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복 교수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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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95년 3월 14일 서경대학교 경제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김성복(金成福)[1]
1976년 Y대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해 웨스트 일리노이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 테네시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한 뒤 1992년 3월 서경대학교 경제학과 전임강사로 임용돼 1995년 당시 조교수로 승진한 상태였다.
덕원중학교, 덕원예술고등학교 등을 보유한 재단이었다.
2. 상세[편집]
1995년 3월 14일 오후 11시 20분경 금룡학원 이사장 김형진은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덕암빌딩에 있는 자택에서 아내와 TV를 보다가 방으로 가 잠들었다. 약 7분 후 방에서 김형진의 신음소리가 들렸고 방으로 들어간 아내는 목에 칼을 찔려 피를 흘리던 김형진의 모습을 보고 큰아들 김성복을 불러 김 이사장을 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숨졌다.
3. 수사[편집]
동맥을 예리하게 찔러 단번에 살해했을 정도로[3]
해당 상처 이외에 외상은 전혀 없었고 저항의 흔적도 없었다. 한마디로 일격에 급소를 바로 찔렀다는 얘기.
김성복은 사건 발생 이틀 전부터 미리 범행 도구를 구입하고 예행연습을 하는 등 치밀한 모습을 보였으며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장례식에 참석하여 슬픔을 호소했다. MBC 뉴스데스크 보도영상#1, #2
김성복은 4월 15일에 구속기소되었다. #
4. 판결[편집]
김성복은 1심에서는 1995년 10월 10일에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10월 17일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
2심에서는 1996년 1월 25일에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2월 10일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
5월 12일에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5. 이후[편집]
2016년 이후 덕원중학교, 덕원예술고등학교 등 금룡재단에 소속되어 있던 학교들이 부영재단으로 매각되면서 더 이상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이 되어 버렸다. 참고로 부영재단의 대표인 이중근은 다름아닌 덕원중학교와 덕원예고를 설립한 우진학원의 설립자였다. 근 30여년만에 설립자 품으로 돌아간 셈.
재단이 바뀐 이유도 좀 씁쓸하다. 이 사건 이후 그의 어머니가 학교 이사장을 맡았는데 이후에 건강이 많이 나빠진 데다 아들 김성복이 2016년에 가석방되면서 출소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아들에게 물려주기도 좀 그랬고 다른 아들에게 물려주자니 학교 경영권을 놓고 다툼의 소지도 있었기 때문이라 덕원학원의 전신인 우진학원을 최초로 설립한 설립자 이중근에게 다시 경영권을 되팔게 되었다고 한다. 경영권을 넘긴 지 5개월 후에 전 이사장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 중 김성복 교수는 76억 원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형제들이 반발해서 2018년에 또 갈등이 있었다는 기사가 났다. # 이후 어떻게 해결됐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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