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 총리에서 넘어왔습니다.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일본은 천황이 군주로 있는 입헌군주국이기 때문에 대신(大臣)이라고 부른다. 일본국 헌법에 따르면 '행정권이 속하는 내각(内閣)의 수장'으로 정의되어 있다. 공식 명칭은 내각총리대신이지만 내각의 상(相, 장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장이라는 뜻으로 수상(首相; 슈쇼)이라고도 칭하며[2] , 일반적으로 총리(総理; 소-리[3] )라고도 부른다. 또한 총리에 대해서는 각하(閣下; 각카)라는 경칭이 사용되기도 한다. 다만 황실 구성원에 대한 경칭(폐하, 전하)과는 달리 법적인 근거는 없다.
일본의 총리는 국회의원들 중에서 국회의 의결에 의해 지명된다. 자격은 '국회의원' 뿐이지만[4] , 관례상 중의원과 참의원 의원의 투표로 중의원 의원 중에서 다수당 총재가 지명된다. 일본의 사실상 군사조직인 자위대의 최고지휘감독권(통수권) 또한 총리의 권한이며, 타국의 계엄령에 준하는 치안출동 및 경호출동명령 역시 도도부현의 장의 요청에 따라 총리가 선포한다.
일본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보수 우위의 정치 구도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 말은 즉 일본 역대 총리 중 대부분이 보수 인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역대 총리 가운데 혁신/좌파 계열 인사는 가타야마 데쓰, 무라야마 도미이치, 간 나오토 3명에 불과하다. 리버럴로 분류되는 호소카와 모리히로, 하타 쓰토무, 하토야마 유키오, 노다 요시히코까지 합쳐도 비보수 계열 인사는 단 7명이다.[5][6] 이들의 총집권 기간을 합쳐도 겨우 5년 남짓밖에 안 된다. 선진국 가운데서 이렇게 어느 한 당이 절대우위를 오래 유지하는 국가는 매우 드물다. 보통 내각제에서는 대통령 중심제에 비해 한 당이 오래 집권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일본/자민당은 꽤 극단적인 케이스.
2. 역사[편집]
초/중세 일본에서 율령제하 군주인 천황과 실질적의 통치자인 쇼군체제에서 근대의 메이지 유신을 거친 직후의 일본은 나라 시대 율령 반포 당시에 제정된, 태정대신(太政大臣), 좌대신(左大臣), 우대신(右大臣) 등으로 이루어진 '태정관 제도'를 살려 정부조직을 구성했다.[7] 그렇지만 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제도를 근대 국가에 적용하려니 태정관은 엄청 바쁘고 좌우대신은 별로 하는 일이 없는 등의 문제가 많았다. 그리고 태정대신은 권한이 적었고 내무성의 '내무경'이 실질적인 정치적 실권을 가졌는데 오쿠보 도시미치가 초대 내무경이었다. 이후 1885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로 근대적인 내각 제도가 도입되면서 내각 제도와 내각총리대신이 나타나고 1889년에 '대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하면서 확립하게 된다.
임명은 천황(天皇)이 하게 되며, 선출은 법률로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메이지 초기에서 쇼와 초기까지는 원로(元老)[8] 의 추천에 따라서 임명되었으며,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는 중의원에서 제1정당의 대표가 추천을 받아 임명되기도 했다. 쇼와 초기에서 일제 패망까지는 '중신회의'(重臣会議)[9] 에서 추천되었다.
이 무렵 총리의 실권은 약간 미묘했는데, 헌법에는 내각이나 내각총리대신에 대한 직접적인 규정이 없으며, 내각총리대신은 "다른 국무대신들과 동등한 지위의 수석대신으로서 천황을 보필하는 존재"이며, 내각은 각 대신의 협의와 의사통일을 위한 조직체 정도로 정의되었다.
