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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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려 제34대 군주이자 마지막 군주.
묘호는 없고, 시호는 조선 태종이 올린 공양왕(恭讓王)으로 휘는 '요'(瑤)였다.
제33대 창왕이 폐위되자 이성계 일파에 의해 고려의 군주로 옹립되었다. 바보짓도 하고 정치적 야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별짓을 다했지만 이성계 일파는 그를 무혈 선위의 도구로 사용했고, 왕위에 오른 뒤엔 본색을 드러내면서 정몽주와 함께 마지막으로 반전을 노렸지만 무위로 그친 끝에 폐위되어 유배당한 뒤 처형당했다.
2. 생애[편집]
왕요는 제20대 신종의 7대손으로 신종의 차남이었던 양양공(襄陽公) 왕서(王恕)의 직계였다. 부계로는 제26대 충선왕의 제3비 정비의 아버지인 서원후 왕영(王瑛)의 현손자로,
순이었다. 그래서 충선왕 이후의 고려 군주들 중 유일하게 한몽혼혈이 아닌 순수 고려인(한국인)이었다.고려 제20대 왕 신종 → 양양공 → 3남 시안공(始安公) 왕인(王絪) → 서원후(西原侯) 왕영(王瑛) → 장남 익양후(益陽侯) 왕분(王玢) → 장남 순화후(淳化侯) 왕유(王瑈) → 장남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왕균(王鈞)[3]
폐왕 왕우, 폐왕 왕창을 빼고나면 제31대 공민왕의 뒤를 이은 것이 공양왕인데, 공민왕은 제17대 인종의 셋째 아들이었던 제19대 명종의 7대손이고, 공양왕은 인종의 다섯째 아들 신종의 7대손이므로 공민왕에게 공양왕은 부계로는 8대조인 인종에게서 갈라진 '16촌 칠종제'였다. 한편 공양왕의 어머니 삼한국대비 왕씨는 제25대 충렬왕의 증손녀로 '8촌 삼종남매'이자 '15촌 육종숙'인 정원부원군 왕균과의 사이에서 공양왕을 낳았다. 하여 모계로 따져 보면 공민왕과 공양왕은 7촌 숙부-조카 사이였다.
어머니는 연덕부원대군 왕훈의 딸이었다. 그리하여 공양왕은 충렬왕과 정화궁주 왕씨의 현손[4] 이 되었다. 덧붙여서 서원후 왕영과 정화궁주는 남매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엔 부유한 왕족으로서 큰 근심없이 여유롭게 지내왔다. 하지만 이성계 세력이 그를 왕위에 올리려하면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2.1. 반강제적인 즉위[편집]
고려 말기 고려를 침공한 여러 외세를 무찌르면서 힘이 지나치게 커진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해 이인임과 고려 신하들이 별 수를 다 썼지만 패배했다.[5]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을 실각시킨 이후 고려에서 제일가는 권력자가 되어 공민왕의 아들이면서도 섭정 이인임을 아버지, 즉 '국보'라고 불렀던 우왕을 폐위하고 8세의 어린 세자 창을 대신 옹립했다. 하지만 혁명을 저지하려는 고려의 세력들이 창왕을 중심으로 결집할 낌새가 보이자 군주를 교체하려는 마음을 먹는다. 한편, 이성계를 따르는 조선 건국 세력은 선위를 통한 평화적인 왕조 교체를 원했다.
마침 새로운 군주로서 이성계와 사돈 집안이기도 한 정창부원군 왕요가 꼽혔다. 왕요의 동생 정양군이 이성계의 7남 이방번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6] 게다가 정창부원군 부인 노씨는 이성계의 17촌 먼 친척이기도 했다.
공양왕이 단순히 이성계와 가까워서 즉위한 것은 아니었다. 얼자를 차별해서 계승권을 주는 대신 출가시켜 버리고, 적통 왕자들 중에도 출가자가 자주 나온데다 무신정권의 의중에 따라 폐위가 반복되면서 이미 귀해졌던 고려 왕실 직계는 원 간섭기에 원나라의 정치상황과 연동되어 더욱 줄어들었고, 자손 자체도 많이 줄었다.
제30대 충정왕이 숙부인 공민왕에 의해 제거되고, 제28대 충혜왕의 서자인 왕석기와 그의 아들이 제32대 우왕 즉위 직후 처형됨으로서 충혜왕 직계가 단절되고, 창왕이 혈통을 부정당해 제27대 충숙왕-제31대 공민왕-제32대 우왕-제33대 창왕으로 내려온 계보도 끊어져 충 자 돌림 왕들의 직계가 끊어졌다. 고려 왕실과 대결했던 왕고 이후 심왕 자리를 계승해오던 정화궁주 왕씨의 직계 후손도 제3대 심왕 왕토크토아부카의 죽음으로 끊어진 상황에서 창왕과 부계 18촌, 모계 9촌인 공양왕은 왕위에 가장 가까운 왕족 중 한 명이었다. 덧붙여 모계 기준으로 정화궁주의 잔존한 유일한 후손이기도 했다.
