 없다고 두려워하자 "그렇지 아니하다. 군사는 정(精)한 데에 있지, 많은 데에 있지 않다.[48] 어찌 한 가지만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반박하며 명의 침공에 대비해 성(城)을 튼튼히 하고 군량(軍糧)을 저축하는 것이 가장 오늘날의 급무(急務)라고 주장하면서 명과의 전쟁에 철저히 대비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태종은 여진족 관련 문제로 영락제의 명과 충돌한적도 있었다. 조선 초기엔 여진 부족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조선과 명나라의 대립이 있었는데 당시 두만강 인근 변경 지역의 여진 부족은 조선의 지배를 받기로 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명나라는 사신 '왕교화적'을 보내 여진족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그곳 여진족들은 조선을 섬기기로 회맹하며 맹약을 맺었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들 여진 부족에 대한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였고, 결국 힘이 없는 약소한 여진 부족들은 대부분 조선의 질서에서 벗어나 명나라의 초유를 받아들였다.
이에 분노한 조선 태종은 곧바로 '보복 공격'에 나섰다. 길주도찰리사 조연이 이끈 1천여 명의 조선군 기병 부대는 올량합 부족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가옥과 논밭을 불태웠고, 수백여 명의 부족민을 참수, 이어 무기로 무장한 여진족 군사 160여 명을 포로로 잡아 또 참수하였다. 그러나 이는 명나라의 사전 동의를 받지 않은 조선군의 일방적인 토벌이었고, 태종도 이를 의식했는지 신하들과 대처 방안을 논의했다. 당시 태종은 자신의 상국인 명나라 황제를 속이기로 작정했고, 태종의 계책은 성공해서 외교적 문제로까지는 비화되지는 않았다.
한편 태종은 양녕대군을 영락제의 딸과 혼인시키기 위해 조선에 단골 사신으로 오던 황엄에게 타전하여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이후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흐지부지되었다. 실제로 명 황실과의 통혼이 성사되었다면 양녕대군의 폐위는 어렵게 되어 양녕대군이 조선의 4대 왕으로 즉위했을 가능성이 크며 세종의 치세 또한 존재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영락제가 고려 시대에 세워진 거대 사찰인 흥왕사의 금탑을 탐내어 사신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자, 조선에서 논쟁 끝에 결국 주었다는 이야기가 한국 인터넷상에 떠돌아다니는데, 정작 조선왕조실록이나[49] 명사 조선열전에서는 아무리 검색을 해도 전혀 찾을 수 없는 내용이라 신빙성이 의심된다.
5. 가족[편집]
5.1. 조상[편집]
- 부황: 태조 고황제 주원장
- 모후: 미상
5.2. 아내[편집]
5.3. 자녀[편집]
5.3.1. 황자[편집]
5.3.2. 공주[편집]
6. 일화[편집]
베이징에서 약 44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역대 명나라 황제들의 무덤인 명십삼릉(明十三陵)이 있는데,[50] 그중 영락제의 능인 장릉이 가장 규모가 크며 유명하다. 장릉보다 더 큰 능을 만드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장릉의 전각인 능은전(裬恩殿)은 자금성의 태화전에 맞먹는 규모이며, 태화전과 함께 중국 최대의 목조 건축이다. 만력제의 정릉 발굴을 주도했던 베이징 부시장 우한은 장릉 발굴을 추가적으로 준비하며 40만 위안의 예산을 국무원에 요청했으나 저우언라이 총리는 "나는 죽은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라고 이를 거절했다. 이는 돈이 너무 드는 것도 문제였지만 당시 중국의 고고학 기술이 미비해서 유물 보전이 어렵기 때문에 추가적인 발굴을 하면 안된다는 고고학계의 탄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린(Giraffe)이 동양권에 알려지게 된 시기 또한 영락제 때. 그 기린 덕분에 정치적인 안정을 가져오는 효과도 있었다.[51]
십족을 멸한다는 말을 만든 장본인으로 정난의 변 과정에서 방효유의 십족을 멸족시킨 적이 있다. 원래 구족[52] 이라는 개념은 있어도 십족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그런데 건문제의 측근으로서 연왕(훗날의 영락제)를 제거하려 한 방효유를 회유하여 즉위 조서를 쓰라고 했을 때 방효유가 이를 거부하며 오히려 연적찬위(燕賊纂位 : 연나라의 역적이 제위를 찬탈하다.)라고 쓰자 화가 난 영락제가 "너의 죄가 구족에 미치더라도 계속 고집을 부리겠는가?"라고 했고, 이에 방효유가 "구족이 아닌 십족을 멸족시킨다고 해도 내 뜻을 꺾을 수는 없다!"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전무후무한 십족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이는 구족에 친구와 문하생을 포함시킨 것. 방효유의 '십족'으로서 총 847명이 처형되었다고 하며, 이들은 모두 방효유의 눈앞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다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방효유의 사촌동생인 방효복(方孝復)은 그 당시 경원위(慶遠衛, 現 광시성 허츠시 이저우구)에서 군역을 지고 있었던 상태여서 죽음을 면했다고 해서 십족 멸족에 대한 이 일화가 지나치게 과장되었거나 어느 정도 왜곡이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도 현대는 존재하고 있다.
