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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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 영서 · 영동 )
충청
남부
호남
영남
제주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이 발간한 <대한민국 국가지도집 I 2019>를 근거로 한다.
② 전통적인 의미의 관북은 미수복 강원특별자치도를 포함하지 않는 함경도 지역이다.
③ 해서와 충청은 전통적으로 각각 중부와 남부 지방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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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국의 지역구분 지도.svg

전라도(호남)
全羅道(湖南) | Jeolla Province(Honam)


파일:전라도 지도.svg
위치
대한민국(헌법[1]) 서남부 / 남한 서남부
면적
20,915.4㎢
인구
4,998,393명 (2023년 6월)
인구밀도
240.30명/㎢
최대도시
광주광역시
광역자치단체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전라북도
광역자치단체장
강기정 (광주광역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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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록 (전라남도지사,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김관영 (전라북도지사,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하위 분류
광주·전남
전북
1. 개요
2. 명칭
3. 범위
4. 역사
5. 인구
6. 지리
6.1. 자연지형
6.2. 인문지리
6.2.1. 생활권
6.2.2. 도시
6.2.3. 식문화
6.2.4. 사투리
6.2.5. 예술
7. 교통
8. 대학
9. 여담
10. 정치
10.1. 전라도의 보수주의
11. 전라도 지역을 본관으로 한 성씨
12. 같이 보기
13. 둘러보기
14. 세종실록지리지에서의 설명



1. 개요[편집]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광주광역시, 전라북도, 전라남도의 3개 광역자치단체가 포함되는 지역이다. 호남이라고도 부른다.

면적은 20,915.4㎢에 달한다.[2] 북쪽으로는 충청도, 섬진강을 경계로 동쪽으로는 경상도와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해가 있고, 서쪽으로는 황해가 있다.

주요 도시로는 광주광역시, 전주시, 목포시, 여수시, 순천시, 익산시, 군산시 등이 있고, 그 중 최대 도시는 광주광역시이다. 인구는 4,998,393명이다.[3][4]

2. 명칭[편집]


전라(全羅)도는 고려(全州)와 (羅州)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던 명칭이 현재까지 이어진다. 의 유래를 보면, 도는 본래 도읍을 중심으로 도로가 지방으로 뻗어나가며 거점 도시를 연결하는 형태의 행정구역으로 당시 이 길의 거점 도시이자 위상이 높은 도시가 전주와 나주이기도 했다. 1896년, 전국을 13도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전라도는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분도된다. 분도의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지만 원래 고려에서 전주 일대의 강남도(江南道)와 나주 일대의 해양도(海陽道)로 있다가 고려에서 전라도로 합쳐졌다.

호남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연려실기술' 지리전고에 따르면 한국사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인공 저수지로 불리는 김제시 벽골제의 남쪽을 뜻한다는 설이 있고, 금강의 옛 이름인 호강(湖江)의 남쪽을 뜻한다는 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소정방이 '중국둥팅호 남쪽 지방과 같이 기후가 온화하고 농사가 주업인 유사한 곳'이라 해서 전라도 지방을 호남 지방이라 불렀다는 설 등이 있다.

3. 범위[편집]


금강의 남쪽을 호남이라고 하면 충청남도 논산시, 계룡시, 금산군[5], 부여군, 공주시대전광역시, 충청북도 옥천군까지 호남의 범위로 들어온다[6].

그러나 대체로 금강-논산천-대둔산을 호서와 호남의 경계로 본다. 이렇게 보면 논산도 호남에 포함되는데, 실제로 논산은 충청도의 다른 지방과는 산으로 막혀 떨어져 있고, 호남평야에 포함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보다 충청도의 중심인 공주가 훨씬 가까웠기 때문에 충청도에 속하게 되었다.

현대에는 행정구역에 따라 광주광역시, 전라북도, 전라남도만을 전라도로 보고 있다.

4. 역사[편집]



4.1. 원삼국시대[편집]


'후한서'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마한은 서쪽에 54국, 진한은 동쪽에 12국, 변한은 남쪽에 12국이 있는데, 마한이 가장 강대하다", 역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마한으로부터 가야의 뿌리인 변한과 신라의 뿌리인 진한이 갈라져 나왔다"는 마한의 땅이었다. 마한 연맹의 54개 국가들 중에서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 건마국침미다례 등이 포함되는 것으로 추측되는 영산강 유역 세력을 포함한 지금의 전라남도 지역까지 대략 25개 국가가 전라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미, 심미다례 혹은 침미다례는 영산강 유역 중에서 해남 일대의 백포만 지금의 군곡리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구체적으로는 해남읍 화산면, 현산면, 계곡면 일대로 추정된다. 침미다례 위치는 강진, 남해, 제주도로 보는 설도 있고, 침미다례 위치를 근처 강진으로 추정되는 고해진을 근거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사실 고해진 위치 자체도 확실치는 않다. 영산강 유역 중에서는 해남 백포만 일대로 추정하는 설이 유력하다.[7][8]

초기 마한 맹주국은 기원전 190년고조선으로부터 내려온 세력이 건국한 건마국이었다. 문헌 사료와 고고학적 근거가 맞긴 맞지만 기년이 틀린 경우가 잦은 백제나 신라의 경우와는 달리, 유독 건마국 같은 경우는 건국 세력의 고고학적 남천 시점과 준왕의 문헌학적 남하 시점이 거의 일치하는 정말 흔치 않은 경우. 한편 건마국이 건국되면서 전라도 일대에는 중요한 변화가 발생하게 되는데, 전북 익산, 전주, 군산 일대에 위만조선이 싫어서 내려온 한씨조선 유민들이 익산 건마국을 중심으로 응집하며 주변 토착민들에게 강력한 위계체제를 관철한 결과, 이들의 통제를 따르기 싫었던 송국리형 유형 문화 주민들이 대거 전남 남서부 일대, 즉 훗날 침미다례로 발전하게 될 지역으로 빠져나가고, 그냥 전북에 남았던 여타 토착민들은 별 수 없이 건마국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들이는 양상이 드러난다. 이후 위만조선이 망하자 또 다시 중대한 변화가 전라도에 일어난다. 위만조선이 망한 후 대규모로 남하한 조선계 유민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전북 일대에는 정착하지 못하고 대부분 그보다 거리가 먼 침미다례에 정착하게 되는 사실이다.[9] 이렇게 되다보니 침미다례는 아예 애초부터 건마국을 필두로 한 전북 마한 세력과는 여러모로 연합이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 된다. 전북 마한 세력 입장에서 보았을 때, 침미다례는 준왕의 지배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던 토착민 집단과, 준왕 세력을 조선에서 쫓아낸 바 있는 위만조선 후예들이 연합해서 세운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건마국은 기원후 3세기 시점에서는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청당동에 자리잡은 걸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목지국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고, 침미다례 내부에선 위만계 고조선 세력이 토돈분구묘계 세력 및 송국리 문화 유형계 주민들을 누르고 주도권을 잡게 된 반면 기존 건마국 내부에선 준왕이 처음 등장했을 때엔 주도권을 내주면서 피지배층 입장이었던 토돈분구묘계, 송국리 문화 유형계가 오히려 주도권을 잡게 되는, 상당히 묘한 상황이 등장하게 된다. 한편 이 전라도의 마한 거수국들이 천안 목지국 세력과 맺었던 관계는 묘한데, 아무래도 목지국이 이들에게 훗날 백제가 행사했던 간접 지배력은 행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목지국의 영향력은 분명 무시할 수는 없으되 훗날 등장하는 백제에 비하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마한이라는 연맹체에는 크게 보아 한강~임진강 유역, 안성천 일대, 금강 유역, 영산강 유역, 섬진강 유역 등 다섯 유역으로 분류해 볼 수 있고, 그 영향력은 목지국만 못 했던 걸로 추정되지만 금강 유역과 영산강 유역 역시 나름 세력이 있었기에 그 지역들에는 그렇게까지 크게 미치진 못 했던 걸로 보인다. 섬진강 유역은 세력은 미약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목지국이 3세기 중후반 백제에게 소멸된 이후에는[10] 백제가 목지국이 하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백제는 목지국과는 꽤 지향점이 다른 고대 국가였다. 금강 유역은 적어도 4세기~5세기까지, 영산강 유역은 고유의 묘제가 6세기에도 어느 정도 유지된다.[11]# 다만 침미다례 등이 있었던 것이 유력한 영산강 유역 세력은 후기 마한 연맹체를 이끈 바 없으며, 굳이 후기 마한 연맹체의 영도국을 든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백제국이다. 비록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왜계 전방후원분(초기 횡혈식 석실분)[12] 또는 가야 세력의 유물이 전남해안 일대에서 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백제의 영향력이 시간이 지날 수록 침투해가면서 영산강 유역 세력의 타지 진출을 제한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렇듯 마한이 백제에 편입되는 과정은 목지국을 대신해서 맹주국이 된 백제가 다른 마한 소속 연맹 국가들을 중앙 집권체제로 편입해가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바탕으로 이병도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근거로 주장한, 근초고왕이 마한, 즉 전라도 남해안 일대까지 모두 정복했다는 학설은 문제 있는 학설이었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록 자체가 왜의 한반도 정벌이라는 황당무계한 내용에 여기에는 또 왜의 신라, 가야 정벌 기록도 있는데 신라, 가야를 정벌했다는 기록은 외면하고 굳이 침미다례만 콕 집어 마한 전체를 정벌했다고 해석했던 게 그것. 다만 지명의 비정이나, 근초고왕 이후 고고학적으로 금강 유역 일대의 성장이 억제되는 점, 그리고 백제가 대방군(현재 황해도 일대)의 옛 교역 루트를 장악하는 데는 성공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백제가 영산강 유역의 해남 백포만 일대로 추정되는 신미-침미다례를 직접지배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옛 목지국이나 건마국보다 훨씬 강력한 지배력과 위상을 영산강 유역 세력권에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건 무리한 추정이 아니다. 한성백제의 한성 공함 전까지 영산강 유역 세력은 무덤 부장품의 양이 꽤 줄어들고, 가야 세력도 침투에 서서히 성공해가는 전라도 동부에는 아예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데 이는 백제의 강력한 견제와 간섭 탓으로, 굳이 말하면 이는 그전 건마국이나 목지국은 아예 시도도 해볼 수 없었을 강권 행사였다.[13][14] 이러한 설은 이병도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근거로 주장한 이론으로만 주장하는 게 아니라, 2000년대 후반에 충청남역사문화원에서 발간한 백제사 시리즈의 웅진백제 편에서 삼국사기까지도 고려하여 해석한 것이다.

4.2. 삼국시대[편집]


4세기부터 지금의 서울에 있던 백제가 남하하며 조금씩 백제에 복속되기 시작했고, 이 무렵에 대가야금강 상류와 섬진강 일부 유역에 진출하였다. 이 시기까지 전라도에는 제대로 통합된 국가가 없이 성읍국가만 난립한 상태였던 건 아니다. 전북 서북부 해안 일대는 백제가 아예 근초고왕 이전 시기까지도 직접 지배 영역을 굳혀 나가고 있었으며 이는 충청도 북부보다 백제의 진격이 빠른 경우였고, 전라도 서남부 내륙 일대는 건마국 세력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주변 소국이 응집하는 구도였는데 서부 내륙 일대는 전북 서해안보다는 직접 세력화는 늦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백제와 훨씬 타협이 쉬운 상태였다. 한편 나름 세력이 만만찮은 영산강 유역(=침미다례) 일대가 전남 서남부[15]에서 세력을 이뤘고, 전라도 동부에서는 주로 진개의 고조선 정벌 당시 내려온 유민들로 구성된 세력이 각기 있었다. 즉 마한에 속했던 거수국들이 그저 생각없이 흩어져 있었던 게 아니라, 비록 고대 국가 체제는 이루지 못할 망정 각자 정치, 경제, 문화적 경계에 따라 나름대로는 응집해 있었던 것이다.

백제는 일찍부터 마한의 영역이었던 전라도 일대에 관심을 안 둘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 일대를 장악해야 백제의 대방군 무역권 승계, 즉 경기-충청-전라-왜 열도의 무역망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수왕의 한성 공함으로 당장 망하지 않기 위해선 호남 일대의 직접 지배화 프로그램을 더욱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되긴 했지만 그전 한성백제라고 마냥 전라도 일대를 방치했던 건 아니었다. 적어도 개로왕 사망 직전까진 금강 유역 일대, 즉 전북 일대에 대한 직접 지배 영역은 상당히 넓어져 있었고, 그나마 가장 독자적 세력이 강성하여 적어도 근초고왕 재위기 초반엔 백제의 마한 수장국 자격에 정면 도전했던 영산강 세력은 아예 마한 운운하는 얘기는 입밖에도 꺼내지 못하면서 코앞의 전라도 동부 진출도 제어당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백제가 남천하면서 전라도의 백제화에 가속화가 붙었다는 건 어디까지나 그 이후 상당한 기간의 진행과정을 뭉뚱그린 결과론적 얘기다. 적어도 한성 공함 당시 백제의 국력과 위상은 급전직하로 추락한 상태였음을 잊어선 안 된다. 천안 목지국 휘하의 일개 거수국에 불과했던 백제국이 목지국의 국력 약화를 기회로 틈을 엿보아 성공했던 것처럼, 아직은 지배 기반을 해체당하지 않은 전라도의 옛 마한 거수국들은 각자 다른 선택을 하기 시작하며 풍전등화인 백제의 애간장을 더욱 태우게 된다.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건 다름아닌, 전라도의 옛 마한 거수국들 중 가장 강력했던 영산강 유역 세력, 즉 침미다례였다. 이 시기 나주 금동관국보 제295호이 보다 화려해지는데, 이는 백제 내에서도 독자적으로 대중국 외교를 행하려 했던 데다, 신라, 대가야 그리고 심지어는 일본 큐슈 일대와 교역을 강화하며 힘을 키운 게 고고학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거꾸로 이 시기 대가야의 경우 신라보다는 백제 쪽으로 문화나 경제적, 군사적 의존도가 기울어지는 경향이 드러나는 걸 보면 서로 상반되는 경향이 드러나는데, 백제 입장에서 이는 그간 꾸준히 공을 들여왔던 영산강 유역 세력이 대가야보다도 백제에게 비협조적이 되었다는 걸 뜻했다.