2.2. 4대조 공작 추존[편집]
갑자기 즉위한 군주들이 늘 그렇듯 공양왕은 유교적 예법에 맞춰 4대조를 추존하고자 했다. 군주가 아니었던 조상들을 추존 군주로 올리는 절차였다. 하지만 공양왕의 왕실은 그의 조상을 왕(王), 왕후(王后)가 아닌 공(公), 공비(公妃)로 추존했는데 이는 전례로 삼은 후한 세조 광무제와 북송의 영종 선황제의 방침을 빙자해 이성계에게 굽히고 살아 남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 건국 세력은 눈에 불을 켜고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공양왕은 어찌되었든 전례에 따라 4친(四親)을 추존했다. '원'을 구성해 적경원(積慶園)이라 했고, 성균관 오른쪽에 설치했다. 제도는 고려의 경령전[7] 과 같게 하여 당시 살아있던 공양왕의 친모를 제외한 7명이 모셔졌다.[8]
2.3. 이성계 견제[편집]
난[余] 평생동안 의식(衣食)과 사령(使令)이 모두 충분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부하(負荷)가 이리 막중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 《고려사》 <공양왕 세가> 중. -왕위에 오른 뒤 잠을 설쳐가며 불안해 했다.-
당시 정국은 이성계 일파가 잡고 있어서 실권은 없었지만 공양왕은 이성계 일파에 대한 대항마로 이색과 정몽주 같은 반(反) 이성계파 인사들에게 주목했고, 그들을 이용해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여 고려 왕조를 지키고자 했다. 치부에 힘쓴 배경 탓인지 우왕과 창왕 시절 토지 개혁을 추진했던 조준과 정도전을 즉위 전부터 미워했던 탓도 있다.
이성계에게 대항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이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우왕과 창왕의 처리 건이다. 연달아 군주 2명을 갈아치웠기에 명 태조 홍무제의 눈치를 보고 있던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의 처형을 조금 미루자는 입장이었으나 공양왕은 이들의 즉결 처분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래서 즉위 직후부터 그들에 대한 폄하 조치들을 시행하여 즉위 1개월여만에 우왕과 창왕은 빠르게 처형되었다. 이는 <폐가입진>의 명분을 강화시켜주는 조치였다.
공식적으로 역적인 창왕을 옹립했다는 정치적 약점을 잡힌 이색 대신[9] 반 이성계 파로 돌아선 정몽주와 협력했다. 이성계와 같은 흥국사 9공신의 한 명인 정몽주가 공양왕을 지지해준다면 그의 정통성은 더욱 강해지며, 거물급 정객이기도 한 정몽주가 도당에서 버텨줌으로서 공양왕을 끌어내리기 위해 여론몰이와 공세를 취하는 이성계측 인사[10] 들의 공세를 어느 정도 막아낼수 있었다.
1392년 이성계가 명나라에서 귀국한 세자 왕석을 마중나간차에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부상당했을 때는 이성계의 부재를 틈타 정도전, 조준 등 이성계 일파의 핵심 인사들을 모두 탄핵하여 귀양보내면서 이성계의 수족을 잘라 버렸다. 정몽주는 공양왕에게 치명타를 날릴 것을 계속 주문했지만 공양왕은 어물쩍거려 결정타를 날리지 않았다. 이는 공양왕의 권력기반과 관계가 있었다. 이성계가 보위를 노리는 권신임과 동시에 공양왕의 권력 기반이기도 했다는 점이 공양왕의 딜레마였다.
이성계 일파를 몰아내면, 이성계의 사돈이자 그에 의해 옹립된 자신도 덩달아 쫓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의방 등 무신정변의 주역들에 의해 옹립된 제19대 명종이 이의민의 죽음 이후 최충헌에게 폐위되었던 전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 매체에서 이성계, 정몽주, 정도전 관계를 극적으로 재구성하느라 놓치기 쉬운 부분인데 정몽주는 정도전보다 훨씬 오래된 이성계의 핵심 막료로서 창왕 폐위 때까지는 쭉 행동을 함께한 인물이었다.
공양왕의 즉위 정통성을 흔들 수밖에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정몽주가 이성계 세력 일망타진을 권한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둘은 고려 왕조를 지킨다는 큰 목적이 같아서 힘을 합친 것이지 이성계와 정도전, 조준처럼 절대적인 신뢰로 뭉친 관계가 아니었다. 고려를 유지하려 한다는 점만 빼면 정몽주 역시 이성계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으며 이성계가 꺾이면 새로운 권신이 될 사람이라고 공양왕이 생각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무엇보다 앞서 정몽주는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협조했다.[11] 그렇다면 자기 역시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공양왕이 정몽주를 신뢰하기엔 정몽주는 공양왕과 인연도 없고 이미 군주를 갈아치운 경력이 있었다.
