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항(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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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려 현종 대의 문신. 경주 최씨 문벌귀족 출신이며 최언위의 친손자이다.
2. 상세[편집]
경주 최씨는 옛 왕조 신라의 6두품 출신 호족 가문이었다. 그러다 고려에 편입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타 가문과 인연을 맺어 최고의 문벌귀족 가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최항은 이런 가문 출신으로 성종 대엔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가문 좋고 실력도 좋은 인재를 발탁한 성종은 그를 중용했고, 성종의 후계자인 목종도 최항을 크게 신임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3] 중추원사(中樞院使)[4] 까지 임명했다.
목종이 정권을 잃고 실각 위기에 처했을 때, 목종이 점 찍은 후계자 대량원군, 훗날의 현종을 데려오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 바로 최항이었다. 최항은 채충순, 고영기, 유충정 등과 함께 숨어살던 대량원군을 데려오는데 성공했지만, 강조의 정변으로 정권이 옮겨진다. 분노한 최항은 강조에게 고금에 이러한 일이 있었냐며 면전에 대고 일갈했다. 이는 강조의 권력 기반이 불안정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대목인 동시에 최항의 강직한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고려에 중흥의 기회를 가져온 현종에 의해 1012년(현종 3년)에 이부상서와 내사문하성 서열 3위인 참지정사, 그리고 감수국사로 임명된 데 이어 1021년(현종 12년)에는 내사문하성의 차관인 수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守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까지 임명되었고, 동시에 자작이 되어 청하현을 읍호로 받고 공신호를 받았다.
그러다 더 이상 관직에 마음이 없던 최항은 치사#致仕 연령인 70세가 되기도 전에 표문을 올려 퇴직을 요청했고, 자신의 본관인 경주에 있는 황룡사 9층 목탑 수리에 전력을 다하고 자신의 집을 사찰로 바치는 등 불교에 큰 관심을 보였다.[5]
1024년(현종 15년) 음력 6월, 최항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유학자였으나 동시에 불교 신자였고, 조정의 2인자 자리까지 올랐지만 반부패, 청렴함을 유지해 집은 초라하고 재산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현종은 그의 죽음을 슬퍼해 유가족에게 곡식, 비단 등을 하사하려 했지만 최항의 아들은 아버지가 유언으로 받지 못하게 했다며 받지 않았다. 청백리 인생을 산 최항은 큰 존경을 받아 시호를 받고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후 정광(正匡),[6] 시중(侍中),[7] 수태사 겸 중서령에 계속 추증되어 후대의 우대를 받았다.
3. 기타[편집]
- 현종은 여요전쟁으로 인해 소실된 실록을 복원시키기 위해 사관을 재정비하고, 최항과 황주량, 최충 등에게 고려 태조부터 목종까지 7명의 왕에 대해 "칠대실록"으로도 불리는 칠대사적을 편찬하라고 지시했다.
4. 대중매체[편집]
KBS 대하드라마 천추태후에서 등장한다. 현종의 사부 격으로 나오며 배역은 김하균.[8] 현종과 함께 피난길에 같이 오른다. 특이하게도 현종을 지지하면서도 천추태후와는 사이가 나쁘지 않게 그려진다. 애초에 천추태후에 대한 미화와 왜곡이 많은 사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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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사 최항 열전에는 세는나이 20세에 갑과(甲科)에 급제하였다고 나오는데, 선거지에는 그 시점이 991년으로 나온다.[2] 율리우스력 7월 13일.[3] 상서이부의 차관. 이부는 인사 담당 부서이다.[4] 내사문하성 다음의 최고 정부기관인 중추원의 장관.[5]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 왕조는 고려사 열전에서 말년의 최항을 비난했다.[6] 4품 1등위 향직 품계.[7] 중서문하성 문하시중의 전임격 직위.[8] 바로 전 출연 작품인 대조영에서는 고구려의 간신배이자 매국노인 부기원 역할을 했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고려를 위해 헌신하는 청렴한 충신을 맡았다. 그의 연기 내공을 볼 수 있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