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몽골 출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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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19년,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안휘군벌의 쉬수정이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구실로 참전군을 창설한 것에 대해 국내외의 불만이 빗발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행한 청나라 멸망 이후 사실상 독립한 복드 칸국에 대한 군사작전을 말한다. 이로 인하여 외몽골의 자치가 취소되고 1921년까지 몽골에 대한 직접 통치가 있었다.
2. 배경[편집]
1911년 청나라에서 신해혁명이 발생하고 선통제가 퇴위할 위기에 놓이자 외몽골의 왕공들은 더 이상 청나라의 지배 아래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1911년 12월 1일, 독립을 선포하고 후레(현 울란바토르)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에 몽골의 여러 왕공들이 귀부를 청원하며 호응했지만 복드 칸의 몽골 민족 통합 정책에 대해서는 반응이 엇갈렸다. 아예 복드 칸국 합류 거부를 천명한 쪽부터 해서 중화민국 정부에 기울어지는 쪽도 있었고 눈치를 살피는 이들도 많았다. 복드 칸은 처음에는 몽골통합에 대해서 외교적으로 호소했으나 나중에는 무력을 동원하였다.
한편 1912년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취임하고 청조의 판도를 회복하기 위해 몽골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몽골 독립 취소를 기도했으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내몽골의 왕공들에게 청조 시대의 특혜를 약속하며 이들을 회유하려 했다. 이에 상당수의 내몽골 왕공들은 태도를 바꾸어 위안스카이에게 귀부하기도 했다. 복드 칸국은 러시아 제국과 몽골 독립 문제에 대해 협의하여 1912년 11월 3일 몽러협정을 체결함으로 독립국 대신에 중화민국 산하의 완전한 자치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이어 1913년 5월 20일, 러시아제국과 북양정부는 중러협약을 체결, 몽골의 자치에 동의했고 11월 5일, 중러 베이징 선언을 발표, 중화민국으로부터 몽골의 자치를 승인받았다. 이에 대해 국민당은 격렬히 반발했지만 계축전쟁과 중화민국 국회 해산으로 무력화되었다.
복드 칸국은 오로군을 파견하여 내몽골의 무력 병합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중화민국의 반격으로 격퇴당했다. 결국 1913년 말부터 러시아, 중국과의 회담 끝에 1915년 6월 캬흐타 협정이 체결되면서 외몽골의 자치가 확인되었고 이 상황이 1919년까지 이어졌다.
3. 전개[편집]
3.1. 64개 조항 제시[편집]
하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었고 몽골은 뒤를 봐줄 상대를 잃게 되었다. 11월 7일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권력을 잡았는데 볼셰비키는 캬흐타 조약을 무효라고 발표했다. 중화민국은 위안스카이 정권 시절부터 몽골의 재통합을 준비하고 있었고 1917년 호법전쟁이 흐지부지하게 끝나 타격을 입은 돤치루이의 안휘군벌 정권은 세력 강화를 위해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세계대전에 참전하겠다는 구실로 참전군을 만들어 국내외의 비난을 받고 있었다. 돤치루이는 참전군을 변방군으로 개칭하여 중국 서북부에 주둔시키고 쉬수정을 사령관 겸 서북주변사로 삼았다.
그러던 중 후레에 주재하던 중국의 도호사 천이는 캬흐타 협정이 폐기되자 이를 몽골 병합을 위한 중요한 기회로 여기고 몽골의 미래발전을 위한 64개 조항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이는 몽골 자치정부를 철폐하여 중화민국에 편입시키고 중화민국 정부가 관리를 몽골에 파견하여 통치를 하며 중화민국 군대를 몽골에 주둔시키는 대신에 복드 칸과 여러 왕공에게 특전을 베풀겠다는 것이었다. 이어 천이는 7월에 변방군 소속 병력 600명을 후레로 불러들여 복드 칸국을 무력으로 압박했다. 몽골 의회는 최고 행정장관을 몽골인으로 임명하고 몽골에 주둔할 중국군의 병력과 수비지역은 협상을 통해 결정하며 지방 행정장관의 관할과 지휘을 받을 것, 특수한 상황으로 증파된 군대는 사후 즉시 철수할 것, 토지소유권 보장 등을 요구하고 '활불' 복드 칸의 칭호를 유지하고 체제유지와 예의를 다할 것을 요구했다.
천이는 몽골의 이러한 요구사항을 베이징에 전달하여 관대하게 심의할 것을 주문했고 자치 철폐 문제가 완만히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야심가 쉬수정이 개입하면서 일이 틀어지게 되었다.