게다가 1388년 위화도 회군부터 김저, 정득후의 우왕 복위 미수 사건(1389), 윤이·이초의 옥사(1390)로 이어지는 일련의 숙청 속에 고려의 군권은 이미 이성계 일파가 완전히 장악한 상황이었다. 이성계가 부상을 입었을 뿐 이방과, 이지란, 이화, 이제 등 이성계의 막강한 군사력을 책임지는 친위무장세력이 건재했다. 정몽주의 요청을 받아들였다해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만약 공양왕이 계속 밀어붙이고 자극하다가 이성계가 마음을 바꾸는 순간 군사력을 동원해서 왕조를 바꿔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까지는 않더라도 무신정권 시절이나 우왕과 창왕처럼 그냥 폐위시켜 버리고 다른 왕씨를 옹립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공양왕으로선 어느 정도 세력을 꺾었으니 이 쯤에서 숨을 고르면서 세력 균형을 잡고 타협하는 노선으로 흐를 수 밖에 없었다. 어느 한 쪽을 완전히 궤멸시키지 않고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이유는 과거 우봉 최씨 세습 무신정권이 있었듯 이성계를 필두로 한 전주 이씨 세습 무신정권을 용인하고, 왕조는 보존하려 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으로 어느 정도 설명된다. 다만, 이미 고려는 그런 애매한 방식으로 존속하기엔 너무 쇠락한 나라였고, 고려 왕실의 권위는 더 떨어질 수 없는 곳까지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성계의 부상은 생각보다 심한 편이 아니었다. 5남 이방원의 보좌를 받으며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왔기에 결국 공양왕과 정몽주의 반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공양왕은 자신의 딜레마를 명나라라는 중원의 슈퍼파워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낙마사건이 일어나기 1년전에 세자 왕석을 명나라에 입조시켜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명나라에 책봉을 요청하는 사신도 보냈다. 공양왕의 심중을 뻔히 아는 이성계는 이에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대비인 정비 안씨로부터 <폐위 교서>를 받아내 공양왕을 폐위시켰다.
2.4. 군신 동맹 요청[편집]
공양왕 때 고려의 멸망이 시작된 것은 윤이·이초의 옥사였는데 명나라를 끌어들여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했던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마침내 급진 사대부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공양왕은 본시 정몽주의 말을 묵살하며 사건을 오히려 조사하려고 했는데 그 결과 공양왕과 정몽주가 각기 고립되었고, 이어진 이방원의 정몽주 암살이 결정타가 되었다. 명망있는 대신이자 반 이성계파로서 공양왕의 든든한 지원 세력이었던 정몽주조차 무참히 살해되고, 이에 대해서 공양왕이 이성계 일파에 아무 책임도 물을 수 없는 상황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이로써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 무너지자 공양왕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으며 조회가 끝나면 대신들이 군주가 아직 어좌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리거나 연회 때 공양왕 면전에서 술주정을 하는 대신도 있을 지경이었다.
이전 무신정권과는 달리 이성계는 단순한 권신이 아니라 한반도 동북면(함경남도) 지역을 사실상 독립국으로 경영하면서 만주 지역에까지 자신을 섬기는 여진 부족들을 수두룩하게 거느린 군벌이었으니 이미 일개 신하로 볼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위화도 회군을 하기 전에도 이미 2,000명이 넘는 직속 정예 사병인 가별초를 운용하고 있었는데다가, 수십 년간 고려 장군들과 함께 전장을 누비면서 매우 친밀한 관계까지 구축했다.
1388년 위화도 회군 당시 고려군내 서열이 최영-조민수-이성계-심덕부-정지-변안열 순이었는데 최영, 조민수, 변안열, 정지가 차례로 제거 혹은 정계에서 축출되고, 심덕부가 이성계 편에 서면서 고려의 군권은 사적으로 이성계에게 충성하는 인물들로 완전히 장악되었다. 무신 집권기 100년을 포함해 고려시대 다른 권신들의 사병은 겨우 100명도 안 되었으며[12] , 공식적인 국가의 군대를 명분없이 자기 마음대로 운용할 수는 없었기에 이성계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그나마 세습에 성공했던 우봉 최씨 무신정권때는 사병은 크게 확장했지만 정규군에 대한 군사권은 여전히 다른 신하들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하지만 이때의 이성계는 고려의 모든 군사권을 개인적으로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왕이 명령을 내려 우리 태종과 신하 조용을 소환했다.