그러나 정작 백제에게 더 큰 타격은 그간 침미다례는 물론이요 건마국 일대 세력보다도 경제군사적으로 약했던 전라도 동부 섬진강 유역 일대에게서 발생하게 된다. 이 전라도 동부는 그 시대 기술로는 평지가 적고 물살도 좁고 빨라 큰 공동체가 발생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으며, 때문에 영산강 유역과는 달리 공동체들이 죄다 따로 노는 분위기였다. 그래서였는지 한성백제는 마한 신미국이란 명칭으로 대외에 자칭하면서[16] 백제국의 마한 대표 자격에 이의를 제기하던 영산강 유역 세력에게만 신경을 썼는데, 그러나 4세기 초에 가야가 섬진강 유역과 활발한 교역을 추진하면서 영향력을 심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이 전라도 동부의 경제군사적 실력은 서서히 상승하고 있었고, 한성백제가 한성을 공함당하자 대가야 연합에 참여하면서 아예 백제가 주도하는 마한 연합에서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현재 전북 동부인 남원시, 장수군, 구례군이나 순천시, 여수시 같은 섬진강 유역 에는 가야 계통 유물과 고분들이 나타나는 게 바로 이것이 원인이었다.[17]

한편 여기서 금동관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왕과 신하와 같은 수직적 관계에서는 칼이 하사품으로 등장하지 금동관이 등장하지는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칼이 주로 하사품으로 등장하는 지역은 해당 공동체의 수장이 극히 미약해서 금동관까지 줄 필요가 없었거나, 아니면 아예 해당 지역을 백제 중앙 지역에서 파견한 군사령관이 힘으로 지배하는 직접 지배 지역에서 나타나는 양상이기에, 칼이 아니라 금동관이 등장한다고 지배 지역이 아니라곤 할 수가 없다. 금동관은 독립된 세력의 최고 지배자를 뜻하는 것으로 금동관을 하사하였다면 이는 곧 공존과 협력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백제와의 상하 관계를 꼭 뜻하지 않는다곤 해석할 수 없다. 이런 해석으로는 백제가 아예 천도까지 감행하기 직전 공주 수촌리 세력이 한성백제 시절에도 금동관을 사여받은 사실, 그리고 백제국이 마한의 원수장국이었던 익산 건마국을 해체하기 위해 준왕 계열의 잔여 세력인 입점리, 웅포리 세력들에게 금동관을 사여한 사실이 잘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래도 한성 공함 직후 백제가 정신을 추스르기 전 시기에 영산강 유역에서 쓴 금동관은 당시 백제에게서 사여받았다고 보기엔 너무나도 화려할 수 있고 독자성도 강하기에, 적어도 영산강 유역 세력을 우대해줬거나 반(半)독립적 지역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다만 이렇게 서남부는 자치체가 상당기간 존재했고, 동부는 대가야 연합으로 이탈하는 일이 일어났어도, 개로왕 때까지 진행된 백제의 남진이 헛되지는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전라도 세력들보다는 백제에게 협조할 이유가 많았던 옛 건마국 세력의 전북 서부, 그리고 영 제어가 버거운 영산강 유역을 상대하기 위해 백제가 직접 키운 광주 세력을 위시한 전남 내륙부 일대는 여전히 백제 왕실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백제는 이 일대 세력들을 지렛대로 삼아 영산강 유역 세력은 회유와 타협을 통해 5세기 후반~6세기 초반 경에 복속을 완료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전 한성백제 시절엔 백제에게 딱히 반항한 바 없는 가야 세력이었다. 이들은 대가야의 지원에 힘입어 영산강 유역 세력과는 달리 무력으로 백제에게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적어도 한 번은 대가야와 함께 백제의 공격을 격퇴해냈지만 이때도 여수, 광양, 순천 일대는 백제가 사수해냈고, 끝내 520년대 중반부터는 백제에게 무력으로 복속당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무령왕 재위기인 520년대부터 전라도는 한 나라 안에서 처음으로 전체가 직접 지배세력화되게 되는데, 이것이 경상도-신라에 대응하여 전라도에 백제 계승의식이 자리잡히게 되는 이유가 된다. 전라도 일대는 이 상태로 660년 백제가 망하기 전까지 적어도 수백년 동안은 백제의 직접 지배 체제 아래에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18] 다만 이 또한 아무래도 후세인의 통설적 설명에 불과한 것은 사실. 이 시기에 백제는 영산강 유역 세력, 건마국 일대의 옛 준왕계 세력에게 베풀었던 호의적인 조치와는 달리, 유독 전라도 동부 일대의 현지인 유력자들에겐 현령 자리도 주지 않으면서 소단위 지배 단위까지 죄다 외부에서 파견해 채우는 꽤나 신경질적인 조치를 단행하게 된다. 이는 다름아닌 통일신라가, 백제 멸망 직후 옛 백제 지역 전체에게 단행한 조치와 비슷하였다. 적어도 6세기 중반 시점에선 백제에 대한 호감도와 친밀감이, 전라도 각 지역마다 제각기 달랐을 개연성은 부정할 수 없다.

일단 이렇게 백제는 6세기에 지역 체계로 22담로를 갖추고 있었는데, 6세기 중반에 가서야 완전히 전라도를 지배지로 편제한 후 백제의 지역 체계가 37군으로 개편된 것으로 보아 옛 마한 거수국들 당시 형성된 자연 경계들이 백제라는 이름 아래 체계만 달리하여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수도권의 마한 17국은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고구려가 이 지역으로 16개 행정구역을 편성한 것을 보면 이는 마한 54국 중에서 수도권 마한 17국 정도와 거의 일치한다. 즉 현재 지역 기준으로 수도권 마한 17국, 충청도 마한 12국, 전라북도 마한 10국, 광주와 전남의 마한 15국으로 추정되는데 도합 마한 54국으로 이중에서 수도권 17국을 뺀 37국과 백제 멸망 무렵의 지역 체계가 일치한다. 다시 말해 백제 복속 전에 이 지방에 있던 세력이 그대로 백제의 행정구역으로 편제된 것이다. 백제가 직접 지배를 완료한 시점에서도 옛 마한 거수국들 시절의 문화적, 경제적 경계를 무시할 수 없었음이 여기서 드러난다.

538년성왕은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으로 천도하였으며 부여 바로 아래에 있는 전북은 이때부터 차차 백제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하였다. 무왕 대에 가면 지금의 익산으로 천도하려 했는데, 왕궁리 유적이 당시 천도하려고 짓던 도시가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4.3. 통일신라시대[편집]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며 전라도는 신라에 복속되었다. 685년(신문왕 5년)에는 전국을 9주로 나누고, 5소경을 설치하였는데, 전라도에는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북도 지역에 완산주,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남도 지역 무진주가 있었다. 한편 섬진강 일대 일부는 강주(현 진주시를 중심으로 한 경남 서부)에 속했는데, 옛 가야의 영역이다.

완산주는 완주로도 불렸는데, 지금의 완주군이 그 지명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그리고 완주의 완() 자는 전() 자와 뜻이 같으므로 전주의 유래가 되었다. 한편 무진주는 광주 근교에 솟아 있는 무등산의 어원이 되었으며 현재 광주광역시에는 무진대로라는 도로명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여하튼 이때부터 전북과 전남의 틀이 잡힌 것이다. 757년에는 경덕왕이 전국의 지명을 중국식으로 고치며 비로소 전주(全州)와 무주(武州)[19]가 되었다. 고로 훗날 후백제의 왕이 되는 견훤이 '무진주에서 일어나 완산주로 수도를 옮겼다.'는 기록은 엄밀히 말하자면 틀린 것이지만, 삼국사기 기록에서도 완산주와 무진주라고 언급하는 걸로 보아 훨씬 더 먼 훗날에 조선왕조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후 한성부(漢城府)로 이름을 바꾸고 나서도 백성들은 여전히 관습적으로 한양이라 불렀던 것처럼 완산주가 경덕왕 대에 전주로 바뀌고 나서도 백성들은 관습적으로 완산주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시기에 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전라도에 정착했다. 안승이 세웠다는 보덕국은 지금의 익산에 있었는데, 문무왕의 묵인 하에 옛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의 영토 내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 보덕국은 신문왕 대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고, 보덕국 유민들 중 일부를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로 옮기면서 남원경을 설치하였다. 그 나머지 보덕국 사람들은 서라벌 혹은 익산 이남 전라남북도에 분산 배치하게 된다.

이렇게 9주 5소경을 설치한 까닭은 동쪽에 치우친 서라벌의 지리적 특성 상 지방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도 한 몫 했지만, 가장 큰 목적은 고구려백제 유민들을 다스려 신라에 동화되도록 라는 것이었다. 하여 최종적으로는 백제부흥운동을 잠재우고자 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당시까진 영산강 유역보다 다소 낙후되어 있었던 전남 동부 일대에 대한 개발사업이 행해지게 되는데, 이 시기에 통일신라가 전남 남부와 동부 일대 호족이나 인민들을 물리적으로 옮긴 예는 없으나 그 과정에서 원신라 지역 출신인들의 이주가 전남 중동부 일대에 이뤄지면서 오늘날 광주전남 서남부 일대의 영산강 호족들과 묘한 대립이 이뤄지게 된다. 이는 신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으로 등재된 3곳 즉 공주, 부여, 익산 중에서 고구려로부터 가장 먼 익산 지역에 의도적으로 보덕국을 만들었던 것과 대강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되며, 신라 입장에서는 혹시 있을지 모를 백제부흥운동의 방지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오늘날 전라도 영역 전체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의 물리적 융합이 이뤄진 격이 되었다.


4.4. 후삼국시대[편집]


백제는 허무하게 멸망하였으나,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은 끊임없이 서라벌 중앙세력을 위협했다. 신라 말기에는 청해진(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일대)을 중심으로 중국과 해상 무역을 하며 세력을 키운 장보고가 서라벌 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 배경에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조차 융화되지 못할 정도로 폐쇄적이였던 골품제 특유의 폐쇄성 때문이었다. 9주 5소경을 설치하며 고구려, 백제 유민을 융합하고자 했던 통일 초기 화합의 정신은 물거품이 되고 결국에는 신라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지 못 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옛 백제 지역 전역에서 반신라(反新羅)의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진성여왕 대에 접어들자 서라벌의 조정은 정치가 문란해져 지방을 통치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이때를 틈타 백제의 부활을 이루겠다며 무진주에서 세력을 일으킨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후백제의 왕 견훤이다. 옛 백제의 후기 중심지가 충남에 있던 것과 달리, 후백제의 중심지는 완전히 전라도에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견훤을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삼국유사에는 고기(古記)에 의하면 견훤은 전라도 광주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후자는 견훤이 왕을 칭하던 초기에 퍼뜨렸을 가능성이 크다. 견훤900년에 완산주로 수도를 옮기고 본격적으로 왕을 칭하며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이때 전북 일대는 견훤의 백제부흥운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것으로 보이며, 전북 일대에 옮겨진 옛 보덕국 유민들은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전혀 고구려 부흥을 외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와 달리 영산강 일대는 이들과 이해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영산강 유역이 백제에게 가장 늦게 복속된 지역이란 관념은, 아예 백제가 주도하는 마한 연합에서 이탈해서 대가야에게 가담했다가 무력으로 병탄당한 전남북 동부가 영산강 유역보다도 백제의 직접 지배 체제에 편입이 늦었기에 옳다고 할 수 없다.

영산강 유역 세력이 견훤의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할 동기가 약했던 사정은 나주 공방전 문서 참조. 이렇게 된 건 견훤이 아무래도 본인과 보다 관계가 밀접했던 전남 동부와 영합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영산강 유역 세력에겐 그저 그전 통일신라의 정책이 계속된다는 부정적 인상을 지운 이유가 컸다. 견훤 자체도 무려 5세기부터 신라 왕실의 직할 지배령이었던 추풍령 경북 서남부 출신이었던데다, 지배력의 원천도 다름아닌 신라 정규군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903년에는 태봉이 후방에서 쳐들어와 나주를 비롯한 전라도의 서남부 해안 지방을 점령했다. 이 전투를 나주 공방전이라 하는데, 이 당시 선봉에 섰던 것이 바로 고려창업군주가 되는 왕건이었다. 그리고 왕건은 이곳에서 두 번째 정실부인인 장화왕후 오씨를 만나게 되는데, 장화왕후의 아들이 바로 고려 제2대 국왕인 혜종이다. 장화왕후는 나주의 호족이었던 오다련의 딸이다.