하지만 의사통일을 한다고 한들, 총리는 각 대신에 대해서 임명권이 없으며 대신을 파면할 수 없고, 설득이나 사임을 촉구하는 정도의 행동밖에 할 수 없었다. 실패하면 내각총사퇴를 할 수밖에 없으며 게다가 육군대신, 해군대신 등은 '현역 무관'을 임명하도록 육군성 관제와 해군성 관제(官制: 요즘의 ~~성 설치법에 해당하는 법령) 규정되어 있었으므로 내각의 구성이 군의 뜻에 따라서 제한을 받았다. 예를 들어 육군에서 내각이 마음에 안 들면 육군대신이 사임하고 아무도 내각에 안 들어가면 되고, 그럼 내각이 붕괴해서 다시 군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10] 그래도 고집부리면 "너 암살"이었으며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절 등에는 총리가 정부수반 혹은 국가지도자처럼 기능했지만, 사실 아닌 경우가 더 많았다. 이 시기에는 총리보다 훨씬 더 실권이 컸던 직책도 많았다.
2차대전 패전 이후 일본국 헌법(日本国憲法)을 제정함에 따라 일반적인 의원내각제의 총리와 역할이 유사해졌다.
3. 선출[편집]
전후 일본에서 총리대신의 자격은 국회의원 중에서 국회의 과반수 의결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헌법에 정해져 있다. 이 밖에 관습적으로는 집권정당의 대표이며, 당원에게 총리의 자격이 부여되었다고 인정된 자여야 한다. 국회 양원의 투표로 총리후보를 지명[11] 한 뒤 천황이 총리에게 임명장[12] 을 수여한다. 물론 현대 입헌군주제 국가가 다 그렇듯 천황의 임명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내각총리대신은 중의원(하원)에서 최대세력을 차지하는 정당의 당수, 혹은 연립 여당 가운데 하나의 당수가 지명된다. 지명 시 요건을 국회의원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참의원(상원) 의원이 총리에 취임할 수도 있으며 중의원의 수반 지명 선거에서 참의원 의원이 득표를 받은 사례도 다수 존재하지만, 참의원 의원이 총리가 된 사례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총리와 국무대신(각료)은 '문민(文民: Civilian)'이어야 한다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문민이란, 1973년 정부 견해에 따르면, 옛 제국군의 직업군인 경력을 지닌 자로서 군국주의 사상에 깊이 물들었다고 생각되는 자 및 자위관을 제외한 자를 가리킨다.
4. 권한[편집]
-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은 일본 행정부의 수장으로 일반적으로 타국의 대통령, 주석, 의원내각제 총리 등과 동격으로 간주된다.
-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은 국가 의전서열 10위이다. 그 뒤로 중참 양원 의장과 최고재판소 장관 등이 뒤따른다. 10위밖에 안 되는 이유는 그 앞을 천황과 황족들이 채우기 때문. 비단 일본뿐만 아니라 모든 군주국은 군주와 왕족들이 총리보다 의전서열이 위다.
4.1. 입법권 (국회)[편집]
- 내각총리대신은 일반적으로 행정부의 수장인 동시에 입법부 정당 중 가장 큰 세력의 당대표이기 때문에 일본 국회의 수장이자 마찬가지로 다수당 중진 출신인 참의원의장, 중의원의장들을 비롯해 국회 다수당인 집권여당 및 연립여당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만 그 때문에 그 외 야당들로부터는 견제가 상당한 편. 특히 주기적으로 개최되는 대정부 질의 시간에 야당 의원의 공세에 총리가 고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4.2. 행정권 (내각)[편집]
- 일본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내각에 불일치가 발생하면, 소속 국무대신을 파면·해임할 수 있다. 어떤 이유로 대신이 갑자기 사직하면, 그 후임을 임의로 지명하여 임명할 수 있다.[14]
- 중의원에 대해서 해산의 전권을 총리가 가지고 있다. 일본국 헌법 제 7조에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따라 천황이 실시한다."라고 되어 있지만 천황은 역시나 형식적인 것이고, 내각부의 "각의 결정 없이 해산할 수 없다"고 제한이 되어 있기는 하나 이론적으로는 각료회의에서 해산 서명을 거부하는 국무대신이 있어도 총리가 파면하고 자신이 겸임한 채 서명할 수 있으므로[15] 총리에게 전권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 일본 경찰(日本国警察)은 중앙의 경찰청과 도쿄의 경시청 및 도쿄도를 제외한 각 도부현 경찰본부로 분할되어 운영되는 자치경찰제이다. 때문에 총리는 일본 경찰에 대한 실질적인 지휘권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지만. 경찰을 통제하는 국가공안위원장 임명권(공안위원장은 국무대신의 일원이다.)을 이용해서 실질적으로는 경찰청을 통한 경찰력을 통제하고 있다. 일본의 공권력 순서는 총리 → 공안위 → 경찰청 → 경시청/도부현 경찰본부이다.