(왕이) 이르길: "나[予]는 곧 이(李) 시중(侍中)과 동맹(同盟)을 맺고자 한다. 경등(卿等)이 내[予] 말[言]을 시중(侍中)에게 전해 시중의 말을 듣고 맹서(盟書)의 초고를 써 와라."
그리고 또 이르길: "반드시 이런 고사(故事)가 있을 것이다."
조용이 대답하길: "맹(盟)이란 것은 귀한 것이 아니니, 성인(聖人)이 싫어하던 것입니다. 열국동맹(列國同盟)이라면 옛날에도 있었으나 군신동맹(君臣同盟)은 경적(經籍)에 없는 고사(故事)입니다."
왕이 이르길: "그저 초고를 쓰라."
조용과 우리 태종께서 태조(太祖)께 가 왕교(王敎)를 전하셨다.
태조께서 말씀하시길: "내[予]가 무슨 말이 있겠는가? 네[汝]가 마땅히 상교(上敎)하여 초고를 올려라."
조용이 초고를 퇴고했다.
(글에) 쓰길: '경(卿)이 없으면 내가 여기에 어떻게 있겠는가? 경의 공과 덕은 내가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 황천후토(皇天后土)가 (우리의) 위에 있고 옆에 있으니 서로 세세토록 자손에게 해를 입히지 말자. 내가 경에게 부담을 준다면 이 맹이 있도다.'
조용과 태종께서 초고를 왕에게 바치셨다.
왕이 이르길: "가(可)하다."
- 《고려사》 <공양왕 세가> 중.
급기야 공양왕은 신하인 이성계에게 군신 동맹을 맺자는 제안을 할 정도로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는데 이 동맹 제의를 했던 시점이 폐위 1주일 전의 일이었다. 사실 동맹이라는 것은 나라와 나라 또는 세력과 세력 간에 맺는 것이지, 군주와 신하가 맺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고려의 역사에는 무신정권이라는 전례가 있었으니 그를 모범으로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실제로 과거에 우봉 최씨 무신정권이 4대 60여 년 동안 장기 집권한 사례도 있었으니 무신정권 시대의 전례를 따라 이를 반복하여 이성계의 실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전주 이씨 무신정권을 세워주고, 그저 허울만 남는 한이 있어도 왕씨의 고려 왕조는 지키겠다는 처절한 시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줌의 사병 외에는 별다른 지지세력이 없어서 군주가 될 능력이 없었던 무신정권의 실력자들과는 달리, 공양왕 시대의 고려는 나라의 군권이 이성계 1명에게 완전히 넘어갔고, 건국 명분을 보태주는 문신 세력의 지지도 충분했으니 결국 고려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2.5. 고려의 멸망[편집]
결국 대세는 완전히 기울어 1392년, 왕대비 안씨의 이름으로 공양왕은 폐위되었다.'금왕(今王)은 멍청하고 어두워 군도(君道)는 사라졌고 인심(人心)은 떠나갔습니다. 더 이상 사직 및 생령의 주(社稷生靈主)가 될 수 없으니, 부디 폐(廢)하여 주십시오.'
북천동궁(北泉洞宮)에 있었던 공양왕은 엎드려 왕대비의 교지를 듣고 난 뒤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난[余] 본래 군(君)이 되고 싶지 않았다. 군신(群臣)이 날 강제로 세운 것이다. 내 성격이 민첩하지 못해 사기(事機)를 알지 못했으니, 어찌 신하(臣下)의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겠는가."
- 《태조실록》 중, 1392년 7월 12일. -공양왕의 반응-
공양왕의 옥새는 왕대비가 가져갔고, 국정은 왕대비의 명의로 처리되었다. 문하시중 이성계는 감록국사(監錄國事) 이성계가 되었다. 7월 16일 대비로부터 옥새가 전해지고 7월 17일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군주로 즉위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명나라의 책봉 이전이므로 권지고려국사라는 칭호를 이용했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34대 475년만에 멸망했다. 정몽주가 암살당한지 4개월만이었다.[13]
이성계가 왕위를 단순 찬탈하고자 했으면 1388년 위화도 회군 때 이미 힘이 있었기에 그 시점에서 왕위에 올랐겠지만, 최대한 보기 좋게 왕위를 양위받고 싶었기에 세운 것이 공양왕이었다. 이성계가 양위를 원했기에 공양왕과 정몽주는 이성계를 나름대로 견제할 수 있었지만, 결국 공양왕이 절대로 양위할 뜻이 없다는걸 알자마자 공양왕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왕이 되었다. 《삼국지》의 조조-조비 부자나 사마의-사마사/사마소-사마염 3대가 '보기 좋은 선양'을 위해 허수아비를 앉혀놓고 공들인 수십 년의 시간에 비하면 고작 쿠데타 4년만에 다 죽이고, 왕이 된 이성계는 상당히 빨리 판을 뒤집은 편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성계는 여유부릴 시간이 없었다. 이성계의 낙마사건부터가 명 태조에게 입조하려는 세자 왕석을 배웅하러 갔다 벌어진 일이었으니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낸 공양왕이 후속 조치로 추진하던 명 태조의 책봉까지 받아내면 이미 이성계를 곱지 않은 눈으로 주시중인 주원장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 말고는 왕위에 오를 방법이 없었다. 이성계가 공양왕을 폐위시킬 때 이미 명나라로 가는 책봉 요청 사절이 출발한 상태였고, 이성계가 가장 먼저 한 일 중에 하나가 급히 파발을 보내 사신단을 귀환시키는 일이었다.