이는 단순히 전쟁하러 온 장군이랑 귀족영애가 눈이 맞아 부부가 된 것이 아니라, 영산강 유역 세력이 왕건을 지지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나주 일대는 왕건의 지지 기반이 되고, 전주 일대는 견훤의 지지 기반이 되어 대립하게 되었다. 삼국시대 당시에는 전남 남서부가 백제 동성왕에게 항복한[20][21] 반면 한곳에서만 200여 기에 이르는 가야의 대형 고분군이 발견될 정도인 전남 동부가 백제에게 저항했는데, 후백제 때는 이런 구도가 뒤집힌 것. 전라도 전체를 먼 과거부터 하나의 실체로만 떠올리는 요즘 감각으론 상상이 어렵겠지만, 광주전남 서부와 동부는 유역권 자체가 달랐기에 고대에는 정치적 향배가 이렇게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가야는 영호남 소통의 열쇠로 통하기도 한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에서도 가야사 연구에 관심을 보였고, 우연의 일치인지 당시 김대중 대통령, 김종필 국무총리,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이 전부 다 김해 김씨였다. 그래서는 아니지만 초기 가야사 연구도 김해에 집중됐었는데, 가야사를 파면 팔수록 영호남 전체에 걸쳐서 김해 못지 않은 가야의 유적들이 나오게 되고, 그래서 가야사 연구에 영,호남 지자체들이 대거 참여하게 된다. 가야사 연구의 권위자인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가야는 여러 독립국들이 연합을 맺고 있는 형태로, 각각이 다 정치세력을 지닌 국가였고, 유적들도 예상보다 훨씬 넓게 분포되어 가야사 연구가 진행될수록 영,호남 주민들간의 소통이 된다고 한다.[22] 한편 사비백제 초기에는 침미다례와 달리 백제와 관계가 험악했던 옛 전라도 가야 세력이, 이번에는 견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옛 백제의 제2수도권 일대 및 광주 세력과 제휴하여 백제를 부활시키는 묘한 구도가 나타난다. 그보다 약 사백팔십년 전 무령왕이 510년대 초반에 대가야와 전쟁을 시작하면서 전남북 동부 일대를 정복하기 시작하던 때와는 정반대로 뒤집힌 양상이었다.

그렇게 후삼국시대 군사, 무역의 요충지인 나주 일대를 놓고 궁예, 왕건 그리고 견훤이 패권을 겨루게 된다. 견훤은 서남부 지역을 수복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으나 후백제의 멸망 때까지 서남부를 정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주 호족은 고려 건국의 주요 세력으로 활약한 공으로 고려 제2대 왕 혜종을 배출하기도 할 정도의 위세를 떨치며 중요한 곳으로 대접 받아 훗날 전주와 함께 전라도를 이루게 된다.

견훤은 큰아들 신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금산사에 유폐되고 말았는데, 그때 몰래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한 루트가 바로 나주였다. 그렇게 견훤이 고려에 귀순한 이후 후백제는 몰락하게 되었고, 936년 이후 고려에 복속되었다. 후삼국통일의 향방이 바로 전라도에서 결정된 것이다.

4.5. 고려시대[편집]




고려 태조후백제를 합병하고 전주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하여 옛 후백제 땅을 다스렸다. 그리고 성종983년에 전국 주요도시에 (牧)을 두었는데, 전주는 전주목, 나주는 나주목이 되었다. 그리고 995년에는 전국을 10개의 로 나누었고, 지금의 전북은 강남도(江南道), 전남은 해양도(海陽道)가 되었다.

1018년에는 현종이 10도 체제를 5도 양계로 개편하였다. 이때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쳐 전라주도(全羅州道)가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전라도의 공식적인 첫 탄생이자 광역도의 시작이였다. 이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후 다른 광역도들이 시작되었다. 참고로 당시 지정된 도(道) 단위 행정명 중 현재까지 명칭이 유지중인 지역은 경상도와 이곳 단 둘뿐이다.

4.6. 조선시대[편집]



조선>
행정구역



[ 경국대전(1485년) ]
경관직京官職
한성부漢城府
개성부開城府
외관직外官職

경기
京畿
충청도
忠淸道
경상도
慶尙道
전라도
全羅道
황해도
黃海道
강원도
江原道
영안도[1\]
永安道
평안도
平安道

도 이하 행정구역



경주慶州
전주全州


영흥永興[2\]
평양平壤
대도호부


안동安東


강릉江陵
안변安邊
영변寧邊

광주廣洲
여주驪洲
파주坡洲
양주楊洲
충주忠州
청주淸州
공주公州
홍주洪州
상주尙州
진주晉州
성주星州
나주羅州
제주濟州
광주光州
황주黃州
해주海州
원주原州

안주安州
정주定州
의주義州
도호부
수원水原
강화江華
부평富平
남양南陽
이천利川
인천仁川
장단長湍

창원昌原
김해金海
영해寧海
밀양密陽
선산善山
청송靑松
대구大丘
남원南原
장흥長興
순천順天
담양潭陽
연안延安
평산平山
서흥瑞興
풍천豐川
회양淮陽
양양襄陽
춘천春川
철원鐵原
삼척三陟
경성鏡城
경원慶源
회령會寧
종성鍾城
온성穩城
경흥慶興
부령富寧
북청北靑
덕원德源
정평定平
갑산甲山
강계江界
창성昌城
성천成川
삭주朔州
숙천肅川
구성龜城

양근楊根
풍덕豊德
안산安山
삭녕朔寧
안성安城
마전麻田
고양高陽
임천林川
단양丹陽
청풍淸風
태안泰安
한산韓山
서천舒川
면천沔川
천안天安
서산瑞山
괴산槐山
옥천沃川
온양溫陽
합천陜川
함양咸陽
초계草溪
청도淸道
영천永川
예천醴泉
영천榮川
흥해興海
울산蔚山
양산梁山
함안咸安
금산金山
풍기豐基
곤양昆陽
보성寶城
익산益山
고부古阜
영암靈巖
영광靈光
진도珍島
낙안樂安
순창淳昌
금산錦山
진산珍山
김제金堤
여산礪山
곡산谷山
봉산鳳山
안악安岳
재령載寧
수안遂安
배천白川
신천信川
평해平海
통천通川
정선旌善
고성高城
간성杆城
영월寧越
평창平昌
삼수三水
문천文川
고원高原
단천端川
함흥咸興[3\]
중화中和
상원祥原
덕천德川
개천价川
자산慈山
가산嘉山
선천宣川
곽산郭山
철산鐵山
용천龍川
순천順川
희천熙川
이산理山
벽동碧潼
운산雲山
박천博川
위원渭原
영원寧遠

현령(縣令, 종5품) 파견
용인龍仁
진위振威
영평永平
양천陽川
김포金浦
문의文義
영덕盈德
경산慶山
동래東萊
고성固城
거제巨濟
의성義城
남해南海
창평昌平
용담龍潭
임피臨陂
만경萬頃
금구金溝
능성綾城
신계新溪
옹진瓮津
문화文化
우봉牛峯
금성金城
울진蔚珍
흡곡歙谷

용강龍岡
삼화三和
함종咸從
영유永柔
증산甑山
삼등三登
순안順安
강서江西

현감(縣監, 종6품) 파견
지평砥平
포천抱川
적성積城
과천果川
금천衿川
교동喬桐
통진通津
교하交河
연천漣川
음죽陰竹
양성陽城
양지陽智
가평加平
죽산竹山
홍산鴻山
제천堤川
덕산德山
평택平澤
직산稷山
회인懷仁
정산定山
청양靑陽
연풍延豐
음성陰城
청안淸安
은진恩津
회덕懷德
진잠鎭岑
연산連山
이산尼山
대흥大興
부여扶餘
석성石城
비인庇仁
남포藍浦
진천鎭川
결성結城
보령保寧
해미海美
당진唐津
신창新昌
예산禮山
목천木川
전의全義
연기燕岐
영춘永春
보은報恩
영동永同
황간黃澗
청산靑山
아산牙山
개령開寧
거창居昌
삼가三嘉
의령宜寧
하양河陽
용궁龍宮
봉화奉化
청하淸河
언양彦陽
칠원漆原
진해鎭海
하동河東
인동仁同
진보眞寶
문경聞慶
함창咸昌
지례知禮
안음安陰
고령高靈
현풍玄風
산음山陰
단성丹城
군위軍威
비안比安
의흥義興
신녕新寧
예안禮安
연일延日
장기長鬐
영산靈山
창녕昌寧
사천泗川
기장機張
웅천熊川
광양光陽
용안龍安
함열咸悅
부안扶安
함평咸平
강진康津
옥과玉果
고산高山
태인泰仁
옥구沃溝
남평南平
흥덕興德
정읍井邑
고창高敞
무장茂長
무안務安
구례求禮
곡성谷城
장성長城
진원珍原
운봉雲峯
임실任實
장수長水
진안鎭安
무주茂朱
동복同福
화순和順
흥양興陽
해남海南
대정大靜
정의旌義
장련長連
송화松禾
장연長淵
강령康翎
은률殷栗
강음江陰
토산兔山
이천伊川
평강平康
김화金化
낭천狼川
홍천洪川
양구楊口
인제麟蹄
횡성橫城
안협安峽
홍원洪原
이성利城
길성吉城
명천明川
양덕陽德
맹산孟山
태천泰川
강동江東
은산殷山

대마對馬[4\]
[1\] 1470년(성종 1) 함경도에서 개칭, 1498년(연산군 4) 함경도로 개칭.
[2\] 1470년(성종 1) 대도호부에서 승격, 1498년(연산군 4) 대도호부로 강등.
[3\] 1470년(성종 1) 부에서 강등, 1498년(연산군 4) 부로 승격.
[4\] 1592년 기점으로 속주로서의 지위 상실.



[ 23부제(1895년) ]

한성부(漢城府)
한성, 고양, 파주, 교하, 적성, 양주, 포천, 영평, 연천, 광주(廣州), 가평
인천부(仁川府)
인천, 부평, 강화, 교동, 김포, 통진, 양천, 시흥, 과천, 안산, 수원, 남양
충주부(忠州府)
충주, 제천, 청풍, 단양, 영춘, 음성, 진천, 괴산, 연풍, 청안, 여주, 이천(利川), 음죽, 용인, 양지, 죽산, 원주, 평창, 정선, 영월
홍주부(洪州府)
홍주, 결성, 예산, 덕산, 대흥, 서산, 해미, 태안, 청양, 정산, 아산, 온양, 신창, 당진, 면천, 보령, 남포, 서천, 비인, 한산, 임천, 홍산
공주부(公州府)
공주, 천안, 목천, 직산, 진위, 평택, 안성, 양성, 회덕, 진잠, 연기, 전의, 은진, 연산, 노성, 부여, 석성, 청주, 문의, 보은, 회인, 옥천, 청산, 영동, 황간, 금산(錦山), 진산
전주부(全州府)
전주, 고산, 익산, 함열, 여산, 용안, 옥구, 임피, 김제, 금구, 만경, 정읍, 고부, 태인, 부안, 고창, 흥덕, 무장, 장성, 영광, 지도
남원부(南原府)
남원, 운봉, 장수, 무주, 진안, 용담, 임실, 순창, 담양, 창평, 곡성, 옥과, 구례, 순천(順天), 광양, 돌산
나주부(羅州府)
나주, 남평, 광주(光州), 능주, 화순, 동복, 낙안, 흥양, 보성, 장흥, 강진, 해남, 영암, 함평, 무안, 진도, 완도
제주부(濟州府)
제주, 정의, 대정
진주부(晉州府)
진주, 산청, 단성, 함양, 안의, 하동, 거창, 사천, 곤양, 남해, 합천, 초계, 삼가, 고성(固城), 의령, 함안, 칠원, 창원, 진해, 웅천, 김해
동래부(東萊府)
동래, 기장, 양산, 거제, 울산, 언양, 경주, 연일, 장기, 흥해
대구부(大邱府)
대구, 현풍, 경산, 하양, 자인, 인동, 칠곡, 선산, 금산(金山), 지례, 개령, 성주, 고령, 청도, 영천(永川), 신녕, 의성, 비안, 군위, 의흥, 밀양, 창녕, 영산
안동부(安東府)
안동, 예안, 청송, 진보, 영양, 청하, 영천(榮川), 순흥, 풍기, 상주, 함창, 문경, 예천, 용궁, 영덕, 영해, 봉화
강릉부(江陵府)
강릉, 울진, 평해, 삼척, 양양, 고성(高城), 간성, 통천, 흡곡
춘천부(春川府)
춘천, 홍천, 낭천, 횡성, 양구, 인제, 철원, 김화, 금성, 평강, 회양, 양근, 지평
개성부(開城府)
개성, 풍덕, 장단, 삭녕, 마전, 이천(伊川), 안협, 금천, 토산, 평산, 수안, 신계, 곡산
해주부(海州府)
해주, 연안, 배천, 옹진, 강령, 장연, 송화, 풍천, 안악, 은률, 장련, 재령, 신천, 문화, 서흥, 봉산
평양부(平壤府)
평양, 삼화, 용강, 강서, 증산, 함종, 중화, 상원, 황주, 강동, 삼등, 성천, 양덕, 안주, 영유, 숙천, 순안, 순천(順川), 은산, 자산, 맹산, 영원, 개천, 덕천, 영변, 운산, 희천
의주부(義州府)
의주, 용천, 선천, 철산, 정주, 곽산, 박천, 가산, 태천, 구성, 삭주, 창성, 벽동
강계부(江界府)
강계, 후창, 자성, 초산, 위원, 장진
함흥부(咸興府)
함흥, 덕원, 정평, 영흥, 고원, 문천, 안변, 단천, 이원, 북청, 홍원
경성부(鏡城府)
경성, 부령, 길주, 명천,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
갑산부(甲山府)
갑산, 삼수


[ 13도제(1896년) ]