- 일본 경찰청- 특별소속
- 도쿄 경시청 및 각 도부현 경찰본부 - 지방소속
4.3. 통수권 (군권)[편집]
- 지위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전 일본군의 통수권은 천황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패전 후 일본은 맥아더 연합군최고사령관이 이끄는 연합군사령부 군정의 통제를 엄격하게 받아 군대의 보유 자체를 금지당하고 자위권 차원의 군대가 아닌 자위대의 보유만이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천황의 자위대에 대한 통수권도 부정되었다.
위의 육상자위대, 해상자위대, 항공자위대의 막료장들 깃발과 비교하면 일본총리의 벚꽃 개수는 하나 더 많다.[16]
4.4. 정보부[편집]
일본 총리가 이끄는 일본국가정보회의는 구성이 이러하다. 아래 조직들은 정보력이 매우 뛰어난 편이며. 자위대와의 정보공유 관계가 매우 조밀하게 운영되고 있다.
5. 기타 사항[편집]
5.1. 수상 관저[편집]
5.2. 급여[편집]
아베 신조 전 총리는 2015년에 연 4065만 엔 정도를 수령했다. 총리 + 국회의원으로써 2902만 8000엔을 수령하며, 여기에 1년에 두 번 보너스 581만 엔이 주어졌다. 출처[17]
5.3. 전용기와 전용차[편집]
총리의 전용기는 존재하지 않지만 일본정부전용기를 통해 천황과 전용기를 공유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총 2기가 운용되는데, 정규기 1기를 예비기인 2기와 반드시 함께 이동한다. 천황과 총리의 해외 방문 일정이 동시에 겹칠 경우에는 천황이 우선적으로 사용하고, 총리는 전일본공수 등 민항사에서 임차한 특별기로 이동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참고로 황태자/황사[18] 역시도 외국 공무에 한해서 전용기를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만일 황태자와 총리가 서로 일정이 겹칠 경우에는 총리 우선이기에 총리의 공무 일정을 확인하고 최대한 이를 피해서 공무를 하는 편이라고 한다. 이 전용기들은 다른 국가들이 공군에서 관리하듯이 항공자위대가 관리하나 수리 및 미사용 시 보관은 JAL이 담당하고 있다. 명목상 천황이 총리보다 우선권을 갖지만 천황의 해외 순방은 극히 적어서 정부수반인 총리가 전용기를 더 많이 사용한다.
일본 총리의 전용 차량은 토요타가 생산하는 센추리와 렉서스 LS600hL을 같이 이용하고 있다. 센추리는 1967년부터 이용된 전통적인 총리의 관용차종이였으며 렉서스는 2008년 6월 홋카이도 도야코 정상회담을 앞두고 친 환경적인 차량으로 새로 도입된 차종이다. 총리 전용차는 당연하게 방탄기능이 들어간 특수제작 차량으로 일본 정부의 각료 중에서는 유일하게 총리 전용차만 특수제작된 차량이 이용된다.