백관들이 왕대비 안씨의 옥새를 받들어 이성계의 집을 찾았을 때 이성계는 사양의 뜻으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며 백관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몇 번의 사양 끝에 옥새를 받들었다. 또한 즉위식에서 자신의 몸이 성하지 못해 도망가지 못했다며 최대한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는 짜고치는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았다.
2.6. 강등과 최후[편집]
1개월 뒤인 1392년 8월 7일, 폐주 왕요는 쓸쓸하게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고, 오늘날 강원도 원주에 유배되었다. 이후 간성군(杆城郡)[14] 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는데[15] 이때의 유배지명를 따서 '간성왕'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간성군에서 총 2년간 있었는데 공양왕의 저항으로 촉발된 명분 부족은 곧 조선 건국을 주도한 유신들의 위기의식과 개경 왕씨들에 대한 지독한 경계심을 초래했다.[16]
1394년 1월에는 조선이 건국되고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된 상태에서 동래 현령 김가행과 염장관 박중질이 맹인 점쟁이에게 왕씨 왕족들 중 누가 귀한 사주인가를 물었다는 것이 발각되었다. 결국 대마도 정벌로 유명한 박위가 시킨 일로 점점 불이 커지더니 점쟁이가 말한 왕씨들도 옥에 갇히게 되었다. 태조는 적당히 벌을 주고 무마하려 했지만 결국 왕화, 왕거, 김가행, 박중질 등 모두가 참수형에 처해졌고 공양왕 부자의 명운도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었다.[17] 결국 조선 왕조는 1394년 3월 14일 공양왕과 그의 아들 2명을 오늘날 강원도 삼척으로 다시 유배시켰다.
'신민(臣民)들이 밀어붙여 나[予]를 군(君)으로 만드니, 참으로 천수(天數)였다.
영(令)하여 군(君)을 관동(關東)에 머물게 하고 다른 동성(同姓)들은 알아서 편한 곳으로 가 생업(生業)을 하게 했다.
지금 동래 현령(東萊 縣令) 김가행(金可行)과 염장관(鹽場官) 박중질(朴仲質) 등이 불순한 짓을 도모하여 군과 친속(親屬)의 운명을 맹인(盲人) 이흥무(李興茂)에게 점치게 했다.
일이 발각되어 죄를 물었다. 군은 비록 모르고 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대간법관(臺諫法官)들이 계속 장(章)을 올려 주청함이 12번을 넘기니, 매일마다 다투었다.
대소신료들까지 또 상서하여 다투니 나[予]는 어쩔 수 없이 청을 물릴 수가 없어 따라야 한다. 군은 이를 알라!'
- 《태조실록》 3년 4월 17일 병술, -공양군을 교살하다.- @
공양왕은 결국 폐위된지 2년 후인 음력 1394년 4월 17일, 삼척 고돌산의 살해치[18] 에서 중추원부사 정남진(鄭南晋)에 의해 왕세자 왕석과 함께 향년 50세에 교살되었다.[19] 1394년(태조 3년) '고릉'(高陵)의 능호가 붙여졌으며 원래 폐위 직후에 '공양군'(恭讓君)[20] 으로 불리었으나 1416년(태종 16년) 태종이 '공양왕'(恭讓王)으로 추봉을 하고, 사신을 보내 그의 능에 제사를 지냈다. 현재는 왕비인 순비 노씨와 합장되어 있다.
이성계는 서주 성왕이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 즉 제신의 이복형 미자계를 송나라의 공작에 봉해 상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을 본받아 공양왕의 동생이자 자신의 사돈인 정양군 왕우를 귀의군으로 봉해 고려 역대 군주들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왕우는 이성계의 사돈이었기 때문에 그와 두 아들 왕관과 왕조는 왕씨 숙청 때도 무사할 수 있었으나, 왕우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이 일어났을 때 왕관과 왕조도 휘말려 죽었다.