또한 서쪽을 정복한 티무르가 명과의 결전을 준비한 것이 1404년의 일로 영락제는 1402년에 찬탈하고 황제로 즉위했으니 막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한 영락제와 정복의 막바지에 이른 티무르의 군세가 격돌할 위험이었으나 티무르는 1405년 병사, 당대 최강을 다투는 양 제국의 대결전은 성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잔혹도를 보면 티무르가 영락제보다 더 심하다.
7. 서자설 - 생모는 누구인가[편집]
정사(正史)인 《명사》(明史)와 《명실록》에는 홍무제와 마황후의 4남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영락제가 붕어하고 얼마 안 된 때부터 영락제가 적자가 아니라 서자라는 기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것은 영락제가 본래 원 혜종 우카가투 칸 보르지긴 토곤테무르의 서자이나 대도[53] 를 함락시킨 홍무제가 입양했다는 것인데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학자는 없다. 애초에 대도는 1368년에 함락되었고, 영락제는 1360년생이다. 다만 현 황제가 사실은 한족이 아니라 몽골인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 만큼 명나라 초기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조카인 건문제를 내쫓은 (사실상 살해한) 영락제에 대해 반감이 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영락제 서자설의 근거가 되는 문헌은 황실 종묘의 제사를 책임지는 부서인 '태상사'에서 발간한 《남경태상사지》이다. 이 책은 현존하지 않지만 청나라 초기까지 존재했고, 그 일부분이 여러 책에 인용되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영락제와 그의 남동생 주숙은 마황후의 자식이 아니라 후궁인 공비의 자식이다. 다른 곳도 아닌 황실의 제사를 관장하는 관청에서 남긴 기록이기에 학계에서도 영락제 서자설이 정설로 여겨진다. 게다가 조선인이라서 비교적 황실의 검열에서 자유롭고 실제로 연왕 시절 영락제를 배알한 적도 있는 권근의 저서인 《봉사록》에서는 영락제의 '생모'의 기일이 7월 15일로 적혀 있는데, 마황후는 8월 10일에 죽었다. 이러한 기록을 신뢰하는 학자들은 조카를 몰아내고 황위를 찬탈한 영락제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실록을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영락제는 황위에 오른 후 공식적으로 《태조실록》을 수정하라고 두 차례나 명령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이 홍무제와 마황후의 4남이라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생모에 대한 여러 가설이 나와서 중국 위키피디아에는 '주체생모'라는 별개 문서#가 있을 정도이다. 후보로는 달비(達妃), 공비(碽妃), 원 혜종의 비인 옹기라트 씨, 마찬가지로 원 혜종의 비인 옹비(甕妃), 고려비(高麗妃) 한씨[54] 등[55] 다양하다.