유튜브 일본어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이 영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경호원들이 자전거 탑승자를 경계한다.
도로를 전면 통제하는 대신에 경호원들이 직접 몸을 내밀고 합류 신호를 보낸다. 일본 수도권고속도로이다. 아베 신조 총리 시절에 찍힌 영상인데, 사실 이때 아베가 간테이에 살지 않고 집에서 출퇴근했기 때문에 이런 것.
5.4. 생존 중인 전직 내각총리대신[편집]
현재 생존 중인 전직 총리들은 스가 요시히데[19] 를 제외하면 모두 헤이세이 시대 총리들로, 제90, 96-98대 총리인 아베 신조가 2020년 9월에 퇴임하면서 헤이세이 시대의 모든 총리들이 퇴임하였다.[20]
가장 장수한 총리는 1990년 1월 20일에 향년 102세로 사망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히가시쿠니 총리는 장수 기록과는 반대로 총리 재임 기간은 일본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짧다.
5.5. 자연사 이외 사유로 사망[편집]
5.6. 불명예 퇴진 (내각불신임결의)[편집]
6. 역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목록[편집]
6.1. 메이지 시대[편집]
6.2. 다이쇼 시대[편집]
6.3. 쇼와 시대[편집]
6.3.1. 제2차 세계대전 전[편집]
6.3.2. 제2차 세계대전 후[편집]
6.4. 헤이세이 시대[편집]
6.5. 레이와 시대[편집]
7. 여담[편집]
- 일본 총리는 관저와 사무실을 오가며 하루 2번 정도의 기자회견을 하게 된다. 이를 부라사가리(ぶら下がり)[56] 회견이라 한다. 총리의 몸상태가 안 좋거나 아직 사안에 대한 공식 답변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관례상 기자들의 질의에 응해야 된다. 또한 각 조간신문에 매일 총리의 공식 일정이 시간 단위로 정리되어 공개되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도 총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상세히 알 수 있다.[57]
- 다른 의원내각제 국가가 그렇듯 현직 총리가 선거구에서 지거나 비례대표에 탈락하면 자동으로 낙마한다. 다만 상식적으로 낙선을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한테 당수직을 맡길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어렵다.[58]
- 현재까지 가장 오래 재임한 총리는 아베 신조(2006-2007, 2012-2020)이다. 전후를 기준으로 다음은 사토 에이사쿠(1964-1972, 2798일), 요시다 시게루(1946-1947, 1948-1954, 2616일), 고이즈미 준이치로(2001-2006, 1980일), 나카소네 야스히로(1982-1987, 1806일) 순이다.
- 현재까지 재임한 총리의 인원수는 64명이며 평균 재임기간은 2.15년이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5 02:51:12에 나무위키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고시치키리몬(五七桐紋, 오칠동문). 오동나무를 형상화한 것으로, 본래는 조정의 상징이었으나 유력한 다이묘 등도 차차 쓰게 되었다. 전국시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이 가문 인장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오늘날 황실은 국화 문장만을 쓰고 있다. [2] 이는 각료(장관)의 경우도 똑같아서 법무성의 수장인 법무대신은 法相(호쇼, 법상), 외무성의 수장인 외무대신은 外相(가이쇼, 외상), 방위성의 수장 방위대신은 防衛相(보에이쇼, 방위상) 등으로 줄여 부른다.