2.7. 2개의 왕릉[편집]
오늘날 공양왕릉(고릉)은 강원도 삼척시와 경기도 고양시에 각각 따로 존재하고 있는데 삼척의 공양왕릉은 강원도 기념물 제71호에 지정되어 있고, 고양의 공양왕릉은 사적 제191호에 지정되어 있다.
공양왕릉이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각각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삼척에서 죽은 후 나중에 추봉되면서 고양으로 이장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둘 중에 공양왕의 유족과 조선 왕조에서 공인하고 예우해준 곳은 고양에 있는 능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삼척, 고양 모두 심상치 않은 전승들이 내려오고 있으며 관련 기록들도 모순되다보니 공양왕의 죽음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공양왕이 삼척에서 교형에 처해졌다고 했지만 고양의 공양왕릉 주변 지역에서는 공양왕이
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21] 왕씨 몰살과 엮어 보면 공양왕이 유배지 삼척에서 탈출을 감행해 모종의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처형된 뒤 그 일체가 조선 왕조에 의해 은폐된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도 있다. 반면에 사서 기록에 따르면 공양왕의 처형은 왕씨 몰살과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기록을 신뢰하면 공양왕이 무언가 큰 사건을 일으키려고 탈출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처형을 피하기 위해 탈출했다가 붙잡혀 시해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성계에게 견제와 방해를 시도했고, 최후에도 저런 수상쩍은 사건이 있어서인지 능에 대한 예우는 거의 없다.[22]"삼척에서 탈출해 이 근처까지 왔다가 죽었다."
조선시대에 삼척 공양왕릉에 대한 기록은 1660년부터 1662년까지 삼척 부사를 지낸 허목이 쓴 《척주지》(陟州誌) 정도에서 소개되고 있다. 어쨌든 두 곳의 공양왕릉을 열어서 확인해본 것도 아니고, 교차 검증을 할 문헌도 부족해서 현재는 두 곳 모두를 공양왕릉으로 인정하고 있다. 삼척과 고양 두 곳 다 공양왕릉으로 가는 길의 이름은 '공양왕길'로 되어 있다.
3. 가족관계[편집]
4. 평가[편집]
고려의 마지막 군주로, 망국의 군주가 되었지만[24] 앞에 언급한 것처럼 그저 무능한 군주는 아니었고, 나름대로 없는 힘이라도 쥐어짜서 고려 왕조를 지키고자 했던 군주였다. 결정적인 순간에서 망설인 것이 결국 자신의 나라와 목숨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적어도 이성계가 내린 존호인 '공양'[25] 왕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군주는 아니었던 셈이다.[26] 그러나 사실상 이미 망한 왕조에서 무혈 선위를 통한 평화적인 왕조 교체라는 최대한 좋은 그림을 목적으로 이성계 세력에 의해 강제로 세워진 왕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군주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냥 부유하게 살다가 갔을지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애초에 이성계가 자신을 왕위에 올린 이유도 알고 있었을 테니 그냥 이성계가 하자는 대로 해서 끝까지 목숨을 보전하자는 생각도 했겠지만, 차마 470여 년 사직의 마지막 군주가 될 순 없어 저항을 시도했다.[27] 어쨌든 대부분의 망국의 군주들이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잔혹한 숙청을 당한 군주였다.
한편으론 시대를 너무 잘못 타고난 군주로, 권력욕이 그렇게 강하지 않는 대신 신하들의 상소(上疏)에 도장을 찍고, 무과를 받아들일 만큼 덕망도 있었다. 우왕과 창왕을 치는 데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고, 제11대 문종, 제16대 예종과 같은 명군이 되기에 꽤 충분했으나 전대의 군주들이 너무나도 무능하여 비극을 당한 군주이기도 했다. 즉, 본인이 아무리 잘하려고 노력해도 도저히 수습이 불가했다. 왜냐하면 이미 사실상 나라가 망했으니까. 참고로 공양왕 같은 군주들은 전대 군주들이 잘해야 성군이 되는 군주들이다. 한국 역사 최고의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대왕의 업적도 태종 이방원이 이룩한 강력한 왕권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공양왕은 대세와 운, 현실이 너무나도 안 따라줬던 셈이다.
실제로 《고려사》 <공양왕 세가>를 보면 상소들이 숱하게 올라오고 그 내용도 매우 긴데, 대체적으로 공양왕 개인의 실정보단 전왕의 실정이 주류를 이루어 공양왕은 이러지 말라는 것을 아예 엄청난 장문으로 적은 상소들이었다. 군주가 이런 상소들을 다 보고 다 찍는 것은 어지간한 성군조차도 하기가 힘들고, 도장을 다 찍기전에는 상소의 오류도 시정해야하며, 또 상소들이 줄기차게 올라왔다는 것은 상소문들이 생각보다 엄청났다는 것인데 우스갯소리로 소위 상소가 산을 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군주를 비롯해 심지어 당대의 학자이자 문하시중인 정몽주조차도 이걸 다 하기 어려울 실정이었다. 실제로 《고려사》 <공양왕 세가>의 상소는 어지간한 사학자들조차도 다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 앞의 군주인 공민왕(제31대)은 자신이 마음에 안 들거나 문제를 지적한다거나 귀찮다 싶은 상소들은 아예 본보기로 불태우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이존오의 상소가 그러했다. 심지어는 빌미잡아 숙청까지 했기에 상소문들이 공양왕보다 더 적었다. 그래서인지 공민왕 시절에 신하들의 상소 기록이 공양왕 때보다 훨씬 적다.