3.2. 쉬수정의 출병[편집]
1919년 10월 17일, 쉬수정은 서북변방계획안을 제출하여 몽골의 철도, 목지를 개간하고 광산, 상업, 금융, 군비, 교육, 예의, 풍속에 달하는 모든 사항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몽골의 사정을 도외시한 무리한 요구였고 청나라도 위안스카이도 요구한 바가 없는 과격한 것이었다. 10월 23일 베이징을 출발한 쉬수정은 장가구를 거쳐 10월 29일 후레에 도착하여 자신의 몽골통치안을 통보하였다. 11월 6일 복드 칸을 배알한 쉬수정은 천이의 64개의 조항 중 63개의 조항이 일부 왕공에게만 유리할 뿐 일반 몽골인들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11월 11일 조약을 다시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이는 "내용을 가능한 수정하고 부족한 부분은 보충할 수 있으며, 관제에 있어서도 상충되는 부분은 제거할 수 있지만, 큰 문제가 없다면 원래의 조항은 그대로 두어 몽골인의 민심을 안정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했으나 쉬수정은 막무가내였다.
여기에 총리 바담도르지와 복드 칸의 측근인 조트바, 펑삭, 쿤보 등의 라마승들은 쉬수정을 이용하여 천이를 제거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는데 쉬수정은 거꾸로 이들을 조종하여 복드 칸에게 자치철폐를 설득하려 했다. 바담도르지는 복드 칸에게 자치를 철폐해야 한다는 쉬수정의 의견을 전달했지만 복드 칸이 쉽사리 동의하지 않자 쉬수정은 11월 7일 병력을 후레 시내로 진주시켰다. 11월 13일 쉬수정은 복드 칸국 정부에게 중화민국의 지배를 원한다는 탄원서를 1919년 11월 14일 오전 8시까지 제출하지 않으면 복드 칸과 바담도르지를 모두 체포하여 베이징으로 압송하겠다고 위협했다.
3.3. 자치의 철폐[편집]
11월 17일, 복드 칸은 쉬수정의 무력에 굴복하여 자치를 철폐한다는 청원서를 2부 작성, 천이와 쉬수정에게 각각 하나씩 보내 베이징에 제출하게 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때 복드 칸은 "이번에 한번 중국의 지배 하에 들어가지만, 2~3년 내에 주권을 회복할 때가 반드시 오리니 맘대로 하라."라며 언젠가 몽골의 독립을 되찾겠다고 이를 갈았다.
11월 22일, 베이징 정부는 대총통 쉬스창의 명의로 몽골의 자치 철폐를 선포하고 몽골 군대 해산과 무장 해제, 5부 폐지, 관인 회수 등을 명하고 복드 칸과 왕공들에게 쉬스창의 사진에게 머리를 조아려 자치권을 박탈하게 하는 의식을 거행하게 했다. 복드 칸은 눈이 거의 보이지 않고 몸이 불편하였는데 쉬스창의 사진에게 세번이나 절하는 굴욕을 맛보아야 했고 이 때문에 몽골인들은 민족감정에 큰 상처를 입었다. 12월 1일 쉬수정은 서북주변사 공관을 후레에 설치, 후레도호사 공관의 사무를 모두 이관시켰고 총기 9천정, 대포 5문, 기관총 10정, 대량의 탄약을 몽골 군대로부터 압수하고 1만 명의 병력을 몽골에 진주시켰다.
3.4. 중화민국의 몽골 통치[편집]
쉬수정은 몽골에 1912년 이전에 몽골이 중국에 지고 있던 채무를 이자까지 쳐서 모두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선포했다. 이에 따라 몽골인들은 '호브드 지역에서만 낙타 5만 5천마리, 말 7만 5천마리, 소 40만 마리, 양 5만 마리를 중화민국 정부에 바쳐야 했는데 이는 1913년 기준으로 2천만 루블에 달하는 막대한 양이었다. 이외에 아이막과 호쇼 지역에서도 비슷한 양을 상황할 것을 요구했고 이 때문에 몽골 유목민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어 반중 감정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직계와 환계의 대립이 고조되면서 쉬수정이 1920년 6월 17일 몽골을 떠나 베이징으로 돌아가면서 쉬수정의 통치는 끝나게 되었다. 쉬수정은 1920년 7월에 발발한 안직전쟁에서 직예군벌에게 패배하여 몰락했고 안휘군벌의 수장 돤치루이도 하야했다. 몽골을 지배하던 변방군도 해체되면서 몽골에 대한 중화민국의 통제도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반중감정은 고조되고 소련의 부추김 속에서 중화민국에 대한 무장 투쟁의 움직임이 일었다.