[3] 발음이 Sorry와 꽤 비슷한 탓에 드립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4] 즉 규정상으로는 현임 당수가 아니어도 현직 중·참의원의원이면 총리 지명이 가능하다는 것.[5] 그 외에 미키 다케오 정도도 관점에 따라 예외로 볼 수 있다. 전쟁 전에는 사이온지 긴모치나 와카쓰키 레이지로, 하라 다카시, 하마구치 오사치, 이누카이 쓰요시 정도가 조금 '온건파'나 '문민'이라 그나마 성격이 조금 다르다. 그런데 하라와 이누카이는 제 명에 못 살고 극우에게 암살되었고 하마구치도 암살 미수를 당해 10개월 동안 투병하다 후유증으로 사망했으며 이누카이는 민정당이 아닌 보수성이 강한 정우회 출신이다. 노다 요시히코도 민주당 소속인데, 경제적으로는 좌파에 가깝지만 역사관이나 영토 문제에서는 자민당과 같이 보수 쪽에서 같이 걷고 있으므로 기준이 애매하지만 총리 개인의 성향과는 달리 파벌안배를 하며 리버럴 인사들에게 각료 자리가 꽤 많이 갔기 때문에 총리 개인의 성향과 상관없이 내각의 성향 자체는 리버럴로 분류할 수 있다.[6] 이 중 호소카와 모리히로, 하타 쓰토무, 하토야마 유키오 3명은 자민당에서 정치를 시작하다가 모두 1993년 중원선을 앞두고 자민당을 탈당했다.[7] 사실 윗 문단에서 일본 총리대신의 문장의 각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문장이었다는 언급에서 히데요시가 지낸 관백이라는 자리는 엄밀히 말하면 내각의 수장이 아니라 천황을 대리하는 격이었다. 따라서 관백은 천황의 대리이므로 중신들의 회의기구인 '태정관 회의'에 참여할 수 없었다. 물론 관백을 역임한 자가 태정대신이 되는 경우도 흔했다. 관백이라는 자리 자체가 율령제체에 속하지 않은 일종의 별정직인 영외관이었기 때문이다.[8] 메이지 유신 시기의 유력자들로서, 천황의 칙령으로 '원로' 지위를 얻은 사람들.[9] '원로'들이 나이 먹고 죽었지만 보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사이온지 긴모치가 노쇠하면서 그 기능을 대신하는 형태로 나타난 회의. 총리 경험자와 추밀원 의장 등으로 구성.[10] 심지어 패망 직전이던 1945년 4월 성립된 패망 전 마지막 내각인 스즈키 간타로 내각에서도 해군 예비역이라는 이유로 육군에서 비토하려고 했다. 결국 아나미 육군대장을 대신으로 참여시키면서 항복을 하지 않는다는 요구조건을 집어넣어 내각이 겨우 성립되었다. 그 정도로 군의 횡포는 엄청났다.[11] 중의원은 중의원 의사당에서, 참의원은 참의원 의사당에서 투표를 따로 치른다. 다만, 중의원이 선출한 총리후보와 참의원이 선출한 총리후보가 다를 경우, 중의원이 선출한 총리후보를 양원이 선출한 총리후보로 간주한다.[12] 천황의 친필 서명 및 인장(어명어새)이 들어가고, 물러나는 총리가 부서한다. 예시로, 하토야마 유키오의 총리 임명장을 보면 당시 아키히토 천황의 친필서명과 인장, 그리고 물러나는 총리 아소 다로의 서명이 들어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3] 전후 신헌법이 시행되고 일본제국이 일본국으로 개편될 때의 첫 번째 내각이었던 가타야마 내각 첫 조각 당시 이 일이 실제로 발생했었다. 가타야마 데쓰 총리가 위원장으로 있던 일본사회당은 요시다 내각의 자유당이 총선에서 패하여 제2정당으로 추락하면서 어부지리로 제1정당이 된 케이스였다. 그러나 겨우 12석 차의 신승이라 단독 여당으로 할 의석은 못 됐기 때문에 제3정당인 일본민주당의 아시다 히토시와 자유당 요시다 시게루가 연립하면 둘이서 계속 집권할 수가 있었고, 가타야마 역시 그렇게 될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둘은 연립하지 않았고, 가타야마는 얼떨결에 제1정당 대표로서 총리가 되었다. 아시다와 요시다의 관계가 껄끄러워서 생긴 일이었다. 