그리고 공양왕은 한국사의 다른 마지막 군주들의 최후랑 비교해보면 훨씬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한국사의 역대 마지막 왕조의 군주들과 비교하면 이렇다.
- 말년을 편하게 살다간 군주
- 말년이 (위의 군주들보다) 상대적으로 안 좋았거나 불명인 군주
- 말년이 비참한 군주
- 공양왕은 폐위 후 본인도 유배, 사사당하는 것은 물론 개경 왕씨 일족들까지 대부분 조선 조정에 의해 학살당했다.
태봉의 궁예[31] 나 후백제의 신검[32][33] , 흥료국의 대연림[34] , 장안국의 김헌창[35] , 최씨낙랑국의 최리[36] , 위만조선의 우거왕처럼 공양왕과 비슷한 결과를 맞은 이들도 많지만 이들은 모두 길어야 수십년만에 망해버린[37] 단명국가였다. 장장 475년 동안이나 장기간에 걸쳐 안정적으로 존속해 온 고려와는 얘기가 달랐다.
5. 기타[편집]
- 자신이 우왕과 창왕을 대신해 등극했다는 걸 알리기 위해 태조 진전을 참배했다. 당시 사용한 축문이 <공양왕 세가>에 남아있는데 거기에는 신라가 '조선(朝鮮)'이라고 지칭되어 있다. 당시 조선은 삼한처럼 한반도 전체를 고아(古雅)하게 부른 표현이었지만[39] 영 미묘하게 느껴진다.
- 《고려사》 <공양왕 세가>에는 공양왕이 옹립된 뒤에 잠도 못 자면서 불안해했다고 하며 사람은 착한데 너무 우유부단했다며 은근히 디스한다.
- 이성계가 공양왕을 위해 수창궁에서 연회를 연 적이 있는데 즐겁게 논 공양왕은 이에 보답으로 이성계에게 비싼 갓끈, 말, 옷을 선물했고 이성계는 받는 즉시 옷을 입어 보였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 궁문을 닫자 이방원은 혹시라도 자신들을 죽이려는지 의심하여, 아버지를 데리고 몰래 궁을 나가버렸는데 신하가 군주에게 하직 인사조차 하지 않고 냅다 가버린 것이었다. 다음날 빡친 공양왕이 궁문을 열어준 신하를 가두어버리자 이성계는 내가 너무 취해서 문 열라 시켰다며 옹호해 공양왕은 별 수 없이 풀어줘야 했다.
- 이성계가 사냥 도중 낙마하여 부상을 입은 적이 있다. 공양왕은 강연 중 소식을 들었는데 한 신하가
'이 시중은 나라의 장성(長城)과 같은 존재이니 그가 다친 것은 큰 손실입니다.'라고 하자 공양왕은 읽던 책을 덮어버리고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성계에 대한 반감을 알 수 있는 대목.
- 조선의 여진족 회유는 고려 공양왕의 치세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성계가 주도하여 북방에 방문을 붙였는데, 고려로 귀화하는 여진족은 큰 상을 주겠다며 선전했고, 이에 많은 여진족들이 호응하여 두 부족의 수장들인 알도리와 올량합이 고려로 왔다. 이 둘은 서로가 더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신경전을 벌였는데 알도리가
"시중 윤관이 우리 땅을 평(平)하고 '고려지경'(高麗地境)이라 쓰인 비석을 세우니 경내(境內)의 우린 제군사(諸軍事)를 모화하여 왔다. 굳이 이런 곳에서 싸워도 의미가 없다."라 하니 공양왕은 먼저 귀화한 부족장이 높은 자리에 앉게해 알도리가 윗자리에 앉게 되었다.
- 공양왕과 신하의 강연 도중 늙은이와 과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공양왕은 장수하는 사람은 분명히 불교에 대한 믿음이 깊기에 오래 산 것이라고 하며, 자신이 꿈에서 부처를 만난 뒤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에 신하는 맞장구를 쳐주는 동시에 유가(儒家)가 불가(佛家)를 싫어하지 않지만 굳이 배척하는 이유는 인군(人君)이 불교를 믿다가 정치를 소홀히 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라며 은근슬쩍 유교에 대한 강조로 넘어갔다.
