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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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태조 신성대왕을 추대하고 태조를 도와 고려를 건국한 네 공신 중 한 명이다.
면천 복씨의 시조로 초명은 사귀(沙貴) 또는 사괴(砂瑰)이다.
2. 약력[편집]
3. 생애[편집]
복지겸의 가문은 통일신라 후기에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지역을 중심으로 황해 바다에서 세력을 가졌던 해상 호족 세력으로 추측된다. 복지겸의 선조 복학사가 당나라에서 바다를 통해 신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해적들을 소탕하고 백성들을 모아 보호했다고 전하는데 9세기 서해안에는 장보고가 직접 토벌했던 중국계 해적이나 신라구, 능창 등 해적 집단들이 들끓며 상선들을 위협했고 이들을 소탕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해상 세력가로 추정해볼 수 있다.
궁예의 태봉 정권에 합류했다가 배현경, 홍유, 신숭겸과 함께 왕건을 추대한 4명의 마군장군 중 1명으로 고려가 건국된 후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1] 다른 1등공신들의 이력을 살펴보면 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구하고 장렬히 전사한 충신 신숭겸, 군졸이었다가 용맹이 남달라 출세한 배현경, 태조 원년부터 유금필과 함께 청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고창 전투에 참전하는 등 야전 지휘관으로서 뚜렷한 군공이 전해지는 홍유에 비해 복지겸은 군공은 물론 종군했다는 일체의 기록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거사 전 복지겸의 직위가 마군장군이었으니 참전 경력이 아예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지만 고려사나 다른 사료에 복지겸이 전쟁터에 나가 군공을 세웠다는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다른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첩보를 통해 고려 개국 후 내부 반란분자들의 불온한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여 왕건 정권의 기반을 다졌다. 지금으로 치면 안보지원사령관 및 국가정보원장 겸 대통령경호실장쯤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 되겠다. 야전 사령관으로 활동한 타 4기장들과는 달리 역성혁명 직후 혼란한 시기에 발생한 모든 반란 음모를 모두 제압하며 왕건의 안정적인 권력 승계에 크게 일조했다.
마군장 환선길은 동생 환향식(桓香寔)과 함께 왕건을 추대한 공으로 왕건을 보필하며 숙위(宿衛)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환선길의 아내가 “당신의 재주와 능력이 남보다 훨씬 나으므로 사졸들이 복종하고 있으며 공이 있는데도 정권은 다른 사람에게 있으니 부끄럽지 않습니까."하고 부추기자 이에 넘어가 일부 병사들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실을 알아낸 복지겸은 그대로 왕건에게 전했고 왕건이 즉위한지 4일이 지난 918년 6월 환선길은 병사 50명을 거느린채 내정으로 뛰어들어와 왕건을 시해하려다가 실패해 참수되었고 동생 환향식도 도주하던 중 잡혀 죽었다. 이 반란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환선길의 처가 말하는 뉘앙스를 보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이는데 즉위 후 4일 지나 아직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지 못한 상황에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다는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첫째날 왕을 바꾸고 둘째날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셋째날 모의해서 넷째날 쳐들어갔다? 때문에 환선길이 왕건의 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고 이흔암처럼[2] 궁예의 핵심적인 지지 세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있으며 모든 것이 복지겸의 계략이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918년 9월에는 궁예가 904년 청주인 1,000여 호를 철원으로 이주시킬 무렵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 순군리(徇軍吏) 임춘길은 같은 청주 사람 배총규, 계천(전라남도 장흥군) 사람 강길ㆍ아차귀, 매곡(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사람 경종(景琮)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다 복지겸에게 발각되었고 도망친 배총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사로잡혔다. 왕건의 측근 중 청주 출신인 현율은 경종의 매형이 후백제와의 접경 지대인 매곡성주 공직임을 들어 이들을 살려줄 것을 청했으나 염상의 결사 반대로 모두 심문 끝에 참수당했다. 918년 10월 청주에서 진선과 선장 형제의 모반 사건이 일어났는데 왕건의 대처도 신속해서 진선과 선장은 홍유와 유금필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다급해진 공직이 두 아들과 딸을 후백제에 볼모로 보내고 그대로 후백제에 투항해버리는 바람에 매곡을 비롯하여 중북부의 요지들이 후백제에 무더기로 넘어가면서 아직 기반을 다지지 못한 왕건은 한동안 후백제에 밀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복지겸의 활동은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고려 건국 후 얼마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거나 다른 장군들에 밀려 이렇다 할 공적을 세우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호는 무공(武恭)이며 성종 13년 다른 개국공신 3명과 함께 태사 벼슬을 추증받고 태조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4. 여담[편집]
복지겸이 건강이 나빠져서 면천[3] 지역에 와 휴양을 하는데도 건강이 나아지지 않자 그의 딸인 복영랑이 아미산에 올라 100일 기도를 드렸는데 마지막날 꿈에 신선이 나타나 "아미산에 활짝 핀 두견화(진달래꽃)와 찹쌀로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4] 의 물로 빚어 100일이 지난 다음 아버지께 마시게 하고, 뜰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어 정성을 드려야 나을 수 있다."고 얘기해 주었고 그 말대로 술을 빚어 복지겸이 건강을 되찾았다고 하는 면천두견주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
복영랑이 복지겸의 쾌유를 발원하며 940년 복지겸의 영지였던 당진에 영랑사를 건립했다는 전승도 있다.
또한 김해 김씨 족보에 따르면 고려 개국공신이었던 김해호족 김상좌의 배필이 면천 복씨이며 복지겸과 김해 김씨가 사돈지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5. 대중매체[편집]
자세한 내용은 복지겸(태조 왕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둘러보기[편집]
[1] 왕건은 역성혁명 성공 이후 논공행상에서 1등공신 4명, 2등공신 7명, 3등공신은 각지의 군웅들을 포함해서 2천 명을 책봉했다.[2] 웅주를 지키던 이흔암은 왕건 즉위 직후 도성에 올라와 있다가 복지겸과 함께 반역자 색출에 열을 올리던 수의형대령 염상에게 딱 걸려서 일가가 몰살당했다.[3] 현 충남 당진시 면천면[4] 지금 면천초등학교 뒤에 있는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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