상술한 《남경태상사지》에 따르면 영락제의 생모는 공비(碽妃)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문제는 중국에는 공씨(碽氏) 성이 없다는 것. 여기에서 황제의 생모를 차마 고려에서 온 공녀(貢女)라고 적을 수는 없어서 슬쩍 바꾼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경례남도봉선전기사(敬禮南都奉先殿紀事)'에 따르면 공비는 영락제의 능묘인 효릉에서 비빈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곳에서 유일하게 오른편(서쪽)에 놓였는데, '영락제를 낳아 다른 비빈들이 감히 나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조림잡초》에 따르면 공비를 두고 '고려공비'라고 기록하고 있어, 공녀인지는 차치하고 고려인이었던 것은 거의 맞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남경태상사지의 기록이 타 기록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어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8. 현대 매체[편집]
8.1. 드라마[편집]
중국 사극에선 주연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한국 사극에선 주요 인물로 나오는 경우는 없다고 보면 되고, 그냥 조선 인물들의 에피소드에 곁다리 식으로 잠깐 나오는 정도나 아니면 아예 등장도 하지 않고 언급만 되는 경우가[56] 대부분이다.
8.1.1. 정화하서양(국내명 정화의 대항해, 2009)[편집]
전반부의 진 주인공 급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정화의 영원한 주군이자 절대 권력과 부를 지닌 스폰서로 등장한다. 황제 즉위 후 엄청난 재정을 사용하여 지속적으로 정화를 믿고 아끼면서 지원한다. 그러나 홍무제의 유지(해상 무역 금지)와 대항해 정책을 반대하는 보수 관료 세력과 타협하면서 싸우고 아들들의 권력 투쟁과 문헌 편찬, 전국 각지의 천재지변, 티무르의 준동, 대운하 보수, 베이징 건설, 자금성 건설, 장성 축조, 황릉 건설, 몽골 원정[57] , 정화의 항해 비용, 항해 때 팔아야할 물건 구입, 외국 사신의 선물 비용, 부선장[58] 의 정화의 모함 등을 해결하느라 고생고생하며 자금성과 베이징 공역이 끝나고 항해를 멈추고 민간에게 맡기고 해외에서 자체적으로 오게 하려하자 정화가 겁을 먹으나[59] 머잖아 정화가 프랑스 이탈리아 사람을 데려오는데 극진히 대접하지만 대화를 하면서 중국와 달리 유럽이 해상 진출에 적극적이면서도 무력적이고 욕심이 끝이 없으면서 무기도 성능이 뛰어난 것도 있는등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경계하고 내심 항해에 대해 생각을 하다 결국 몽골 원정길에 죽는 그날까지 지속적으로 정화와 대항해를 지원한다.
배우는 마오쩌둥 전문배우로 유명한 원로 배우 당국강이 맡았다. 제갈량이나 옹정제를 연기하던 40대의 젊은 시절이 아닌 50대 중후반의 적지 않은 나이로 맡은 배역임에도 30대 후반부터 장~노년기의 모습까지 소화하며 어항의 금붕어를 생으로 뜯어먹는 등 광기어린 열연과 수많은 액션씬을 선보였다. 특히 정난의 변 전후로는 역사적 고증을 살리려면 연출이 조금만 엇나가도 어린 조카 건문제만 불쌍해보이기 일쑤임에도 성깔 화끈하지만 감정기복도 심한 '아직 덜 다듬어진' 간웅이 완전체로 진화해나가는 과정을 묘사하는데, 가히 중국 드라마의 숱한 역적(...)들 중 손꼽히는 카리스마를 선보인다. 정난의 변 전후 줄거리는 그야말로 공훈배우 당국강의 연기력이 폭발하는 호연의 연속인데, 이런 주체의 강렬한 캐릭터 때문에 꿋꿋하게 살아남는 잡초 같은 서사를 부여받은 주인공 정화의 존재감이 흐려진다는 지적이 잠시 나왔을 정도였다.
8.1.2. 납첩기3(2016)[편집]
조연으로 등장한다. 건문제의 장남 주문규(화간태자)를 잡아온 주인공을 치하했고 정화를 도와 해외로 가서 건문제를 찾을 것을 명령했다.