자신이 총리가 된다는 소식을 들은 가타야마의 첫마디는 "이거 큰일났네." 안 그래도 전쟁으로 몹시 어수선한 판국에 인재풀도 말라버려 신속한 조각이 불가능할 지경이었기에 결국 가타야마가 임시로 전체 각료직을 겸직하여 혼란을 수습했다. 물론 실제로 혼자서 노는 건 아니고, 임시 대리/대행을 발령하여 내각 기능을 조성하며 대개 내각이 아직 조성되지 않은 시기에 정도만 유지되나 마음먹고 작정하면 할 수 있다.[14] 기존 각료에게 겸임을 시킬 경우 천황의 인증을 받을 필요 없이, 총리 본인이 인사발령장에 도장 찍어주면 끝난다. 각료가 아닌 사람을 새로 입각시킬 경우에는 천황의 인증을 받아야 하나, 말 그대로 인증에 불과하고 천황이 총리대신이 주청하는 인사안건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국무대신 인사를 총리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1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이뤄진 계기가 되는 2005년 중의원 해산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의회해산을 반대하는 농림수산대신을 즉각 해임하고 자기가 농림수산대신을 겸해 중의원 해산에 서명했다. 심지어 고이즈미는 그로부터 몇 년 전에도 외무대신을 겸임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현직 총리의 국무대신 겸임 사례는 나오지 않다가 2021년에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대신이 자민당 간사장으로 이임하여 생긴 외무대신 공석을 제2차 기시다 내각 출범 직전까지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잠시 겸임하면서 16년 만에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옛날에는 총리가 국무대신을 겸임하는 사례가 매우 많았으나 전후 혼란기를 거쳐 정국이 안정되고 나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16] 대한민국 국군의 통수권자인 대한민국 대통령은 문민통제의 이미지를 위해 전시상황 등으로 군복을 입어야할 경우 무궁화 휘장을 따로 부착한다.[17] 한국이랑 비교해도 총리급여가 꽤 낮은데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받은 연봉이 2억원대였기 때문.#[18] 2019년 5월자로 황태자가 없기에 현 천황의 동생 후미히토가 맡고 있는 직책으로 황태자를 대신하는 직책.[19] 스가 요시히데는 레이와 시대 총리이다.[20] 여담으로 쇼와 시대 총리 중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한 사람은 2019년 11월, 향년 101세의 나이로 사망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다.[21] 현재 당적은 무소속이지만, 정계 은퇴 당시 당적은 민주당이었다.[22] 55년 체제를 붕괴시킨 최초의 총리.[23] 다이쇼 시대 태생 총리중 유일하게 생존중인 총리.[24] 전 스가 내각 부총리 겸 재무대신, 現 중의원 의원, 자민당 부총재.[25] 민주당 정권 최초의 총리, 現 공화당 대표.[B] A B 現 입헌민주당 최고 고문, 중의원 의원.[26] 레이와 시대에 선출된 최초의 총리, 現 중의원 의원.[27] 재임 횟수가 5회로 현재까지 가장 많다.[28] 재직일수 2720일. 7년 6개월(171일)이다. 초대 이래 5대, 7대, 10대 일본 총리이기도 했다. 1901년 5월 최종적으로 물러날 때는 60세였다.[29] 2,886일 = 7년 11개월(331일) (11대 4년 7개월, 13대 3년 1개월, 15대 3개월 더)[30] 도합 1년 270일. 시데하라 권한대행 기간 포함시 2년 21일.[31] 전범이 될 만한 근거가 별로 없기에, 희생양의 측면이 있다. 