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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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 공식명칭은 中华人民共和国主席(중화인민공화국주석)으로 약칭은 国家主席(국가주석)이다. 영문 명칭은 마오쩌둥 시절에는 Chairman으로 표기하다가 1982년부터 President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시진핑을 미국, 영국, 말레이시아 등 영어권 국가나 지역에서 소개할 때는 "President Xi Jinping"라고 하고, 주석 호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한자문화권 한국과는 달리 영어권에서는 대통령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주석은 시진핑이다. 임기는 2023년 3월 14일까지였으나, 헌법 개정으로 장기 집권하였다.
2. 권한[편집]
공산권에서는 일반적으로 국가유일정당인 공산당의 당수(서기장)가 국가원수직을 겸임하는데, 국가원수직에는 별 권한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당수는 국가유일정당인 공산당을 통제하는 자리에 있으므로, 당이 국가기관의 우위에 있는 공산국가에서는 국가원수인 인물이 당수까지 겸하여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쥔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중국의 국가원수인 국가주석이 가지고 있는 건 외교권밖에 없고 바지사장에 불과하지만[1] 당수(총서기)는 국가기관을 영도하는 중국 공산당의 인사권을 쥐고 있기에 강력한 권력을 갖는다. 그리고 중국은 다른 공산국가와는 달리 당군인 인민해방군에 대한 통수권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갖고 있으므로, 중국 국가주석은 이 자리까지 겸직해야 최고권력자가 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입법부로써 행정부(국무원), 사법부(최고인민법원)보다도 우위에 있기 때문에 입법부의 권한이 엄청나게 강력하다. 그렇기에 국가주석은 시진핑의 개헌 이전까지는 5년 임기를 연임해 10년의 집권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 전국인민대표대회가 국가주석의 모든 결정과 집행을 무력화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임기 중 어느 때라도 단순 과반 투표로 국가주석을 해임할 수 있다. 법적으로 정확히 명시된 권한도 법률의 공포권, 국무원 총리 및 국무원 부장(장관)에 대한 임면권, 사면권, 국가비상사태와 동원령의 선포권 등... 내각책임제하의 대통령과 권한이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입법부의 권한이 너무 강력해서 존재하는 모든 정당이 하나의 원내교섭단체인 민주당파를 결성하고 중국 공산당의 주도적 위치를 명기함으로써 이 강력한 입법부를 공산당이 혼자서 통제한다. 그리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이자 군통수권자인 중앙군사위 주석이 자연스레 국가주석직도 맡게 되니까, 별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어야 할 국가주석직의 존재감이 커지는 것은 물론 권한마저 강력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대약진운동 이후 장쩌민이 국가주석이 되기 전에는 중앙군사위 주석, 국가주석, 총서기를 모두 다른 사람이 맡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리셴녠, 양상쿤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당시의 국가주석은 지금의 최고지도자와는 위상이 많이 달랐다.
흔히 사회주의 일당독재 국가의 체제를 당이 모든 것을 영도하는 당-국가(party-state) 체제로 설명하는데, 이 시스템하에서는 이론적으로는 당권을 장악한 사람은 굳이 다른 직함을 보유하지 않아도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를 수 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입법부인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공산당이 완전히 통제하고 있고, 당직 외에도 부장(한국의 장관)이나 성장(한국의 부지사)와 같은 공직에 대한 인사권도 당중앙 중앙조직부가 틀어쥐고 있어 당의 1인자가 곧 국가의 최고 권력자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1959년 마오쩌둥은 국가주석 직을 류사오치에게 물려줬지만 중군위 주석직은 놓지 않아서 여전히 실권은 마오쩌둥이 쥐고 있었다. 또 중국이 주로 같은 사회주의권 국가들과만 교류하던 시절에는[2] 국가 대 국가보다는 당대 당 교류가 중국의 대외관계에서 더 중시되었기 때문에 국가주석과 당 주석(또는 총서기)를 다른 사람이 맡아도 큰 문제가 없었다.[3]
다만 1979년 미중수교 이후 서방과의 교류가 시작되고,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국제적, 경제적 위상이 커지면서 총서기(혹은 중앙군사위 주석)와 국가주석이 분리된 상황은 외교 의전의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1992년 한중수교 당시 노태우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양상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이 정상회담을 가졌을 때 일각에서 "상징적 국가원수 양상쿤과 노태우가 정상회담을 갖는 것은 격에 맞지 않고, 외교적 홀대다"라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총서기 겸 중앙군사위 주석 장쩌민은 당직만 맡고 있었기 때문에 방중한 노태우를 접견할 수는 있었지만 그 만남이 정상회담의 형식을 갖출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실권자인 덩샤오핑은 당시 아무 직함이 없는 평당원으로, 직접 나서면 현역 지도자들이 바지사장임을 인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니 역시 회담이 성사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대외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대표하게 된 국가주석의 격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거기에 경제는 국무원 총리의 소관이라, 세 곳(당, 국가주석, 국무원)[4] 외교창구를 상대하는 중국과의 교섭 상대국들의 불편이 컸던지라 지휘계통을 통일할 필요가 있었다. 또 직함에 있어서도 다른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군주, 총리, 대통령으로 불리는 것에 비해 주석(영어로는 Chairman으로 번역)이라는 호칭은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는 국가의 대중들에게 생소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Chairman으로 번역되는 주석이 대통령 자리보다 격이 낮게 보이기도 했다.