8.1.3. 대명풍화(2019)[편집]
중국의 베테랑 배우인 왕학기(왕쉐치)가[60] 맡아 열연했으며 남자주인공인 선덕제의 할아버지로 등장한다. 조카의 황위를 빼앗은 것에 죄책감이 심해 홍무제에게 꾸중을 듣는 악몽을 자주 꾼다. 무인 출신답게 호전적인 성격의 황제로 정치보다는 군대와 전쟁을 매우 좋아한다. 특히 작중에서 용포보다는 갑주를 입는것을 좋아하며 직접 전쟁에 나서는 일이 많으며 문관보다는 무관을 더 우대해주어 무관들에게 신망을 받는다. 하지만 이로 인해 황태자에게만 국정을 맡기고 아예 소홀히 하고 있으며 그가 벌이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는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는데도 전쟁을 좋아하고 계속 나서는터라 황태자와 신하들이 우려한다.
가족과 관련되어서 자식들때문에 속을 썩이는데 인자한 성격의 장남을 아끼나 장남은 병약하고 차남은 포악한 성격의 깡패에다 삼남은 야심만만해서 차남과 삼남이 황위를 찬탈할까봐 우려한다. 특히 차남인 주고후의 능력은 인정하나 그가 걸핏하면 폭력을 일삼아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다보니 속을 썩는다. 그러던 도중 손자인 주첨기가 뛰어난 능력을 보이자 장남이 오래 살지 못하더라도 손자가 잘해낼것이라 믿고 손자를 아끼며 곁에 두고 제왕학을 가르키며 사실상 후계자로 삼는다. 몽골군이 대규모로 침공했을때 50만의 원정군을 이끌고 가서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나 이미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된 상황이라서 나중에가면 영락제도 후사를 결정해야하는데 역사와 다르게 황태자는 오래 못살것이니 원정을 나가있는 차남을 황제로 정하며 밀지를 몰래 써서 양사기에게 전한다. 임종때는 주첨기를 부르며 황태자와 왕조를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다. 사후 황태자의 꿈에서 등장하는데 황태자에게 내가 그동안 너무 많은 전쟁을 벌여 너와 신하들,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어싸다며 사과하고 네가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어라는 말을 남기며 말을 타고 사라진다.
8.1.4. 산하월명(山河月明, 2022)[편집]
배우 풍소봉이 주체 역을 맡았다. 아역일 때부터 똑똑하고 활발하며 고집이 있다. 금의위 수장으로서 많은 탐관과 원의 첩자들을 제거했다. 친왕중 무예와 용병술이 제일 뛰어나서 군사적 요지인 북평을 맡게 된다. 천도를 한다면 북평으로 해야 국경을 오랑캐로부터 쉽게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장남이 무예를 못하니 차남을 세자로 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만 아내의 만류로 그 생각은 접었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공을 거뒀고 장군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받게 된다. 건문제가 삭번을 추진하며 번왕들을 죽이자 연왕은 살아남기 위해 미친 척을 하고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건문제는 연왕을 직접 제거할 대의명분이 없어서 연왕의 수하들을 범죄자로 몰아 연왕의 손발을 묶어버릴 생각이었는데 참지 못한 연왕이 결국 800명의 군사로 간신처단과 선황의 명령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거병했다. 그동안 무패전승의 장군이었으나 동창전투에서 패하고 장옥도 잃어서 슬퍼했다. 행군할 때 공자, 맹자의 고향에 폐를 끼쳐선 안된다며 우회했다. 남경을 점령하고 제태, 황자징, 방효유, 연자녕 등의 간신과 일가족을 모두 처형했다.
8.1.5. 상식(2022)[편집]
삼국지에서 관우를 맡았던 우영광이 영락제를 맡았다. 1화부터 영락 20년이라 영락제 분량이 적다. 승마도 못할 정도로 뚱뚱한 태자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다. 엄청난 무예를 지닌 태손에 대해서는 매우 흡족해한다.