경기도
광주(廣州), 개성, 강화, 인천, 수원, 여주, 양주, 장단, 통진, 파주, 이천(利川), 부평, 남양, 풍덕, 포천, 죽산, 양근, 안산, 삭녕, 안성, 고양, 김포, 영평, 마전, 교하, 가평, 용인, 음죽, 진위, 양천, 시흥, 지평, 적성, 과천, 연천, 양지, 양성, 교동
충청북도
충주, 청주, 옥천, 진천, 청풍, 괴산, 보은, 단양, 제천, 회인, 청안, 영춘, 영동, 황간, 청산, 연풍, 음성
충청남도
공주, 홍주, 한산, 서천, 면천, 서산, 덕산, 임천, 홍산, 은진, 태안, 온양, 대흥, 평택, 정산, 청양, 회덕, 진잠, 연산, 노성, 부여, 석성, 비인, 남포, 결성, 보령, 해미, 당진, 신창, 예산, 전의, 연기, 아산, 직산, 천안, 문의, 목천
전라북도
전주, 남원, 고부, 김제, 태인, 여산, 금산(錦山), 익산, 임피, 금구, 함열, 부안, 무주, 순창, 임실, 진안, 진산, 만경, 용안, 고산, 옥구, 정읍, 용담, 운봉, 장수, 구례
전라남도
광주(光州), 나주, 영암, 영광, 순천(順天), 제주, 보성, 흥양, 장흥, 함평, 강진, 해남, 무장, 담양, 능주, 낙안, 무안, 남평, 진도, 흥덕, 장성, 창평, 광양, 동복, 화순, 고창, 옥과, 곡성, 완도, 지도, 돌산, 대정, 정의
경상북도
상주, 경주, 대구, 성주, 의성, 영천(永川), 안동, 예천, 금산(金山), 선산, 청도, 청송, 인동, 영해, 순흥, 칠곡, 풍기, 영덕, 용궁, 하양, 영천(榮川), 봉화, 청하, 진보, 군위, 의흥, 신녕, 연일, 예안, 개령, 문경, 지례, 함창, 영양, 흥해, 경산, 자인, 비안, 현풍, 고령, 장기
경상남도
동래, 진주, 김해, 밀양, 울산, 의령, 창녕, 창원, 거창, 하동, 합천, 함안, 함양, 고성(固城), 양산, 언양, 영산, 기장, 거제, 초계, 곤양, 삼가, 칠원, 진해, 안의, 산청, 단성, 남해, 사천, 웅천
황해도
황주, 안악, 해주, 평산, 봉산, 연안, 곡산, 서흥, 장연, 재령, 수안, 배천, 신천, 금천, 문화, 풍천, 신계, 장련, 송화, 은률, 토산, 옹진, 강령
평안남도
평양, 중화, 용강, 성천, 함종, 삼화, 순천(順川), 상원, 영유, 강서, 안주, 자산, 숙천, 개천, 덕천, 영원, 은산, 양덕, 강동, 맹산, 삼등, 증산, 순안
평안북도
의주, 강계, 정주, 영변, 선천, 초산, 창성, 구성, 용천, 철산, 삭주, 위원, 벽동, 가산, 곽산, 희천, 운산, 박천, 태천, 자성, 후창
강원도
춘천, 원주, 강릉, 회양, 양양, 철원, 이천(伊川), 삼척, 영월, 평해, 통천, 정선, 고성(高城), 간성, 평창, 금성, 울진, 흡곡, 평강, 김화, 낭천, 홍천, 양구, 인제, 횡성, 안협
함경남도
덕원, 함흥, 단천, 영흥, 북청, 안변, 정평, 삼수, 갑산, 장진, 이원, 문천, 고원, 홍원
함경북도
경흥, 길주, 회령, 종성, 경성, 경원, 온성, 부령, 명천, 무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전라도는 조선시대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다만 일시적으로 도의 이름이 바뀐 적은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도의 명칭의 유래가 된 고을에서 역모나 하극상 등의 일이 있으면 그 고을의 등급을 강등시킴과 함께 도의 명칭에서 빼버리고 다른 고을의 명칭을 가져와서 도의 명칭을 정했다. 충청도는 광해군 때 청주, 충주에서 차례대로 반란이 일어나 충홍도(忠洪道, 충주+홍주)로 바뀌었다가 다시 공홍도(公洪道, 공주+홍주)로 바뀌었고, 인조반정 후 충청도로 복귀한다. 강원도는 원주에서의 반란으로 강춘도(江春道, 강릉+춘천)로 바뀌었다.

1645년(인조 23년)에 나주에서 향리가 나주목사를 상해를 입히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나주목을 금성현(錦城縣)으로 강등하고 나주 대신 남원을 따서 전남도(全南道)라 하였다. 1654년(효종 5년)에 금성현은 나주목으로, 전남도는 전라도로 복구되었다. 그러나 1년 후 1655년 나주에서 전패(殿牌)가 파손되는 사건이 일어나 다시 금성현으로 강등되고 전남도가 되었다. 이후 광남도(光南道) 등으로 개칭했다가 복귀했다. 전라도에서는 전주, 나주와 함께 광주, 남원이 위상이 높은 도시였으므로 광주나 남원 중에서 이름을 정했다. 다만 1589년 정여립의 난에도 불구하고 전주는 풍패지향이라는 이유로 강등되거나 도명이 바뀌지는 않았다.

1728년(영조 4년)에는 이인좌의 난에 나주가 연루되어 나주목이 강등되고 대신 광주를 넣어서 전광도(全光道)로 도의 명칭이 바뀌었다. 이 일과 관련해 영조는 경상도에도 영남을 토벌했다며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우기도 하였다. 1737년(영조 11년)에 다시 나주가 부로 재승격되면서 강원도와 함께 원래 이름을 되찾게 된다.

전라도는 본래 조선 왕실의 본관이 있는 곳으로, 왕조 초기부터 전주는 왕실로부터 풍패지향(豊沛之鄕)[23]이라고 불리며 특별한 대우를 받아 전주부가 되었고, 전라감영을 전주에 두었다. 그리고 호남은 조선 중기부터 서인의 정치적 기반이 되는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1416년에는 탐라국이 완전히 한반도 국가에 복속되어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을 설치하고 전라도에 귀속되었다. 제주도는 1914년 독립 행정구역이 될 때까지 500년 동안 전라도 소속이 되었다.

1894년 6월 23일에는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23부제를 시행하며 전라도가 사라지고 전주부, 나주부, 남원부, 제주부의 4개 부(府)로 나뉘었다. 그러나 겨우 1년 뒤인 1895년 8월 4일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 체제로 전환하게 됨에 따라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로 개편되었고, 산하에 1개 목[24]과 58개 군을 두게 되었다. 전라북도감영(現 전라북도청)은 전주에, 전라남도감영(現 전라남도청)은 광주에 두었다.

4.7. 근현대[편집]


전라도에서 부가 다시 등장한 건 1897년무안군무안부로 승격되면서부터였다. 이 당시 무안부가 승격된 건 목포가 개항장으로서 중요한 위치가 되면서 로 승격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었다. 이때부터 목포가 전라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뒤따라 1899년에는 지금의 군산시 일대에 있었던 옥구군옥구부로 승격되었다. 전통적으로 전라도의 맹주도시였던 전주와 나주보다 목포와 군산이 먼저 부로 승격되며 전라도의 중심지가 옮겨 가게 된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 무안부는 목포부로, 옥구부는 군산부로 개칭되었고, 1935년에는 광주군 광주읍이 광주부로, 전주군 전주읍이 전주부로 승격되었다. 1940년대에 가서 광주가 전라도 제1의 도시로 올라서게 되었다. 이 당시 전라도의 도시 규모는 광주, 목포, 전주, 군산 순이었다.

해방 이후인 1947년에는 익산군 이리읍이 이리부로 승격되었고, 1949년에는 여수군 여수읍이 여수시로, 순천군 순천읍이 순천시로 승격되었다. 여수와 순천 두 지역은 해방정국 당시 극렬한 좌우대립 속에서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며 크게 몸살을 앓았던 지역으로, 특히 전라도 동부의 지리산은 산이 크다 보니 빨치산이 은거하기 좋은 장소가 되어버려 여순반란 이후로도 몇 년 동안이나 토벌작전이 시행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1963년에는 금산군충청남도로 이관되었고, 익산군 일부 지역이 충청남도 논산군으로 편입되었다. 1986년에는 전라남도 광주시가 광주직할시(現 광주광역시)로 승격되어 최종적으로는 1광역시, 2도가 전라도에 있게 되었다.

4.8. 현대: 인구 유출과 경기 침체[편집]


가장 높은 지방 인구 유출을 보이고 있으며, 그때문에 자본 투자가 줄어들고 있다. 이는 전라도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 재밌는 사실은 전라도는 고려, 조선시대엔 인구가 많았고 도시(당시엔 큰 고을)도 많았지만 한국전쟁 이후로 이런 인구유출 현상을 보였기에 마치 도심 공동화 현상과 비슷하다는 것.

전국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장 인구 유출이 심각하다. 비수도권 지역의 인구 감소가 예사로운 일이라고 해도 전라도는 특히 심각하다. 당연히 안 그래도 안 좋은 경기 침체를 가속화시켜 전남, 전북, 광주의 GDP는 순위에서 서로 끝을 다투고 있는 악재가 계속되고 있으며, 전국에서도 특히 인구 증대, 재정 자립도, 지역민 복지 수준 등에서 하위권을 차지한다. 다만 최근에는 경상도의 인구 감소도 심각해지고 있다.

타 지역에 비해 타 도시나 수도권으로 이탈한 전라도 출신 지역민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이는 인구 증감과 관련된 자료를 살펴봐도 알 수 있다.

1949년 → 2022년 기준
  • 전북 약 205만 → 약 178만(약 27만, 13% 감소)
  • 광주·전남 약 304만 → 약 330만(약 26만, 9% 증가)

로 타 지역[자료]에 비해 증가세가 정체되있고 특히 전북은 대한민국 총 인구가 약 2,018만 → 약 5,165만으로 약 3,147만명이 증가하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인구가 감소한 지역이다.

간접적으로도 알 수 있는게 2018년에는 투표로 선출된 서울특별시 25개 구청장 중에서 구로구, 서초구, 금천구, 중구, 강서구 5개 구청장을 제외한 20개 구청장 출신 지역이 전라도다. 16개 구청장은 광주광역시전남 출신이고, 4개 구청장은 전북 출신이다.

일자리가 있는 타 지역으로의 인구 유출이 많아지면서, 이주자들은 지역 텃세에 맞서기 위해 지연을 중심으로 뭉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이는 호남향우회와 같은 단체의 확장을 가져왔다. 또한 육전, 떡갈비, 홍어 등 전라도 지역의 식문화나, 타이거즈 야구단 등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문화가 이주자들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타향에서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 '전라도', '호남' 등을 포함한 연고 지역을 간판에 나타내기도 하였으며, 서울 수도권 등지에서 빈번하게 보이는 전라도 관련 자영업 상호는 이러한 상경민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진보 진영에서 전라도 민심에 각별히 신경쓰는 이유이기도 한데 어느 정도 이념 대립이 완화되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전라도 현지 여론이 움직이면 몇달 후 서울 및 수도권 여론도 움직이고, 반대로 서울에서 여론이 움직여도 전라도 현지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그만 수그러들고 만다고 한다.

다만, 전라도의 인구가 충청도에 추월당하게 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충청도는 특정 이념, 특정 지역의 편을 들기보다는 조절자 성향을 보여왔던 지역으로 이보다는 최근 진보 정권에서의 실정 등에 관해서는 전라도에서야 옹호 여론이 우세하더라도 수도권에서는 비판 여론이 우세한 등 전라도 여론이 수도권 여론을 움직인다고는 볼 수 없어지고 있다. 당연히 전라도 현지 여론과 수도권 여론이 항상 똑같을 수는 없지만 2010년대 정도까지는 어느 정도 그런 경향이 남아 있었다. 다만 전라도 외에 경상도 등 다른 지역들에서도 수도권으로의 인구 유출이 심해지고, 처음부터 수도권 태생인 세대들이 늘어가면서 현재에는 수도권과 전라도는 정치성향상 큰 연관이 없는 편이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전라도가 민주 진보 정권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며 그 이후에는 정권에 달렸지만 이후 각성하고 반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고 하겠다.

4.9. 사료[편집]


태조 왕건훈요 10조에서 언급한 '차현(차령) 이남, 공주강(금강) 바깥'이 이 지역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고, 이를 두고 지역감정과 결부시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런 의견은 사서에선 공주강 이북으로 적혀있는 걸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이남으로 해석해 억지로 전라도와 결부시키는 등 사실상 역사왜곡이랑 다를 바 없는 엉터리 해석을 기저에 깔고 있다.[25] 또한 지금의 차령산맥은 1903년 일본인 지질학자가 인부 4명과 당나귀 6마리로 14개월 동안 만든 산맥체계에 의해 처음으로 생긴 지명이라 왕건이 말하는 차현이랑은 아예 다르다. 심지어 차령산맥을 100여 년 동안 배워왔지만 2000년 대에 국토연구원에서 인공위성을 통해 측정한 결과 지하에 지맥도 없고, 그냥 흔한 낮은 구릉지대라고 한다. 역사에도 없고, 실재하지도 않던 차령산맥을 기준으로 해석하려니 공주강 이북을 공주강 이남으로 곡해하거나 흐지부지 넘어가거나 아예 생략하는 억지를 부린 것이다. 잘못된 훈요10조 해석에 관한 사안은 훈요 10조 문서에도 잘 정리되어 있다.

당장에 조작된 해석을 믿으면 고려는 전라도 인물을 등용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고려 역사 곳곳에는 전라도 출신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풍수지리의 비조 도선,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버린 신숭겸, 6대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보필하며 태사(太師)로 추증된 최지몽도 전라도 출신이다. 무엇보다 고려 왕실 자체가 전라도와 밀접한 관계이다. 태조 왕건의 장자(長子)로서 왕건의 적통을 이어 왕위에 오른 혜종은 전라도 나주 출신이며, 공예태후는 고려 18대 왕 의종, 19대 왕 명종, 20대 왕 신종의 모후(母后)이시자 여인의 몸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고려 왕실을 지키신 분인데 전라도 장흥 출신이다. 고려 2대 혜종의 직계인 고려 8대 왕 현종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전라도 나주로 몽진을 가기도 하였다. 그런 8대 현종 즉위 후 3대 정종에서 7대 목종의 세력 기반인 충청도 일부 지역을 견제하려고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고려 왕조를 통틀어 불천지주(不遷之主)에 오른 왕은 태조, 혜종, 현종 세분 뿐이다. 애초에 '차현 이남, 공주강 바깥'이란 지역에 대한 해석에 문제가 있다. 고려에서 강 외(外) 즉 강의 바깥(外)은 강을 관할하는 행정구역 바깥을 의미하는데, 공주성은 공주강 남쪽에 있으므로 공주강 외(外)는 공주강 북쪽을 의미한다. 즉 차현 이남(금북정맥 이남)과 공주강 북쪽(금강 북쪽) 즉 그 사이 지역이 된다. 통일 과정에서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할 때, 청주 민호 1천호가 철원으로 이주하였을만큼 친궁예 지지기반이던 청주를 포함한 지역 일대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경상도와 함께 '하삼도(下三道)', '삼남(三南)'으로 불리기도 했다.[26] 붕당 정치가 시작되기 전 면앙 송순, 기대승, 이항 등과 같은 유학자가 나와 조선 성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고, 붕당 형성에도 기여를 하였다.