항목 참조.[32] 사퇴 이후 황적이탈하고 나서는 히가시쿠니 나루히코라고 불렸다.[33] 황족 출신 총리, 전후 수습 내각, 역대 최단 재임 총리, 최장수 총리(102년 1개월)[34] 전후 최고령 총리(73세)[35] 일본 제국에서 일본국으로 체제 전환, 전후 최장기 재임 3위, 역대 최장 재임 5위[36] 55년 체제, 자민당 장기집권 시작[37] 역대 최장 재임 3위, 역대 연속 재임 2위, 재직일수 2798일 (1964-1972)[38] 임기 중 사망. 1980년 6월 12일부터 동년 7월 17일까지 이토 마사요시가 권한대행[39] 레이와 시대까지 생존했던 쇼와 시대 마지막 총리, 일본 경제 최전성기 시절 총리.[40] 역대 4번째 최단 재임[41] 자민당 정권 붕괴(1차)[42] 55년 체제 이후 최초 비자민당 총리[43] 일본신생당 출신, 역대 2번째 최단 재임. 총리 퇴임 이후로도 중의원의원으로 활동하며 2010년대까지도 민주당 당적을 가졌으므로 민주당의 첫 총리는 하토야마 유키오라기보다는 하타로 보아야 맞는다.[44] 일본사회당 출신, 무라야마 담화, 효고현 남부 지진[45] 자민당 정권 복귀(1차)[46] 임기 중인 4월 3일 혼수상태에 빠져 직무 수행이 불가능해져 아오키 미키오 당시 관방장관이 4월 5일까지 권한대행을 지냈다. 후임 모리 요시로 총리가 취임한 지 한 달 만에 의식을 찾지 못하고 사망했다. 수상관저 홈페이지의 역대 내각 일람을 보면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는 재임 중 사망하여 임기 종료일을 사망일로 두었으나 오히라 총리와 달리 오부치 총리는 사망은 아니라는 차이점 때문인지 오부치 총리 임기 종료일은 혼수상태에 빠진 날이 아니라 모리 총리 취임일로 두고 있다.[47] 중도 사임 없이 임기 만료로 퇴임한 단 둘뿐인 총리 중 1명. 나머지 1명은 스가 요시히데.[48] 전후 최연소 총리(51세), 전후 최장기 재임[49] 67대 총리 후쿠다 다케오의 아들.[50] 자민당 정권 붕괴(2차)[51] 첫 민주당 출신 총리. 하토야마 이치로 총리의 손자로, 할아버지가 자민당 정권 시대를 열었다면 손자는 그 시대를 닫은 격이 되었다.[52] 자민당 정권 복귀(2차)[53] 48회 중의원 선거를 전후로 공식 당색이 초록색→빨간색으로 변경되었다. 의석 현황에서도 빨간색으로 확인된다.[54] 통산 8년 268일[55] 역대 최장 집권 내각총리대신. 2006년 9월 26일 ~ 2007년 9월 26일(1차 내각), 2012년 12월 26일 ~ 2020년 9월 16일(2~4차 내각)[56] 사전의 뜻은 "매달리는 일"이며 이를 빗대어 총리·국무대신 등의 요인(要人)이 관저나 국회 복도를 걸을 때 이를 기자들이 에워싸고 같이 걷거나 말을 건네면서 취재하는 일. 지진 등의 비상사태 시 총리의 기자회견도 이런 형식이다.[57] 한국에서 세월호 사고 당시 7시간의 공백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일본인들이 한국 대통령의 일정이 비공개라는 것에 대해 매우 의아하게 여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총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밀착동행하며 취재하는 기자들도 많기 때문에 사실상 개인 사생활이 거의 없다. 미국도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언론과 홈페이지에 대통령의 모든 일정을 공개한다.[58] 현직 총리가 자기 지역구에서 낙선한 사례는 21세기 들어서는 호주의 존 하워드 총리 정도가 끝이다. 하워드는 2007년 11월 총선에서 자기 지역구를 잃음과 동시에 의회 과반수를 내주며 정권을 케빈 러드의 노동당에 내줬다.[59] 도쿄대학 출신 총리가 없다고 알고있는 한국인들이 꽤 있는데, 앞서 언급했듯 당연히 틀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