8.1.6. 용의 눈물[편집]
배우 강만희가 황제로 배역을 맡았다. 용의 눈물에 잠깐 등장해서 양녕대군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상기한 십족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8.1.7. 육룡이 나르샤[편집]
육룡이 나르샤 후반부에 등장한다. 배우 문종원이 연기했다. 이땐 황제 등극했을 때는 아니고 연왕일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온 이방원을 만나는 역할로 나온다. 대사를 한국어로 하는데, 드라마 편의상 한국어로 처리한게 아니라 작중 유모가 고려 출신이어서 조선말을 할 줄 안다는 설정을 붙였다.[61] 다만 첫 등장 당시에는 명나라 말로 말하고, 이방원의 조선말은 하륜이 통역해주다가 사실 연왕이 조선말을 할 수 있었기에 조선말로 대화하는 것으로 연출된다. 그래서인지 조선말을 쓰는 건 대부분 이방원과 대화할 때이다. 마지막 등장은 조선으로 돌아가는 이방원을 배웅할 때인데, 이때 서로의 무운을 빌어줬다. 이후 조선에선 주요 세력들이 다 주원장 사망 이후 연왕이 반란을 일으킬거라며 조선에도 큰 정치적 풍랑이 일 것임을 예견하며, 이후 실제 명과 조선 모두 쿠테타군이 승리하면서 영락제도 옥좌에 오르게 된다.
8.2. 만화 및 애니메이션[편집]
무협지에 가장 많이 배경으로 쓰이는 시간대가 바로 영락제 때이며 영락제 자신도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 보통 무공이 강하고 매우 호전적이며 유능한 군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인지 한백무림서에서는 영락제가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한백무림서에서 무림의 균형은 사패, 팔황, 구파와 황실이 지키는데 이 황실의 수장이 바로 영락제. 한백 무림서의 핵심 인물인 진천의 장인이기도 하고 무당마검에선 친정을 하여 챠이와 맞대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8.2.1. 꼴(만화)[편집]
허영만의 꼴에서는 황제가 되기 전에는 풍채가별로였는데 크고 아름다운 수염을 기른 후부터는 관상이 바뀌어 저 초상화처럼 상당히 후덕하고 호방해졌다고 한다.
8.3. 게임[편집]
8.3.1. 징기스칸 시리즈[편집]
코에이의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4에서 명나라 본명인 주체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정치 83, 전투치는 무려 96, 지모 86이고 특기로 농업, 건설, 문화, 외교, 기동, 돌격, 공성 복병, 병과 적성은 보병 A, 궁병 A, 기병 S, 수군 C로 동아시아 문화권 최강의 먼치킨이다. 혈연 무장이라는 메리트가 있어서 병사를 더 많이 이끌 수 있으니 가히 야전에서는 적수가 없다. 특히 등장 시점에서 연령 11세[62] 라 10대 초반부터 세계정복에 나설 수 있다. 명을 컴퓨터에게 맡겨놓으면 시간이 지난 후 정난의 변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이걸 보고 나면 이름이 본명인 '주체'에서 '영락제'로 개명된다.
8.3.2. Europa Universalis 시리즈[편집]
전작들에선 어째서인지 평범 이하의 스탯을 받았지만, 평가가 일신된 Europa Universalis IV에서의 시대상 등장하지는 않으나 영락제는 군주 능력치 5 6 6으로, 최고 능력치가 6 6 6임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보통 도합 능력치가 14를 넘어야 최고급 군주라고 불러주는데, 명나라에서는 14를 넘는 군주가 영락제와 6 4 6인 홍무제뿐이다. 동시기 왕조인 조선은 유일하게 4대 군주가 6 5 5로 이 기준을 만족한다.
8.3.3.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편집]
페이스북 판인 Assassin's Creed: Discover Your Legacy에서는 성전기사단의 일원으로 등장. 방효유와 리 통의 부모를 비롯한 암살단 용의자들을 잡아다 모조리 처형[63] 하지만 결국은 1424년 리 통에게 암살당한다.
8.3.4. 도미네이션즈[편집]
영락제의 꽃병이 유물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