선조시기 정여립의 난으로 인해 발생한 기축옥사에 휘말렸다. 직접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수백명이며[27] 정여립과 무관하게 정개청을 추존한 사실 때문에 금고된 자가 400명, 죄인으로 억울하게 몰린 자가 50명, 그 중 유배형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은 자가 20명에 달하는 등 호남유림이 와해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고 전라도가 반역향으로 일시간 지정되었으나, 정여립 출신 지역이 왕실의 관향으로 풍패지향(豊沛之鄕)인 전주이고 직후 벌어진 임진왜란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정여립이 전주 출신임을 들어 전주를 엮으려다 본관 자체가 사라진 가문도 있었다. 선조가 "짐이 간악한 정철에게 속아 호남의 어진 선비들이 고초를 겪었다"고 언급하며 호남에 대한 실질적인 복권이 이루어졌다. 호남과는 별도로 정여립 사건 자체는 이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집권한 북인에 의한 복권시도가 있었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북인도 숙청당하면서, 숙종 대에 남인도 경신대출척과 갑술환국으로 축출당하고 권력과 멀어지면서 반란으로 규정되었다.

당시 정여립 사건으로 호남 유림이 와해되어 어려움을 겪었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이 일어서니, 예를 들어 임진왜란 초기 관군이 기를 쓰고 싸운 몇 안 되는 전투 중 하나인 동래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해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도 감복했다는 동래부사(현 부산광역시장) 송상현(宋象賢)이 전라도 정읍 출신이고, 임진왜란 전투 중에서도 대혈전으로 꼽히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전라도 화순 출신,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黃進) 전라도 남원 출신, 사령관 격인 김천일(金千鎰) 의병장 전라도 나주 출신, 사천 현감 장윤(張潤) 전라도 순천 출신, 형제 의병장 강희보, 강희열 전라도 광양 출신...등. 결국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최경회 전사, 황진 전사, 김천일 전사, 장윤 전사, 강희보 전사, 강희열 전사, 김천일 아들 김상건 전사, 고경명 아들 고종후 전사...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 100,000명에 대적해 10,000명이 안되는 6,700명으로 싸웠으며, 호남 의병은 3,500명이 참전하여 3,500명이 순절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 전라도 여수를 떠나 한산도로 군진을 옮기는 시점에 즈음하여 친구인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쓴 편지에서 그 동안의 소회를 밝히며 '호남 없이는 나라도 없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사적인 편지에서 호남의 지정학적인 전략적 중요성을 언급하기보다는 정황상 그 동안 생사를 넘나들며 함께 지낸 호남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과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그나마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호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하겠다.

호남 지역은 정여립의 난으로 호남 내 동인 계열이 많이 숙청되면서 인조반정 이후에는 노론·소론의 세가 강했다고 한다. 동인이 대거 사라졌으니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인 측면이 있고, 또한 이는 광산 김씨의 영향이 크다. 특히 서인의 종장(宗匠) 사계 김장생 가문이 그렇다. 사계 가문은 학문의 연원이 깊고, 종통이 무거워 한양 권문세가들의 기를 꺾을 수 있는 능력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한양 명문 거벌들의 수장으로서 종주(宗主) 역할을 하였다. 조선 양대 문벌(文閥)로 불리운 두 가문을 일컬어 '연리광김(延李光金)' 또는 '광김연리(光金延李)'라고 하는데, 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각각 7명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였다(양관 대제학 기준으로 홍문관 설치 이전까지 포함하면 광산 김씨 8명이고, 연안 이씨도 조선 초기 대제학 이전 명칭인 대학사까지 포함하면 8명이다.). 정여립 사건 이전에도 동인과 서인의 세가 비슷했던 호남 지역과 달리 영남 지역은 북인의 몰락으로 세가 약해진 인조반정 이전에도 남인을 주축으로 동인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서인은 극소수였다. 호남 지역은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의병장 전라도 광주 출신 고경명(髙敬命) 장군의 경우도 서인이었을만큼 처음부터 동인과 서인의 세가 비슷했던 반면 영남 지역은 북인이 몰락하고 서인 계통의 붕당이 집권한 이후에도 남인이 대세였다.

어느 조선 후기 척제(瘠齊) 이서구(李書九, 1754~1825)라는 사람이 단가 "호남가"를 지은 적이 있다. 이 사람은 1793(정조 17)년과 1820(순조 20)년 2차례 전라 감사를 역임한 바 있는데, 전라도 곳곳에는 이서구와 관련된 민간 전승이 다수 남아 있다. 이 "호남가"를 보면, 조선 시대 전라도의 여러 고을들이 나와 있다. 여기에는 진산(珍山) 등 누락된 고을도 있으며, 현재는 충청남도로 편입된 금산군 및 전라도에서 분리된 제주도도 포함되어 있다. 아래 시를 자세히 보면 각각의 고을 이름을 의역하여 나름대로 의미와 내용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서구는 천문, 수리, 풍수에 능했고, 이로 인해 여러 설화를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이서구가 "물은 30장(丈)이 내려가고, 땅은 30장(丈)이 올라온다"고 했던 곳은 훗날 새만금 간척지가 되었고, "이 앞으로 화마(火馬)가 지나간다"고 했던 곳은 훗날 기차가 지나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咸平(함평) 天地(천지) 늙은 몸이 光州(광주) 故鄕(고향)을 보랴 하고,

濟州(제주)[28]

>漁船(어선) 빌려타고 海南(해남)으로 건너갈 제,

興陽(흥양)에 돋은 해는 寶城(보성)에 비쳐 있고,

高山(고산)에 아침 안개 霊岩(영암)을 둘러 있다.

泰仁(태인)하신 우리 聖君(성군) 藝樂(예악)을 長興(장흥)하니,

三台六卿(삼태육경)은 順天心(순천심)이요, 方伯守令(방백수령)은 鎭安民(진안민)이라.

高敞城(고창성) 높이 앉아 羅州(나주) 風景(풍경)을 바라보니,

萬丈(만장) 雲峰(운봉) 높이 솟아 層層(층층)한 益山(익산)이요,

百里(백리) 潭陽(담양) 흐르는 물은 굽이굽이 萬頃(만경)인데,

龍潭(용담)에 맑은 물은 이 아니 龍安處(용안처)[29]

이며,

陵州(능주)의 붉은 꽃은 골골마다 錦山(금산)[30]

이라.

南原(남원)에 봄이 들어 各色花草(각색화초) 茂長(무장)하니,

나무 나무 任實(임실)이요, 가지 가지 玉果(옥과)로다.

風俗(풍속)은 和順(화순)이요, 人心(인심)은 咸悅(함열)인데,

異草(이초)는 茂朱(무주)하고, 瑞氣(서기)는 靈光(영광)이라.

昌平(창평)한 좋은 세상 務安(무안)을 일삼으니,

士農工商(사농공상) 樂安(낙안)이요, 父子兄弟(부자형제) 同福(동복)이라.

康津(강진)의 商賈船(상가선)은 珍島(진도)로 건너갈 제,

金溝(금구)의 금을 일어 싸 놓으니 金堤(김제)로다.

農事(농사)하는 沃溝百姓(옥구백성) 臨陂城(임피성)을 둘러 있고,

井邑(정읍)의 井田(정전)법은 納稅人心(납세인심) 淳昌(순창)하고,

古阜(고부) 春陽(춘양) 楊柳色(양류색)은 光陽春風(광양춘풍) 새로워라.

谷城(곡성)에 묻힌 선비 求禮(구례)도 하거니와,

興德(흥덕)하기를 나날이 時習(시습)하니, 扶安齊家(부안제가) 이 아닌가.

우리 湖南(호남) 좋은 法聖(법성) 全州百姓(전주백성)을 거느리고[31]

,

長城(장성)을 널리 싸고 長水(장수)로 돌렸는데,

礪山(여산)돌 칼을 갈아 南平樓(남평루)에 꽂아 놓으니,

어느 外方之國(외방지국)이 輕擧(경거)할 뜻을 둘까 보냐.


5. 인구[편집]


{{{+1 ''' {{{#000000 광역자치단체 인구현황
2023년 3월}}} ''' }}}











전라남도
1,813,872명


전라북도
1,765,175명


광주광역시
1,432,049명



{{{+1 ''' {{{#000000 주요도시 인구순위
2023년 3월}}} ''' }}}











광주광역시
1,427,508명


전주시
647,987명


순천시
278,649명


여수시
273,917명


익산시
272,602명


군산시
261,601명


목포시
215,956명


광양시
152,070명



전라도 인구 추이











1960년
5,948,265명


1966년
6,569,976명


1970년
6,318,921명


1975년
6,440,526명


1980년
6,067,426명


1985년
5,950,506명


1990년
5,716,402명


1995년
5,226,522명


2000년
5,239,922명


2005년
5,021,548명


2010년
5,242,084명


2015년
5,250,906명


2020년
5,105,715명


2022년 6월
5,040,097명



6. 지리[편집]



6.1. 자연지형[편집]


전라도는 백두대간의 끝자락에 있는 땅으로서,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지리산, 북쪽으로는 금남정맥을 경계로 삼고 그 안에 있다. 그리고 전라도에는 두 개의 큰 강이 흐르는데, 금남정맥과 백두대간 사이로 흐르며 서해로 나가는 금강과, 호남정맥에서 발원해 서해로 나가는 영산강이다.

그리고 금강의 하구 지역에 충적되어 호남평야가 만들어지고, 영산강의 하구 지역에 충적되어 나주평야가 만들어졌다.

호남평야는 한반도 최대의 평야로서, 무려 면적이 3,500km²에 달한다. 호남평야 지역은 곡창지대로 유명하며 쌀이 많이 생산된다. 여기에 나주평야까지 합치면 한반도에서 거의 절반에 달하는 쌀이 여기서 나온다. 현대에 경상도의 공업지대가 나라를 먹여 살릴 중요한 지역으로 취급 받는다면, 농업국가였던 조선시대에는 전라도가 그 공업지대와 맞먹는 위상을 지녔던 것이다. 또한 꾸준히 간척사업을 벌여 전라도의 평야는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반면 전라도 동부는 험준한 산지다. 전북 동부는 진안고원으로, 같은 전북도내의 서부 지역과는 완전히 다른 지리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전라도의 해안은 빙하기 이후 해수면의 상승으로 인해 생긴 리아스식 해안으로, 먼 바다에 나가도 수심이 많이 깊어지지는 않는다. 이러한 특성으로 갯벌이 발달하였고, 또한 많아 다도해라고 한다. 이 섬들이 해수면이 낮았던 빙하기에는 모두 산등성이였던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무려 해안선이 전주 인근까지 들어왔던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군산은 그냥 섬이 많은 바다였고, 익산, 김제, 부안도 바다 한가운데였다는 말이 된다. 내륙 쪽에 박혀 있는 전주가 괜히 전북의 중심이 된 게 아니다. 그 당시 해안에 있던 갯벌이 훗날 호남평야로 변하면서 훌륭한 토질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것이 현대에는 약점이 되어 전라도에는 큰 항구를 건설할 수 없게 되었고, 수심이 동해보다 깊지 않은 까닭에 동해보다 수온이 차갑지가 않고, 조수 간만의 차이가 커서 바닷가 수심이 일정하지 않아 대량의 차가운 냉각수를 필요로 하는 원자력 발전소 입지에도 적합하지 못해서 상대적으로 전라도가 경상도에 비해 발전이 뒤쳐지게 된 원인이 되었다. 또한 전라도는 농지가 많았으므로 한국이 농업국가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 한 1970년대에는 농지보호의 명목으로 공업지구가 들어서지 않기도 했고, 1970년대 서해 건너에 있던 중국 경제가 후진적이고 극심한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국가간 교류가 없었던 원인도 있었다.

6.2. 인문지리[편집]


전라도의 문화권은 전주시를 구심점으로 하는 전북 문화권과 광주광역시를 구심점으로 하는 광주·전남 문화권으로 나뉘고, 이에 따라 남북도 간에도 역사적, 문화적인 부분과 말씨 등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6.2.1. 생활권[편집]


전라도는 크게 두 개의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광주를 중심으로 한 광주·전남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북이다. 그리고 광주·전남 안에서도 광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의 전남 서부와 여수, 순천, 광양을 중심으로 한 전남 동부로 나뉜다.

광주전남과 전북은 대개 노령산맥을 경계로 나뉜다. 다만 노령산맥이 온전히 전남북의 경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북 동반부는 노령산맥 이남에 있으나 전북이고, 영광군은 노령산맥 이북에 있으나 전남이다. 사실 노령산맥이 전남북 경계에 걸리는 곳은 정읍시, 고창군 - 장성군 뿐.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전북의 드넓은 호남평야가 이어지다가 큰 산이 보이는데, 이곳이 노령이고 이 산의 호남터널을 지나면 전남이다. 이 노령은 과거부터 전북과 전남을 구분했으며 현재도 전북과 광주, 전남의 생활권/문화권을 구분짓고 있다. 그리고 전남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호남정맥을 경계로 전남 동부가 나오는데, 이 지역이 바로 전라도 최대의 공업지구다.