1920년 11월 담딘 수흐바타르와 허를러깅 처이발상 등이 몽골인민유격대를 조직, 소비에트 러시아와 접촉하여 반중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 와중에 1920년 9월 백군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이 복드 칸에게 "중국군을 몰아내고, 복드 칸을 다시 칸으로 추대하여 자치정부를 세우겠다."라고 제안하였다. 복드 칸은 이를 승인하였고 운게른 슈테른베르크는 1920년 10월 2일 몽골로 들어와 1921년 2월 세 차례의 전투 끝에 중국군을 격퇴하고 후레를 점령하여 복드 칸을 복위시키고 몽골의 독립을 선포했다.
한편 몽골인민유격대는 운게른이 후레를 점령하기 이전부터 운게른 역시 중국군과 마찬가지로 침략자로 간주, <몽골진리보>를 발행하여 몽골인민당 대표 명의로 운게른 타도를 선포했다.
1921년 2월 수흐바타르와 처이발상은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유목민들을 규합하여 유격대를 확장시켰고 1921년 3월 1일, 캬흐타에서 몽골인민당 제1차 대표대회를 개최하여 몽골의 최초의 현대적 정당을 탄생시켰다. 이들은 인민혁명사령부를 건립하여 수흐바타르를 인민군 총사령관에, 처이발상을 정치위원에 추대했다. 3월 15일 캬흐타에 주둔한 8천명의 중국군대에 대한 최후통첩이 보내졌다. 3월 18일 몽골인민유격대가 캬흐타를 점령하고 중국군을 섬멸했다. 3월 19일 임시정부 수립이 선포되었고 몽골인민유격대는 4월 5일, 공식적으로 적군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백군을 소탕하던 적군이 이에 호응하면서 4월 28일 몽골 변경에 주둔하던 적군이 몽골인민유격대와 함께 외몽골로 진주, 6월 30일 백군을 격파하여 운게른을 축출하고 7월 6일 후레에 이르렀다. 운게른은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지만 부하들의 배신으로 체포되었고 적군과 몽골인민유격대는 7월 8일 후레에 입성했다.
인민임시정부 수반 보토, 몽골인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단잔, 인민군 총사령관 수흐바타르 등은 복드 칸 겨울궁전에 찾아가 복드 칸을 알현하고 "시대 변화에 맞추어 인민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마땅하고 복드의 칸으로서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하고, 각 부처의 업무를 임시정부로 이양할 것"을 요구했으며 복드 칸은 이를 수락했다. 인민임시정부 수뇌부는 7월 9일 회의를 열고 모든 업무를 임시정부에 이양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7월 10일 정권 이양식을 거행하여 인민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했다. 7월 11일, 인민임시정부는 복드 칸의 복위를 선포하여 제한군주로 옹립하고 이전의 연호를 복구함으로 인민입헌제 정부의 수립을 선포했다. 이로서 중화민국과 운게른의 외몽골 지배는 끝났다.
4. 결과[편집]
몽골의 독립은 중화민국 정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나 1차 직봉전쟁, 2차 직봉전쟁, 손봉전쟁, 직봉풍전쟁이 이어지는 대혼란의 상황의 연속인지라 개입할 여력도 없었다. 그 당시 중화민국은 혼란스러운 내정으로 인해 군벌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화민국은 몽골의 독립을 불인정한다는 입장을 취했고 장제스가 북벌을 일으킨 국민정부도 이 방침을 고수했으며 이후 중소우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외몽골 독립이 인정되는가 했는데 국공내전으로 국민정부가 패주하면서 중소우호조약도 폐기되어서 외몽골 독립인정도 번복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실질적으로 독립을 인정하는 듯 하다.
이후 몽골은 사회주의와 입헌군주제를 혼합한 독특한 정치 체제를 이어나갔다. 복드 칸의 명망이 높아서 공산주의자들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복드 칸 사후인 1924년에야 몽골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세계에서 두번째로 공산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그리고 막판에 나타나서 몽골을 차지했던 운게른은 1921년 9월 소비에트 러시아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5. 참고문헌[편집]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국 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1911년 몽골 독립과 하이산, 이평래, 대동문화연구 75권 75호,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 1911년 외몽골 독립에 대한 중국 연구자들의 시각, 이평래, 동북아역사논총 3호, 동북아역사재단.
- 20세기 초 몽골 민족주의의 전개 : 독립 선언에서 임시정부 수립까지, 이준희, 중국학논총 32권 32호, 한국중국문화학회.
- 몽골의 독립과 외교정책에 관한 연구 : 준완충국에서 완충국으로 이행, 튭신 고려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 直皖戰爭과 奉天軍閥의 關內進出, 송한용, 중국사연구 28권 28호, 중국사학회.
6. 둘러보기[편집]
7. 관련 문서[편집]
7.1. 인물[편집]
7.2.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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