때문에 1982년부터 국가주석의 영문 명칭을 President로 변경해 타국의 대통령에 상응 및 대등한 직책임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1992년 양상쿤이 국가주석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장쩌민이 국가주석을 겸임하면서 외교의전상의 격의 문제와 명칭의 생소함을 해결하게 된다. 정리하면 외교무대에서 맡는 역할 때문에 총서기가 겸임하게 되었을 뿐, 그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는 직책인 것.
3. 임기[편집]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임기는 5년으로 이에 따라 주석의 임기도 5년이다. 덩샤오핑이 실권을 장악한 후, 주석제가 부활할 때, 과거의 폐해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연임 제한 규정을 두어 헌법에 따라 연임할 경우 최대 10년까지 가능했다.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부주석의 매기 임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매기 임기와 같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79조
하지만 2018년 3월 시진핑이 개헌을 통해 이러한 연임 제한 규정을 삭제하면서 무제한 종신 집권이 가능해졌다. #
4. 목록[편집]
5. 기타[편집]
- 타이완에서는 하나의 중국 정책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중국의 국가주석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타이완에서 시진핑의 공식 직함은 중국 국가주석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 총서기이다.[5]
- 홍콩, 마카오의 민주파 진영에서는 국가주석이 전 인민의 민의에 의해 뽑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진핑을 국가주석으로 호칭하지 않고 중국 공산당 총서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독재로 자유나 민주주의를 극심하게 탄압하는 중화인민공화국과는 달리, 중화민국(대만)은 참정권,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각종 기본권은 보장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화독파나 대독파도 이러한 명칭으로 부른다. 최근 미국의 반중감정이 극심해짐에 따라, 미 최고위직 인사가 시진핑을 '주석' 대신 '총서기'로 부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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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산권에서 당수직과 국가원수직이 분리되어 있는 국가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바로 베트남. 이 경우 실권은 당수에게 있다. 장쩌민 주석 취임 전의 중국도 마찬가지였다.[2] 미국과 전쟁을 치르기도 했고, 당시에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국제사회 영향력이 남아 있던 대만의 국민당 정부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은 국가가 적지 않았다.[3] 당과 국가의 실질적 업무에 국가주석이 관여하지 않았고, 실제 역할은 국가적 중요행사에서 축사 읽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현재 총리가 실권자인 나라들의 상징적 국가원수보다도 못한 존재였던 것. 다만 류사오치는 서열 2위의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부주석을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석직함과는 별개로 당내에서 큰 권력을 쥐고 있었다.[4] 지금도 그렇지만 중국공산당은 대외연락부라는 별개의 당내 외교채널을 갖고 있다. 외교창구가 나뉜 상황에서 각자가 최대한 협조해도 서로 말이 맞지 않기 마련인데, 거기에 총리와 총서기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기까지 하면 답이 없었다. 때문에 19차 당대회 이후 중국은 외교채널을 사실상 총서기가 지휘하는 중앙외사공작위 계통으로 일원화하게 된다.[5] 2015년에 시진핑 중국 주석과 마잉주 대만 총통이 양안 첫 정상회담을 가졌을 때에는 서로를 별 다른 직함 없이 선생(先生)으로만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