전북과 광주, 전남의 사투리 차이도 크게 존재하며 도시권 역시 다르다. 실제로 광주광역시전라북도에 도시권을 미치는 범위는 고창군 정도이며 나머지 도시들은 정읍시순창군처럼 전북 남부에 위치해 있어도 전주시의 도시권 영향을 매우 크게 받는다. 광주, 전남과 전북의 자연적 지리특성이 과거부터 두 지역을 구분 지었고 현재도 도시권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전라도일지라도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사투리의 경우 흔히 접하는 전형적인 전라도 방언의 경우, 광주, 전남 방언이고, 전북 지역의 방언은 북쪽으로 갈수록 충청 방언과 가까워지는 특성이 있다.

전남 동부는 이주노동자 비율도 많고 경상도와 가깝기 때문에 방언도 전남 동부와는 또 차이가 있다. 그리고 동부로 갈수록 동남 방언이랑 비슷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호남 지역 생활권은 아래와 같다.


  • 군산-익산 생활권
    • 군산시, 익산시(+충청남도 서천군[32])

  • 목포 생활권
    • 목포시, 나주시[33], 무안군, 신안군, 영암군, 함평군, 해남군, 진도군, 완도군, 강진군, 장흥군


  • 남원 생활권
    • 남원시, 장수군, 임실군[34], 곡성군


6.2.2. 도시[편집]


광역시로는 광주광역시가 있고, 대도시 특례를 받는 도시로는 전주시가 있다. 광주와 전주는 각각 전남과 전북의 중심도시 역할을 하고있다. 실제로 전라남도광주광역시를 중심으로 도로가 뻗어나가는 형태로 도로가 건설되어 있으며, 전라북도 역시 전주시를 중심으로 한 교통망이 많이 개설되어 있다. 다만 철도의 중심지는 익산역이 있는 익산시이다.

광주전주 이외에도 많은 중소도시가 있다. 전남목포시는 전남 서부의 중심도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순천시는 동부의 중심도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여수시는 거대한 석유화학단지가 있는 공업도시이며 광양시는 제철 산업이 발달하고 전남 최대의 항구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 전북익산시는 전라도의 철도 집결요새 역할을 하고 있는 철도의 도시이며 익산국가식품클러스터를 통한 산업이 발전하고 전주의 배후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35] 군산시 역시 산업이 발달하고 항구가 발달했으며 새만금의 중심도시로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시되는 도시이다.

6.2.3. 식문화[편집]


전라도는 음식과 요리가 전국 기준으로 상당히 발달한 것으로 유명하다. 연예계에서는 김수미, 김가연, 박지영, 박나래, EXID혜린 등 요리 잘하는 전라도 출신 인물을 볼 수 있고, 그래서인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에서 요리의 달인이라 하면 전라도 출신으로 설정하는 편.[36] 보통 남도 음식으로 통용된다.

그래서 전라도 지역은 식문화가 발달되었다는 인식이 있다. 실제로 전라도라 하면 음식부터 떠올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홍어, 젓갈[37], 한정식 등이 특히 발달되었다. 남부지방에 위치해 기후가 온화하고, 이 귀하던 시절에 쌀로 과자를 만들어 먹을 정도로 전통적으로 물산도 많고, 사람도 많아 식문화가 발달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특히 무주, 진안, 장수 등의 산지 지역과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은 김제평야와 같은 평야 지역, 그리고 지척에 바닷가인 군산이 서로 맞닿아 물산이 풍부한 전주 같은 경우가 음식으로 유명하다. 이와 같은 조건을 갖춘 곳으로 광주전남의 물자가 집중된 나주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남부지방의 더운 기후 탓에 양념을 강하게 치고, 젓갈류와 장류가 발달했으며, 서남해안 갯벌이 있고, 드넓은 평야가 있어서 물산이 풍부해 식재료가 다양하다.[38] 음식 종류가 엄청 다양해 상차림에도 많은 음식이 올라간다. 정성을 많이 쏟으며 장식과 구성이 다양하다.

전라도 내에서도 전라북도와 광주/전라남도의 차이가 약간 있다. 전북은 상대적으로 농산물의 비중이 더 큰 반면, 전남은 해산물의 비중이 더 크다.

전라도 음식이 맛있다는 세간의 인식은 아래와 같이 일제강점기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전주는 음식 솜씨가 조선에서 제일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과연 음식 솜씨는 사치도 하려니와 첫재는 더운 철에는 더운 철을 따르는 듯한 민첩한 솜씨도 있는 듯하고 제법 영양분에 대한 주의도 게으르지 않은 듯합니다. 지금도 먹고 싶은 것은 그 슬슬 녹는 듯한 생정과입니다.

- 1932년 9월 11일자 동아일보


다만 음식이라는 건 개인의 취향 및 성장 배경에 따라 사람마다 선호가 다른 게 당연하기 때문에 전라도 음식이 전반적으로 양념을 강하게 넣고 짜고 맵거나 단 맛이 강한 자극적인 맛이라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국제화된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서울특별시 기준 다양한 외국의 음식 문화가 들어와 있고, 교통과 유통의 발달로 거의 모든 식재료가 전국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고, 수요만 있다면 전국의 어느 향토 음식이든 타지역에서도 맛볼수 있어 전라도 현지의 식문화에 대하여 과도한 기대를 갖거나 자신의 개인적 호불호를 꼭 절대화할 필요는 없다.

물론 도 탄수화물이고, 한과를 만들 때 들어가는 조청도 단맛을 내니 전라도와 단맛이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부에서 필요 이상 달게 먹는 건 서양 식습관의 영향이지 전라도와는 관계가 없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가 한국을 대표하는 장수마을로 선정한 곳도 고추장으로 유명한 전라북도 순창군이고, 전라남도 구례군, 곡성군, 담양군 등 서울대 노화연구소가 장수의 원인을 심층 연구하는 곳들이 집중되어 있으며, 보건복지부 통계 전국에서 장수 동네를 최다 보유한 곳도 전라도이고, 역사적으로 전라도에 장수 지역이 많았던 점을 보면 물론 수명을 결정하는 데는 공기, 스트레스 같은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식습관도 주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전라도 식습관이 건강에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되지 해가 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 입맛도 시대에 따라 변해서 청와대 조리장 출신으로 7년 동안 대통령 식사를 담당했던 한상훈 쉐프는 레스토랑에서 본인도 그렇고 간을 옛날보다 세게 한다고 하는데, 왜냐 하면 사람들 입맛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짠맛은 스낵에도 짠맛이 있는 외국에 비하면 그렇게 짜다고 할 수 없다는 평도 있다. 물론 짠맛은 혈압과 상관관계가 있지만, 여기에도 논란이 있어서, 미국 심장학회(AHA)가 고혈압 기준을 낮추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고혈압 환자군이 대거 늘어난데 대하여 미국 내과학회의 반발과 미국 내에서도 AHA가 제약기업들의 로비단체가 아니냐는 비판, 그리고 실제로는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보다는 혈압이 낮아서 발생하는 뇌경색 발병률이 월등하게 높다는 논란이 있기도 하다.[39] 다만 이는 기저에 그런 논쟁도 있다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의료계는 저염식을 권장하고 있다.

6.2.4. 사투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서남 방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전라도 사투리(서남 방언)를 사용한다.

다만 서남 방언 중에서도 매체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전라도 사투리는 대부분 전남 지역 사투리다.[40]
전북 지역 중 북부 지역은 지리적 영향으로 금강 일대 충청도 남부의 사투리와 영향을 주고 받았다.[41]

6.2.5. 예술[편집]


조선 중후기 권력에서 밀려나거나 귀향한 명사들을 중심으로 양반문화가 발달했다. 16세기 양팽손, 17세기 윤두서, 그리고 19세기 허련을 중심으로 남종화가 발달했고, 송순, 정철, 윤선도 등은 전라도 지역에서 많은 가사문학을 남겼다.

판소리로도 유명하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서대석 명예교수는 판소리의 악조 장단 및 여러 음악적 요소들은 퍼져 나가는 과정에서 각도의 민요와 소리패들의 소리를 수용하면서 복잡해졌기 때문에 이들 중 한가지 요소만을 추적하여 판소리의 기원을 찾는 작업은 판소리의 본원을 잘못 파악할 위험성이 있다며, 판소리의 기원이 무속 제전에서 서사 무가의 가창 형식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판소리 악곡이 호남 지역 민요인 육자배기토리를 주조로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조선 창극사'에서 거론된 명창들 출신지 대부분이 전라도라는 점 등을 들어 판소리 발생지는 전라도라고 했다. 현재는 중고제동편제가 맥이 거의 끊기면서 서남지방 중심의 서편제만이 명맥을 잇고 있어 판소리 구전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7. 교통[편집]


옛날부터 전주나주를 거쳐 해남에 이르는 해남로와 전주에서 해남로와 분기하여 남원을 거쳐 진주, 통영에 이르는 통영로가 전라도를 지나갔다. 현대의 호남선전라선이 비슷한 경로로 지나간다.

현재 전라도에는 호남고속선, 호남선, 전라선, 경전선, 장항선의 5개 철도 노선이 지나고, 호남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 광주대구고속도로, 순천완주고속도로, 무안광주고속도로, 고창담양고속도로의 7개 고속도로 노선이 지난다.

1914년에는 전라도 최초의 철도인 호남선이 개통되었다. 호남선은 경부선과 함께 한국의 양대 간선철도가 되었다. 그러나 호남선이 당시 전북 최대 도시인 전주를 지나지 않고 익산을 지났기 때문에 따로 전주에서 익산까지 가는 노선이 호남선의 지선으로 개설되었으니, 이것이 지금의 전라선이다. 전라선은 1930년대에 꾸준히 연장되어 1937년에는 전 구간이 완공되었다.

이 당시 전라도에 철도를 지으려던 것은, 식량 공출에 요한 것이었다. 이 일환으로 광주에서 곧바로 부산으로 가는 경전선을 계획했으나 1942년태평양전쟁이 터지며 있던 철도도 뜯어가던 판이라 무산되어버렸다. 경전선은 해방 이후에 완공되었다.

2004년에 호남선 KTX가 개통되었다. 이와 동시에 코레일은 경부선 열차는 서울역으로, 호남선 열차는 용산역으로 이원화하여 받는다고 해서 전라도 사람들에게 욕을 무진장 얻어 먹었다. 결국 그 계획은 철회하고 모두 서울역에서 시종착을 하게 되었다. 다만 일부 열차는 용산역에서 시종착을 한다.

2015년에는 오송역~광주송정역호남고속선 1단계 구간이 개통되었다. 그러나 논산천안고속도로처럼 천안에서 경부고속선과 분기하여 곧장 남쪽으로 직진하는 게 아니라 오송에서 분기하여 청주 쪽으로 크게 커브를 돌게 되자 전라도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다. 게다가 앞으로 개통될 호남고속선 2단계 구간은 무안공항 쪽으로 꺾게 되는 바람에 목포 사람들은 또 한 번 뒷목을 잡았다.

전라도의 철도는 상당히 낙후된 편이다. 경전선장항선이 거의 마지막 비전철화 구간인 것만 봐도 그렇다. 그리고 부경권이나 대구권, 대전권만 봐도 광역전철 계획이 나오는 중인데 광주권은 인근에 수요가 없어 광역전철 계획이 없다.

철도가 이렇게 낙후되다 보니 전라도는 예전부터 고속버스 수요가 굉장히 많았고, 전라도를 기반으로 한 금호고속이나 호남고속 같은 버스회사들이 성장할 수 밖에 없었다. 금호고속은 버스회사로 시작해서 아예 비행기를 날릴 정도였으니까...[42]

8. 대학[편집]


국립대학으로는 종합대학인 전북대학교전주시 덕진구에 있고, 전남대학교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다. 전라도에서는 이 두 대학의 규모가 가장 크며,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외에도 군산대학교, 목포대학교, 순천대학교, 목포해양대학교가 있다. 이밖에 교육대학전주교육대학교광주교육대학교가 있고, 과학기술원광주과학기술원도 있다.

규모가 큰 사립대학으로는 전라북도 익산시원광대학교가, 광주광역시 동구조선대학교가 있다. 이외에도 우석대학교, 호남대학교, 광주대학교, 동신대학교, 전주대학교 등의 사립대학이 있다. 광주여자대학교는 4년제 여자대학교들 가운데 유일하게 지방에 있는 학교이다.

상대적으로 적은 대학교 특성상 타 지역[43]처럼 많아야 1 ~ 2개 뿐인 의치한약수+로스쿨을 사립대학도 기본 2~3개[44]씩 보유하고 있다.

수도권과의 거리로 인해, 제주특별자치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유일하게 분교가 없는 지역이다.[45]

최근 학령인구감소와 수도권과 멀다는 지리적 여건 등으로 전라도 대학들이 위기를 맞고 있다. 부실대학으로 이름을 날린 아시아대학교, 명신대학교, 성화대학, 벽성대학, 서해대학, 광주예술대학교가 폐교되었고 2018년에는 서남대학교가 폐교되었으며 한려대학교는 파산 선고를 받아 폐교 예정이다. 또한 2021년 신입생 모집에서는 전라도의 거의 모든 대학들이 미달되었다.##


9. 여담[편집]


통계청에 따르면 종교적으로는 한국 평균(개신교 18%, 불교 22%)에 비해 개신교의 세가 약 20~25%로 강하고, 반대로 불교의 세가 15% 정도로 비교적 약한 편이라 한다. 가톨릭은 전라도에 2개의 교구를 두고 있는데, 광주, 전남 지역의 성교회을 관할하는 천주교 광주대교구와 전북 지역을 담당하는 천주교 전주교구가 있다. 한국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최초의 천주교 순교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46] 원불교는 전북교구와 전남교구 이외에 익산의 중앙 총부와 그 주변으로 구성된 중앙교구가 있다.