- 제31대 공민왕때부터 공양왕의 아버지가 봉지로 하사받은 곳은 '정원'(定原)이었고, 공양왕 자신은 '정창'(定昌)이었으며, 공양왕이 군주가 된 뒤 동생에게 봉해 준 곳은 '정양'(定陽)이었는데, 모두 현 평안도 정주(定州)였다.[40] '고구려계 패서 지역 호족'이 만든 나라가 '고구려계 패서 지역에 봉해진 자'에서 끝난 셈이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기존의 드라마에서는 전통적인 역사관대로 공양왕을 무기력하고 무능한 허수아비 군주로 그리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정도전>에서는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군주로 그리고 있다.
- 1983년 KBS 드라마 <개국>에서는 배우 김진해가 연기했다.
-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1부 <추동궁마마>에서는 배우 김웅철이 연기했다.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중견배우 김영선[41] 이 연기했다. 어보를 갖고 온 이성계의 군사들에게 자신은 "왕 하기 싫다"[42] 고 말하는 장면이나 이성계에 대한 암살을 주저하는 장면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전의 공양왕에 대한 전형적인 시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역사대로 폐위되었다가 결국 아들과 함께 처형당하는데 이 장면에서 "자신의 혈족들이 떼로 죽었으니 우리만 어찌 살아남길 바라겠냐"며 사약을 거부하고 "의연하게 죽고 싶다"며 단검으로 배를 갈라 스스로 할복한다. 이 장면에서 마지막 유언은 "왕씨의 혼령들이여! 끝까지 살아남아 오늘을 잊지 말지어다!"[43] 이성계가 죽기 직전 꾼 꿈에서는 "어서오시오 대감. 고려를 죽인 이 원수!"라고 원한이 사무친 외침을 날린다.
- 2003년 출간 역사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개국 편과 태조, 정종실록에서 등장한다. 우왕 다음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성계세력이 창왕을 폐위하고 울면서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첫 등장. 1389년에 왕위에 오르자마자 이색과 조민수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공양왕은 이들을 유배조치로 하고 조민수는 폐서인만 하는것에 그친다. 1390년에는 이성계 세력이 살려두려했던 우왕, 창왕의 목을 벤다. 또 이때 윤이·이초의 옥사가 터지면서 유배지에 있던 이색과 이숭인, 권근등을 불러서 국문하게 했으나 이때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감옥에 물이 차오르자 이성계 세력에게 이들을 석방할 것을 요청한다. 이성계가 또 사직하려하자 이를 극구 말리는 등 이성계는 공양왕이 꼭두각시 임금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이성계 세력이 없애려 했던 온건파 사대부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그 중에서도 정몽주에게 많이 의지했다. 이성계 등이 조민수와 이색을 벌 줘야한다며 강력히 주장하자 공양왕은 이색은 무죄로 하고 조민수는 유죄로 인정하고 폐서인 하면서 이성계 세력을 당황시켰는데 이에 한 술 더 떠서 정몽주가 “전하의 뜻이 정해졌습니다. 이 후로도 이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자가 있을 시엔 마땅히 무고죄로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라면서 이성계 세력은 어이없이 한 방 먹고만다. 거기에 정도전까지 유배보내면서 이성계 세력이 지는 줄 알았으나 이방원이 조영규를 시켜 정몽주를 죽이면서 그럴 일은 없어졌다. 1392년 8월 13일에 조선이 건국되고는 “내 원래 임금이 되고싶지 않았는데… 키힝~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이 되게 했잖아. 잉잉~ 내가 똑똑하지 못하고 일이 돌아가는 바를 잘 모루는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른 일이 없겠는가……요?”라고 울면서 왕위에서 물러난다. 이후 태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씨몰살 정책에 걸려들어 두 아들과 함께 목을 매어 죽음으로써 등장종료.
- 2012년 SBS 드라마 <대풍수>에서는 배우 김병춘이 연기했다.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박형준이 연기했다. 실제 역사대로 이성계에 맞서는데 첫 조정 회의에서부터 신하들 앞에서 이성계를 갈구며 "내가 왕이고 넌 신하일 뿐이다!"라는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키고 변안열과 이색을 등용하여 이성계 일파를 대놓고 견제하는 등 첫 등장 당시에는 역대 사극을 통틀어 가장 강하게 묘사된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이내 이방원의 협박에 굴복하거나 "이성계가 동북면을 떠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는 등 정치적으로 미숙한 면을 많이 드러내어 사실상 이전의 허수아비 군주 묘사를 그대로 답습한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45] 이후 9회에서 군신 동맹 제의도 생략된 채 폐위되는 장면을 끝으로 허무하게 극에서 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