세계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분포한 6만여 기의 고인돌 중에서 한반도에 4만여 기가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전라도에 있을만큼 압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 중에서 고창군, 화순군에 있는 고인돌들이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서양에서는 '청동기 시대'를 '영웅들의 시대'라고도 하는데,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 신화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의 배경이 바로 청동기 시대이기 때문. 그런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으로 거석 문화를 대표하는 고인돌이 이곳에 밀집해 있는 이유는 미스테리이다. 한반도 고인돌들은 전라도에서 퍼져나간 패턴을 보이며 인근 지역들도 고인돌이 많아서 강화도에 있는 고인돌들도 함께 유네스코에 등재되었고, 인근 지역인 경상도 역시 고인돌이 많다. 또한 정신적인 면을 중시하는 곳으로 3대 신흥 종교가 전부 전라도에서 일어났다. 대한불교조계종의 본산인 서울 조계사 대웅전도 전라도 정읍에 있던 보천교 십일전을 분해해서 그대로 옮기었다. 조선조 남사고 선생은 '인류 구원의 대도(大道)는 이 땅 조선에서 출현한다. 전라도에서 하늘(天)과 땅(地)의 기운이 통하니 무극대도(無極大道)이다'라는 예언을 하기도 하였다.

유명한 바둑기사가 많이 나온다. 정운창(전남 보성), 조남철(전북 부안), 조훈현(전남 목포), 이세돌(전남 신안), 김인(전남 강진), 이창호(전북 전주) , 조치훈 역시 조남철의 조카이고, 박정환 역시 아버지가 광주 출신이다.[47]

동학농민운동, 호남의병항쟁, 광주학생항일운동, 5.18 민주화운동 등 부당하고 압제적인 세력에 저항하는 운동이 많이 일어났던 지역이다.

간혹 한 글자가 같고 이름이 비슷한 호서(湖西) 지방과 헷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호서 지방은 충청도를 일컬는 단어이다.

10. 정치[편집]


경상도와 반대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48] 전라도 지역은 민주당계 정당에 승낙 사인을 내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실제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성장한 이들은 전라도 현지에서의 지지를 바탕으로 전국구 후보로 발돋움했다.[49] 전라도의 승낙, 지지를 받은 인물과 당령이 전국 민주당 지지자들의 향방을 이끄는게 특징이다. 더 쉽게 표현하면 정치적 실권은 인구수가 많은 수도권 지역이 이끌지만, 명분 및 상징성의 면에선 여전히 전라도 지역의 여론 및 지지가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다. 사실, 보수 정당의 본진인 경상도가 수도권 다음으로 인구가 많고 수도권과 충청도는 보수 정당 지지층과 무당층이 상당하기 때문에 전라도는 다른 지역에서도 보수 정당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과 세력에게 전략적 투표로 힘을 실어준다.[50]

민주당계 정당이 분열되어 있으면 전라도에서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가 관심사가 되는데,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분당된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전북지사는 열린우리당, 전남지사와 광주시장은 민주당이 가져갔다. 새정치민주연합 분당으로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이 등장한 후 전라도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 호남 홀대론이 불어 국민의당에게 많은 지지를 몰아줬으나, 이후 2017년 19대 대선에서 2018년 7회 지방선거와 2020년 21대 총선까지 더불어민주당을 제대로 밀어주고 있다. 그리고 20대 대선과 8회 지방선거 결과를 보면 앞으로도 여전히 민주당을 밀어줄걸로 보인다. 출신인 이낙연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정세균국무총리가 유력한 대선 후보로 부각되는 것도 있다.

정치 성향의 정도는 3개 광역자치단체가 대체로 비슷하지만 굳이 따지면 5.18 민주화운동의 중심지로 민주당계 진영으로부터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은 광주광역시가 가장 강하고 그 다음이 전라남도, 전라북도 순이다. 최근에는 젊은 층의 지역주의 약화로 전남-광주-전북 순이 되어가고 있다. 지역에 따라 비율은 다르지만, 친 민주당계 정서와 반 보수당계 정서가 태반으로 이 둘이 합쳐져 민주당의 세가 강하다. 다만 민주당계가 못할때나 보수당계 반감의 정도가 약해졌을 땐 반 보수당에게 소수나마 문을 열어주는 경우가 있다.

보수주의 정당의 지지율이 정의당류의 진보주의 정당의 지지율과 비슷하게 나오는 편이었다. # 하지만 5.18 망언이 터져나오거나 신흥 인터넷 극우 혹은 보수 언론에서 전라도 비하 논란이 터져나오면 보수주의 정당의 지지율이 1% 미만으로 폭락하는 특징을 보인다. 사실상 열성 보수 지지자가 없다시피하거나, 전라도의 보수주의자들이 지역비하와 과거사 논란에 특히 민감함을 방증하는 것이다. 특히 선거가 가까워지면 인터넷 극우들의 활동세가 강해지고, 5.18 망언, 5.18 관련 법안 발목잡기 등이 언론 카메라에 잡히면서 평시와 선거철의 보수정당 지지율이 큰 차이를 보이는게 정치지형의 특징이다. 전라도가 배출한 보수계 인사인 이정현, 정운천의 경우는 시기적인 운도 따라주고 당시 보수여론이 전라도에 내비친 호의 덕분에 전라도에서 정치적 기반을 자리잡을 수 있었던 사례였다.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다시 대립이 심해지고 인터넷 극우와 이들의 지지를 받는 극우 성향 정치인들의 영향으로 전라도에서의 보수정당에 대한 반감이 다시 강해지고 이정현과 정운천은 전라도에서 지역구 당선이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51]

통상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호남인들이 민주당에 대하여 느끼는 호감도가 영남인들이 새누리당에 대하여 느끼는 호감도보다 더 낮다는 점이다. 다만 호남인들이 새누리당에 대하여 느끼는 호감도는 매우 낮았으며, 이는 영남인들이 민주당에 대하여 느끼는 호감도보다 10.5%p만큼 낮다. 결국, 호남인들이 민주당과 새누리당에 대한 호감도의 차이는 민주당에 대한 높은 선호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새누리당에 대한 낮은 선호도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호남 유권자들의 이슈에 대한 태도 및 이념적 특성, 21세기 정치학회


회귀분석결과 또한 호남 거주자들과 호남 출신자들의 정치적 행태가 매우 상이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호남 거주자들의 경우 국민의당에 대한 선호도가 높고 더불어민주당보다 국민의당에게 투표할 가능성이 증가하는 반면, 호남 출신의 경우는 정반대로 국민의당에 대한 선호도가 낮고 투표가능성 또한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3정당’에 대한 호남 유권자들의 선호와 투표결정,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통제변수들에서는 여성 변수가 민주연합 지지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점과 지역적 변수로서 새누리당이 전라도 지역민으로부터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점이 흥미롭다. 이는 민주연합이 보다 여성 친화적인 정당이 되었음을 의미하며, 정당지지에서도 남녀의 성별 분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전라도 지역에 거주하는 유권자의 경우 다른 지역의 유권자에 비해 새누리당을 지지하지 않을 가능성이 52% 정도로 매우 높았다. 이는 민주연합이 경상도 지역에서 지지를 덜 받을 가능성은 높지만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은 점, 그리고 전라도 지역에서 높은 수준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점과 비교된다. 이 같은 결과는 호남 지역 유권자의 전통적인 정당 태도인 ‘새누리당에 대한 거부감’이 여전히 견고하다는 것을 뜻한다.

지역주의 정당구도의 지속과 변화: 경쟁적 가설의 경험적 검증을 통한 전망,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호남지역의 경우 민주통합당에 대한 정당선호의 수준이 절대적으로 높지 않다. 이 연구에서 살펴본 것처럼 호남지역에서 민주통합당의 지지율은 대구.경북지역에서 새누리당의 지지율보다 낮다. EAI(동아시아연구원)의 7차조사에서도 호남지역에서 민주통합당을 지지하는 이들의 비율은 50.4퍼센트였으며, 대구.경북지역에서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이들의 비율은 이보다 조금 많은 52.7퍼센트였다.

호남지역에서 나타난 정당후보득표율의 지역편향, 한국정당학회


여러 사회과학적 조사 방법을 통해 확인한 결과, 전라도 '거주' 유권자와 전라도 '출신' 유권자는 동일한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이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민주당계 정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 통설처럼 여겨지고 있다. 전라도 출신 유권자가 민주당계 정당의 핵심 충성계층인 데 비하여, 전라도 거주 유권자는 민주당계 정당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보수주의 정당이 너무 싫어서 대안인 민주당계 정당을 지지하는 행동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왜 거대 보수주의 정당이 아닌, 군소 진보주의 정당이 전라도 지역에서 제1야당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처럼 민주당이 지역 정계를 꽉 잡는 상황이라서 진보주의 정당은 어부지리격으로 명목상 '지역 야당' 역할을 하는 편. 실제로도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등에서는 대부분 민주당이 지지율 1위를, 그 다음 자리를 진보 정당이 차지하는 편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명목상일 뿐, 전라도 지역 내에서도 실질적으로 민주당계 정당과 1:1로 대립할 체급은 아직 되지 못한다.

다만 민주당 지지세가 강하다고 해서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무조건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가령 환경 운동이나 동성애, 페미니즘, 다문화주의와 같은 분야에선 전라도는 수도권과 비교하면 더욱 보수적인 면모를 보인다. 특히 산업화가 상대적으로 덜 되어 있는 지역의 경우 농어촌의 비율이 많은데다 고령층 인구도 더 많고, 그에 따른 자영농 + 소영업자 비중이 높다. 또한 개신교 신자 비율도 전국에서 가장 높기 때문에[52] 자연스럽게 보수적인 문화를 띄기 쉬운 것. 그래서 한국의 민주당계 정당은 미국 민주당에 비해 사회보수주의가 강한 편이다. 다만 전라도 정치사의 특성상 이것이 보수 성향 정당의 지지로 연결되지 않을 뿐이다. 게다가 마찬가지 이유로 진보주의 정당에 대한 반감은 상대적으로 적은데다, 진보주의 정당에 대한 색깔론, 즉 매카시즘 공세는 거의 먹히지 않는 곳이다.

즉 사회문화적인 면모는 대구경북과는 비슷하지만 정치 성향이 다른 것이다. 당장 여성가족부 또한 민주당이 아닌 한나라당이 제안한 것.[53]

20대 대선을 앞두고는 일부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상당한 지지율을 보이고, 일부 세대에서 이기는 여론조사도 나오면서 이준석 전 대표가 30% 득표를 목표로 내거는 등 귀추가 주목되었으나, 막상 실제 투표 결과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80% 이상 득표로 낙승했다. 출구조사의 전라도 세대별 지지율에서도 세대를 가리지 않고 이재명 후보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당분간 큰 변화는 없을 듯. 다만 젊은 층이 약간 더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지지세가 약하다는 점은 확인되었다.

정치 성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각각 광주광역시/정치, 전라북도/정치, 전라남도/정치에 나와있다. 특히 광주광역시/정치 문서는 전라도의 현대 정치사를 압축하여 서술되어 있고, 전주시/정치 문서는 전북의 정치사가 압축 서술되어 있다.

10.1. 전라도의 보수주의[편집]


지금의 정치적 지형을 보면 잘 상상되지 않지만, 정부 수립 직후 등의 정치적 지형에서 농업국가인 당시 한국에서 지주들은 전라도에 많았다. 그래서 한국민주당은 창당 초기에 전라도 당, 전라도 갑부의 정당, 친일 지주의 당이란 비난을 받았다. 한민당의 주요 인사들 중에 전라도 출신으로는 김성수, 김병로(전북 고창), 임영신, 유진산(전북 금산, 뒤에 충남으로 편입), 송진우, 백관수, 백남훈(전남 담양), 김준연(전남 영암), 이철승(전북 고창) 등이 있다. 충청도 출신인 윤보선, 조병옥 등 다른 지역 출신도 많았기 때문에 허정은 한민당이 전라도 당이라는 비난은 공산당의 선전이라고 하였다.[54]

1948년 열린 제헌 국회의원 선거 에서 한민당은 지역구 29석 가운데 14석을 전라도에서 획득했다. 1954년 열린 3대 총선이나 1958년 열린 4대 총선에서도 보수 정당인 자유당은 전라도 안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가진 정당이었다. 이런 기조는 대한민국 제3공화국 시절에도 이어졌다. 6대 총선에서 집권 여당인 공화당 역시 전라도 내에서 의석이 가장 많았다. 의석 30석 중에 19석을 공화당이 차지했다. 7대 총선에선 30석 중 27석까지 비중이 올라갔다.[55] 전두환 정부 시절인 11대 총선에서도 전라도의 최대 정당은 36석 중 17석을 차지한 당시 보수주의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이었다. 다만 야당인 민주한국당이 15석으로 추격했다. 1985년에 열린 12대 총선에서도 여전히 전라도에서 1당은 민정당이었다.

1988년 열린 13대 총선에서 전라도는 김대중이 이끌던 평민당이 32석 중 31석을 차지하였다. 이때부터 오늘날 익숙한 전라도의 정치 지형이 형성된다. 1992년 열린 14대 총선에서는 김대중의 민주당이 전라도의 39석 중 37석을 차지했고, 보수주의 여당인 민자당은 2석에 그쳤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37석 중 새정치국민회의가 36석, 보수주의 여당인 신한국당이 1석을 차지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선 전라도의 29석 중에 민주당이 25석, 무소속이 4석을 차지하고 보수정당은 아예 의석을 얻지 못 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선, 전라도의 31석 중에 열린우리당이 23석, 민주당이 5석을 차지했다. 다만 당시의 민주당은 열린우리당의 분당 이후 보수적인 면모가 강해진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2008년 18대 총선에선 31석 중 민주당이 25석을 차지했고 나머지는 모두 무소속이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전라도의 30석 중에 민주통합당이 25석, 통합진보당이 3석을 차지했다. 나머지는 무소속이었다. 2016년 20대 총선에는 다시 민주당계 정당이 갈라져 전라도의 28석 중에 국민의당이 23석, 민주당이 3석, 새누리당이 2석을 차지했다. 2020년 21대 총선에는 전라도의 28석 중에 민주당이 27석을 차지했다.

요약하자면, 전라도는 1970년대 초까지는 다른 지역들처럼 보수주의 정당이 어찌 됐건 강세를 이뤘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보수주의의 산실로 여겼지만 점차 70년대부터 야당의 지지가 높아지는 경향을 보이긴 했다. 그러던 것이 유신 시절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부터 점차 야당의 비중이 높아지더니 대한민국 제6공화국에 들어서면서부터 민주당계 정당의 지역적 기반으로 바뀌었다.

전라도 출신의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인물들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11. 전라도 지역을 본관으로 한 성씨[편집]




12. 같이 보기[편집]




13.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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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세종실록지리지에서의 설명[편집]


[1] 바로 위의 접힘처리가 된 지도는 한반도의 부속도서를 포함하기에 '헌법상' 영토라고 표기되었다.[2] 이스라엘보다 약 150㎢ 정도 더 크다[3] 2023년 6월 기준[4] 2023년 5월 기준인 5,001,218명에 비해 감소했다.[5] 심지어 여기는 1962년 12월 11일까지는 호남 지방에 속했다.[6] 고려시대 행정구역의 전라도는 금강 중류의 충남 일부지역까지 포함했다.[7] 침미다례를 전남 해남으로 추정한 최초의 인물이 쓰다 소키치 와세다 대학 교수로 친일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은 역사학자 이병도의 지도교수였던 인물이고, 전남 강진으로 추정한 최초의 인물이 경성제대 교수이자 조선사 편수회 간사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였으며, 침미다례를 전남 해남, 강진 일대 영산강 유역 세력으로 추정하는 논문의 저자들이 '한국고대사학회'에서 이러한 사조를 이어받은 회원들이라는 점에서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이 있으나, 일제 식민사학자가 연구한 논리라고 해서 다 부정하는 건 옳지 못한 견해다.[8] 대표적인 예가 삼국사기 초기 연대에 대한 의문제기인데 물론 5세기까지 삼국사기 기재 내용을 죄다 부정한 논리는 오늘날에 와선 국내 사학자들의 꾸준한 논파로 웃음거리로 전락한 상황이지만, 적어도 2~3세기 부분에 대한 기년 오류나 삼국간 상호작용이 어딘가 맞지 않는 부분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해남 군곡리가 신미국이란 학설은 현대 한국 고고학자들 및 사학자들의 연구 결과며, 해남 군곡리 신미국 세력이 근고초왕 및 동성왕~무령왕 때 두 번이나 철저하게 백제의 무력 응징을 받아 끝내 몰락해버린 사실은 일본 식민사학자들과는 무관한 국내 고고학자들 및 사학자들의 연구 성과다. 지금도 국내 사학자들은 영산강 유역 세력이 일본 전방후원분 세력이라는 일본 사학자들의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고고학으로 입증된 사항마저 이병도나 스에마쓰가 일부 주장한 내용과 같다고 다 부정하면 한국사학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이런 비뚤어진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이 오히려 일본사학계에 트집을 잡힐 수 있는 약점이 될 수 있다.[9] 고고학계에서는 더 이상의 발언을 삼가지만, 현재 추측되는 사유로는 위만조선 일파에게 여전히 큰 반감을 갖고 있었을 준왕계 건마국 세력의 강력한 비토권 행사 외엔 다른 이유가 없다. 비슷한 시기에 경주 사로국 일대로 이주한 위만조선 유민들은 박씨 족단이 나타날 때까지는 서로 융화하지 못했을 망정 기존 한씨조선 멸망 당시 먼저 정착했던 부류들과 그럭저럭 어울려 지냈던 것과 크게 대조되는 양상이다.[10] 최몽룡 서울대 고고사학과 명예교수는 목지국이 소멸한 것이 아니라 이동하여 예산, 익산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나주 반남면 일대에 마지막 근거지를 뒀다는 가설을 제시하였으나, 이는 이미 십수 년 전 논파된 학설이다. 충청도 북부 일대가 주 세력권인 목지국이 어찌되든 그건 목지국에게 마한 수장국 자리를 빼앗긴 전북 건마국 세력 입장에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였으며, 오히려 경쟁 관계기에 옮겨갈 수 없었다. 그러니 목지국이 익산으로 옮긴다는 얘기는 더 성립불가지만 설령 그렇다한들 상술했듯 전북 마한 세력과 침미다례는 이해 관계 자체가 달랐던 데다 대립 관계는 더 심했고, 전북 세력은 광주 세력과 합세하여 백제와 더욱 친밀했으니 거기서 침미다례로 목지국이 이동한다는 건 더욱 성립불가다.[11] 물론 나주 복암리 고분 봉분들 크기가 크고, 부장품들도 금동신발, 은제장식, 장식대도 등 비상한 관심을 끄는 점도 사실이고, 신라도 지증왕 시기 즉 6세기 초까지 마립간 시대의 특징으로 대형고분들이 있었고, 백제 능산리 왕릉들도 2020년 문화재청이 실시한 지하물리탐사 결과 왕릉들의 크기가 훨씬 더 큰 것으로 밝혀지기는 했지만, 갈수록 한반도 전역에서 그 전 시기에 비해 무덤의 크기가 점차 줄어드는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이는 세계적으로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관료 체제가 확립되면서 왕의 무덤 크기와 왕의 권위가 일치하지는 않게 된다.[12] 겉은 횡혈식 석실분인데 내부에는 영산강 유역에서 주로 보이는 옹관묘다.[13] 백제의 마한 병합 과정은 신라의 진한 병합과정과도 비슷하지만 다른 면도 있었다. 애초에 마한의 영역 자체가 진한의 2~3배에 달하는 데다가 독자적인 수계가 있는 영역권들은 최소한 4~5개는 있었기에 사로국의 진한 병합과는 이 점이 꽤 달랐고, 처음에는 인접 지역에 대해 가급적 직접 지배를 관철하려 하였으나 범위가 멀거나 영산강 유역 같이 나름의 독자적 힘이 강했던 지역에 대해서는 중앙행정력의 투사력이 상대적으로 크게 떨어졌을 뿐이다.[14] 경북 북부 지역인 의성,군위,상주,예천,안동,영주,봉화,청송 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들은 경주 토기와는 다르고, 경북 북부 지역에서는 백제식 금동관, 환두대도 같은 백제 유물들이 출토되며 또한 고려에서 신라부흥운동도 경북 남부 지역에서 일어나고, 경북 북부 지역에서는 호응이 없었듯 전라도 지역과 마찬가지로 경상도 지역 심지어 경북 지역 내에서도 당시에는 단일한 집단이 아니었듯이 어차피 고대사의 견해들 자체가 어느 정도는 추측에 기반해서 이뤄질 수밖엔 없으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신미-침미다례 전체를 은연중 광주전남 혹은 전라도 전체로 비정하거나 혹은 아예 마한으로 보는 일각의 억지스러운 추측이다.[15] 광주를 비롯한 전남 서남 내륙부는 사실 침미다례와 계통이 같았으나, 백제가 침미다례를 제압하기 위해 일부러 광주 세력을 우대하면서 친백제 세력을 만들어 침미다례로부터 떼어냈다.[16] '진서(晋書) 卷36 列傳 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 즉 여기서 신미(新彌)가 침미다례(忱彌多禮)이다.[17] 고대 국가 형성기에 철기문화의 모태 지역으로 철기 유적이 밀집된 현재의 전북 지역은 마한과 가야 문화의 공존과 융화된 모습이 나타나는 지역으로 이로부터 가야의 국력이 확장하는 계기가 된 지역으로# 이들 지자체에서도 가야사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18] 단 전라도 무주 일대는 6세기 후반에 관산성 전투 후 진흥왕의 신라에게 빼앗긴 후 백제가 망할 때까지도 되찾지 못했고, 남원, 진안, 장수 일대는 역시 6세기 후반 진흥왕의 신라에게 빼앗긴 후 616년에야 백제의 무왕이 수복했으니 여기서 예외지만, 일부 지역 및 시대적 예외에 불과하기에 각주로 남김[19] 현재의 전라북도 무주군(茂州郡)과는 다르다.[20] 이는 탐라를 정벌하러 가는 과정에 무진주에서 탐라의 항복을 받았다는 내용을 이병도가 탐라를 제주도로 해석하면서 그 의미를 확장하면서 나온 추측이다. 탐(耽)은 침(沈)의 고어(古語)이기 때문에 '하침라'로 보기도 하는데 일본서기에는 무령왕 시기인 508년 남해 가운데 있는 탐라가 처음으로 백제국과 교통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여기서 섬인 탐라가 등장하므로 이 탐라가 제주도로 보이므로 이병도의 추측은 일리가 있고 이는 한성백제박물관 시리즈에서 임기환 교수에 의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21] 삼국사기에는 무덕 이래(618~625년) 탐라국이 백제에 속하게 됐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탐라와 백제의 관계가 더 밀접하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한편 이 기사는 이미 침미다례 일대가 그전에 동성왕에게 항복했다는 근거 기사로서, 고고학적으로는 바로 이 시기에 원래의 침미다례였던 해남 군곡리 세력이 크게 쇠락하여 없어지는 게 밝혀졌다. 즉 동성왕 당시 침미다례 일대는 별 수 없이 항복한 반면 의견을 달리한 군곡리는 반항하다가 군사적 응징을 받은 것이며, 이후 백제의 보복성 조치로 반남면 세력도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되고 반남면 대신 복암리와 영암 시종면이 대우받게 된다.[22] 다만 주보돈 교수는 가야사를 연구하다 보니 영호남 소통이 된 것이지 억지로 정치논리가 역사연구에 개입되는 것에는 경계심을 나타냈다.[23] 한 고조의 고향이 풍읍 패현(豊邑 沛縣)이었다는 데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즉, 조선 왕실 스스로 한나라 황실에 비유한 것이다.[24] 제주목[자료] 수도권 약 419만 → 약 2,604만(약 2,185만 증가), 강원도 약 114만 → 약 154만(약 40만 증가), 충북 약 115만 → 약 160만(약 45만 증가), 대전·충남 약 203만 → 약 394만(약 191만 증가), 대구경북 약 320만 → 약 500만(약 180만 증가), 부울경 약 313만 → 약 780만(약 467만 증가), 제주도 약 25만 → 약 67만(약 42만 증가)[25] 다른 사서들을 총합해서 정확히 말하면 훈요 10조에 언급된 지역은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공주시 북부 및 청주시에 해당한다.[26] 이러한 삼남(三南) 의식은 1961년 5.16 당시 이북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부에서 전라도 출신 장성들이 같은 삼남(三南) 출신을 지지한다는 명분 아래 경상도 출신 박정희를 지지하여 삼남(三南) 출신들이 이북 출신들을 군부에서 축출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27] 기축년 10월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20개월 사이에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 조신(朝臣)·명관(名官) 중에 죽은 자가 10여 인이었으며#[28] 해방 이후 1946년 제주도(현 제주특별자치도)로 분리되기 전까지 전라도(1896년 이후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다.[29] 문자 그대로 '이 편안히 쉬는 곳'으로도 읽힐 수 있다.[30] 1963년 충청남도로 편입되기 전까지 전라도(1896년 이후에는 전라북도)에 속해 있었다.[31] 여기에서는 '모든 고을의 백성을 거느린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다.[32] 장항 지역 해당[33] 서남부 지역만 해당[34] 동남부 지역만 해당[35] 심지어 익산시 역시 전주시 처럼 익산시/음식 항목이 개설될 정도로 음식문화가 뛰어나다.[36] 허영만 작가의 대표 히트작 식객의 주인공 성찬이 그 예.[37] 바다가 가까워서 해산물을 많이 이용한다.[38] 특히 새끼 돼지를 재료로 한 애저나 푹 발효시킨 삭힌 홍어 등이 아주 매니악한 인기가 있다.[39] 중앙대병원 뇌졸중 클리닉에 따르면 2021년 기준 뇌졸중 환자 10명 중에서 2명이 뇌출혈, 8명이 뇌경색이라고 한다.[40] 전북지역의 사투리보다 더 억양이 강하기 때문이다.[41] 전북 북부와 충남 남부 지역 사이에는 지형적 장애물이랄것이 없어 사실상 같은 방언권이다.[42] 아시아나항공한진그룹대한항공에 인수되면서 더 이상 금호그룹은 항공업을 운영하지 않게 되었다.[43] 인천광역시제주도 제외.[44] 원광대학교, 조선대학교가 대표적이다.[45] 그나마 비슷한 사정인, 경상도에는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가 존재한다.[46] 훗날 전라도 최초의 순교지에 성당을 세우게 되는데 이것이 전주 전동성당이다.[47] 반대로 김지석의 경우 본인은 광주 출신이나 아버지는 부산 출신이라고 한다.[48] 하지만 원래 경상도는 1960년대 초반까지는 진보 성향이 매우 강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와 그의 친구인 황태성은 사회주의 정당인 조선노동당과 남로당 소속이었고,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만큼 사회주의 세력이 매우 활발했다.[49] 대표적인 사례가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 때 광주에서 승리를 거뒀던 노무현이다. 전북 출신인 정동영이 원사이드로 패배한 이후로, 노무현의 후계자로 지지를 받은 문재인에게 힘을 실어 줬다.[50] 3당 합당으로 비전라도 보수층이 대거 보수 정당으로 넘어갔던 충격이 크기도 했다.[51] 대구경북도 다시 보수결집이 강해지면서 김부겸, 홍의락이 낙선됐다. 다만 도시 지역구를 중심으로 20-30%대의 고정 진보층은 남은 상황이다.[52] 작은 시골마을도 교회 하나씩은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53]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들이나 보수정당 중 대부분 구성원은 5.18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이종명, 김진태, 김순례 등은 5.18을 폭동이라고 폄하하고 이들의 추종 세력 역시 그렇다. 주로 국내야구 갤러리와 같은 디시인사이드 전반, 일베저장소 같은 사이트 등.[54] 허정은 경남 부산에서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55] 이 선거에서 서울만은 14석 중 공화당이 1석, 신민당이 13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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